“저는 사실 페미니스트인데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어느 한 발표수업에서 이렇게 발표를 시작했다. 심장이 뛰었지만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마이크를 쥐고 있는 사람은 나였기 때문에, 아무도 답은 없었다. 가끔 학원 선생님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아이들에게 페미니즘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기 위해, 종종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곤 했다. 두 경우 모두 내가 더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평상시 사회에서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 것은 꽤 곤란한 일이다. 누군가는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채용에서 불리해지기도 한다. 특히, 페미니즘이 극단적인 세계관으로 이해될수록 페미니스트와 아닌 사람의 거리는 멀어진다.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은 페미니즘이 극단적 세계관이 아니라 누구나 가져야 하는 세계관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페미니즘 라이프스타일이란 하나의 삶의 태도를 넘어서, 삶의 태도와 가치를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페미니즘을 소비 취향 혹은 개인적 선호 정도로 이해하고, 그런 행태를 옹호하는 책으로 오해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저자는 소비로는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한다. 또, 사회운동을 통해 구조를 발견하고 집단적 실천으로 변화시켜야 함을 강조한다. 페미니즘 안에서 ‘불편한 용기’(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의 직접행동주의와 그외 소비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페미니즘 학자는 많지 않아, 이 책은 충분한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의도한, 영영페미에게 다른 운동관을 제시하며, 이것을 설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왜 이렇게 무기력을 호소하는 페미니스트는 늘어났는가?
저자는 페미니즘 운동을 “인식론, 교육, 운동을 포함하는 삼중의 실천행위이며 삶의 비전이라 할 때, 페미니스트는 피해자성만으로 장기간 삶을 살아내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구조적이고 다양한 권력관계를 분석하면서 운동과 삶의 지향을 바꾸는 세계관적 인식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불편한 용기’는 ‘가장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실현하면서도, 동시에 당사자성이 강조되며, 분노, 불안, 안전에 대한 긴장 강도가 높은 정치행위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시위의 ‘현장 고양감’만으로는 일상의 무기력함이 해결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타당한 평가라 할 수 있으며, 섹슈얼리티를 범죄나 피해 중심으로 다루는 페미니스트들이 경청할만 하다. 피해 중심의 페미니즘은 대중 시위를 통해 현장 고양감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불평등한 여남관계를 바꾸는 것에는 시위 이상의 일상의 변화, 다수의 세계관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소비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 역시, 특정한 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토론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물건을 구매한자와 물건을 구매하지 않은 자의 차이는 소비의 차이지 얼마나 운동의 의미를 이해했느냐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는 대중시위에 참여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개별 여성들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변화를 만들 수 있는데 기여할 수 있는지’라는 운동적 기준으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운동관은 배울만하지만, 과연 영영페미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가 제기하는 대안 중 가장 구체적인 대안은 라이프스타일의 사회운동화(집단 참여, 현재 변화, 연대 등)와 사회운동의 라이프스타일화이다.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사회운동이 될 수 있을지는 저자가 비판적으로 평가한 기준에 따르면, 좁은 당사자성과 피해 중심이 아니라 서로의 피해를 성찰하고 그 피해에 공감할 수 있는 페미니즘 운동, 일시적인 체험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가치의 통합, 장기적인 삶의 태도로서 그리고 사는 방법으로서 페미니즘의 가능성과 실현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사회운동이 라이프스타일이 된다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자율’이다. 자율은 사회적 연대를 조직하고, 착취의 지배 바깥에서 자기조직화를 이루고, 자기 혼자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감각 안에서 자기 일과 입장을 드러내는 일이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나름 영페미로서 영영 페미와 소통하려 한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페미니즘을 세계관으로 이해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급진주의적 페미니즘 경향인 영영페미와는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의 운동에 대한 기준은 타당하지만, 이정도로는 영영페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교차성 페미니즘의 최대 약점인 ‘대체 여성의 정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여전히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차성 페미니즘이 단순히 당사자성 비판과 개인화를 비판하는 정도로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대한다면, 앞으로도 페미니즘이 ‘여성의 권리가 아니라 소수자 정치가 된다’는 그 질문을 피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이 고유하게 차별받는 원리가 무엇인지 밝히지 못하면 교차성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교차성 정치’ 혹은 ‘소수자 정치’ 정도로 남게 된다.
소위 교차성 혹은 포스트주의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 간의 성적 차이를 수없이 해체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여성억압의 완전한 종말을 위해서는 성적 차이를 기반으로 한 성과 재생산의 권리 – 이성애 관계, 가족제도, 재생산 과정 등-의 구축을 통해 사회 전체의 급진적 변화를 꾀하는 변혁적 운동이 필요하다. 여성 신체의 고유한 재생산능력을 무시해버리는 것, 남성을 적대화하는 것만으로는 여성해방을 이뤄낼 수 없다. 우리는 성별 해체가 아니라 가족제도의 변형과 자본주의의 변혁 운동이라는 틀 안에서 임금, 사회보장, 돌봄, 주거, 가족법, 부모의 권리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가족에 특권을 부여하는 국가정책을 변혁하는 정치 운동으로서 페미니즘 운동을 해나가야 한다. (더 자세한 주장을 읽고 싶다면 2021 행진 팜플렛 1호 페미니즘 파트를 참고하자.)
“저는 사실 페미니스트인데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어느 한 발표수업에서 이렇게 발표를 시작했다. 심장이 뛰었지만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마이크를 쥐고 있는 사람은 나였기 때문에, 아무도 답은 없었다. 가끔 학원 선생님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아이들에게 페미니즘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기 위해, 종종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곤 했다. 두 경우 모두 내가 더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평상시 사회에서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 것은 꽤 곤란한 일이다. 누군가는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채용에서 불리해지기도 한다. 특히, 페미니즘이 극단적인 세계관으로 이해될수록 페미니스트와 아닌 사람의 거리는 멀어진다.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은 페미니즘이 극단적 세계관이 아니라 누구나 가져야 하는 세계관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페미니즘 라이프스타일이란 하나의 삶의 태도를 넘어서, 삶의 태도와 가치를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페미니즘을 소비 취향 혹은 개인적 선호 정도로 이해하고, 그런 행태를 옹호하는 책으로 오해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저자는 소비로는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한다. 또, 사회운동을 통해 구조를 발견하고 집단적 실천으로 변화시켜야 함을 강조한다. 페미니즘 안에서 ‘불편한 용기’(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의 직접행동주의와 그외 소비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페미니즘 학자는 많지 않아, 이 책은 충분한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의도한, 영영페미에게 다른 운동관을 제시하며, 이것을 설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왜 이렇게 무기력을 호소하는 페미니스트는 늘어났는가?
저자는 페미니즘 운동을 “인식론, 교육, 운동을 포함하는 삼중의 실천행위이며 삶의 비전이라 할 때, 페미니스트는 피해자성만으로 장기간 삶을 살아내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구조적이고 다양한 권력관계를 분석하면서 운동과 삶의 지향을 바꾸는 세계관적 인식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불편한 용기’는 ‘가장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실현하면서도, 동시에 당사자성이 강조되며, 분노, 불안, 안전에 대한 긴장 강도가 높은 정치행위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시위의 ‘현장 고양감’만으로는 일상의 무기력함이 해결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타당한 평가라 할 수 있으며, 섹슈얼리티를 범죄나 피해 중심으로 다루는 페미니스트들이 경청할만 하다. 피해 중심의 페미니즘은 대중 시위를 통해 현장 고양감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불평등한 여남관계를 바꾸는 것에는 시위 이상의 일상의 변화, 다수의 세계관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소비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 역시, 특정한 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토론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물건을 구매한자와 물건을 구매하지 않은 자의 차이는 소비의 차이지 얼마나 운동의 의미를 이해했느냐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는 대중시위에 참여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개별 여성들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변화를 만들 수 있는데 기여할 수 있는지’라는 운동적 기준으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운동관은 배울만하지만, 과연 영영페미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가 제기하는 대안 중 가장 구체적인 대안은 라이프스타일의 사회운동화(집단 참여, 현재 변화, 연대 등)와 사회운동의 라이프스타일화이다.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사회운동이 될 수 있을지는 저자가 비판적으로 평가한 기준에 따르면, 좁은 당사자성과 피해 중심이 아니라 서로의 피해를 성찰하고 그 피해에 공감할 수 있는 페미니즘 운동, 일시적인 체험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가치의 통합, 장기적인 삶의 태도로서 그리고 사는 방법으로서 페미니즘의 가능성과 실현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사회운동이 라이프스타일이 된다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자율’이다. 자율은 사회적 연대를 조직하고, 착취의 지배 바깥에서 자기조직화를 이루고, 자기 혼자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감각 안에서 자기 일과 입장을 드러내는 일이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나름 영페미로서 영영 페미와 소통하려 한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페미니즘을 세계관으로 이해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급진주의적 페미니즘 경향인 영영페미와는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의 운동에 대한 기준은 타당하지만, 이정도로는 영영페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교차성 페미니즘의 최대 약점인 ‘대체 여성의 정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여전히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차성 페미니즘이 단순히 당사자성 비판과 개인화를 비판하는 정도로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대한다면, 앞으로도 페미니즘이 ‘여성의 권리가 아니라 소수자 정치가 된다’는 그 질문을 피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이 고유하게 차별받는 원리가 무엇인지 밝히지 못하면 교차성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교차성 정치’ 혹은 ‘소수자 정치’ 정도로 남게 된다.
소위 교차성 혹은 포스트주의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 간의 성적 차이를 수없이 해체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여성억압의 완전한 종말을 위해서는 성적 차이를 기반으로 한 성과 재생산의 권리 – 이성애 관계, 가족제도, 재생산 과정 등-의 구축을 통해 사회 전체의 급진적 변화를 꾀하는 변혁적 운동이 필요하다. 여성 신체의 고유한 재생산능력을 무시해버리는 것, 남성을 적대화하는 것만으로는 여성해방을 이뤄낼 수 없다. 우리는 성별 해체가 아니라 가족제도의 변형과 자본주의의 변혁 운동이라는 틀 안에서 임금, 사회보장, 돌봄, 주거, 가족법, 부모의 권리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가족에 특권을 부여하는 국가정책을 변혁하는 정치 운동으로서 페미니즘 운동을 해나가야 한다. (더 자세한 주장을 읽고 싶다면 2021 행진 팜플렛 1호 페미니즘 파트를 참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