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이 여성운동 주체가 될 수 있나
<남성페미니스트>
김윤은미 기자
2004-06-06 23:22:41
남성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글을 시작할까 한다. 대학교에서 나와 함께 활동하던 (소수의)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남성+페미니즘이라는, 그 모순된 정체성 때문에 자기 위치를 잘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주변 여성들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늘 조심스러워 했고, 일종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도 보였다. 여성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해 단일한 의견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남성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대다수의 남성들은 자신이 남성이기에 여성의 경험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양성평등이라는 원칙적인 명제에 동의할 뿐 지적 호기심 차원에서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활동하지 않았으며 ‘오빠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후배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서는, 눈에 거슬리는 상황도 있었다.
남성이 여성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논쟁거리다. 일차적으로 페미니즘이 남성에 의해 여성이 억압 받는 현상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만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남성은 주변 남성 동료들로부터 “너 왜 그러냐?”는 식의 냉소적인 반응을 받기 쉽다.
한편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경우, 남성이 여성의 문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 때문에 그들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기도 한다.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성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에 남성과 여성 모두 여성운동을 할 수 있다고 이론적으로 분석 가능해도, 현실적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남성들은 실천적인 영역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성페미니스트>는 여성운동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쓴 에세이 모음집이다. 여성이 아닌, 남성 스스로가 페미니즘과 자신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은 상당히 새롭다. 이 책은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없는가의 문제부터, 여성과 남성의 우정 비교, 양육과 아버지의 문제 등 상이한 주제와 경험들을 다루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남성 또한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운 점과 자기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진솔하게 고찰하고 있다.
정체성 패러다임에서 실천 패러다임으로
이 글의 저자들은 정체성 패러다임에서 실천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여성운동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산드라 바트키는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책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여성 집단 전체가 같은 억압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유효해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여성들이 돈 많은 보수적 조직을 후원하기도 하고 페미니즘을 거칠게 비난하기도 하는” 상황을 볼 때, 여성운동이 반드시 남성 대 여성의 구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반면, 197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인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은 남성 그 자체로서 여성을 억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찰해 낸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때문에 이 흐름은 여성의 경험과 여성만의 독특한 인식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기 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흑인페미니즘을 비롯하여 여성 내에서도 다양한 경험과 이론이 존재하며, 여성 역시 여성을 착취할 수 있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정체성 패러다임은 한계를 맞이하게 됐다.
저자들은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것임에는 분명하나, 여성만이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성 억압을 밝혀내는 역사는, 여성 개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바 있다. 여성의 억압은 계급문제처럼 외부로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 개개인의 억압을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경험은 그 자체로서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투명하게 전달되는 경험이란 있을 수 없다. 패트릭 홉킨스는 “경험은 동시에, 언제나, 이미 하나의 해석이자 해석을 요구하는 개념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여성의 경험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페미니즘 이론의 기반이 되기는 어렵다.
물론 현실적으로 여성들이 같은 여성들의 경험에 대해 더 잘 공감하고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경험이 모두 같다는 전제, 혹은 같은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명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책은 남성이 여성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명제가 한 가지 다른 전제를 깔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된 젠더(gender) 정체성을 전제로 하여, 이 구별 속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톰 디그비는 남성과 페미니즘의 대립이 “모든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로 분류된다는 가부장적 문화의 전형적인 이분법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스스로와의 싸움 직면해야
이 책에 제시된 두 명의 ftm 트랜스젠더(female to male)의 에세이는 페미니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젠더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한다. 페미니스트와 남성성 이 둘을 긍정하며 지향하는 이들은 젠더에 대한 단일하고 확실한 구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억압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해리 루빈은 자신이 트랜스섹슈얼임을 “커밍아웃”한 후 여성학과에서 직장을 구할 때 자신의 여자 페미니스트 친구가 “여성으로서 여성학을 배우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고백하며,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거나 여성성을 수용하거나 혹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정체성 패러다임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이콥 헤일은 성전환 후 자신에게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들어왔다고 고백한다.
남성과 페미니즘은 모순된 정체성의 결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은 어찌 보면 쉽게 나오는 정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지는 까닭은, 여성운동을 하는 남성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어떻게 하면 남성들이 보다 적절하게 여성운동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많은 조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이 책의 영향으로 남성페미니스트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남성 활동가들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궁극적으로는 긍정하는 것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길임을 조언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해리 브로드는 “남성 긍정성이 친페미니즘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물론 한계도 지적된다. 데이비드 카한은 남성과 페미니즘이라는 모순된 형태가 ‘가능한가’보다 ‘있음직한가’의 문제 제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지식인 남성들이 보이는 한계적인 모습들을 허식가(이론을 알지만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는 자)/내부자(열심히 일하지만, 정작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휴머니스트/자기학대자(가부장제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자기 탐닉에 빠진 자)로 분류한다. 그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는 가부장제와 싸우는 것이 스스로와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직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운동을 하는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과 함께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맞는지는 정답이 없지만, 자신의 행동과 영향에 대한 성찰이 강하게 요구된다는 점은 유효한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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