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페트라스 교수의 「이라크 저항운동을 지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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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라크 팔루자에서 미군과 저항세력간의 교전이 진행 중인 가운데 미국 뉴욕의 빙햄프턴 대학 제임스 페트라스 교수가 지난 4월 7일 발표한 「이라크 저항운동을 지지하자」를 번역■소개한다. 그동안 시민■사회운동과 남미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집중시켜온 페트라스 교수는 팔루자 교전을 '민족해방운동'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서구 좌파 지식인들의 무기력을 질타하고 있다.

출처 : '정의로운 세계를 위한 국제운동' 홈페이지(http://www.just-international.org)

제임스 페트라스 뉴욕주립대 교수

(번역 이종태)

이라크의 팔루자, 바그다드, 라마디, 나시리아의 전체 민중들이 식민지 점령군과 용병들, 협력국 들에 대항해 봉기했다. 처음엔 평화적 대중집회를 통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미군, 영국군, 스페인군, 폴란드군은 탱크와 머신건으로 맨손의 시민들을 학살했다. 무장 항거는 당시엔 소수였으나 지금은 수백만 명이 지지하고 있는 가장 대중적인 힘으로 발전했다. 식민지 점령군들은 모든 이라크인들에 대한 공포에 질려 닥치는 대로 발포한 이후 후퇴한 상태이다. 그들은 팔루자를 포위하고 무장 헬리콥터를 이용해 가옥, 공장, 이슬람 사원 등에 폭격을 가하고 있다. 식민지 점령군의 입장에서는 적이 도처에 깔려 있는 셈이다. 옳다. 저항이 시작되면서 모든 가옥과 상점, 거리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현재 저항은 모든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민중들은 부상당한 전사들을 치료하고 상처를 씻어주고 있다. 민중들은 물을 공급해 전사들의 마른 목을 적시고 뜨거운 손을 식혀주고 있다. 무기는 여전히 뜨겁다.

달아난 용병들

서방국가들의 용병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하루 1천 달러를 보수로 받으며, 방탄조끼에 색안경을 끼고 총을 든 채 건방지게 거들먹거리던 용병들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의 눈에도 새까맣게 타버린 동료들의 시신이 보였던 것일까.

이라크인 수백 명이 살해당했다. 수천 명은 부상을 입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례식을 마칠 때마다, 평화를 사랑하던 사람들, 정치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 '좀 더 두고보자'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점차 손에 총을 잡기 시작했다.

부르주아 언론들은 "이것은 내전"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들은 '내전'으로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시아파와 수니파, 형제들과 누이들(거리의 여성 전사들!)은 이미 서로의 팔을 끼고 탱크와 맞서는 동지들의 등을 엄호해 주고 있다. 그리고 저항은 승리하고 있다. 식민지 점령군들은 이제 1명 당 5명, 10명, 20명의 이라크인들과 맞서야 한다. 이라크 민중들의 저항은 이미 정치적으로 승리한 것이다. (식민지 점령군이) 임명한 관료들에겐 미래가 없다. 이 관료들은 미군이 이라크에 머물 때까지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미군이 철수하는 순간 달아나야 할 것이다.

아랍은 저항하고 있다

미군과 용병들에겐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상태다. 매일 수십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고 있다. 워싱턴의 군국주의자들과 이라크침략 계획을 세운 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월포위츠 국방부장관, 차기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케리는 "병력을 더 보내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부시는 자신의 텍사스 목장에서 저항군 지도자인 사디르를 '살인자'라고 불렀다. 부시의 텔레비전은 불타는 거리도, 무차별적 폭력으로 찍겨 나가는 육체도, 학살도, 난도질당한 어린이들의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부시는 다시 한번 '킬링필드'(한번은 베트남, 한번은 이라크)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이제 그는 징병유예를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시는 지난 2003년 5월 이라크전 종전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2004년 4월엔 6백 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다. 이에 비해 이라크 저항세력은 부시의 도전에 응전, 점령군으로부터 도시를 회복하고 이를 단호한 용기와 결단력으로 지키고 있다.

'아랍'은 저항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샤론 수상은 침묵하고 있다. 한때 수다스러웠던 샤론의 앞잡이들, 월포위츠, 아브람, 페이스 등은 기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중동에서 지배권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조작해 미국을 전쟁으로 몰아 넣고 수천 명의 미군들을 사망케 하거나 불구자로 만든 것에 대한 대중적 역풍을 두려워하고 있다.

"조국 아니면 죽음"

2004년 이른봄에 '신세계 질서'의 입안자들이 계획한 '식민주의 제국'의 꿈은 이미 무너졌다. 이 같은 사실은 4월 들어 더욱 명확해졌다. 샤론-월포위츠-블레어-체니의 '대 중동 공영권'이 몰락한 것이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시리아-이란-쿠바-북한을 연쇄적으로 침략하려는 (네오콘의) 꿈을 팔루자와 사디르, 바그다드에서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의 악몽으로 바꿔 놓았다.

이라크 민중의 저항은 영웅주의, 담대함, 용기 그 이상이었다. 이라크 민중은 자원과 연대, 역사 신념을 결집하고 있다. 그들은 해방되고 모든 식민지 점령군들을 물리치게 될 것이다.

'조국 아니면 죽음'이란 구호는 이라크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조국 아니면 죽음'은 지도자나 전사들만의 슬로건이 아니라 전 민중들을 감화시켜 봉기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 구호는 이라크 민중의 살아있는 실천이다. '조국 아니면 죽음'이 거리에 나온 10대 전사들의 입에서, 행상인들의 입에서, 검은 스카프를 두른 과부들의 입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런 '4월의 이라크'는 제3세계와 제국주의 식민주의자들에게 교훈을 준다. 즉, 대중적인 무력 저항은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패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아랍의 겁쟁이 지도자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비겁한 요르단과 사우디의 왕조, 말만 번지르르한 부패한 '종신 대통령' 무바라크, 이란의 아야툴라 부역자들이 그들이다. 비겁자들은 이라크의 민족해방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라크의 저항이 성공하는 경우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좌파 지식인들의 질병

서구 지식인들은 어떠한가. 1년 전 이라크 민중들의 저항이 시작되었을 때 그 수많은 미국의 진보적■비판적 지식인 중 누구도 반식민지 투쟁과 연대하겠다고 선언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아랍 근본주의자들, 테러리스트들, 반유대주의자들을 돕는 것은 문제"라고 말한 것으로 필자는 전해 들었다.

예전에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반나치 무장저항 운동을 반대했던 프랑스 지식인들의 변명이 다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알제리 해방투쟁 당시 프랑스인 농장주들도 "알제리에 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알베르 카뮈) 라이트 밀즈는 자신의 저서 「들어라 양키들아」에서 1960년대 초 쿠바혁명에 대한 지지를 망설였던 미국의 '진보'세력에게 이렇게 도전한다.

"이것은 피와 내장이 튀는 실제 상황의 혁명이다. 당신은 '문제'의 일부가 되거나 '해결'의 일부가 되는 두 경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냐, 민족해방투쟁이냐

서구 지식인들은 '문제'에 속한다. 물론 그들이 이라크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처지는 이라크 초등학생들을 살해하는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서구 지식인들은 편히 앉아서 "그러나 우리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캐리 후보(이라크전을 지지하고 심지어 4만 병력을 증원해 밀집지구에 미사일을 퍼붓자고 주장하는)를 지지하려고 파리떼처럼 몰려 간다.

이라크 민중들은 지금 손에 무기를 들고 미군의 저거노트(치명적인 장거리■연발사격이 가능한 신무기)에 맞서고 있다. 그런데 서구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진지하게 젠체하는 서구 지식인들은 결국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미 제국주의. 다른 하나는 식민지 점령군에 대항하는 이라크 민족의 항전.

이 중 하나에 대한 선택을 거부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공범이란 것과 같은 의미이다. 지적인 자기만족은 제국에 사는 지식인들의 사치품인데, 이라크엔 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 점령기간 동안 1천명 이상의 이라크 지식인과 교수들이 살해되었다. 논점은 결코 복잡하거나 애매하지 않다. 한쪽에서는 자유선거, 자유언론, 자치를 요구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식민지 관료들이 신문발행을 가로막고 허수아비 통치자를 임명하며 반대세력을 학살하고 있다.

미국 좌파 지식인들은 무기력하고 이라크 민중에 대한 연대도 감히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해지는 질병에 걸려 있다. 이것은 식민지의 '좌파' 지식인들을 괴롭히는 질병이기도 하다. 이들은 문제(식민지 전쟁)을 두려워하는데 그 해결책(민족해방)도 무서워한다.

결국 이들은 식민지 모국이 제공하는 편안함과 자유, 대학에서의 찬사와 알랑거림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혜택들은 (이라크 민중의) 해방운동을 직설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정신적 고통을 상쇄시켜 준다. 그래서 '좌파' 지식인들은 사기성 짙은 '윤리적 등가성'(편집자 주 : 예컨대 미국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모두 나쁘다)에 호소하고 '반전'과 '반근본주의' '반테러리즘'에 의지한다. 제국주의 국가의 진보적 지식인이 (이라크) 해방운동과 연대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식민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지식인들에게 실천적 교훈을 주는 사람들은 수천 명에 달하는 이라크 빈민들이다. 이들은 2004년 4월 삼엄한 탱크와 무장 헬리콥터의 벽을 뚫고 바그다드에서 팔루자(영원히 해방의 요람으로 기억될)로 행진했다. 팔루자에 포위되어 있는 무장한 이라크인들에게 음식과 약품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침략군과 석유 강도를 축출하라"

그동안 이라크 민중들은 잘 먹고 중무장한 점령군과 대결해왔다. 이라크 민중들은 이웃과 친구, 동지들에게 "당신은 수니파요 혹은 시아파요 혹은 세속파요, 아니면 바트당이요, 혹은 공산주의자요"라고 묻지 않는다. 그들은 이슬람 사원과 학교와 가옥이 폭격 및 총격 당하는 것을 이젠 방관하지 않는다. 그들은 침략군과 석유 강도, 그리고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살인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런 투쟁에서 물러나 제3세계 해방투쟁에 대한 서구 지식인들의 무능함을 다시 한번 입증한 것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가련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