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아프다
- 가족주의에 가려진 우리 사회의 문제점
기관지 제37호
조이여울 여성주의 저널 ‘일다’ 편집장
가족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해 보자. 대다수 사람들이 평생 가족과 관련을 맺고 살면서도 가족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생각해보길 꺼린다. 대신 가족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이미지를 머리 속에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간혹 술자리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떨쳐버리고 싶다”고 말할 지 모른다. 사실 가족의 실체에 대해 생각하길 꺼리는 이유는 ‘가족은 생각만해도 무겁고 아프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거움과 아픔을 덜 수 있는 대책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가족은 ‘이성’이 아니라 통념이다
가족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윤리가 있다. 부모 세대로부터 배우는 역할 모델과 ‘남자와 여자는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인(人)간론, 자손을 남기는 것이 도리이자 태어난 이유라는 등의 윤리를 주입 받는다.
한부모 가족의 자식이건 고아이건 간에 주입 받는 부모 역할 모델은 비슷하게 존재하며, 이 때의 역할 모델은 성별 분업을 위시한 성 역할 모델이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의지한다는 것의 실체는 여자가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의존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여자가 남자를 뒷바라지한다는 것이다. 자손을 남기는 것은 남자의 씨를 남기는 것이며, 이는 여자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고 성인이 될 때까지 돌보는 것 역시 여자의 몫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가족 윤리가 이성애 중심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윤리관으로 볼 때, 한 개인이 가족을 이루지 않고 산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며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일탈,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것, 무언가 부족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가족을 유지하는 윤리는 ‘이성’이나 ‘실증주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유교적 통념을 그대로 내리받은 것이고, 심지어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가족 내 질서와 폭력
가족 내 윤리의 대표적인 것이 ‘효’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윤리인 ‘효’는 부모와 자식 간 ‘위계’를 의미한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것은 부모가 원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의사결정 시 부모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노후와 간병 역시 자녀의 몫으로 돌아간다. ‘효’는 부모에게 막강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며, 자녀에겐 독립적인 삶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효’는 가정폭력을 은폐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가족들을 돌보지 않아도,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한편 ‘효’는 부계 혈통주의를 기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는 결혼하면 친부모보다 시부모에 대한 ‘효’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간 위계뿐 아니라 부부 간 위계도 분명하다. ‘엄마아버지’라는 말이 자주 쓰이듯이 어머니는 친밀하면서 만만하고, 아버지는 거리감이 있으면서 권위가 느껴진다. 아직도 결혼한 남녀가 남편은 반말, 아내는 존칭을 쓰는 경우가 많으며, 나이주의 사회에서 남편이 아내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음으로써 정당화된다. 익히 알다시피 반말, 존칭 관계가 수평적이 되기는 어렵다.
부모/자식, 남편/아내 사이 위계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 ‘폭력’이다. 폭력은 극단의 ‘차별’이다. 남편과 아내가 차별적인 위계 관계가 아니라면 폭력이 일어날 수 없다. 가정폭력은 아주 흔하다. 아내들 중 70%가 남편에게 맞아본 경험이 있다고 밝힌 통계도 있다. 그런가 하면 부모의 체벌은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겪는 딸들도 많다. 가족 내 폭력은 가족 밖의 폭력에 비해 벗어나기 훨씬 더 어렵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또한 이 때문에 더욱 은폐되기도 한다.
가족 내 여성 - 아내, 며느리, 어머니
남편은 집안의 가장이자 생계책임자, 부양자다. 생계 책임 못 지고 부양 못 해도 그 이미지는 여전하다. 아내는 자녀와 더불어 피부양자가 된다. 맞벌이 부부조차 그러하다.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며느리’가 됨으로써 남편 집안에 속하게 되고, 남편 집안의 대소사에 관여해야 되는 위치에 놓인다. 그리고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며 어머니가 된다.
아내는 일차적으로 가족과 관련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책임진다. 하루도 쉴 수 없는 가사노동, 24시간 아이를 키우는 일, 가족 내 환자를 간병하고 노인을 모시는 보살핌 노동이 모두 아내이자 어머니이자 며느리인 여자의 몫이다. 이 노동의 가장 큰 특징은 ‘금전적 대가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집 밖의 노동에 비해 평가절하될 뿐 아니라, 심지어 ‘노동’이 아니라고까지 여겨진다. 전업주부는 ‘집에서 노는 여자’ 취급을 받는다.
출산은 여자의 도리이자 아내의 도리이고, 며느리의 도리다. 시집을 위해, 남편을 위해, 자신을 위해, 여전히 ‘아들’을 낳아야 하는 여자들이 많다. 한편, 여자는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신비로운 존재가 된다. 남성들의 환상, 사회의 환상,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가족 내 윤리 중 ‘효’에 버금가는 것이 바로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는 ‘모성’의 윤리다. 모성은 곧 희생이다. 항상 자신의 이익보다 자녀의 이익이 우선하고, 자녀에게 목숨을 바쳐 헌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머니의 노동을 통해 나타난다. 물론 그것이 환상인 만큼 실제로 그 아름다운 ‘모성’상에 부합하는 어머니들은 별로 없다. 그러나 ‘모성’상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계속해서 어머니들에게 덧씌워진다.
가족 내 여성의 입지 중 가장 갈등을 일으키는 게 ‘며느리’다. 아무 이유 없이 시집에 부채감을 갖게 되는 게 며느리다. 혈통주의 사회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도 ‘며느리’는 시집에 종속된다. 남편의 가족들 입장에서 며느리는 자기 집안 사람이자 일손이다. 민족 대 이동이 일어나는 명절은 아무리 노력해도 평등해질 수 없다. 남편의 조상을 기리고, 남편의 가족을 위하는 잔치에 아내들은 몸 대주기를 하며 버텨야 한다. 명절이 사라지지 않는 한 주부들의 명절증후군은 계속될 것이다. 또한 시’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헌신과 집착의 결정체는 미스터리한 고부갈등을 빚어내고 있다.
가족의 모순에 봉착한 사람들
이성애중심 일부일처제와 결혼제도를 근간으로 한 가족과, 그 가족을 기본 단위로 삼고 있는 우리 사회는 필연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다. 결혼은 두 개인이 결정하고 서로 원하면 파기할 수 있는 약속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두 개인에게 강요되는 삶의 형태다. 남녀가 가족을 이루어 평생 관계를 지속하며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관계를 벗어나는 것, 깨뜨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유지되는 가족이 많다. 즉, 가족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요소가 있다는 것인데, 그 요소는 윤리적인 것이기도 하고, 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결혼과 동시에 부부는 서로 성적으로 충실할 것과, 서로에게 정절을 지킬 것을 약속하지만 섹스리스 커플들도 많고 ‘외도’는 너무나 일상화된 삶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사랑’으로 치장된다. 가족을 둘러싼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이야기된다. 맞선을 봐서 며칠만에 결혼식을 올려도, 동성애자가 이성과 결혼을 해도, 자녀가 미워죽겠단 생각이 들어도,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도, 부부가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고 살아도, 가족은 여전히 ‘사랑’의 이미지다. ‘집’은 아내에게 하루도 안식을 주지 않는 공간이건만, 늘 아늑한 휴식처, 인류가 마지막 기댈 곳으로 미화된다.
그러나 인간이 기계가 아닌 한 가족의 모순에 봉착해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가족 틀을 벗어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못지 않게 많다. 가출, 무자녀, 이혼, 비혼모, 별거, 동거, 독신, 공동체를 꾸린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인데, 이들은 ‘파괴된’ 가족의 모습으로 읽힌다. 즉 ‘가족 해체’라는 것인데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이거다.
정상가족 틀 고수하려는 사회의 발악
사회는 ‘가족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있으며, 그 가족주의의 핵심은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근간으로 한 핵가족의 틀이다. 사회가 가족의 틀에 사람들을 끼워 넣는 방식은 참으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가족을 이루어야만 누릴 수 있는 혜택들, 보장되는 사회적 지위들이 있다. 그것은 가족을 이루지 않았을 때는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시장의 시간표는 아내의 보조를 받는 남편을 기준으로 짜여져 있다.
출산율이 낮아 걱정이라면서도 비혼모의 아이 키울 권리는 주지 않는다. 여성의 성을 가족제도 안에서 통제하려는 심산은 아마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 한부모 가족에 대한 편견도 심각하거니와, 기본적으로 육아가 어머니 개인에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자식 때문에 이혼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흔히 들을 수 있다. 또한 가출한 청소년들에게 ‘노동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가족 안으로 돌아오라고만 하고 있다. 청소년들, 특히 여성 청소년들은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되기 십상이다. 노인 복지 대책이 없다는 것도 한 몫 한다. 노후를 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것은 자식에게 부양책임을 지우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정상/비정상, 건강/비건강 가족 개념을 사용하는 것도 막강하다. 누구도 ‘비정상’, ‘비건강’이란 수식어를 달고 살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국민의 복지를 책임져야 할 보건복지부는 실제론 가족을 유지하는 ‘가족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출산율 감소와 이혼율 증가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자, 부부의 날을 제정하고, 건강가족기본법을 만들고, 이혼 의무상담제도를 도입하고, 어버이 날을 맞아 효도 첫 전화 무료통화를 추진하고, ‘둘만 낳아 잘 살자’의 역 버전으로 저출산 대응 인구정책표어를 공모하고 있는 것이다.
차별 양산하는 ‘가족주의’ 버려라
어찌 보면 지금 가족을 둘러싼 담론의 쟁점은 가족주의를 고집하는 사회와 자의든 타의든 가족 틀을 벗어난 사람들 간의 갈등이다. 더 정확히 말해 가족주의를 고집하는 사회가 가족 틀을 벗어난 사람들과 가족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는 문제다. 가족이 아무리 우리 사회의 기본단위로 취급되어도, 실상은 가족으로 인해 아픈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많다. 또한 가족 틀을 벗어난 사람들의 비율도 많으며 더욱 증가추세다.
국가가 국민이 행복하게 살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정상가족’ 모델을 고수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이유가 있긴 한가? 사회가 ‘정상가족’을 고집했을 때 이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정상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우월한가? 정상가족 유형에서 벗어난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은 부차적인가? 누구도 정상가족을 이루고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틀에서 벗어나거나 배제됐다는 이유로 차별 받아선 안 된다. 만약 가족과 관련해 국가가 국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면, 그 역할은 ‘차별 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요는, 우리 사회가 ‘가족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2004-05-01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