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이데올로기와 한판승부!

‘피할 수 없는, 조직의 명운을 건’ 민주노총의 총파업 선언…비정규직 법안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이번 총파업은 노동운동의 조직적 힘과 건강성을 보여주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11월14일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사진 / 김진수 기자)



“내 손에 최소한 50만표를 쥐어달라.”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은 11월26일로 예정된 비정규직 법안 관련 총파업을 앞두고 전국 사업장을 돌며 파업 찬반투표를 독려할 때 줄곧 이렇게 외쳤다. 민주노총이 그동안 대의원대회에서 통과시켰던 총파업을 전체 조합원(59만5천명)이 직접 참여하는 투표를 거쳐 결의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찬반투표 결과 30만5천명이 참가해 20만7천명(67.9%)이 총파업에 동참하겠다고 찬성표를 던졌다.

비록 50만표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68%에 달한 총파업 찬성률은 ‘뜻밖의’ 높은 수치라는 게 노동계의 반응이다. 올 상반기 투쟁에 따른 조직적 피로감이 누적된데다 외환위기 이후 해마다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에 동원돼온 만큼 ‘파업 피로감’이 클 수밖에 없는데, 이를 감안할 때 찬성 20만표는 현장의 총파업 열기가 갈수록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소장은 “민주노총 단위노조 가운데 자체 사업장 문제로 파업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노조가 수두룩하다”며 “이를 고려할 때 이번 투표 참가율과 찬성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지난 9월 노동부가 내놓은 비정규직 법안(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은 국회에 이미 제출돼 조만간 상임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로 넘겨질 예정이다. 노동계는 정부가 △기간제 근로자를 3년 이내에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고 △파견 대상 업무를 전면 자유화해 비정규직 확산을 조장하는 최악의 개악안을 강행하고 있다며 “비정규직 정부 법안 폐기 및 대화를 통한 새로운 법안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노동부는 “법안은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고 남용을 규제하되 노동 유연성을 훼손하지 않는 데에 기본 방향을 두고 마련됐다”면서 노동계가 총파업으로 맞서더라도 연내에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법안이 상임위에 상정되는 순간, 정부가 법안을 밀어붙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총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업찬성’20만표가 말하는 것은…


민주노총이 사상 처음으로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찬반 여부를 묻고, 또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는 건 이번 총파업이 ‘비정규직 법안 싸움’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민주노총은, 해마다 총파업 선언을 되풀이했지만 별다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판판이 깨지고 말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금껏 총파업 이슈는 임단협 투쟁이거나 ‘일방적 구조조정 반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번 총파업은 성격이 다르다. 정규직 대공장 노조의 이른바 ‘배부른 파업’이 아니라 조직 노동자들 스스로 비정규직 싸움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수호 위원장은 “정부가 이번 개악 법안을 밀어붙인다면 민주노조 운동의 정통성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민주노총으로서는 어느 때보다 비장한 각오로 이번 싸움을 맞고 있다.

사실 민주노총으로서는 비정규직 법안 총파업을 대의원(870여명)한테 묻지 않고 60만 전체 조합원 찬반투표에 부치는 것이 모험이기도 했다. 이수호 위원장의 말마따나 총파업이 부결된다면 민주노조 운동은 정통성에서 일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는 현 노동운동에 대해 “대기업 정규직 노조 중심의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된 운동”이라고 늘 비판해왔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최근 “대기업 노조의 경우 노력에 비해 과도한 과실을 따먹고 있다”고 또다시 노동계를 자극하기도 했다. 결국 총파업이 부결되거나, 총파업에 돌입하더라도 동원부족으로 패배한다면 ‘정규직의 배부른 운동’이라는 정부 논리를 노동계가 입증해주는 셈이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싸움은 ‘대기업 정규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면승부 성격도 띠고 있다.


정부 “여기서 노동계에 밀리면 끝장”


특히 이번 총파업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흐름 속에서 수세에 몰려 있는 노동운동의 조직적 힘이 과연 얼마나 살아 있는지, 또 노동운동이 전체 노동자를 대변하는 ‘건강성’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정부는 “정규직 대공장 이기주의에 젖어 있는 민주노총이 비정규직을 위한 총파업을 한다고? 그래 어디 한번 보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차별 해소를 단지 ‘구호’로만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 민주노총은 “그렇다면 우리의 실력을 이번에 제대로 한번 보여주겠다. 정부의 생각이 오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겠다”고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김주환 국장은 “정규직 노동자 20만명이 비정규직을 위해 총파업을 선언했다는 건, 그동안 말로만 비정규직 투쟁을 외쳐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정규직 노동조합이 무언가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 이번 총파업은 노-정 대립의 분수령이 돌 것으로 보인다. 올초 김대환 노동부 장관(왼쪽)과 이수호 민주노총위원장이 만나고 있다. (사진 / 박승화 기자)





물론 법안이 통과되면 노동시장이 비정규직 중심으로 재편돼 정규직도 비정규직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우려가 작용했기 때문에 예상외로 높은 총파업 찬성률이 나왔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관계자는 “이번 비정규직 법안을 막아내지 못하면 앞으로 노동시장에서 정규직의 씨가 마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노동운동 조직이 취약해질 뿐만 아니라 이수호 집행부가 ‘비정규직 확산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집행부’라는 역사적 평가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런 위기감도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싸움은 1998년 2월 노사정 대타협 당시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했던 상황과 비슷한 수준의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총파업이 노-정 대립의 분수령이 될 공산도 크다. 물리적 힘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노-정 관계가 파국에 이른다면 현 정부가 줄곧 표방해온 ‘사회적 대화’는 이제 노무현 정부 임기 내내 말도 꺼내기 어렵게 된다. 김유선 소장은 “비정규직 법안을 밀어붙인다면 정부가 대화 의지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법안 처리 강행은 노사정위원회 대화 틀조차 공식적으로 폐기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지금 상황은 1996년 말∼97년 초 노동법 날치기 처리 때의 총파업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번 총파업 국면이 향후 노사 관계를 판가름짓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정부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정은 국가보안법 등 4대 법안뿐 아니라 비정규직 법안을 포함해 갈등을 겪고 있는 법안들을 연내에 한꺼번에 털어버리겠다는 구상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노동부쪽은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비정규직 법안은 그동안 충분히 논의된 사안이다. 재논의를 한다 해도 합의가 이뤄질 문제가 아니고, 손질해봤자 별로 달라질 건 없다. 내년부터는 노동법·제도 선진화 방안 등 다른 과제를 풀어야 한다”며 “총파업을 피해간다고 해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노동계 관계자는 “이번에 끝내지 못하면 비정규직 법안이 노-정 관계를 악화시킬 최대 이슈로 계속 작용할 것이기 때문에 정부도 피할 수 없는 싸움으로 보는 것 같다”며 “김대환 노동부 장관도 여기서 노동계에 밀리면 끝장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 대대적 가세, 판이 커진다


한편, 열린우리당에서는 노동계의 저항이 의외로 강한 만큼 연말 총파업 소나기 국면을 일단 피해가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환경노동위원회)은 “열린우리당 환노위 소속 의원들 사이에 이번 국회에서 비정규직 법안을 꼭 처리할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며 “법안 내용도 더 토론해볼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법안 처리가 연기되더라도 앞으로 국회가 열릴 때마다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긴장은 지속되겠지만, 열린우리당은 이럴 경우 노동계도 지쳐 파업 동력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 11월22일 총파업을 앞두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해 정부에 노-정교섭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 김진수 기자)





이번 총파업 국면이 정부와 이수호 집행부의 첫 대규모 정면대결이기도 하지만,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는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 ‘제도’를 둘러싼 최초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각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철폐, 차별 해소 등을 놓고 산발적인 싸움이 계속됐지만 법과 제도라는 측면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정치적 쟁점’으로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노동계는 비정규직 법안을 “이미 노동시장에서 불법·탈법적으로 횡행해온 비정규직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합법화해주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까지 이번 싸움에 가세해 판이 커지고 있는 양상은 주목할 만하다. 양대노총·한국비정규노동센터·참여연대·한국여성단체연합·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103개 노동·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비정규노동법 공동대책위원회’는 법안 철회를 촉구하며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또 학계·법조계·예술단체·시민단체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그동안 기존 노동운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해온 참여연대까지 비정규직 법안 투쟁을 사업의 전면에 배치하면서 연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참여연대쪽은 “비정규노동법 개악은 단순히 노동 문제에 국한된 이슈가 아니라, 소득 불평등과 경제 양극화 등 사회 불평등의 근본 문제”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 총파업은 노동운동만의 고립된 싸움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주변부로 밀려난 절대 다수 노동인구의 삶의 조건을 결정하기 위한 ‘사회세력간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은 올 초 취임 당시 “내가 대화와 교섭을 중시하는 건 맞지만, 차근차근 준비해서 노무현 정부 임기 안에 신자유주의 시장 흐름에 맞서는 제대로 된 한판 싸움을 벌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총파업은 비정규직 법안이란 긴박한 변수로 인해 그 싸움이 생각보다 일찍 닥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노동계에서는 “피할 수 없고, 조직의 명운을 건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과연 총파업에서 노동자들의 함성이 얼마나 크게 터져나올 수 있을까? 일부에서는 이번 총파업이 노동법 날치기로 촉발됐던 96년 말∼97년 초의 총파업처럼 커질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물론 당시에는 새벽 날치기라는 극적 사태가 있었고 정리해고 도입이라는 ‘충격적 이슈’가 있었지만 비정규직 급증은 이미 시장의 대세로 굳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당시 법외단체였던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거쳐 노동운동 세력으로서 실체와 지위를 인정받고 국민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만약 민주노총이 이번 비정규직 법안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조직적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이래저래 이번 싸움은 민주노총에게 하나의 도전이자 기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