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과 '진보적 교수'의 대화
손석춘 <한겨레> 비상임논설위원 . 노동과 세계 3월 3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3월 중순으로 늦춰졌다. 다행이다. '사회적 교섭 안건'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자칫 증폭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미 두 차례나 대의원대회 유회를 보도하면서, 신문과 방송이 노동운동 전반에 걸쳐 마녀사냥을 벌였기에 더 그렇다.
따라서 문제는 '연기'로 해소된 게 아니다. 늦춰진 시간을 온전히 활용해 노동운동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는 숙제가 남겨졌다. '사회적 교섭안 폐기를 촉구하는 교수들'의 성명을 깊이 있게 논의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노총이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는 진보적 학자들의 진단은 허투루 여길 사안이 아니잖은가. 어떤 '기로'인가. 성명은 명토박아 제시했다. "권력과 자본의 탄압과 착취에 맞서 싸워온 위대한 전통을 되살려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선봉부대를 계속 이끌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 대중을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순치시키려는 권력과 자본의 하위 동반자로 전락할 것인가." 성명에 참가한 진보적 교수들은 민주노총이 "새로운 어용노조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고 우려했다.
안타까운 '평행선'
성명이 나오자 민주노총은 "진보를 자처한다는 일부교수들의 분별없는 처신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는 논평을 냈다. "진보를 자처한다"는 표현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민주노총은 성명에 참여한 교수들에게 감정적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논평은 교수들의 성명이 "민주노총에 대해 심각한 자주성 침해와 사실을 왜곡"했다고 반박했다. 게다가 "대중운동을 해온 단체"라고 민주노총을 규정하면서 "학자의 관념으로 재단해서 대중의 자주성을 침해하지말기를 바란다"거나 "섣부른 관념적 운동이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에게 폐해를 초래했는가 우리는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진보적 교수들의 성명과 민주노총의 논평은 평행선만 그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다. 필자는 민주노총과 '일부 진보적 교수들'을 같은 위상에 놓고 싶지 않다. 집행부 스스로 자부했듯이 민주노총은 "대중운동을 해온 단체" 아닌가. 필자의 비판이 민주노총에 쏠리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민주노총으로서는 '어용노조'라는 자극적 표현이 나왔기에 자극적 반응도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수들의 성명이 "참으로 부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방식의 문제제기"였는지는 회의적이다. 집행부가 사회적 교섭안건을 표결로 강행처리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도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수호 위원장이 후보시절에 대화와 투쟁을 병행하겠다고 밝힌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적 교섭안건의 강행처리가 후보시절의 공약이라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수호 후보는 대화를 강조하는 한편 총파업다운 총파업을 하겠다고 공약했기 때문이다.
집행부가 공약에서 '대화'에 무게중심을 두려면, 대화의 당사자인 사(사용자)와 정(정부)의 자세 변화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떤가. 노동부는 김대환 장관이 들어선 뒤 오히려 더 경직되어 있다. '조건 없는 노사정위 복귀'를 고압적으로 요구하는 장관을 보라. '사'의 자세는 어떠한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그리고 엘지정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초강경이다. 저들이 살천스레 저지르는 인권유린과 부당노동행위에 정부는 모르쇠 하고 있지 않은가.
반대세력과 열린 대화를
그래서다. 필자가 이해하는 바로는, 정부와 '사용자'의 자세가 초강경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이수호 위원장이 역점을 둘 공약은 '대화'가 아니라 '총파업다운 총파업'이다. 물론, 민주노총도 밝혔듯이 '총파업다운 총파업투쟁'이 어려운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진보적 교수들이 성명에서 강조했듯이 "총파업투쟁 조직의 어려움이 투쟁 역량 강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 경주 책임까지 면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기존 노사정위 해체와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 구성"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정부와 '사용자'의 경직된 자세를 보라. 진정한 대화는 민주노총이 '총파업 능력'을 갖췄을 때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집행부가 초강경의 '사용자'나 정부와 '대화'를 모색하기 전에, 내부의 반대세력과 마음을 연 대화를 나눌 때다. 대의원대회가 벌써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