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텍, 경찰청고용직, 한원CC, 엔텍, 기륭전자 그리고 여성
여성노동의 불안정화, 모든 노동자의 불안정화로

여성행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경찰청고용직, 한원CC, 엔텍, 기륭전자 그리고 여성노동자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조합원들은 전원이 여성이다. 여성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에 대한 사측의 탄압은 폭력적이다 못해 악랄하다. 오죽하면 조합원 전원이 집단 정신질환 판정을 다 받게 되었을까.


경찰청고용직 노동자들도 전원이 여성이다. 경찰서의 온갖 잡다한 실무와 잔심부름, 심지어 서장의 속옷 빨래까지 해내며 긴 세월 일터를 지켜왔건만 그녀들에게 돌아온 것은 직권면직이라는 이름의 해고. 하루아침에 해고된 그녀들은 400일이 넘도록 투쟁을 진행했다.


283일 동안의 싸움 끝에 그토록 그리던 일터로 돌아간 한원CC 경기보조원 노동자들. 푸른 잔디를 다시 밟고 싶다고, 다시 일하고 싶다고 하던 그녀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나 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골프장 경기보조원은 특수한 형태로 고용된 경기도우미일 뿐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회사는 합의사항을 이행하려 들지 않았고 계속하여 용역전환을 시도할 뿐 아니라 노동조합에 대해 노골적으로 탄압을 일삼았던 것. 결국 한원CC 경기보조원 노동자들은 3개월 만에 다시 투쟁의 머리띠를 둘러매었다.


엔텍에서 십수년을 일한 여성노동자들은 손가락이 다 휘고 마디마디 연골이 닳아버렸다. 그러나 영동 지역에서 엔텍공장 다니는 여자들 손이란게 죄다 이 모양이어서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재해인 줄 그녀들은 미처 몰랐다.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들과 임금차이가 있는 것도 원래 그런 것인 줄로만 알았다. 손이 닳도록 일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입에 풀칠도 어려운 임금과 관리자들의 욕설과 협박. 아줌마 이빨 좀 보이지 마라, 수다 떨러, 남자 꼬시려고 회사왔냐, 화장실은 왜 그렇게 자주가냐, 불만있으면 나가라...결국 그녀들은 싸움을 시작했고, 서울 본사 상경투쟁 중이다.


일거리가 많을 때는 우르르 채용했다가, 일거리가 없을 때는 우르르 해고시키는 통에 기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언제나 마음 졸이며 살아왔다. 저임금에 열악한 노동조건, 게다가 해고통보조차 문자메시지로 보내는 등의 비인간적 대우에 그녀들은 참을 만큼 참은 분노를 터뜨렸다. 불법파견 시정하라! 최저임금 보장하라! 그녀들의 요구는 소박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회사는 그녀들은 사원이 아니라 업체에 소속된 사람일 뿐이라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고소고발에 용역업체를 통한 폭력진압까지 일삼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기륭 여성노동자들은 찬 바닥에서 밤을 지새우며 파업 투쟁 중이다.


여성을 위한 법, 그러나 여성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법


한국에서 여성과 관련한 주요한 법 제·개정, 정부기관의 신설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여성의 공적영역(노동시장을 포함한)으로의 진출을 보장하는 법, 제도적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여성(노동자)에 대한 정책을 수립, 실행하기 위한 기관을 따로 두었다는 것이다. 특히 김대중 정권 이후로 여성노동자 고용을 확대하고자 하는 정책방향은 일관성있게 추진되고 있는데,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여성인력 활용방안이라는 것이 여성들에게 결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일례로 현재 여성가족부를 위시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회적일자리 정책이라는 것은 여성들에게 일자리, 즉 기회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포장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 일자리라는 것들이 저임금에 열악한 노동조건의 것일 뿐 이며, 이런 일자리는 방과후교사, 보육교사, 간병인 등의 소위 ‘여성직종’에 편중되어 있어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진행된 여성고용의 확대는 결국 불안정노동층으로 여성노동자들을 내모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기업에서 여성노동자의 고용을 기피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이유, 이제는 보호가 아니라 평등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 등을 들어 유해 위험 사업 사용 금지직종이나 시간외근로 제한 규정 및 생리휴가 등과 같은 보호조치가 삭제되거나 축소되어왔다. 이는 평등을 위장한 여성노동의 유연화에 다름 아닌 것으로, 결국 여성노동자의 노동조건 뿐 아니라 전반적인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있다.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와 공명하는 여성운동, 노동운동


IMF 구조조정 당시 여성노동자는 우선 해고되었고, 정리해고 후에는 이전보다 열악한 노동시장으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가사노동에 대한 일차적 책임자인 여성노동자는 임시직, 시간제, 비공식부문 등의 불안정노동층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것은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하락시키는 것은 물론이며 전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여성노동정책으로 인해 자본은 생산비용을 절감하는 한편, 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을 기반으로 정부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불안정노동을 양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재생산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노동자를 어떻게 초과 착취하는가를 제대로 인식하여야 한다. 현재의 여성고용의 확대과정은 여성운동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던 ‘여성의 사회참여’, ‘여성의 경제활동’을 받아 들이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또한 결과적으로 전체노동자의 노동조건 하락을 위한 여성노동자에 대한 권리박탈을 여성노동자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오던 ‘차별없는 동등한 권리’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여성노동자의 정신과 육체를 최대한 착취하면서 그에 대한 불만을 유능하게 관리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노동운동 진영은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대해 인식이 부재할 뿐 아니라 가족단위의 생존전략을 구사하며 IMF로 인해 가속화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정에서 여성노동자의 우선해고를 받아들이고, 정리해고 저지투쟁과정에서 여성노동자의 정리해고에 합의하는 등 여성노동자의 희생으로 ‘노동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고 있다. 또한 여성운동은 여성복지정책의 확대를 요구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연화된, 곧 불안정한 노동을, 보호조치삭제를 받아들였다. 역설적이게도 여성운동과 노동운동 공히 신자유주의 여성노동정책의 실행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투쟁하는 여성들과의 실천적 연대가 필요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각에도 절박하게 투쟁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이 고립분산되어 각개격파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투쟁하는 여성들과 함께 하는‘운동’이 필요하다는 원칙의 강조는 거듭되어도 결코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은 투쟁하는 여성들과 함께 하여야 한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폭력과 빈곤에 맞서 투쟁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화답하고 그녀들과 함께 여성의 노동에 대한 권리, 삶에 대한 권리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그 자신의 위기를 지연시키는 데에 여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현실을 폭로하고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 불안정노동을 철폐하는 투쟁을 일구어나 나가야 한다. 여성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하여서는 여성노동정책이 어떤 지반 위에 서 있는지를 분석하며, 이러한 조건자체를 바꿔내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가 배재한 여성들의 요구가 보편적인 여성의 요구로 구성되도록 하는 데에 모든 힘을 기울이자! 여성의 새로운 연대는 여기서 출발하고, 새로운 ‘운동’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노동을 할 권리를 갖는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정한 노동에 접근할 수 없어서도 안 되고, 특정한 노동을 강요당해서도 안 된다.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동성애자이건 이성애자이건 상관없이,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노동할 수 있어야 한다.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권리선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