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영화 <외출>에서 그 남자는 어떻게 ‘법칙없는 사랑’을 성숙하게 만들어갔나
차별화된 남성상으로 한류 열풍 일으킨 <겨울연가>의 강준상에서 한 걸음 더
▣ 정희진/ 서강대 강사
아시아와 탈식민주의 주제의 어느 세미나에서, 한 남성이 <겨울연가>에 대해 내가 쓴 글을 읽었다며, “페미니스트가 배용준을 좋아하다니 의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영애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성이 배용준을 좋아하는 것과 남성이 이영애를 좋아하는 것이 어떻게 같은 맥락일 수 있느냐”고 물었고, 초면인 그와 가벼운 언쟁을 벌이고 말았다(물론, 여기서 ‘배용준’과 ‘이영애’는 실명 개인이 아니라 대중이 소비하는 그들의 이미지를 말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보통’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성은, 세상 물정에 무지한 순진무구한(innocent) 여성이다. 무식함과는 다르다. 적당히 지적이지만 남성의 언어에 도전하지 않고, 거칠고 험악한 노동시장에 진출할 필요·의지가 없으며, 남자에게 부담주지 않을 만큼만 의존적인, 깨끗한 손톱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서 최고급 가전제품을 사용하면서 “여자라서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여성은, (모든 남자가 ‘가질 수 없기에’) 남성의 계급을 증명한다. 바로 광고와 드라마에서 ‘이영애’가 재현하는 이미지다. ‘이영애’는 성 역할 고정관념과 이에 기초한 계급제도를 강화하는 전형적 이미지지만, 배용준, 아니 <겨울연가>의 강준상은 남성 젠더를 파괴하는 전복적인 캐릭터였다. 그래서 ‘이영애’를 좋아하는 남성은 비난받지 않지만, ‘배용준’을 좋아하는 여성은(대표적으로 일본의 중년여성들) ‘아줌마가 주책’ ‘외로운 여자들의 현실 도피’ ‘신데렐라 드라마에 취한 골빈 여자들’로 지탄의 대상이 된다.
몇 개월 연애하고 땡인 '회사인간들'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의 사랑과 보살핌을 갈망하면서도, 여성에게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 진한, 강력한 그리고 영원한 유일한 사랑은 남성 연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짜 인생’은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남자의 인생 중 여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modify) 기간은 연애할 때 몇 개월이 유일하다(반대로, 여성들은 거의 평생을 남성을 위해 자신을 조절해왔다).
<겨울연가>의 강준상(배용준)은 이 법칙을 깬다. 준상은 드라마가 방송되는 20회 내내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며, 여성으로 인해 행복해하고 아파한다. 이제까지 여성들만이 해왔던 관계 유지에 필요한 노동을 기꺼이 분담하는, 여성과 대화할 능력이 있는 새로운 남성이다! 이를테면, 여성들에게 강준상은, 스스로 노동자가 된 자본가, 흑인 노예가 된 백인인 것이다.
전후 50년 동안 ‘회사 인간’만을 겪어온 일본 여성들은 말한다.
“일본 드라마에서는 남자의 눈물을 본 적이 없어요”
그간 일본 남성들은 섹스 관광을 위해 국경을 넘었지만, 일본 여성들은 준상이 집을 방문하고, 춘천에 미군기지가 많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아시아와 한국을 구체적으로 경험한다. 준상에 대한 아시아 여성들의 열광적인 사랑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주창한 ‘문화 제국주의’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다. 한국의 진보 진영의 한류에 대한 이중 감정도 마찬가지다. 한국보다 잘사는 일본에서의 <겨울연가> 열풍은 일견 통쾌한 일이지만, 베트남에서의 인기는 문화를 앞세운 경제 침략 같아 왠지 불편하다.
그러나 문화 침략이라는 고정관념은 글로벌 수용자를 국민국가로 환원하는 것이다. 여성학자 김은실은 지구화 시대 초국적(trans-national)으로 소비되는 글로벌 드라마는, 국민과 국가가 일치하지 않는 곳에서도 국가를 만든다고 지적한다. <겨울연가>는 드라마 수용에서 국민보다 젠더 범주가 더 강력함을 보여준 사례다. 일본 여성들은 <겨울연가>를 보는 동안 자신을 ‘일본인’보다는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이때 이들의 국가는 일본이나 한국이 아니라 ‘욘사마 나라’이다.
이제 제작자의 의도가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드라마는 없다. 성별, 나이, 지역, 계급, 성 정체성(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 등 수용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텍스트는 다르게 수용된다. 즉, 아시아 각국에서 한류의 효과는 단일하지 않으며, 일국 내에서 한류의 영향력 역시 계층이나 성별에 따라 다르다.
배용준이 쿨한 바람둥이로 나온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일본 흥행에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 여성들이 <스캔들>에 큰 상처를 받았다. 여성들이 사랑하는 남자는 배용준이 아니라 강준상인 것이다. 아직까지는 ‘배용준 한류’가 사랑을 둘러싼 남녀간의 권력관계, 젠더 정치학의 지형 위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배우 배용준’의 입장에서는 <겨울연가>와 <외출>의 이미지가 연동하는 것이 억울하겠지만(감독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다),
어차피 <외출>은 <겨울연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이다. <외출>의 여주인공은 전업주부인데, ‘배용준’은 “참 어려운 일을 하시네요”라고 말한다. 이런 대사도 있다. “일하는 여자가 매력 있죠?” “아니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여성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장면이다. ‘배용준’은 여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따뜻한 남자이며,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의 형식에 대한 사랑을 비판 사랑만큼 유사 이래 가장 많이 추구되면서도, 가장 고찰되지 않은 감정도 없을 것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로 성별이 분화된 사회에서는, 남자는 권력을 원하고 여자는 감정적인 밀착과 친밀함을 원한다. 공적 영역의 양성 평등에 동의하는 남성도, 여전히 사랑은 ‘여성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아니라 권력이 시대의 질서인 탓에 아무도 사랑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허진호의 존재는 특별하다. 사랑의 진화와 소멸, 그리고 이 폭풍우를 통과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만큼 성찰하는 작가도 드물다. 그의 신작 <외출>은 <겨울연가>의 주제인 남성의 사적 영역으로의 진출과 감정 노동에의 참여를 넘어, 상처에 휘둘리지 않고 성장하며 사랑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가는 성숙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요즘 젊은이들이 사랑을 쉽게 생각해서 쉽게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하고는 “내가 꿈꾸는 사랑을 할 수 없어서” 헤어진다. 대개 사람들은 구체적인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상태를 사랑한다. 혼외 사랑이라고 해서, 완전히 제도 밖의 사랑은 아니다. 사랑의 각본, 절차, 매뉴얼, 다짐, 약속, 만남과 헤어짐의 의례 등이 존재한다면, 이는 결국 모두 제도화된 관계다.
<외출>은 사랑의 형식에 대한 사랑을 비판한다. ‘외출’은 ‘집’의 존재를 가정하기 때문에 ‘불륜 담론’의 그림자가 있어서, ‘외출’보다는 영어, 일어 제목인 ‘4월의 눈’(April Snow)이 영화의 철학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4월에, 눈은 내릴 수도 있고 안 내릴 수도 있다. 법칙 없는 사랑, 시작도 끝도 정하지 않는 관계, 그릇이 없어 크기를 알 수 없는 사랑. 허진호는 감히, 이런 관계를 꿈꾸고 있다. 부부이건 애인이건, ‘정상’이건 ‘불륜’이건 관습화된 관계를 거부하고, 각자 상호 성장하면서 외롭거나 일상이 지겨울 때 가끔 찾을 수 있는 ‘즐거운 외출’.
그러나 만남의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는 사랑.
<외출>의 관계의 정치학을 대변하는 두 장면. 낯선 도시에서 배우자들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인수(배용준)와 서영(손예진)은, 남자의 아내와 여자의 남편이 사랑하는 사이였음을 알게 되지만, 이들 역시 사랑에 빠진다. 같은 여관에 장기 투숙하고 같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배우자를 돌보며, 고통과 혼란 속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아내가 깨어나자 인수는 아내에게 미음을 먹이는데, 그 장면을 서영이 본다. 쓸쓸한 서영은 남편의 침대에 머리를 묻고 잠이 드는데, 그 장면을 인수가 본다. 이후 두 사람은 현실을 인정하며 멀어진다. 아무리 별난 개인들의 사랑이라 해도, 대개 사랑은 앞서간 이들이 해왔던 행위의 인용과 재인용의 점철이다. 사랑해서 미음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랑해서 배우자의 침대 곁에 잠드는 것도 아니건만, 이런 장면은 용인받지 못한 연인에게는 그/녀와의 모든 역사를 무(無)로 돌리는 대단한 행위로 보이고 깊은 상처가 된다.
제도가 보장하는 관계 앞에서, ‘너’의 넘치는 매력과 ‘나’의 절절하고 순정한 의지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인간은 그렇게 제도 앞에 무력한 존재다. 즐거운 외출은 봄날의 폭설 같은 것 그리고 마지막 장면. 관계라는 생물의 죽음과 생존이 모호한 시간이 지나고, 봄날 폭설이 내리자 두 사람은 “어디로 갈까요?”라며 다시 만난다. 영화는 말한다. 들어왔거든 들어온 문을 잊어라. 관계의 향방이 사랑을 구속하지 말라.
사족 둘. 1)‘불륜’은 이 영화의 소재도 주제도 아니다. 폭력과 착취가 없으면, 세상 모든 사랑은 윤리적이다. 사랑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에 속한다. 이 근대 민주주의 기본 강령들은, 인간은 각자 자기 몸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사랑처럼 개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몸 밖의 사회(가족, 국가…)가 금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영화에서처럼 교통사고가 나서 배우자가 알게 해서는 곤란하다. 2)베드신은 ‘꽝’이다. 구릿빛, 역삼각형, 복부에 왕자(王字) 새겨진 배용준의 몸과 손예진의 가슴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는 사랑의 현실감이 전혀 없으며, 관음증으로 그야말로 윤리가 없고, 근거 없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아시아’는 구체적인 장소, 구체적인 몸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