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여성에 약인가 독인가
전문직엔 ‘기회’, 비정규직 근로조건 악화 우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면 지식서비스 분야의 전문직 여성은 사회진출의 기회가 크게 늘겠지만 시장개방의 확대로 비정규직 일자리가 양산되면서 대부분 여성 근로자의 근로환경은 생각보다 훨씬 열악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됐다.
5월 초 한국에서 첫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하는 한·미 양국은 내년 3월 협상 타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협상이 타결될 경우 교육·의료·법률·컨설팅 등 지식서비스 분야, 특히 전문 여성인력의 고용 및 관리직 승진 등에서 크게 유리할 것으로 보인다. 또 교육시장 개방으로 조기유학 수요 감소 등이 기대된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가속화로 일반 여성 근로자의 고용 안정이 크게 위협받고, 농산물 개방으로 인해 전체 농민의 50%를 차지하는 여성 농민의 빈곤화 현상도 심화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또 외국 자본의 서비스 분야 진출은 소자영업자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며, 특히 여성 자영업자 대부분이 소상인이란 점을 생각하면 여성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문현아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은 “한·미 FTA 협정이 일부가 아닌 대다수 여성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며 “지금부터라도 여성들이 FTA 협상 과정을 주목하고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성 경제활동에 미치는 영향…전문가 분석}
5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 협상 시작을 앞두고 산업별로 손익계산에 분주하다. 한·미 FTA 협상은 농업, 제조업, 지적재산권, 환경, 노동 등 20여 부문을 포함하고 있으며, 정부는 내년 3월에 협상을 타결하고 2008년에는 발효한다는 계획이다. 협상이 발효되면 향후 10년간 단계적으로 양국 교역 품목의 90%에 대해서 관세가 없어진다.
협상이 타결되면 국내의 농업·교육·제약·화장품 산업은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며, 섬유·신발·전자·자동차 등 제조업체는 수출 기회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에 따른 신규 일자리도 10만4000개 이상 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좋은(decent) 일자리 창출에 대한 기대는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한·미 FTA는 여성의 생활과 경제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각계 전문가들은 FTA 협상이 여성의 경제활동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협상 결과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생활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분야는 농산물·교육·의료·법률 등의 서비스 개방이다.
미국이 절대적 우위에 있는 농업 개방으로 소비자들은 저렴하고 다양한 농산물 구입이 가능해진다. 쌀의 경우 국민 정서상 아직까지 반향이 크지 않지만 가계 지출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가계 지출의 50%까지 차지하는 자녀 교육비에도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정부는 공공성을 헤치지 않는 범위의 협상 원칙을 고수하고 있어 중·고등학교의 개방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학·대학원(MBA), 학원의 개방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영어교육을 위한 조기유학은 많이 감소하고, 또 지금까지 남성들이 주를 이뤘던 MBA과정에도 여성들의 도전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 의료기관의 국내 진출로 인한 의료서비스 역시 정부는 ‘공공성’ 원칙을 지킨다는 입장이지만, 시장이 개방될 경우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일부 부유층이 주 수요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법률 서비스 개방으로 국내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선진화가 빨라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송영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취약했던 법률·회계·컨설팅 분야가 개방되면서 기업은 물론 개인들도 법률 서비스를 좀 더 쉽게 활용할 수 있어 법이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외국의 대규모 자본이 밀려옴에 따라 소상인들의 영업 환경은 더욱 나빠질 것이며, 특히 미용 분야의 타격이 클 것이라는 분석도 나와 여성 경제인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현재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의 등록 회원 중 90%가 소규모 자영업 종사자이다.
그러나 박번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글로벌경제실)은 “아직 협상의 구체적 항목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며 “다만 정부가 피해를 최대한 줄이더라도 서민의 생활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국내 일자리 창출로 연결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도 지난 3월 21일 여성 경제인과의 간담회에서 “한·미 FTA가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을 확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실제로 양국의 전문자격증 상호 인증, 외국 기업의 투자 확대 등으로 인한 기업경영 환경 변화는 여성 채용 및 관리자 승진기회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김영옥 한국여성개발원 인적자원개발실장은 “교육, 문화, 컨설팅 분야에는 전문 여성인력의 진출이 활발한 분야이며, 시장 개방으로 이들의 진출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사회의 전체 일자리 수는 오히려 줄어들 수 있고, 이 경우 저학력·저숙련 여성 근로자의 노동환경은 더욱 열악해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문현아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은 “현재 비정규직의 대부분은 여성인데 FTA로 인해 비정규직이 더 확대되면 결국 여성에게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며 “특히 여성 농민 비율이 50%이고 이들 대부분이 소농인데, 개방 후 기업농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이들의 빈곤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시장 개방 후 여성들은 더욱 치열한 ‘자기계발’에 몰두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송영관 부연구위원은 “고급인력 시장에서 국경이 사라지고 있다”며 “이제는 남성이 아닌 국내에 진출할 세계의 인재와 경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경쟁에서 소외되는 여성들을 위한 ‘재취업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등 사회적 인프라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자유무역협정(FTA)이란? 국가 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모든 무역 장벽을 제거하는 협정이다. FTA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와 다른 점은 WTO가 모든 회원국에 최혜국 대우를 보장해 주는 다자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반면 FTA는 양자주의 및 지역주의적인 특혜무역체제로, 회원국에만 무관세나 낮은 관세를 적용한다. 시장이 크게 확대되어 비교 우위에 있는 상품의 수출과 투자가 촉진되고, 동시에 무역전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협정 대상국에 비해 경쟁력이 낮은 산업은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게 단점이다.
한국은 2004년 4월 칠레, 2006년 3월 싱가포르와 FTA 협정이 이미 발효 중이다. 2007년에는 캐나다, 멕시코, 인도와 협정 타결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일본과는 2004년부터 계속 협상 중이다.
김미량 기자 kmryang@
872호 (2006-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