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칼럼] 진정한 폭력자는 누구인가?
박노자칼럼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지난 11월22일의 전국적 시위를 두고 정부와 보수 언론들이 ‘폭력’ 운운하며 시위 조직자·참가자들을 범법자를 다루듯 취급한다. 물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군에 끌려간 민중의 아들들인 의경들이 시위 과정에서 다치게 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위 참가자들의 각목 등의 사용이 경찰의 탄압적인 행동에 맞선 방어적 대응이라 하더라도,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대신에 의경들의 계급적인 양심에 호소하여 그들이 하는 일의 본질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을 이끌어낼 수 있었으면 더욱더 좋았을 것이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그 성패가 결정지어지지만, 민중의 시위에 발사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일선 졸병들의 양심적인 행동으로 본격화된 1917년 2월의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군이 아무리 맹목적인 규율을 강요한다 하더라도 군인의 민중적 양심을 깨치게 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심각하게 다친 의경의 미래를 나라가 제대로 책임질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한 일이기에 시위자들이 의경들을 ‘적’이라기보다는 ‘징병제의 희생자’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탄압을 받는 와중에서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시위 과정에서 부상자가 나온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해도 과연 ‘폭력’의 책임을 행동하는 민중에게 전가해도 되는가? 정부·언론들이 절대로 의식하려 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노동자가 생산 수단과 생산 과정을 현장에서 민주적으로 관리할 수 없게 돼 있는 자본주의 제도 자체가 늘 제도화된 폭력으로 뒷받침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노동자가 생산 과정의 부속품으로 전락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한국적인 신자유주의라는 최근의 상황에서 이 측면이 극단적·가시적 폭력성을 띠게 됐다. 예컨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직접 고용을 정당하게 요구한 한국고속철도(KTX) 여승무원들이 파업까지 해가면서 몇 달 동안이나 정부와 철도공사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은 데 이어, 이제는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에게까지 ‘외주화’라는 이름의 다단계 고용을 또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정부와 고용주는 다단계고용·단기계약 등의 수법으로 근로자의 노동 여건을 최대한 불안하게 만듦으로써 근로자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장악해 그들을 언제나 쉽게 갈아치울 수 있는 말없는 기계로 만들려 한다. 그 목적이 폭력적인 만큼 그 수단도 권위주의 시대의 폭압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아무런 폭력도 행사하지 않으면서 평화적인 농성을 진행했던 한국고속철도 여승무원들에 대한 폭력적인 연행을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정부와 자본의 폭력이 ‘법’의 가면을 자주 쓰게 되는 것도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삼성에스디아이(SDI) 노동자 투쟁의 진실을 알리려다가 ‘명예훼손죄’를 뒤집어쓴 삼성일반노조의 김성환 위원장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노동자에게 결사의 자유를 불허하는 삼성 자본이 이 사회의 주인 노릇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은, 한국에서 ‘법’이란 ‘주먹’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시위자의 각목보다는 여승무원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마는 철도공사 사장의 말 한 마디가 훨씬 더 많은 폭력성을 내포한다. 불에 탄 대전의 향나무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해고의 불안과 격무의 스트레스 속에서 만성피로와 신경·정신질환, 과로사, 자살로 생애의 끝을 맺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에 탄 인생’들은 이 향나무와 달리 뉴스에서 집중 조명되지 않는다. ‘폭력’이란 무엇보다도 한국의 자본·국가 지배방식의 실체를 가리키는 용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