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명숙 국무총리님께 / 이승렬
시론
» 이승렬 영남대 교수·영어영문학
1979년 3월9일을 기억하십니까? 총리님 개인사에서 매우 충격적인 날이었을 테니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날 총리님은 평상시 근무하던 크리스찬아카데미 사무실 인근 다방에서 불법연행되어 중앙정보부 취조실로 끌려가십니다. 영장 제시도 없었고 변호인 접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죠. 당시 총리께서는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빈부의 양극화가 진행되는 사회현실을 개선할 방법을 고민하시며 농촌 여성 교육에 힘을 쏟다 결국 권력의 미움을 사게 돼 짧지 않은 시간, 고초를 치르십니다.
제가 총리님의 과거 이력을 들추는 이유는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초법적인 국가권력의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이제 권력의 핵심에서 국정을 이끌고 있는 지금, 군사독재 시절의 위법적인 국가운영의 행태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데에서 오는 당혹감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드러운 리더십’, ‘대화와 타협을 존중하는 리더십’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최초의 여성 총리가 생존권 수호를 위하여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는 사람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관용’을 선언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실망스러웠을 뿐 아니라 충격적이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몇몇 대기업을 빼고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결코 대다수 시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지 못할뿐더러, 노동자·농민들은 생존권마저 위협받을 것이라는 시민사회의 우려에 대해 정부는 아직껏 어떤 설득력 있는 해답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총리님 자신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중간집단’의 양성과 농촌사회의 번영이야말로 사회 양극화를 막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젊은 시절의 소신은 이제 총리님의 것이 아닌지요? 미국과 한 배를 타는 것만이 나라 번영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참여정부의 정책방향과 맞지 않으면, 어떤 목소리도 경찰력으로 짓눌러야 하는 것인지요? 지난 11월29일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일부 농민들의 차량은 도로상에서 강제로 점거되었고, 노동자들이 차량에 탈 수 없도록 경찰이 버스를 탈취·억류하였다는 보도를 보고는 우리나라가 민주화된 법치국가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총리님, 우리나라 헌법 21조는 모든 국민의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이는 결코 허가사항이 아님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경찰청은 11월29일 집회를 금지한 데 이어 12월6일의 집회 금지 방침을 철회하라는 국가인권위의 권고까지 무시하였습니다. 총리님은 헌법을 유린하는 경찰청장을 질책하고, 보통의 민주국가에서 그러하듯, 시위대를 보호하도록 지침을 내리셨어야 합니다. 일부 시위대의 폭력행위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것도 국가가 시민생존권을 박탈하는 구조적 폭력이 근본 원인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총리님은 평택 대추리의 늙은 농민들에 대해서도 더는 관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계십니다. 미국의 ‘평화의 어머니’로 지칭되는 신디 시핸은 최근 대추리를 방문한 뒤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여러 세대 동안 마을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켜주어 왔던 논을 파괴하고 그 위에 골프장을 세운다니! 골프를 위해서 한 마을을 송두리째 파괴한다니! 이런 게 미국적 방식이라면 우리는 이제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총리님, 신디 시핸의 글에서 진정한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돌아가신 강원룡 목사의 자서전을 보니, 총리님이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잡혀가실 때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힘없는 노동자, 농민들의 심정이 그러합니다. 부디 그들과 함께하여 주십시오.
이승렬 영남대 교수·영어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