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방송중>
혁명은 ‘이념’보다 ‘일상’이런가
볼가 강변의 도시, 울리야노프스크는 레닌의 고향이다. 생가 자리에는 거대한 레닌 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청소년기를 보낸 집은 지금도 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올해 초 이곳을 방문했을 때 관리하는 할머니들이 다소 의외라는 눈빛으로 “자본주의자들이 왔구먼” 하며 말을 건넨다. 아마도 남한에서 온 최초의 방문자이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자본주의자’라는 말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닌데 말이다. 이 할머니들은 공산 정권 내내 ‘반자본주의 캠페인’을 들어왔고 또 함께 외쳤던 세대들이다.
〈러시아 혁명〉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이들이 과거 체제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스탈린’이 만들어 놓은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향수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에서 온 ‘자본주의자’의 머릿속에선 이런 의문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구세대들은 연금, 대학, 의료 서비스 등이 무상으로 제공되고 질서와 안정이 존재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탈린 숙청’의 끔찍한 기억은? 물론 이들도 1937년과 38년 사이 수백만명이 체포되고 68만명이 총살된 공포의 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일반인들의 뇌리에는 ‘공포의 기억’보다는 ‘일상의 기억’이 더 지배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스탈린의 강제수용소’보다는 ‘기다리기만 하면 아파트가 무상으로 제공되던 시절’의 추억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옛 소련이 붕괴된 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현재도 많은 러시아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경쟁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거리를 지나다 보면 ‘공장을 노동자에게’ 같은 낙서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또한 공산당은 지금도 여전히 주요한 야당세력이다. 페테르부르크의 한 ‘노동자 정당’을 방문했을 때는 1917년 혁명 당시의 구호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신기한(?) 구호도 본 적이 있다. 물론 아무도 이들이 현실에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들은 날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러시아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연구 중이다. 90년 전 많은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혁명’의 여운은 여전히 러시아인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것은 ‘국가가 책임지는 시스템’, 그리고 ‘평등에 대한 강한 기억’들이다.
그렇다면 ‘러시아 혁명’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일까?
프로그램 제작을 하면서 점점 더 ‘혁명’은 ‘거창한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일상’과 더 가까운 것임을 깨닫는다.
한홍석/문화방송 〈엠비시 스페셜〉 피디
‘세계를 뒤흔든 순간-러시아 혁명’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