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서 물으세요? 조·중·동 기자예요?"
촛불 집회에 왜 나왔느냐는 질문에 딸의 손을 잡고 있었던 이수경(38·가명) 씨는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이 씨는 이명박 정부의 대응에 하도 화가 나서 촛불 집회에 처음 나왔다. 그는 "가만히 있으면 청와대의 저 양반은 영 분위기 파악을 못할 것 같아서 사람 수라도 채워주려고 나왔다"고 설명했다.
5월 17일 청계광장에 약 4만 명의 시민이 모여서 촛불을 들었다. 지난 15일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 조건 고시를 연기하는 등 시간 끌기에 나서자, 바로 시민들이 경고로 화답한 셈이다. 이 씨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텐데, 정부ㆍ언론이 그런 분위기를 감지 못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다른 이들도 참석 이유를 묻자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17일 4만여 명의 시민이 서울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밝혔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이명박 대통령이 잘 할 때까지 촛불을 들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시안 |
뿔난 엄마들…"강남 엄마들 민심도 흉흉해요" |
▲17일 촛불 집회에는 가족, 연인의 자발적인 참석이 많았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부, 중·고등학생 딸과 나온 부모, 청계천에 데이트를 하러 나왔다 촛불 집회에 참석한 연인 등등. ⓒ프레시안 |
이날 촛불 집회에는 가족, 연인의 자발적인 참석이 많았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부, 중·고등학생 딸과 나온 부모, 청계천에 데이트를 하러 나왔다 촛불 집회에 참석한 연인 등등. 여러 사람이 초를 들이밀면서 "죄송합니다만 불 좀…." 하는 진풍경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들 중 상당수는 촛불 집회 초보자였다.
여의도에 산다는 주부
심보경(가명) 씨는 딸의 닦달을 못 이겨 촛불 집회에 나왔다. 그는 "캐나다에 유학을 가 있는 딸이 계속 전화를 하는 통에 나왔다"며 "캐나다에 사는 교민도 걱정이 아주 많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심 씨는 "금방 관심이 식을 줄 알았는데, 이번 사안은 좀 다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촛불을 들고 청계천 근처에 앉아 있던 50대 중반의
김진희(가명) 씨는 이번이 세 번째 촛불 집회 참석이었다. 그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용은 원래 참 순한 동물이래요. 단, 거꾸로 나 있는 비늘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이런 용에 비유하자면 주부의 비늘은 바로 자식이지요.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이 자식의 건강을 건드린 거예요."
유모차를 끌며 남편과 함께 참석한
윤미진(37·가명) 씨도 동감을 표시했다. 그는 흔히 말하는 '강남 엄마'다. "괴담? 엄마들 무시하지 마세요. 미국산 쇠고기 들어오면 학교 급식에 쓰일 게 뻔한데,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해요? 불안하면 안 먹는 게 순리 아닌가요? 아, 또 열 받네. 이명박 대통령은 자기편이었던 강남 엄마 민심이 바뀌는 걸 모르나 봐요?"
"이렇게 못할 줄은…이러다 임기는 채우겠어요?" 나이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촛불 집회가 열리는 가에 앉아 있던 60대의 김성철·이순임(가명) 씨 부부는 벌써 시간 날 때마다 나와서 촛불을 들었다. "우리는 데이트를 여기서 해. 촛불 하나 들고, 커피 하나 들고. 분위기도 흥겹고, 젊은 사람들이 옳은 일에 목소리를 내는 것도 보기 좋잖아."
김 씨는 "나는 사실 의료 보험 민영화가 더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국민건강보험 없어지면 우리처럼 돈 없는 서민은 갈 병원이 없다"며 "앞으로 남은 생 더 많이 아플 텐데, 국민건강보험 없어지면 우리처럼 아픈 노인들은 어디 가서 치료를 받느냐"고 설명했다. 그는 "대통령을 정말로 잘 못 뽑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딸과 같이 나온
최정희(58·가명) 씨도 마찬가지였다. 최 씨는 "청계천 산보 겸해서 촛불 집회에 나왔다"며 "이명박 대통령이 자기가 만들어 놓은 청계천이 이렇게 쓰이는 걸 보면 기가 막힐 것"이라고 웃었다. 그는 "일 하나는 잘 할 줄 알았는데, 요즘 같아선 임기를 채울지 걱정된다"고 설명했다.
옆에 있던 딸
김민영(28·가명) 씨가 바로 말을 받았다. 그는 "이명박 씨는 대통령 감이 아닌데 분위기를 타서 대통령이 된 것"이라며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굳이 이명박 씨를 찍으셨다"고 눈을 흘겼다. 그는 "나는 언론이 제일 문제라고 생각 한다"며 "아침부터 기분 상할까봐서 집에서 보는 <조선일보>엔 손도 안 댄다"고 덧붙였다.
|
▲이날 촛불 집회 분위기는 5월만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바람을 일축이라도 하듯 열띤 분위기였다. ⓒ프레시안 |
연예인 대거 참가…"10대들 촛불에 부끄러워서!" |
▲촛불 집회에 참석한 한 시민은 "미국산 쇠고기가 국내에 대량 유통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고보자"고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경고했다. ⓒ프레시안 |
오후 9시가 넘자 예고한 대로
김장훈,
윤도현,
이승환 등 인기 가수가 참석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9시 40분께 무대에 오른 이승환 씨는 "가수가 아닌 시민의 한 사람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바로 내 가족, 친구, 이웃이 걱정돼 이렇게 나왔다"고 밝혔다. 이 씨는 "여러분에게 제 노래가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각각 10시, 10시 30분 무대에 오른 김장훈, 윤도현 씨도 노래를 불렀다. 윤 씨는 "미군 장갑차에 생명을 잃은 여중생 집회 이후 처음으로 이 장소에 왔다"며 "10대들이 촛불을 들고 나서는 걸 보고 아주 창피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촛불이 아주 아름답다"며 "작은 힘이라도 모아서 쇠고기 재협상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5월만 지나면 잠잠?…"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고 봅시다" 이들의 가세로 한껏 고조된 촛불 집회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끝났다. 촛불을 들고 청계 광장을 떠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언제든지 촛불을 들고 나올 것"이라고 답했다. 늦게까지 자리를 지킨 이수경 씨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 경고했다.
"5월만 지나면 잠잠해 질 거라고요? 진짜 그렇게 되는지 한 번 두고 봅시다. 미국산 쇠고기가 국내에 대량 유통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대통령 계속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