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문화제 넘어 대중적 정치주체의 탄생을 향해
1. 현 정세를 규정하는 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안전’(security)의 총체적 붕괴에 대한 심각한 우려이고, 다른 하나는 ‘헌정적 위기’ 요소들의 확산이다.
2. 삶의 안전에 대한 총체적 위협
미국 소고기 수입 협상 문제로 시작한 현재의 저항의 배경에는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문제라는 좁은 의미의 먹거리의 안전성 문제만 놓여 있는 것은이 아니다. 그것이 광우병 문제로 터져나온 것은 광우병이 가장 직접적/가시적이며, 또한 ‘국가’의 ‘임무방기’의 가장 적나라한 측면을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에 비정규직의 대대적 증가로 나타나는 고용의 ‘불안전성’, 유가인상 등에 대한 무대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촉발되는 생활조건의 지속성에 대한 ‘불안전성’, 부동산 값 인상에 따른 주거의 ‘불안전성’,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 부활에도 또는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교육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안정적 미래의 ‘불가능성’, 어린이 납치를 통해 증폭된 바 있는 ‘치안의 부재’, 수돗물 괴담이 보여주는 바 있듯이 공기업 민영화가 촉발할 사회기초 서비스의 ‘부재’ 등등의 수많은 불안전이 초래하는 정세의 결집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사실 사회적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것들로 암묵적으로 이해되어 온 것인데, 그것의 방기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사실상 국가의 존재 정당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광우병이 그 약한고리로 터진 것은 다른 모든 안전의 가장 첫 번째 고리가 되는 생존 자체의 안전성의 보장을 위한 국가의 기능이 의문시됨으로써였다. 따라서 안전이라는 문제는 광우병으로 시작한 문제가 신자유주의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는 중요한 핵심 고리가 된다. 안전은 상이한 조건에 처해있는 대중들이 서로 교통을 확대할 수 있는 고리이며, 이를 통해 연대가 가능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연대가 불가능해 질 수도 있는 쟁점이다.
이런 점에서 대중들이 기존 운동권, 특히 노동운동에 대해 불신을 보이는 측면이 있다면, 이는 이들 운동이 이런 안전 대 불안전이라는 구도의 어느 쪽에 설 수 있는지에 대한 의혹에서 시작되는 것일 수 있다. 노동운동의 핵심 조합원들이 고용의 ‘안전성’에 서있다고 한다면, 그 부분적 불안전의 조건이 있더라도, 이들이 일관되게 ‘불안전’의 조건 속에 위협받는 대중들과 연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기성의 권력’으로까지 인식되는 ‘시민운동’ 단체들(이 점에서는 민중운동 진영도 크게 예외는 아닐 수 있는데)에 대한 불신 또한 이들이 대중의 ‘불안전성’에 기식하는 ‘안정성’의 조직이 아닌가하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의 촛불시위들 등에 비해 현 정세의 차이점은 이런 불안전성이 집중되고 있고, 그것이 광우병이라는, 그리고 동시에 이명박이라는 ‘보수적’ 정치인에 의해 집중됨으로써, 그 복잡함이 단순해지고, 서로 상이한 내용들이 더 손쉽게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이 직접적으로 ‘FTA 반대’로 나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는 FTA 반대와 이런 불안전성의 조건의 직접적 연결고리가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보이고, 그 구호의 추상성에 필요한 매개고리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럼에도 공기업 민영화 반대, 의료 민영화 반대, 교육에서 시장적 경쟁강화 반대, 생존권에 대한 보호 장치를 철폐하는 등에 반대하는 구체적 쟁점이 제기될 때 대중들로부터 큰 이견없이 동의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은 ‘FTA 반대’의 내용 면에서 반대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구호 자체의 모호성이 가져오는 문제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3. 헌정적 위기요소들과 정치적 주체로서 대중
현상황에서 헌정적 위기의 요소들이 확산된다는 것은 그 쟁점이 1987년의 연장선 속에 있고, ‘1987년 정세의 자유주의적 포섭과 그 균열’이라는 문제가 다시 터져나온 정세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7년의 정세에서 대중의 요구는 표면적으로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여덟 글자로 집약되었다. 그러나 그 구호의 이면에 깔린 대중들의 요구들이 곧바로 직선제 개헌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중들의 불만과 저항의 뿌리는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독재체제가 만들어낸 포괄적 측면들에 대한 것이었으며, 대통령 선출방식으로 협소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중들의 구호의 이면은 그보다는 훨씬 더 다면적인 요구들을 담고 있었고, 그 요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상화할 것인가에 대해 대중 스스로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정세였다. 그 87년 정세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것은 6월항쟁이 6.29로 끝맺음한 것이 아니라, 7,8,9 대투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이고, 또 그것이 1991년 정세에서도 유사하게 폭발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6월이 7,8,9로 이어졌다는 것과 더불어서, 그렇게 넘어가면서 어떤 문제들이 좀 더 분명해지지 않았던가 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우리는 현 시점에서 다시 사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87년의 정세는 ‘대중들의 해방은 대중 스스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대중들의 정치를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린 계기였고, 그런 점에서 1980년의 연장이었다. 물론 실제적 과정은 그 ‘자유주의적 포섭’이라 할만한 ‘대의제’로, 즉 ‘대중들 스스로’의 의미가 대중들의 투표를 통해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것이 부족하다면, 일부 NGO적 매개를 통해서라는 방식으로 협소하게 해석되면서 그 더 폭넓은 가능성이 봉쇄되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는 ‘헌법1조가’가 애창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라는 가사, 그리고 신문에서는 ‘우리가 바로 시민이다’,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제목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교과서에나 있었을 ‘인민주권’이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으로 공론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예된 1987년의 효과이다.
특히 이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총체적 무능력을 노정하고 있고, 그러다가 정말로 이 정권이 무너지고 대통령이 하야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대중들의 ‘공포’를 배경으로 하여, 더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뒤를 돌아보면, 야당이라고는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사기꾼들 뿐이고, 진보적 정당은 사분오열되어 있고, 아직도 ‘대중들의 정당’이라고 여겨질 수는 없는 상황에서 이 문제가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쇠고기 협상과 대통령 불신임에 대한 국민투표도, 국민소환제의 등장도 아니다. 그것이 일정하게 정치적 효과가 없을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더욱 근본적인 부분에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주권자일 수 있고, 우리는 어떻게 시민일 수 있는가?’, 현재와 같은 국가의 헌정적 위기의 확산 속에서.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보편적 정치이념을 확대해 나갈 수 있을까?
문제는 대안적 집권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가 집권을 하던 후퇴시킬 수 없는 대중들의 민주주의의 최저선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우선적 조건은 앞서의 ‘불안전성’의 해결에 놓인다. 그것은 인민의 생존권의 포괄적 보장일 것이고, 고용의 불안전에 시달리지 않을 권리, 차별없이 교육받을 권리, 성적/인종적 차별받지 않을 권리, 평화를 누릴 권리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을까?
4. 삶의 공간의 변혁에서 출발하는 연대
우리는 2008년의 상황과 1987년 상황의 가장 중요한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87년은 각종 조직화가 시작되는 기점, 또는 이미 시작된 조직화의 노력이 분출하는 계기였다. 학생은 학생대로, 각종 직장은 직장대로, 지역은 지역대로, 조직화가 시작되었고, 1987년 정세는 각자의 공간에서 조직화의 성과가 광장으로, 다시 광장의 집회에서 촉발된 고양된 정치적 열기가 자신 공간에서의 새로운 조직화와 영향력의 확대로 이어진 바 있다. 그러나 2008년의 정세는 아직까지 광장의 열기는 광장에 남아있고, 삶의 각종 공간은 이 광장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인터넷으로 대단한 열기가 집중된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무정형적으로 시청앞이라는 공간에만 쟁점을 집중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런 점에서 인터넷은 실질적으로 서로 다른 조건에 처해있는 ‘운동들의 운동’이 되지 못하고, 그 운동들을 소통시키는 공간으로도 충분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1987년 정세로 돌아가서 볼 때, 1987년 6월 정세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나타난 것은 7,8,9월이고, 그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그 후 몇 년간 ‘노동해방 앞당기는 전노협’이라는 구호와 더불어서 진행된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1987년의 대중적 고양의 정세가 귀결한 일정한 ‘조직적, 제도적’ 실천의 형태인데, 그 핵심적 특징은 대중들 자신의 주체화 조건의 근본적 전화를 개시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주체화 조건의 재생산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시작점에 운동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광장에서 생활공간으로는 서로 괴리된 것이 아니고, 앞서 이야기 했듯이, 광장이 소통과 연대, 그리고 정세적 집중점의 장소라면, 삶의 공간은 그 정세의 과잉결정 하에서 작동하는 구체적 변혁의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한데, 실제로 대중들의 재생산 조건이 변화하는 곳은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광장의 모임을 단순히 흩뜨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공간에서의 조직화와 재생산 조건의 변화의 시도가 광장의 모임과 결합될 때 촛불집회의 파괴력과 집중력이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럴 때 이는 일종의 중앙권력의 외양상의 과도한 집중성에 대한 대안을 형성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포스트-1968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것을 미시정치적, 욕망의 정치학으로 해석하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 대중정치의 함의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말이다. 1968년은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대부분 실패했고, 그것은 집권세력을 끌어내리지 못하였거나, 끌어내렸더라도 다시 유사한 세력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라하는 프랑스에서조차 그랬다. 그러나 68년의 의미는 다른 곳에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리케이트가 거리에 설치된 단일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거리의 바리케이트의 이편과 저편을 적과 동지로 나누고, 그 바리케이트를 넘어서 깃발을 꽂음으로써 싸움이 끝날 수 있다는 환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 때이다.
대신 바리케이트는 다수로 존재하고, 그것은 특히 삶의 공간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것은 교육제도에, 작업장에, 그리고 가족제도에 있다. 그리고 그것의 변혁은 대중들이 스스로 해방적 주체가 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그러나 바리케이트들은 단순히 분산되어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다. 동시에 이렇게 분산된 바리케이트는 국가를 매개로 강력하게 집중된 효과를 발휘한다. 국가장치는 그 바리케이트들을 위계적 배치 속에서 재편하고 재생산한다. 그래서 또한 운동들은 분산됨으로써만 성공할 수도 없고, 집중됨으로써만 성공할 수도 없다.
여기서 몇가지 조건들이 서로 맞물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삶의 공간에서의 변혁을 위한 노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조건들이 없이는 곤란함을 겪을 것이며, 그럼에도 이런 삶의 공간들 속에서의 변혁을 위한 시도가 없다면 대중들을 정치의 주체로 만들려는 인민주권의 시도의 내용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주의할 점은 그 조직적 형태들이 정세적 유효성을 넘어서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5. 경계를 넘어선 연대
그런 점에서 촛불집회는 아직 넘어서야할 수많은 경계들이 있고, 이 경계들을 넘어설 때 비로소 연대의 조건을, 그리고 해방적 주체의 탄생이 가능한 조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대중들이 느끼는 분할선이 ‘안전’ 대 ‘불안전’이라면, 거기에 연대하기 시작하는 고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불안전한’ 지위에 놓인 사람들이 누구인가. 비정규직, 그리고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한 정도로 이주노동자이다. 그럼 촛불집회의 목표는 그 참석자들이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라고 선언할 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모호하게나마 등장한 ‘인민주권’적 계기는 그 가능성과 한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광우병 소고기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서로 맞물린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
그럼 이주노동자는? 이주노동자는 엄밀하게 말하건 대충말하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아니 국민까지 바랄 것도 없이,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존재 자체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 대한민국 국민이 광우병 소고기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으면, 이주노동자는 그럴 권리가 없는 것인가? 아니라면, 어떤 근거에서 그런 권리가 있는가? 이주노동자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그래서 주권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자신이 처한 삶의 불안전함에서 출발하여 연대하여 공동의 싸움을 해나가지 않을 때 자신이 거리에 나온 이유인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전함도 극복될 수 없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해방의 조건이 자신의 해방의 조건이 된다는 오래된 평범한 구호를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경계를 넘어서려는 고민스러움이 없는 단순한 축제에 머물려 할 때, 해방의 계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해방의 계기는 고통스러운 자기 전화의 과정이고,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인 당연스러움의 경계를 뒤흔드는 것이다.
작게는 차도와 인도 사이에서, 침묵과 외침 사이에서, 체포 위험과 기피 사이에서, 기존의 헌정구도와 스스로 만들어 가는 헌정의 구도 사이에서, 낯설은 노동자운동에 대한 거리감과 그에 대한 연대의 감정 사이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낯설음과 연대의식 사이에서, 이런 경계들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고민 위에서 비로소 타인의 해방의 조건을 자신의 해방의 조건으로 삼는 계기들이 탄생한다. 광장과 시위는 대중들을 스스로 고민에 빠져드는 주체들로 만들어 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소통하고 조건을 전화하는 실천으로 다시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지, 카타르시스를 통해 원점으로 되돌아 가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지도’라는 것이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대중들을 이끌어 가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대중들이 이미 알고 있지만, 넘어서기를 꺼려하는 그 지점에 문제를 집중함으로써 대중스스로 그 경계들을 깨고 넘어서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해방의 계기들을 마련하려 하지 않고, 대중 스스로 낯설음보다는 편안함 속에서 (다소의 우려감을 가지면서) 안주하려고 하는 것을 추종하려 할 때, 그런 ‘지도의 방기’는 결국 대중의 탈정치화로 나가는 길을 닦을 뿐이다.
2008.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