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공공성’복원을 위한 일 제언
전복당한 ‘행위’개념 되살려 ‘시민적 공론정치’ 활성화해야

채진원(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1. 이명박정부 취임 6개월 그리고 한가지 의문
이명박정부 취임 6개월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대통령 국정철학에 대한 직간접적인 쓴소리가 적지 않다. 48.7%로 당선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의 경우도 한때 10%대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 하나같이, 이른바 ‘CEO형 경제대통령 리더십’과 ‘MB노믹스’라 불리는 ‘경제(시장)만능주의노선’이 대한민국의 공공성을 파괴하거나 위협하고 있다는 우려들이다.

이같은 우려는 이미 시민들의 촛불시위로 점화되었고, 촛불은 현재 진화(進化)중에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사회적 파급력을 가지며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부정책 전반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특히 촛불을 경험한 시민들은 어느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가치아래, 촛불이 물, 전기, 의료, 공기업의 사유화에 맞서 민주공화국의 공공성을 지키는 시민운동으로 진화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쯤에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 국민들 전부는 아니지만, 48.7%의 유권자 다수는 지난 17대 대선에서 ‘경제(시장)제일주의’와 ‘CEO형 리더십’으로 중무장한 이명박후보를 선택했는데, 거꾸로 촛불국면에 와서 다수의 국민들은 왜 ‘공공성’위협을 이유로 이대통령의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할 정도로 지지를 철회했는가? 하는 점이다.

즉, 국민들은 17대 대선당시만 해도,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이명박후보를 국가의 대통령으로 뽑아놓고 이제 와서는 거꾸로 공공성의 이유로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같은 유권자들의 ‘비일관적으로 보이는 행위’를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같은 질문은 결국 국민들이 생각하고 있는 ‘경제와 공공성(정치)의 관계’속에서 ‘정치의 공공성’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2.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그리고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그리고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란 개념정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미국의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H. Arendt)의 지적이 적격이다.

그는 먼저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labor)과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로 나누고 거기서 최고의 것을 '행위'로 위계지웠다. ‘행위’는 고대 자유시민의 삶의 양식으로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개성을 드러내면서 ‘자유’(freedom)를 느끼는 즉, ‘인간됨’(human)을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정치적인 것)를 뜻한다. 그리고 ‘행위’ 밑에 있는 ‘노동’과 ‘작업’은 고대의 노예와 장인의 삶의 양태로, 먹기 위해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형인 노동적 동물(animal laborans)과 이윤을 위해 삶을 소비하는 제작인(homo faber)의 삶의 행태(behavior)를 상징한다. 즉, 타인과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삶을 노예화(수단화)하거나 이를 정당화하는 ‘도구적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아렌트는 오직 ‘행위’만을 인간적인 것으로 존대하였는데, 그것의 속성을 ‘인간의 다양성’(plurality)으로 파악하였다. 즉, ‘정치적 행위’는 1인이 다수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man이 아닌 men)의 ‘말’과 ‘행위’가 소통되면서 열리는, ‘공감된 세계’(공적영역)속에서의 '공동행위'를 말한다. 바로 그러한 공동행위의 장이 그리스의 ‘폴리스’였으며 로마의 ‘공화국’이라는 것이다.

자유시민이 공적영역에서 ‘정치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적인 것’(the private)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적인 것이란 시민 개인의 ‘가정경제’(oikos)의 일로, 주로 노예와 여성 등에 의한 ‘생식’과 ‘노동’의 공간을 말한다. 다시말해서 자유시민들은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초월하여 인간됨을 표현하는 ‘정치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공적인 것, (가정)경제적인 것=사적인 것으로 단순화되었던 고대세계의 개념쌍 구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기초한 국민경제국가로 전환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핵심에는 ‘사회적인 것’의 등장(the rise of the social)이 있다. ‘사회적인 것’이란 ‘자본-임노동 관계’의 전면화로, 과거 사적인 영역에 속해 있던 경제가 근대와 더불어 국가적 차원에서 공적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역사적 과정을 지칭한다. 즉, 사적이었던 경제행위가 ‘사회적인 것’(the social)으로 공적인 관심을 획득한 것을 말한다.

공적영역에 ‘사회적인 것’이 침투함에 따라 나타난 큰 변화는, 분명했던 공(公)과 사(私)의 경계가 무너짐으로써, 결국 진정으로 ‘공적’이고,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던 것이 공적인 관심에서 멀어지고 망각된 점이다. 그 결과 인간 최고의 가치였던 ‘정치적 행위’(action)가 자본-임노동이라는 경제 및 계급논리에 밀려 ‘노동’(labor)과 ‘작업’(work)에 비해 후순위로 전복되었다. 그것에 따라 의견의 다양성을 기초로 드러났던 공적영역의 가치가 축소되고, 그 대신에 ‘정치적 다양성’을 부정하는 하나의 획일화된 관점과 표준화된 척도가 그를 대신했다.

따라서 ‘현대의 정치’는 다양한 사람들이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드러내면서 공론장이 펼쳐지는 '행위'(action)가 아니라 ‘노동’(labor)과 ‘작업’(work)의 속성에서 나오는 목적달성을 위한 ‘합목적인 도구적 행위’(계몽, 동원)로 변질되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공학’(즉, labor와 work의 정치적 버전)으로 전락했다.

특히 정치공학의 대표적인 예로, ‘맑스주의’가 자본의 폐해를 ‘노동’으로 대체함으로써, ‘행위’를 최고의 가치로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 즉,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정치행위’가 ‘노동’의 속성(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행위)으로 환원됨으로써, 결국 정치적 다양성과 개성을 계급과 이념의 정체성으로 환원하고 획일화하는 ‘전체주의’를 주조함으로써, 공적영역을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 정치공학속에서는 인간됨이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이같은 ‘정치공학’으로는, 사회적인 것의 전면화에 따라 축소되고 망각된 ‘공적영역’을 복원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대안으로 ‘말’과 ‘행위’로 인간됨을 드러냈던 자유시민들의 ‘행위’개념을 현대에 되살려 공적영역과 정치적인 것을 복원할 것을 촉구한다.

3. 어떻게 할 것인가?
이상으로 아렌트의 개념을 기초로 볼 때, 지난 대선에서 다수의 유권자들이 이명박후보에게 투표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핵심에는 다수의 시민들을 경제적인 노예로 전락시키는 비정규직 문제 등 경제양극화와 빈부격차를 우선 해결하여 시민의 정치적인 삶을 누리게 해달라는 강력한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촛불시위에서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그의 정책노선이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자립과 거리가 멀다고 인식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치의 공공성’ 즉, ‘정치적인 것’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미 맹아는 출현했다. 촛불시위에서 시민들은 다양한 가치아래 축제광장을 보여주었고, 대안으로 ‘민주공화국’을 제안하였다. 다만 민주공화국을 “민주”의 측면에서 권력의 출처로만으로 해석하지 말고, “공화”의 측면에서도 적극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공화”는 공화국의 정체성으로 공화주의(republicanism)로 표현된다. 공화주의는 시민적 미덕(civic virtue)을 구비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공공복리의 실현에 공헌하는 혼합체제로 곧 공화국(republic)을 말한다. 따라서 공화국의 존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본요소는 ‘시민적 미덕’이다.

공화국은 ‘시민적 미덕’으로 운영되는 정치체제다. 시민들이 미덕이 있을 때, 시민들의 정치참여의 자유가 실현된다는 점에서, 그 미덕은 바로 적극적 자유(freedom)와 동의어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공화국의 존립기반인 정치에 참여하는 유덕한 시민이 실제 국민으로 존재해야 한다. 즉, 공화국 시민들이 경제적 불평등과 종속관계로부터 벗어나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공화국이 신자유주의적 경제불평등 체제 도입을 위한 ‘도구적 정치공학’을 포기하고, 정치영역에 침투해오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익정치’를, 공공성의 시각에서 심의할 수 있는 ‘시민적 공론정치’가 부활될 때, 가능하다.

둘째, 공화국의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 부패란 공적영역에 사적인 이해관계가 침투하여 공(公)이 사(私)로 대체되어 공이 파괴된 상태를 말한다. 정경유착과 권언유착의 고리를 끊고, 튼튼한 방어벽을 설치해야 한다. 공기업을 민주적으로 규제하고 재벌왕국 등 경제시스템 전반을 공화국 체제에 부합하는 민주적인 소유지배구조로 바꿔야 한다.

셋째, ‘정치적 공론장’을 꽃피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제도정치권에 대한 시민사회진영의 감시․견제활동을 더욱 활성화하고, 그 방식에서도 ‘정치적인 것’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즉, 정치권에 만연되어 있는 ‘정치공학’과 ‘엘리트적 활동방식’ 및 ‘이익정치’를 ‘소통적인 공론정치’로 바꾸도록 ‘토의민주주의’를 선보일 필요가 있다. 특히, 엘리트가 독점했던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을, 시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개방하고 분권화하여 돌려주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