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에서 드러낸 어느 노조간부의 고백에 대한 코멘트
채진원(2008.10.22)
<차례>
1. 어느 노조 간부의 고백
2. 시민의 다양성과 노조원들의 획일성
3. 노조원들은 시민들의 다양성을 가질 수 있을까?
4. 어떻게 할 것인가?
1. 어느 노조 간부의 고백
지난 2008년 6월, 이명박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광우병이 의심되는 쇠고기수입조치에 시민들의 의문과 다양한 의견 및 참여로 개화되었던 촛불시위가, 마침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라는 새로운 ‘시민권력’컨셉을 발견하게 되어 ‘시민적 공론장’으로 최절정으로 진화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촛불시위에서 시민들이 내뿜는 다양성의 향연과 카니발적 열린공간에 매료되었던 어느 노조간부는 고뇌했다. 마침내 그 노조간부는 ‘시민이 가진 다양성, 노조원은 왜 없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노조원들의 ‘다양성부족’을 노동운동이 직면한 한계로 고백하는 놀라운 통찰력과 성찰을 보여주었다.
그 어느 노조간부는 공공노조의 신세종부위원장이며, 그의 놀라운 통찰력은 “시민이 가진 다양성, 노조원은 왜 없을까?”라는 글로 레디앙(7.29)에 소개되었다. 그의 놀라운 통찰력은 다음과 같이 다시 살아나 많은 이들의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들은 자발성을 확산시키고 있고, 그 자발성이 50차 촛불집회를 이끌고 왔다. 동원되지 않은 촛불, 조직되지 않은 촛불, 다양성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모인 촛불. 이것이 정답이고 이것이 배후이다.
이러한 다양성과 자발성은 창조성을 끌어냈다. 5월 24일 이전까지 촛불집회를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손피켓의 문구들, 그 재치발랄함과 창의성들. 내로라하는 명연설가들을 뛰어넘는 재치로 대중을 압도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발언들.
번호표를 나누어 주어야만 집회가 진행될 만큼 몰려드는 자유발언자들.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구호, 새로운 선전물들. 사진기를 들고 피켓만 찍으러 다녀도 지칠 정도로 집회 자체가 생기 넘쳤다.
그런데 우리 노동조합은? 잠시 우리(노동조합)의 집회와 비교해 보자. 집회의 목적에 대한 (때로는 치열하기까지 한) 토론, 조직지침 하달, 조직 동원, 틀에 박힌 집회(민중의례, 십수 년째 비슷한 사람들의 항상 똑 같은 발언,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 민중가요 부르기, 공연 한 토막, 결의문 낭독).
이제는 선전전조차 동반하지 않고 시민들에 대한 홍보방송조차 하지 않는 따분하고 무의미한 행진, 그 과정에서 조합원 대부분이 빠져나간 후 진행하는 마무리 집회…… 너무 심하게 표현했지만, 그래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노동자도 국민이고, 시민이다. 아니 노동자가 국민과 시민의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국민과 시민에게 있는 다양성이 왜 우리 조합원들에게는 없는 것일까?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민주와 자유, 노동해방과 진보를 부르짖는 우리들이 한편으로는 또 다른 획일주의를 양산해 오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던 것은 아닐까?
국민과 시민에게는 있는 자발성이 왜 우리 조합원들에게는 보이지 않을까? 그 자발성을 끌어내지 못한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덧 조합원들조차 길들여져서 자발성을 잊은 지 오래된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창조성도 없고,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서로 악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상의 고백글에서 신세종부원장이 제기한 질문은 우리에게 네 가지를 해명하거나 이론적으로 검토해 볼 것을 촉구한다. 첫째, 시민이 가진 ‘다원성’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둘째, 시민들이 가진 다양성을 갖지 못하는 노조원들의 ‘활동’은 무엇으로 개념정의 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셋째, 노조와 노조원들도 시민이 가진 다양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여부이다. 넷째, 노조와 노조원들이 다양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모색일 것이다.
2. 시민의 다양성과 노조원들의 획일성
신세종부원장이 제기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찍이 신부위원장과 같은 비슷한 고민을 해온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한나 아렌트(H. Arendt)라는 미국의 정치학자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아렌트는 먼저 인간이 살아가는 ‘활동적 삶’의 모습을 ‘노동’(labor)과 ‘작업’(work), 그리고 ‘행위’(praxis: action)로 세가지 나누고 거기서 최고의 것을 '행위'로 위계지웠다. ‘행위’는 고대 자유시민의 삶의 양식으로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개성을 드러내면서 ‘자유’(freedom)를 느끼는 즉, ‘인간됨’(human)을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정치적인 것)를 뜻한다.
그리고 ‘행위’ 밑에 있는 ‘노동’과 ‘작업’은 고대의 노예와 장인의 삶의 양태로, 먹기 위해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형인 노동적 동물(animal laborans)과 이윤을 위해 삶을 소비하는 제작인(homo faber)의 삶의 행태(behavior)를 상징한다. 즉, 타인과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삶을 노예화(수단화)하거나 이를 정당화하는 ‘도구적 행위’를 말한다.
다시말해서, 아렌트는 인간이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신진대사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이를 구하기 위한 일(예, 사냥, 식물채집)을 ‘노동’으로 생각하였고, 일(활동) 가운데서, 직접적인 신진대사와는 다른, 보다 항구적인 물건을 만드는 일(예, 기계생산, 도시건설, 사회제도화)을 ‘작업’으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아렌트는 오직 ‘행위’만을 ‘인간적인 것’으로 존대하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속성을 ‘인간의 다양성’(plurality)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즉, ‘행위’ 곧 ‘정치적 행위’는 1인이 다수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man이 아닌 men)의 ‘말’과 ‘행위’가 소통되면서 열리는, ‘공감된 세계’(공적영역)속에서의 '공동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그러한 공동행위의 장이 그리스의 ‘폴리스’였으며 로마의 ‘공화국’이라는 것이다.
자유시민이 공적영역에서 ‘정치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적인 것’(the private)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적인 것이란 시민 개인의 ‘가정경제’(oikos)의 일로, 주로 노예와 여성 등에 의한 ‘생식’과 ‘노동’의 공간을 말한다. 다시말해서 자유시민들은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초월하여 인간됨을 표현하는 ‘정치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공적인 것, (가정)경제적인 것=사적인 것으로 단순화되었던 고대세계의 개념쌍 구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기초한 국민경제국가로 전환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핵심에는 ‘사회적인 것’의 등장(the rise of the social)이 있다. ‘사회적인 것’이란 ‘자본-임노동 관계’의 전면화로, 과거 사적인 영역에 속해 있던 경제가 근대와 더불어 국가적 차원에서 공적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역사적 과정을 지칭한다. 즉, 사적이었던 경제행위가 ‘사회적인 것’(the social)으로 공적인 관심을 획득한 것을 말한다.
‘사회적인 것’의 등장으로 가정에 묶여있는 노예들과 여성들이 '근대적인 임금노동자'로 해방되었다.
하지만, 사회적인 것의 등장에 따라 공적영역의 구조에도 변동이 찾아왔다. 즉, 공적영역에 ‘사회적인 것’이 침투함에 따라 나타난 큰 변화는, 분명했던 공(公)과 사(私)의 경계가 무너짐으로써, 결국 진정으로 ‘공적’이고,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던 것이 공적인 관심에서 멀어지고 망각된 점이다.
그 결과 인간 최고의 가치였던 ‘정치적 행위’(action)가 자본-임노동이라는 경제 및 계급논리에 밀려 ‘노동’(labor)과 ‘작업’(work)에 비해 후순위로 전복되었다. 그것에 따라 의견의 다양성을 기초로 드러났던 공적영역의 가치가 축소되고, 그 대신에 ‘정치적 다양성’을 부정하는 하나의 획일화된 관점과 표준화된 척도가 그를 대신했다.
따라서 ‘현대의 정치’는 다양한 사람들이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드러내면서 공론장이 펼쳐지는 '행위'(praxis: action)가 아니라 ‘노동’(labor)과 ‘작업’(work)의 속성에서 나오는 목적달성을 위한 ‘합목적인 도구적 행위’(계몽, 동원)로 변질되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공학’(즉, labor와 work의 정치적 버전)으로 전락했다.
특히 정치공학의 대표적인 예로, ‘맑스주의’가 자본의 폐해를 ‘노동’으로 대체함으로써, ‘행위’를 최고의 가치로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 즉,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정치행위’가 ‘노동’의 속성(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행위)으로 환원됨으로써, 결국 정치적 다양성과 개성을 계급과 이념의 정체성으로 환원하고 획일화하는 ‘전체주의’를 주조함으로써, 공적영역을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 정치공학속에서는 인간됨이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이같은 ‘정치공학’으로는, 사회적인 것의 전면화에 따라 축소되고 망각된 ‘공적영역’을 복원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대안으로 ‘말’과 ‘행위’로 인간됨을 드러냈던 자유시민들의 ‘행위’개념을 현대에 되살려 공적영역과 정치적인 것을 복원할 것을 촉구한다.
이같은 아렌트의 ‘노동’(labor)과 ‘작업’(work), 그리고 ‘행위’(praxis: action)와 그것들이 그려내는 세계를 놓고 비춰볼 때, 신세종부위원장이 던지는 첫째, 둘째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답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시민의 다양성이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시민이 가지는 ‘다양성’은 인간의 활동적 삶 중에서 최고의 것인 ‘행위’(praxis: action)의 속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개성을 드러내면서 ‘자유’(freedom)를 느끼는 즉, ‘인간됨’(human)을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정치적인 것)를 뜻한다.
특히, ‘정치적 행위’는 1인이 다수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man이 아닌 men)의 ‘말’과 ‘행위’가 소통되면서 열리는, ‘공감된 세계’(공적영역)속에서의 '공동행위'를 말한다. ‘행위’가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행위’(praxis: action)가 목적-수단에 얽매이는 도구적인 속성을 가진 ‘작업’(work)과는 다른 ‘목적 그 자체’를 추구하는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다면 노조와 노조원들의 노조활동은 무엇이며, 어떤 속성을 갖는가? 아렌트의 시각에서 보면, 작업(work)에 해당한다. 즉, 노조가 노동자의 사회경제적인 이익과 권리를 도모하기 위한 주목적으로 탄생했고, 노조지도부의 노력들이 대체로 노조원들을 계몽(교육)하거나 조직화하기 위한 ‘목적의식적 활동’을 기본축으로 한다는 점에서 분명해지듯이, 노조활동은 목적-수단관계에 들어온다는 점에서, 작업(work)에 해당한다. 그것의 특징은, 목적달성을 위해 집단적(집합적)이고, 조직적(효율적)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행위'(action)와는 다르다.
특히, 노조의 집단활동이, 시민 한사람 한사람의 다양한 개성과 자유로운 의견을 통해 공론을 형성하기보다는 다양한 개성을 ‘임금노동자’라는 속성으로 환원하여, 노동자들간의 평등성과 집단적 통일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노조활동에서는 ‘획일성’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3. 노조원들은 시민들의 다양성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자유시민들이 해왔던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일까? 즉, 노조원들은 ‘획일성’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일까? 노조원들도 ‘시민적 다양성’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역시 아렌트를 통해 들어보자.
아렌트는 노동운동에 대해 이중적으로 독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praxis: action)로 구분한 것에 조응하는 영역으로 경제적 노동운동인 노동조합운동(trade-union movement)과 정치적 노동운동(the political labor movement)으로 나누어 그 차이를 비교하였다.
즉, 아렌트는 노동(labor)을 정치적인 행위(action)와 구별되는 ‘반(反)정치적인 것’(antipolitical)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근대사회로 통합되는 노동계급의 이해와 사회적 특권을 변호하고 싸우는 ‘노동조합 운동’을 작업(work)의 영역으로, 즉 정치적이지도 않고 혁명적이지 않은 ‘비(非)정치적인 것’(unpolitical)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렌트는 1848년의 프랑스혁명에서 1956년의 헝가리 혁명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노동계급이 노동자의 사회적, 경제적인 극단적인 요구의 문제를 해결한 ‘경제․사회적인 노동운동’이 아니라 오로지 ‘새로운 정부형태’(a new form of government)의 형성을 통해 공적 자유를 드러낸 사례가 있다는 점에서, 그것만이 ‘정치적인 노동운동’이라고 판단하면서 전자와 구별하여 ‘행위’(praxis: action)이라고 하였다.
아렌트는 1871년 파리꼬뮌을 자코뱅당이 시도했던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비교하여 그 차이성을 부각하고 있으며, 그 차이성을 “혁명의 목적이 자유(freedom)이고, 반란의 목적이 해방(liberation)”이라고 구분하여 자유와 해방의 의미를 차별화하고 있다.
이같이 구분하는 이유는 해방(liberation)은 인간 삶의 필연성의 영역인 노동(labor)과 작업(work)에서 빚어지는 빈곤과 전제정 등 필연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freedom)는 행위(praxis: action)가 발현되는 공적 공간에서의 자유와 공적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는 해방 속에서 내포된 ‘개인적 자유'(liberty)가 아닌 동등한 사람 사이에서 공동행위와 공동권력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공적 자유(public freedom)를 말한다.
아렌트가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자유’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보았던 이유는 혁명과정에서 자코뱅당과 로베스피에르가 시도했던 것처럼 사회적 빈곤해결과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연적으로 인간의 다원성을 무시하는 폭력과 공포라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동원했기 때문이다.
즉, 프랑스 혁명이 초기에는 공적 자유의 실현을 위한 정치혁명을 목표로 하였지만, 로베스피에르 이후에는 사회적 빈곤문제 해결 등 시민들의 사적 자유를 위한 사회해방에 주력하여 결국 진정한 공적자유를 목표로 하는 정치혁명에는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정치혁명’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혁명 이후 헝가리혁명 이외에 대다수 현대 혁명은 프랑스혁명을 모델로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도, 이와는 반대로 자유를 위한 정치혁명의 첫 사례로 정치적 노동운동의 결과로 등장한 1871년 파리꼬뮌을 공적 자유가 실현되었던 ‘정치혁명’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아렌트는 1871년 파리꼬뮌의 경험처럼 ‘새로운 정부형태’라는 이름으로 발현되었던 ‘정치적인 노동운동’과 대칭되는 개념인 ‘경제․사회적인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노동조합은 사회를 대표하는 정치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사회개혁을 바랬다는 점에서 결코 혁명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정당’(the political parties of working class)은 거의 대부분 이해관계 정당(interest parties)이었으며 다른 사회계급을 대표하는 이익정당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비판하는 이유는 아렌트가 노동운동의 경제․사회적 동기를 부정하거나 정당의 역할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조합과 당이 “결국 노동계급의 근대사회로의 통합, 특히 경제적 보장, 사회적 위신 그리고 정치적 힘의 엄청난 성장”에 일정 부분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치적 행위가 드러나는 새로운 정치적 공간(the political space)을 창설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아렌트가 이같이 노동운동을 성격에 따라 두 가지 형태로 구별했던 이유는 인간의 경제적인 삶의 영역인 노동(labor)과 정치적인 삶의 영역인 정치행위(praxis: action)를 구별하고 있고, 따라서 ‘노동의 해방’(경제적인 것)과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자유’(정치적인 것)를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노동자의 열정은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획득한 경제적 이익을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성숙한 정치투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는 점에서 “인간으로서 말하고 행위(praxis: action)하는 유일한 조직”으로 노동운동의 정치적․혁명적 역할을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창설하는데 그 비중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다른 이익집단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기득권과 사회적 특권을 요구하고 있어 노동운동의 정치성(the political)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동운동이 1871년 파리꼬뮌,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1956년 헝가리 평의회 등의 경험처럼, 정치적 자유를 위한 정치공동체의 창설이 아니라 더 많은 임금과 여가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경제적인 이익운동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아렌트는 혁명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정부형태를 제시했던 정치적 노동운동과 혁명의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대의기구인 혁명정당의 이해와 인민들의 자발적인 결사체(파리꼬뮌, 소비에트, 인민의회, 평의회)가 대립․갈등할 경우, 인민들의 자발적 결사체가 항상적으로 패배했다”고 비판하였다. 그 단적인 예로, 프랑스 대혁명시 자코뱅당의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가 파리꼬뮌의 주체인 인민협회(popular societies)를 탄압한 것과 러시아 볼세비키당이 혁명적 소비에트를 무력화했던 예를 들고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인민들의 자발적 결사체가 실패한 이유는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근대 국민국가(nation state)와 이것의 대의제적 기반인 정당체제와 관료제의 구축 그리고 혁명정당들과 혁명가들이 평의회를 정치의 새로운 형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무시한 결과로 보았으며, 아울러 정당들이 추구한 정치가 인간의 정치행위(praxis: action)가 아니라 작업(work)의 영역에 해당하는 ‘지도’, ‘조직화’, ‘관료화’ 등의 도구적 정치행태의 만연에 있었다고 보았다.
이상으로 아렌트의 언급에서 볼 때, 노조원들은 시민들이 가지는 다원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조건적으로 1871년 파리꼬뮌과 같이, 노동자의 사회적, 경제적인 극단적인 요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제․사회적인 노동운동’이 아니라 오로지 ‘새로운 정부형태’(a new form of government)의 형성을 통해 공적 자유를 드러내려는 ‘정치적인 노동운동’일 경우에만 그렇다는 점이다.
4.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노조원들이 시민들의 다양성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크게는 세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경제적인 노동조합운동이 가지는 작업(work)의 성격상 노조원들의 획일성과 통일성을 어느 정도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작업(work)이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없다는 한계를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하에서, 조합원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개성들이 아래로부터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최대한 공론장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위계적인 노동조합의 대의구조를 수평화하고 쌍방향소통구조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아울러 조합원들의 다양한 모임이나 참여공간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둘째는 노동조합의 틀내에서는 다양한 시민성이 하나의 노동자성으로 환원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다른 틀(공간)에서 시민의 다양성이 표출되도록 다양한 공간을 제공하고 시민사회와 연대할 필요가 있다. 이 공간은 당분간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확보될 수밖에 없다.
셋째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즉, 정치적인 노동운동이 추구해야 할 모습은 이미 촛불시위가 보여줬다. 정치적인 노동운동의 핵심은 하나의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몰개성적이고 획일적인 노동자집단이 조직적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한사람 한사람이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내면서 다양한 시민들간에 소통되는 공적인 공간을 연출해내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핵심이다.
즉, 촛불시위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가치를 드러내는 가운데도, 새로운 정부형태로 시민적 권력컨셉을 가미한 ‘민주공화국’을 제안하였다. 다만 민주공화국을 “민주”의 측면에서 권력의 출처로만으로 해석하지 말고, “공화”의 측면에서도 적극 해석할 필요는 있다.
일반적으로, “공화”는 공화국의 정체성으로 공화주의(republicanism)로 표현된다. 공화주의는 시민적 미덕(civic virtue)을 구비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공공복리의 실현에 공헌하는 혼합체제로 곧 공화국(republic)을 말한다. 따라서 공화국의 존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본요소는 ‘시민적 미덕’이다.
공화국은 ‘시민적 미덕’으로 운영되는 정치체제다. 시민들이 미덕이 있을 때, 시민들의 정치참여의 자유가 실현된다는 점에서, 그 미덕은 바로 적극적 자유(freedom)와 동의어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공화국의 존립기반인 정치에 참여하는 유덕한 시민이 실제 국민으로 존재해야 한다. 즉, 공화국 시민들이 경제적 불평등과 종속관계로부터 벗어나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공화국이 신자유주의적 경제불평등 체제 도입을 위한 ‘도구적 정치공학’을 포기하고, 정치영역에 침투해오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익정치’를, 공공성의 시각에서 심의할 수 있는 ‘시민적 공론정치’가 부활될 때, 가능하다.
둘째, 공화국의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 부패란 공적영역에 사적인 이해관계가 침투하여 공(公)이 사(私)로 대체되어 공이 파괴된 상태를 말한다. 정경유착과 권언유착의 고리를 끊고, 튼튼한 방어벽을 설치해야 한다. 공기업을 민주적으로 규제하고 재벌왕국 등 경제시스템 전반을 공화국 체제에 부합하는 민주적인 소유지배구조로 바꿔야 한다.
셋째, 노조의 ‘정치적 공론장’을 꽃피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제도정치권에 감시․견제활동을 더욱 활성화하고, 그 방식에서도 ‘정치적인 것’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즉, 정치권에 만연되어 있는 ‘정치공학’과 ‘엘리트적 활동방식’ 및 ‘이익정치’를 ‘소통적인 공론정치’로 바꾸도록 ‘토의민주주의’를 선보일 필요가 있다. 특히, 엘리트가 독점했던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을, 시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개방하고 분권화하여 돌려주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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