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도, 노노갈등 아픔 경험도 | ||||||||||||||||||||||||
[우리에게 듣는 우리 역사-1] 광주 캐리어에어컨지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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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는 현재 2백40여개에 달하는 지회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조직의 규모가 크건 작건, 역사가 길건 짧건 많은 곳들이 치열한 투쟁을 겪으면서 노동조합을 지키고 발전시켜왔습니다. 우리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금속노동자>는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운동 과정에서 소중한 경험을 간직한 조합원들을 찾아 우리 지역, 우리 사업장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금속노동자>가 시작하는 이번 연재꼭지 그 첫 순서로 광주전남지부 소속 캐리어에어컨지회를 찾았습니다. <편집자 주>
“워낙 우리가 압도적이어서 회사가 함부로 못 건드렸지. 한 3개월 정도 싸울 각오를 했고 선봉대는 검도 훈련까지 하며 준비했는데 회사가 일찍 손들어 부렸어.” 당시 해고자 신분으로 이 투쟁을 준비한 곽원식 조합원(48세)은 이때를 캐리어에어컨지회 역사에서 가장 뿌듯한 경험으로 떠올린다.
물론 불법파업이었다. 당시 대우캐리어노조 단체협약에는 일방중재신청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중재를 신청하면 파업을 못하게 돼 있는 독소 조항이다. 노동자들은 회사의 중재 신청을 무시하고 단결해 싸웠다. 그리고 승리했다.
가장 뿌듯했던 96년 승리의 기억
회사는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해 부사장, 노무팀장, 생산담당 관리자를 갈아치웠다. 캐리어 노동자들은 단협의 일방중재신청 조항을 폐기시켰다. 또한 이듬해 곽 조합원 등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는 성과까지 거뒀다.
곽 조합원이 해고된 것은 지난 92년. 당시 곽 조합원을 비롯한 소위 민주파 활동가들이 위원장 직권 조인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는 이유였다. 88년 4월 결성된 대우캐리어노조는 89년 한 달간 파업을 단행하는 등 초창기부터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91년 말에는 회사가 미는 사람이 노조 위원장에 당선된다. 당시 위원장은 92년 임단협에서 노동자 요구를 외면한 채 직권 조인을 했다.
현장은 들끓었다. 민주파 대의원들과 조합원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위원장은 도망갔다. 도망가는 위원장을 붙잡아 생산 라인에 있던 조합원들 앞에 세웠다. 생산은 중단됐고 조합원들은 위원장을 꾸짖었다. 회사는 노동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각종 수당 지급을 약속하는 등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회사는 동시에 이 투쟁을 이유로 곽 조합원을 포함해 활동가 12명을 집단 징계해고했다.
하지만 해고는 활동가들을 더 단련시키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해고당한 후 출근투쟁을 할 때 조합원들이 고개 숙이며 나를 외면하데. 원망스러운 마음도 많이 들었지. 근데 한 3년쯤 지다고 나니 ‘득도’하게 되더라고. 원망도 없어지고, 무엇보다 두려움도 없어지고.” 특히 해고자들은 ‘전국 구속 수배 해고 노동자 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와 ‘광주지역해고자협의회(광해협)’ 등에서 활동을 하며 ‘전투력’을 키웠다. 곽 조합원도 이 기간 전해투 조직국장과 광해협 의장을 맡았다.
대우캐리어노조는 90년대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아래 광노협) 의장을 수차례 배출하는 등 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사업장이기도 했다. 광노협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국적으로 민주노조 결성이 붐을 이루는 가운데, 89년 광주지역 민주노조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다.
곽 조합원은 “당시 노조에서 60여명의 사수대를 꾸려 운영했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사업장이나 각종 집회 때 헌신적으로 나서곤 했다”며 “캐리어노조 조합원이라는 게 자부심이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만 있는 사업장에 사수대가 가서 현장을 지켜주곤 했는데, 눈이 맞아 연애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며 웃는다.
하지만 이처럼 잘 나가던 캐리어 노동자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이 있다. 바로 2001년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대립한 역사다. 곽 조합원은 이 시절이 “해고 때 보다 더 괴로웠다”고 말한다.
해고보다 괴로웠던 시간…2001년 사내하청 투쟁
곽 조합원에 따르면 당시 캐리어 정규직 활동가들은 서서히 비정규직 문제에 눈을 뜨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규직 노조 간부들이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사내하청노조에 가입시키는 데 팔 걷고 나서기도 했다. 잘만 하면 사내하청 비정규직 조직화의 모범 사업장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아직 조합원들까지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회사는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고용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는 뻔한 논리였다. 하지만 에어컨 제조업체인 캐리어는 성수기와 비수기의 일감 차이가 확연하다보니, 회사의 논리가 더 잘 먹혔다. 당시 캐리어노조는 이 같은 회사의 분열책동을 극복하지 못했다. 더욱이 사내하청노조가 공장 일부에서 점거파업을 벌이는 와중에 캐리어노조는 사내하청노조를 막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결국 점거농성 강제해산 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탄압에 가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2002년 1월 금속연맹 대의원대회에서 캐리어노조는 제명을 당하고 만다. 당시 캐리어노조 집행부는 곧바로 사퇴했다. 그 후 들어선 캐리어노조 집행부는 사내하청노조와 대화를 시작했고, 2003년 금속연맹 대의원대회에서 사내하청노조의 요구에 따라 캐리어노조 제명이 철회됐다.
한편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고용 방패막이라는 논리가 무색해지는 일이 2006년 캐리어에서 벌어진다. 회사가 콤프레셔 공장을 폐쇄하며 정규직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 그리고 회사는 2009년 또다시 2백80명 인력 구조조정을 밀어붙였고, 끝내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은 40명을 정리해고 했다. 노동위원회 부당해고 판결과 해고자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지난해 11월 정리해고자 40명 전원이 복직하긴 했지만, 한 때 1천명을 육박했던 조합원 수는 270여명으로 줄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과의 대립. 그리고 두 번의 구조조정. 2000년대 들어 캐리어지회가 겪은 경험은 90년대와 달리 그리 승리적인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곽 조합원은 “캐리어 노동조합역사에 많은 우여곡절과 오류가 있었더라도, 어용노조가 서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광노협 시절 치열하게 연대하고 투쟁했던 캐리어 노동자들의 경험은 쉽게 지워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광노협 치열했던 경험, 쉽게 안 지워져”
곽 조합원은 특히 “노동자들은 위기가 닥친 만큼 더 뭉치고 지혜를 발휘하게 돼 있다”며 지회 활동이 다시 지역의 모범으로 서게 될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방법은 다른 거 없다. 다시 차근차근 확실하게 내부를 준비하는 거다. 현재 곽 조합원은 지회 교육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전 조합원의 간부화’가 교육위원장으로써 품고 있는 꿈이다.
96년 조합원 100%가 참가한 옥쇄파업 때도 그랬다. 최소 3개월 똘똘 뭉쳐 싸울 각오로 준비를 했기 때문에 3주만에 이길 수 있었다. 단결된 노동자 대오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해고자와 비해고자로 갈라지면 싸움이 길어지고 결국 패배하기도 한다. 곽 조합원이 23년간 캐리어 노동자로 살면서 뼛속 깊이 각인한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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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내하청 투쟁 함께한 김대희
조합원캐리어에어컨지회에 쓰라린 역사인 2001년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투쟁 초반엔 정규직들도 함께 도왔지만, 싸움이 치열해지자 대부분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방관하거나 혹은 반대편에 섰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사내하청 노동자들과 끝까지 함께한 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었다. 16일 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대희(41세) 조합원도 그들 중 하나다. 김 조합원은 점거농성장에 직접 합류해 강제해산 과정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사내하청 투쟁 당시 무슨 심정으로 함께했냐는 질문에 김 조합원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복잡한 생각은 없었어요. 당시 어떤 영상물에서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대우차 노동자들이 경찰에 짓밟히는 모습을 봤는데, 우리 공장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 같더라고요. 아기가 물에 빠지면 부모는 자기가 죽더라도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잖아요. 그냥 그런 심정이었죠.”
당시 점거농성이 해산당한 뒤 김 조합원은 징계해고를 당했다가 1년 6개월만에 복직했다. 복직 후 술자리에서 “솔직히 복직 안됐으면 했다”는 얘기를 하는 동료도 있었다. 김 조합원은 그 얘기 듣고 “가슴을 칼로 후벼 파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김 조합원은 2009년 정리해고 대상자이기도 했다. 복직투쟁을 하다 지난해 4월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판결을 받고 같은 해 11월 복직했다. 이번엔 동료들 반응이 달랐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격려해 주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해고자-비해고자가 갈라지진 않은 셈이다. 정규직-비정규직이 대립한 아픈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김 조합원은 “회사의 인력 구조조정 시도가 현장 분위기를 위축시키긴 것은 엄연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김 조합원은 현재 지회 교육선전부장을 맡고 있다. 두 번의 구조조정 속에 얼어버린 현장 분위기. 김 조합원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역할을 강조한다. “매번 정세와 투쟁방향만 일방적으로 교육해서는 현장이 움직이기 힘듭니다. 우리는 정리해고라는 큰 산을 넘고, 매각과 대주주 변경이라는 큰 바다도 이제 막 건넜습니다. 다소 오래 걸리더라도 기초부터 다시 쌓는다는 생각으로 현재 조합원 고민에서 출발한 다양한 의제의 장기적인 교육을 준비할 겁니다.”
당장 당면한 투쟁과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조합원들이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교육을 준비하겠다는 것. 조합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투쟁과 연대가 적들에게 쉽게 깨지고 만다는 사실은 캐리어에어컨지회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