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왜 이런 글이 실리게 됐는지
앞뒤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개인 사생활까지 낱낱히 밝혀야 할 이유가 있는지
강한 의문도 솟는다.
하지만 그녀의 글에서도 표현되듯
소위 '배운년'이 하는 '여성운동'에 대한 시각을
스스로의 삶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항변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짐작해 볼 뿐이다
나는 그녀의 정치적 입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그녀의 삶은 가슴이 아프다
특히 그녀가 이혼을 결심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였던,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어린 아이를 침대에 내던지고 말았던
그 마음만은
그 분노와 슬픔과 절망만은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한두번 겪어야 했으니까
여자로서 치뤄내야 할 통과의례처럼..
최보은 - 그 페미니스트 최보은의 김규항에 대한 반론
마흔세살이 되어, 나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접는다. 나를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꼰대로, 파쇼로, 간이 탱탱 부은 인간 푸아그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계몽과 선동의 값싼 유혹을 포기하는 대신, 그저 자신을 돌아본다.
97년 12월 <씨네21>에 사표를 썼다. 기층민중인 두 번째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서였다.
배운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래서 아마도 덜 이기적일 것이라는 착각으로, 가문도 학벌도 재산도 경제적 능력도 없는 그와 결혼할 때, 나는 돈 안드는 두가지를 부탁했었다. 인간으로 대해줄 것과 몸에 손대지 말 것. 결과적으로, 그건 그에게는 너무 힘든 요구였다. 첫 애가 아직 생후 한달이 안 됐을 때, 그토록 두려워 했던 일이 일어났다. 먹고 살기 위해 나는 밤을 새고 번역을 해야 했고, 그는 저녁이면 내가 주는 용돈을 들고 볼링장에 나가 ‘퍼펙트’를 기록했다. 경제적 가장으로서 신문사를 다니면서 밤에 번역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는, 돈을 전부로 여기는 속물 여편네로 보이지 않기 위해, 돈 못버는 농촌총각이어서 마흔 다 된 나이에 중고 신부를 맞은 남편의 열등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몹시도 속 넓고 우아한 척하고 살았다. 그날 밤, 시댁에서 잠깐 데려온 아이가 몹시도 울었고 나는 지쳐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무슨 군인처럼 50분 번역 10분 휴식의 강행군 중인 나 대신, 마루에 이불 깔고 누운 그가 아이를 달래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다가 “대체 어떻게 해 달라구!” 울부짖으면서 아이를 침대에다 팽개쳤다. 그리고 뛰쳐들어온 남편의 욕설과 주먹세례와 함께 “에미 될 자격이 없는 년”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때, 너도 낮밤 없이 돈 벌면서 노는 아내 위해 밥상 차리고 아이까지 봐야 했으면, 아마 침대에다 아이 수백번은 팽개쳤을 거야, 하고 말해주었어야 하는데, 미처 그 생각을 못하고 내 부족한 모성본능을 반성하기에만 바빴었다. 나는 내 속에 주입된 남성적 시각과 그런 식으로 늘 ‘숙명적인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았다. 솎아내야 할 버릇이다.
폭력은 일년에 두어번쯤 되풀이되었다. 그때마다 시댁 식구들을 비롯한 주변에서는 그의 ‘욱’하는 성질을 상기시키며, 그러니까 내가 좀 더 조심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어머니는 둘째인 남편 출산 전 임신 8개월 때 시아버지의 발길질로 유산을 한 적이 있다고도 하셨다. 그래도 참았으니 이렇게 노년에 부부지간에 의지하며 외롭지 않게 사는 것 아니냐고 하셨다. 그 맹랑한 논리에 설득 당해서가 아니라, “그저 딸들에게 아빠 노릇만 해준다면” 하는 체념으로, 두 번째 이혼은 생각하기도 싫은 내 비겁과 상처를 덮어버렸다. 좀 더 잘 살아보기 위해 월급 백만원도 안되는 신문사를 때려치우고 프리랜서 번역가 일만 1년 반 하다가, 영어만 봐도 먹은 게 올라오는 증상이 심해질 무렵, 나를 아끼는 여자선배와 여자동료의 부름으로 회사에 재입사를 결정했다. 남편은, 집에서도 돈 벌 수 있는데 나돌아다니고 싶어 취직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주 ‘마땅치 않아’ 했다. 시댁동네 여자들, 새벽에 일어나 소똥 치우고 여물 주면서도 불평불만 없이 사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일 하면서 뭐가 그리 힘들다고 엄살이냐고 했다. 아마 내가 ‘나른하게’ 보였을 것이다.
한창 몸과 마음이 힘들어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몽환적인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친구의 성화로, 유능하다는 정신분석의와 마지못해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빨리 나와서 쎄라피를 받고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운명이 딸들에게 대물림된다고 했다. 소름이 끼쳤다. 내가 갖지 못했던 아버지를 딸들에게 주기 위해 참고 사는데, 그렇게 참고 사는 모습이 결국 참고 사는 운명을 딸들에게 대물림하게 되는 거구나, 깨달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이들 버릇없이 키운다고 코뼈에 금가도록 맞은 김에, 정신병원을 찾는 대신, 이혼을 결심했다.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는 내가 “아이들을 팽개치고 직장을 다니는,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는 여자”이기 때문에 두 딸을 줄 수없다고 했다. 그 날로 직장을 때려치우고 네돌, 세돌도 안 지난 두 딸을 끼고, 사흘동안 드러누웠다. 봤지? 나 직장도 그만 뒀지? 그러니 제발 이혼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래도 못해주겠다고 했다.
결국, “절대로 양육비를 요구하지 않겠다” “재혼할 경우 아이들을 돌려준다”는 각서를 쓰고 아이들 데리고 이혼하는 데, 그로부터 3년이 걸렸다. 2001년 2월 마침내 도장을 찍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나는 주변의 아는 여성들로부터 대대적인 축하를 받았다. 여자들끼리 모여 앉아 남편들 싸잡아 씹는 ‘한국식 한풀이’도 했다. 정신적 대모인 김선주 한겨레 논설위원은, 친구인 조선희는 자기들도 돈 쥐뿔도 없으면서 마이너스 카드를 긁어서 내 셋집 얻을 돈을 대거 보탰다. ‘마초 흉내’를 낸 거다. 나는 그 ‘마초 흉내’를 통해 생물학적 여성들의 ‘숙명적 우애’ 관계를 실감했다. 혹시나, 이 기층민중남성과의 결혼실패담이, 부르조아 중산층 인텔리 여성의 ‘급진주의의 극단적 통속화’라고 비난 받는 빌미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르조아! 말이라도, 배가 부르다. 두 번 이혼하면서 우아한척 잘난척 하느라고 알몸만 챙겨갖고 나온, 직장에서 떨려나면 당장 딸 둘과 밥 굶어야 하는, 무늬만 중산층 부르조아의 신분증 제시를 이럴 때 요구받는구나.
김규항이 나를 뭐라고 딱지붙이건 상관 없지만, 앞으로는 최소한 ‘팩트’에 근거한 비판을 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김규항이 나를 ‘주류’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었던, 몇 됫박이나 되는지 몰라도 그런 ‘큰 영향력’이 내게 있었다면, 서구 급진 페미니즘 이론을 수입해가며 배운년 티내고 잘난척 해서가 아니라, 우아 안 떨고 내 치부를 까발리며 ‘매맞는 아내’로 커밍아웃한 데 대한 격려와 정서적 연대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지식수입상 ‘밥맛 없어’한다. 그냥 얘기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내용을 꼬부랑 이름 들이대면서 잘난척 하는 짓, 정말 밥맛 없어한다. 그러니 내 글을 몽땅 뒤져서 내가 수입한 서구 페미니즘 이론을 한 줄이라도 찾아내주기 바란다. 나는 열씨미 밥벌이 하면서 남는 시간 틈틈이, 내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여성들과 나눌 교훈을 찾는, 자생적 페미니스트다. 그래서 장바닥의 쌈닭 여편네처럼 말이 조금 거칠고, 말이 거칠다 보니 ‘도발적’이라거나 ‘엽기적’이라는 평도 가끔 듣는다. 혹시 그런 어법이 내 주장을 ‘급진적’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이유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김규항은 내가 쓴 여성주의적 글들을 탈탈 털어서, ‘여성해방을 인간해방과 별개로 진행한다’는 강령을 내세운 ‘급진적’인 주장이 무엇인지 제시해주기 바란다. 있다면 아마도, 가장 최근 내가 <말>지에서 주장한 ‘박근혜 연대론’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90년대 이후가 아니라 2천년대 초반에 비주류인 여성운동 내부에서도 ‘비주류 단독자’인 자생적 페미니스트의 자생적 급진주의라고 말해야 맞다. 지자체 선거와 대선을 쌍으로 맞은 정치의 계절에 ‘여풍’은 솎아낼래야 솎아낼 수도 없게 씨가 마른, 여성정치가 아예 의제가 되지 못하는 현실을 주시하다가, 평생 지배 이데올로기의 방사능을 쐬고 산 나머지 토막시체가 된 내 여성성을 성찰하다가, 나름대로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박근혜를 여성의 눈으로 보자” “여성이 여성을 찍자”는 얘기를 한 거였는데, 수입했다는 걸 보니 서구에서도 이미 그런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ㅋㅋㅋ. 하긴 여기나 거기나 여성의 삶이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일 테지.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냅두더라도, 그게 그렇게 급진적 주장이라면 근거를 들어 비판하면 될 일이다. 아니, 이미 사방에서 벌떼와 같이 들고 일어나 온몸이 벌집이 된 상태라서, 굳이 ‘나비’처럼 우아하게 지켜보던 마초들까지 '벌'처럼 쏴주겠다고 나설 필요는 없을 것같다. 내 발언이 여성민우회에서, <이프>에서, 지역단위 여성단체에서, 오로지 여성주의의 신념 하나로 차비도 안되는 돈받고 배 곯아가며 몇 년씩 때로는 일이십년씩 버텨온 페미니스트들에게 누가 된다면, 그것은 전략전술 개념없이 머릿속에 생각 떠오를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탓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분들로부터 야단 맞고 싶다. <말>지 인터뷰에서, 이미 나는 ‘배우겠다’고 말했다. 평생을 여성단체에서 헌신하고 지금은 여성민우회의 공동대표가 된 윤정숙씨를 <한겨레21> 대담 때문에 만나게 됐을 때, 그가 웃는 얼굴로 나를 기꺼이 껴안아주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여성계의 반응으로 미루어, 맞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프>. 좋은 직장 마다하고 6, 70만원 월급에 만족하며 비주류매체의 팔자를 기꺼이 감당해온 그들이 왜 나하고 나란히 ‘그년들’ 월드컵 스타팅 멤버로 뽑혔는지 모르겠지만, 한번에 한년씩만 상대하는 게 어떠냐고 ‘그 새끼’에게 물어보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기왕 가르는 김에 그들과 나도 확실히 갈라보라고. 말이 나온 김에, ‘그년들’이 실명이면 ‘그놈들’도 실명이어야 하고, ‘그년들’의 어감상 ‘그 새끼들’이 더 맞는 단어 짝이라는 걸 굳이 가르쳐주어야 아나 싶다. 사실, 이 글은 그가 맥락에도 안맞게 현란하게 늘어놓은 단어들의 바른 용법을 가르쳐주기 위한 용도로도 쓰여졌다.
휴, 이게 다 <씨네21>이 잘 팔리는 탓이다. 내가 창졸지간에 주류 페미니스트가 된 것도, 김규항이 'B급 좌파'가 된 것도. 그가 스스로 자신을 세상만사의 전지전능한 판관으로 임명하고 차제에 페미니즘의 로컬 심판 노릇까지 하겠다고 나서든말든, ‘최보은 죽이기’가 ‘좌파남성 최초의 페미니즘 비판’의 유효한 전략이라고 계산하든 말든, 내 마음은 그저 배 지나간 낙동강이다, 말발 서지도 않는 물건, 일개 사단으로 지나가라구 해라, 이러면서 유유히 흘러간다. 김규항의 두 글은 읽고 화도 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도 정말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바보 된다고 남들이 하도 그래서, 밥벌이도 바빠 죽겠는 월말에 이러고 앉아 있다. <씨네21>은 참 공평하다. 김규항의 그 두 글이 두쪽 분량이라고, 나한테도 두쪽 지면을 내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경우가 병주고 약주는 경우가 아닌가 모르겠다. 물론 주최쪽의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씨네21/3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