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의 궤변
- 탄핵무효화를 주장하며 노무현을 심판할 수 있나?
김성구 (한신대 교수) 읽음: 626
작성일: 2004년03월16일 15시44분01초
민주노총은 3월 12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에 대해 탄핵은 무효라고 노무현 지지 같은 첫 성명을 냈다가 이를 철회하고 보수부패정치 청산이라는 새 성명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새 성명에는 보수부패정치 청산에 더해 노무현정권의 심판도 내걸었는데, 이런 수사 하나 첨부한 것으로 민주노총의 입장이 바뀌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탄핵무효화와 보수부패척결을 요구하는 '범국민행동'에 버젓이 들어가 활동하면서 탄핵무효 주장을 삭제하는 것은 얄팍한 눈가림에 지나지 않는다.
탄핵무효화를 요구하면서 탄핵에 찬성한 수구부패정당을 총선에서 심판하자는 '범국민행동'의 선전은 곧 열린우리당에 표를 결집해서 탄핵 당한 노무현을 정치적으로 재신임 하자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평범한 시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시민단체들이 노리는 점도 이것이다. 그런데 막상 조직노동자를 대표한다는 민주노총은 이 단순한 관계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결정이 정치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른다.
민주노총은 노사모나 시민단체들과 달리 보수부패청치 청산뿐 아니라 노무현정권 심판도 요구하고 있고 총선에서 진보정치를 실현하겠다고 주장하지만, 탄핵무효화를 요구하는 '범국민행동' 전선에서 노무현 심판의 목소리는 결코 나올 수 없다. 탄핵을 무효화해서 노무현의 대통령 권한을 회복시키자고 하면서 어떻게 노무현을 심판하자고 하는 것인가? 이는 민주노총의 궤변이고 자가당착이며, 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민주노총내의 협조주의적 경향의 발로일 뿐이다.
탄핵과 총선 정국에서 진보진영에 핵심적인 문제는 보수부패정치 청산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청산이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사회의 파국적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보수주의 정당과 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전의 김대중-민주당과 지금의 노무현-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 노선이며, 또 한나라당과 보수주의도 정치적으로 노무현-열린우리당과 사활경쟁을 하고있지만 신자유주의라는 공통의 기반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선국면의 핵심 요구는 탄핵무효화와 보수부패정치 척결이 아니라 노무현 탄핵과 열린우리당 심판이어야 한다.
이렇게 '탄핵무효화인가 노무현 탄핵인가'는 노사모-열린우리당-시민단체 대 한나라당-보수파간의 중심적인 쟁점일 뿐 아니라 그와 다른 차원에서 민주노총-진보진영 대 자유주의-보수주의 진영간의 중심 쟁점을 형성한다. 보수부패정치 척결은 그에 비하면 부차적인 요구이다. 이 때문에 진보진영에서 노무현 탄핵 주장이 혹시라도 한나라당-보수파의 주장과 맞아떨어지고 결국 한나라당을 이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가 제기될 수 있는데, 이는 논쟁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이다.
진보진영의 노무현 탄핵 주장은 보수파의 주장과 상이한 효과를 창출하며, 일차적으로 자유주의와 부차적으로 보수주의 양자를 모두 조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만 민주노총은 진보정치의 지지자들과 동요하는 자유주의 지지자들을 진보진영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또 동시에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모두를 심판할 수 있다. 설령 동요하는 자유주의 지지자들의 일부가 한나라당 지지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려해서 한나라당과 보수정치를 표적으로 삼는다면, 민주노총은 열린우리당을 위해 총선에 개입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시민단체들과 자유주의 세력은 대통령탄핵이라는 국면을 빌미로 하여 보수주의 지배로의 회귀냐 아니면 자유주의 정부의 유지냐 하는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후자의 선택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런 선택을 강조할 수도 없고 또 강조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민주노총은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항해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전개해 왔고 반신자유주의 대안과 독자적인 진보정치를 모색해 왔기 때문이다. 대통령탄핵 국면을 이유로 해서 이제와 보수주의에 대항해 자유주의를 지지한다고 하면, 외환위기 때와 같은 엄중한 국면에서 반김대중-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역사는 무엇이고, 지나간 두 번의 대선 때와 같이 대권이 걸려 있는 중대한 국면에서 보수주의와 이회창을 심판하기 위해 김대중-노무현을 밀었어야지 왜 권영길을 내세웠나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런 선택은 민주노총의 역사와도 모순된다.
이번 총선에서 진보진영의 선택은 일단 단순하다. 즉 탄핵무효화를 요구하고 한나라당 심판과 노무현 재신임을 선전할 것인가, 아니면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고 열린우리당 심판과 노무현 불신임을 선전할 것인가. 전자에서 진보정치는 자유주의 정치에 묻혀 총선국면에서 소진될 것이고 후자에서는 자립적인 운동공간을 확보하고 활성화를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탄핵무효화를 요구하고 한나라당 심판과 노무현-열린우리당 심판을 주장하는 민주노총의 개입방안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대중 기만이고, 이는 결국 전자로 귀결되는 안이다. 요컨대 핵심은 탄핵무효화가 아니라 탄핵심판이다. 민주노총과 민중연대가 진정으로 노무현정권을 심판하고자 한다면, 탄핵무효화를 주장하는 범국민행동에서 즉각 나와야하고 노무현 탄핵을 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