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1999.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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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없는 지식은 오히려 위험하다"

정세권 | 출판편집팀
<b><강내희 운영위원(중앙대영문과교수)과의 인터뷰></b>

<font color="#336699">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신지식인운동을 보면, 학력에 관계 없이 자신의 지식을 개발하고 발굴하는 사람들을 신지식인이라고 한다. 어쩌면 기존의 지식인, 지식사회에 대한 반편향으로써 나온 것이 아닌가라는 지적이 있는데요. </font>

그건 '지식인'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라는 것과 연관이 있다. 신지식인운동이 말하는 지식인은 근대사회에서 요청해 왔던 것과는 다른 형태라고 생각한다. 근대사회의 지식인은, 사회적 특권을 누리던 권력자들의 전횡에 맞서, 다수대중에 대한 부당한 억압과 배제에 항거하던 사람들이다. 지식인에게는 기본적으로 비판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설령 자기 개인은 사회에서 기득권층에 속할 수 있다 할지라도 대의를 위해서, 다수인의 권익을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다. 소수의 권력행사와 폭력에 대해서 저항하고, 또, 교육기회가 적어서 자신의 의견을 발언할 수 없는 다수대중과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다.


<font color="#336699"> ● 그렇다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신지식인은 어떤 개념입니까?</font>

지식인은 아까도 말한대로 기존의 권력구도그 자체를 깨거나 개선하려는 사람이다.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올바르게 바라보고, 정당하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일을 자청하고 하려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지식인말은 지식인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보기에는 지식인이라는 개념을 쓸 필요가 없이 어떠한 분야의 전문가이다. <신지식인보고서>를 보면, 어떤 분야에 지식을 활용하여 부가가치를 능동적으로 창출하는 사람들을 신지식인이라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와 지식인은 엄연히 다른 개념 아닌가?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전환시키는 역할을 지식인이 한다면, 전문가에는 그러한 윤리적 의무가 부여되지 않는다. '신지식인'이 자신이 일하는 방식을 '계승'하고 혁신시키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계승·혁신시킨다는 것과 변혁은 다른 것이다. 전자는 권력구도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기존의 구도가 더 잘 작동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지식인은 그 구도를 그대로 두고 더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노하우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신지식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혹은 옛날의 지식인에 대한 비판으로써, 그러한 말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현존 권력구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지식인이라고 볼 수 없으며 신지식인이라는 용어는 잘못되었죠.


<font color="#336699"> ● 선생님이 말씀하신 '지식'이라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요? 지식의 종류에도 전문적인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신지식인운동도 그 추상성에 대한 반경향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font>

음, 지식인상이 '추상적이다'라는 말은, 현재 지식인의 사회적 발언이 그만큼 미온하기 때문 아닐까? 신지식인 담론이 나온 것도 그런 맥락일꺼고. 사회가 바뀌면서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식인의 역할이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변화를 통해서 지식인의 상이 다시금 정립될 필요가 있다. 곧장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려스럽다고 할 수밖에.
이럴때는 신지식인류가 아닌 지식인의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불평등한 사회관계가 존재하는 한 기존 지식인의 사회비판적·대안적 저항은 여전히 필요하니까.
지금까지 말했던 지식인상을 보편적 지식인-보편적 이익을 대변하고 싸우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최근 들어와서는 아주 특수한 영역이지만, 그 영역의 변화로 말미암아 사회전체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복제양 돌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기존과는 새로운 고민을 모두에게 강제한다. 이때 복제양 돌리를 만든 사람은 보편적인 이익을 위해서 싸운 사람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류 전체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을 '특수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특수지식인은 신지식인과는 다르다. 예를 들면 나는 보편적 지식인이다. 그렇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대학의 문제를 바꾸려는 하려 한다. 대학 내의 비생산성을 고치고, 민주화를 통해 공공성을 높임으로써 대학의 사회적 생산성을 높이는 일에 앞장선다면 나 역시 특수지식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특수 지식인과 신지식인과는 다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떠한 영역에서 돈을 잘 벌거나, 그 영역이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만드는일 아니라, 그 영역의 권력구도를 바꾸어 내면서 인류를 '위한' 순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영역이 '사회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 영역자체도 건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신지식인은 그런면과 관계 없이 시장에서 통용되는 부가가치를 높이기만 하면 된다. 즉 상품성을 높이기만 하면 된다. 지식의 상품성을 높이는 것은 지식의 사회적 성격을 높이는 것과는 관계 없는 일이다. 물론 기존의 지식인에 대한 비판중에 경청할만한 것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정화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수지식인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지식인이 추상적이라는 비판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font color="#336699"> ● 사회생태계라는 말이 조금 생소하게 들리는데요. 자세하고 설명해 주시죠.</font>

자연생태계에는 실패와 성공이 없다. 물론 서로 다른 종들이 경쟁을 통하여 생존하는 것은 마차가지겠지만. 하지만 그곳에서의 경쟁은 공존을 위한 것이다. 자연생태계에서 어느 한 종이 완전히 없어지면 먹이사슬이 파괴된다. 경쟁이라는 개념은 생태계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지.
그렇다면 이러한 원칙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로 그대로 옮겨보자. 신지식인에는 '경쟁'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지만, 대신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이 개념은 자본주의적이다. In-put에 비해서 Out-put을 최대한 높이겠다는, 투자는 최소화하고 그 효과는 최대화 하자는 이야기이다. 이는 다른 말로 수행성을 높인다는 것이지.
이때 말하는 수행성이란 생태론적으로 보는 수행성도, 사회비판적인 견지에서 보는 수행성도 아닌 '자본에 대한 투자가치를 높이자는 수행성'이다. 얼마나 더 많은 돈과 권력을 만들어내는가, 이것이 목적이다. 여기서 통용되는 원칙은 '성공해라'라는 논리이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소수일 수밖에 없다. '신지식인'으로 포장된, 성공한 사람만이 바람직한 인간형으로 취급된다면,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은 실패자이자 사회적으로 무능력자로 취급되어도 문제가 없어진다는 것이지. 결국 신지식인이 말하는 부가가치 창출, 혹은 그 결과로서의 성공은 다수 힘없는 사람들의 소외와 배제를 낳을 뿐이다.
이것이 곧장 사회생태계의 파괴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거 아닌가?


<font color="#336699"> ● 질문을 바꾸어 보지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지식인' 그러면 사회상층부로 여겨집니다. 사회상층부에 대한 불만 혹은 지식인에 대한 반감이 이번 '신지식인운동'의 배경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font>

지식인을 상층부로 여기는 거.. 그건 그동안 지식인들의 잘못이 많기 때문일 것 같다. 지식인이 지식인다운 역할을 하지 않아서 지식인의 개념에 대한 혼란, 오해, 몰이해가 생겨나는 것 아니겠는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지식인이다'라는 생각들... 이 문제는 교육을 통해서 사회의 불평등구조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균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현실적 조건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상층이 되고, 이는 또다시 부와 교육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신지식인운동은 기존의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교육을 많이 받고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일수록 더 나쁜 일을 많이 한다'는 관념이 있고, 또한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지식인을 부정하는 듯 하면서도 또다시 잘못된 상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지식인은 '지식인의 부패와 타락을 정상화'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이 부패하면 '부패한 지식인'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논리는 역설적이게도 부패하고 타락한(그래서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는) 지식인 중에서 잘 나가는 모델을 따르자는 것이다.
지식인의 타락된 모습을 신지식인이라고 포장, 대안라고 제시하는 것은 지식인에 대한 혼돈만 양상할 뿐 진정한 대안으로서 작용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지식인계층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사회에서 요구를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font color="#336699"> ● 지식인에 대한 반감뿐만 아니라 환상도 가지고 있쟎아요? 계급상승욕구처럼... 서점에서 신지식인에 대한 책이 잘팔리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구 생각하는데요?</font>

그렇다. 지식인에 대한 환상을 가지면 안된다. 지식인에 대해서 과대평가할 필요도 평가절하할 필요도 없다. 지식인이면 지식인이다 아니다만 말하면 되는 것이다. 유능한 농부를 굳이 지식인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런 표현은 지식인을 과대평가 하는 것이다. 농부인데 유능한 농부라고 하면 그만 아닌가? 그 자체로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평가를 해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사람을 '신지식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해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그래야만 사회적으로 더 높게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지식인'이라는 말에 오히려 지나친 가치부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서 이상한 논리가 작용한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지식인을 불신하고 평가절하면서, 자신들이 보기에는 괜찮다 싶은 사람에게는 지식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양자는 서로 모순되는 것 아닌가? 신지식인론자들은 '기존의 지식인의 개념에 사농공상의 개념이 녹아 있다'고 비판을 하면서 오히려 그 개념을 다시 그들의 논리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가당착 아닌가?


<font color="#336699"> ● 지식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감정 중 또다른 건 '자신의 삶과는 떨어져 있다'라는 느낌 아닐까요? 특수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서 공감은 하지만, 그것이 실제 민중의 삶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그 또한 지식사회 내부로 침잠할 수 있지 않나요? </font>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다양한 영역에서 운동을 하는 지식인이 있지 않나? 환경문제, 지역문제, 그리고도 아주 많을 것이다. 지식인들의 이러한 활동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스크린쿼터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영화배우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런데 심광현교수 같은 사람들이 성명서를 낸다던가, 지식인으로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분석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다자간 투자협정, 양자간 투자협정의 문화 현안을 분석하고 전략을 어떻게 세울까도 고민하고,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을 세우는 역할이 지식인의 몫이다. 지식인의 역할은 '정당하다고 보이는 집단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역사발전의 주체인 노동자의 편에 서서, 이들을 탄압하는 소수 집권자를 비판하고 데모할 때 같이 참여하고, 그런 것이다. 그때에도 지식인은 노동자는 아니다. 지식인 고유의 위치에서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지식인들이 많지는 않다는데 있다.


<font color="#336699"> ● 신지식인운동이 말하는 고부가가치의 창출을 위한 '지식의 생산성'이라는 것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font>

효율성과 생산성은 지식생산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것이 가치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지식인이라는 개념을 가져올 필요는 없다. 지식의 효용가치와 생산성, 생산방식에 변화가 있는 마당에 인간의 지식·노하우가 사회적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때문에 지식인의 비판적 성격이 희화화되면 안되는 것이다.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 '미친 과학자 '이야기가 왜 많이 나오겠는가? 능력있는 과학자가 미치면 세상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공포가 있는 것이다.
부가가치를 높이고 지식활용의 방식을 개선하여 성공한 사람을, 우리 지식의 모델로 삼는 것은 '성공한 사람만이 좋은 사람이다'라는 논리와 마찬가지다.
딴지일보와 인터넷 포르노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이 있다치자. 우리의 기준에서는 딴지일보를 더 높이 평가한다. 그것은 인터넷을 활용하고 돈을 벌수는 있지만, 어떻게 활용하였는가의 문제이다.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해도, 윤리적이지 못할 수 있지 않은가? 성공과 생산성을 기준으로 하면,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다.


<font color="#336699"> ● 결국 지식의 윤리를 지적하시는 거군요.</font>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건 중요하다. 그래서 아까도 전문가의 필요성에 동의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식인이라고 표현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식 혹은 지식인이라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이를 바꾸려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소수 집권자에 의해 유지되는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 단순히 개선이 아니라 다수대중을 위한 구조로 변혁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식과 지식인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어쩌면 지식·지식인의 윤리이며, 변해서는 안되는 본질이다.

신지식인운동은 이러한 윤리와 본질을 외면하는 것 아닌가? 아니 왜곡한다. 사회가 변했기 때문에 지식도 그에 맞게 생산성 중심으로 변해야 한다는 논리일 뿐이다. 하지만 이는 가진자, 소수의 이데올로기이다. 존재하는 권력구조를 온조히 유지하는 것, 나아가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지식'개념을 호도하는 것이다. 말했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인에 대한 '환상'과 '반감'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마지막으로는, 상층중심의 지식인·지식사회의 문제이다. 자기정화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상층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어느 사회이든, 엘리트는 없앨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엘리트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그 엘리트를 만들어내고 통제하는 방식, 엘리트를 활용하는 방식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올바른 엘리트를 만들어내지도 못하지만,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방식도 없다. 사회제도를 통해서 엘리트가 된 사람들은 사회개혁을 위해 살아가는 엘리트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개인의 노력만으로, 좋은 조건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형성된 엘리트가 사회구조의 개혁과 변혁을 고민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상층만을 위해 움직이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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