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1999.8.2호
첨부파일
17문제와시각.hwp

[문제와시각]내가 누군지 왜 알려고 해?

정세권 | 출판편집팀
'니키타'라는 프랑스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니나'로, 홍콩에서는 '블랙캣'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한 영화다. 범죄현장에서 검거된 여주인공을 사회적으로 사망자 처리한 후, 정부 특수기관에서 살인기계로 훈련시켜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줄거리이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 주인공이 자신을 훈련시킨 상사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등지고 평범한 사회인으로 돌아간다는 어쩌면 그렇고 그런 영화이다.

미성년자 관람불가(?)급의 이 영화를 몰래 성인극장에 보고는 의구심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과연 그 주인공은 세금은 어떻게 내고 운전면허증은 어떻게 딸까? 이미 사망자로 처리되었으니, 혹시 죽는다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고 등등. 아마도 그때가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야간자율학습 제끼고 혼자 방황을 즐기던 시절. 그리고 나서 곧 주민등록증을 만들러 역시 수업을 제끼고(이때는 당당했으리라.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가는 것이었으니까) 동사무소로 갔다. 여기저기 터진 여드름을 미처 수습하지도 못하고, 커다란 안경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사진을 가져갔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열 손가락 시퍼런 인주에 비벼 지문을 꾹 찍었던 것 같다.


처음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때의 설렘.

비록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내 사진 척 하니 붙어 있고 빳빳하게 코팅되어 있던, 뒤편에는 엄지손가락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던 주민등록증이었다. 나도 이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구나. 누가 '넌 누구야?' 라고 물으면 당당하게 주민등록증을 보여줄 수 있겠구나.
그렇지만 '니키타'를 보고 나서의 의구심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프랑스나 미국, 홍콩에서는 주민등록증이 없어도, 자신을 증명할 그 무엇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나 보다.
그 물음표는 여전히 유지되었고, '지갑 분실 = 주민등록증 분실 = 나의 존재를 증명할 그 무엇이 없음' 이라는 등식을 간직한 채 아직도 살고 있다.
물론 학생증이 있기는 하지만, 일개 대학에서 발부하는 것과 국가에서 공인하는 무게감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공공기관에 들어갈 일이 있어도(그리 자주는 아니지만) 학생증은 무용지물이었으니까.


최근 주민등록증을 빳빳한 플라스틱 카드로

대체한다는 정부의 지침이 하달(?)되었다고 한다. IMF시대에 그 많은 예산을 어떻게 확충하는지 의문이지만, 또 왜 그런 쓰잘때기 없는 짓을 벌여 사서 고생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역시나 국가의 방침이려니 하는 마음에 동사무소를 가기는 갔는데…
미처 사진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순서대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나아진 대시민봉사려니 했고,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문찍는 것 역시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하다. 더군다나 그 지문이 디지털화되어 관리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문득 떠오르는 그림 하나. 편의점에서 물건값을 계산하기 위해 바코드를 찍는.
삑삑, '소주', '유통기한 X년 X월 X일', '950원'
아마 지금의 나를 찍으면,
삑삑, '아무개', '19XX년 X월 X일 태생' 'X씨와 A씨의 X남 X녀 중 차남', '고향 XX도 XX시 XX번지, 현주소 XX도 XX시 XX번지', '전과 없음', '직업 - 없음', '신용거래 - 불량' 이라고 나오지 않을까?
지문 하나로 주소와 가족관계를 비롯, 어디서 누굴 만나 무얼 먹는지, 신용거래는 어떤지까지 다 알 수 있다니? 정부에서는 이를 두고 '모범시민과 범죄자를 가리기 위하여' '불의의 사고시 신원을 확인하기 위하여'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문날인을 하지 않는 외국은 모두가 모범시민 아니면 범죄자라는 건지(정말로 모 아니면 도), 지난 씨랜드 참사 때 유아들의 신원확인은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되려 나의 몸 속에 일종의 추적장치를 달아놓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주인공에 대한 정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녀'라는 존재만 있을 뿐. 그래도 그녀는 아무런 문제없이 '혼자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영화가 아무리 지어낸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정말로 그러한 삶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지금 우리에게 지문날인과 정보공개를 강요하는 이 사회가 잘못된 게 아닐까. 내가 누군지 알아서 무엇에 쓰려 하는지. 갑자기 소름이 끼친다.
나를 감시하는 그 눈, 그 권력이.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