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5/01 창간준비3호
파견노동자 김건희 씨 이야기
직접생산 제조업에는 파견노동자를 쓸 수 없음에도 인천지역 공단에는 수많은 기업들이 파견업체를 통해서 직원을 구한다. 대부분 임금이 최저임금으로 수렴하는 공단 노동자들에게 정규직과 파견의 차이는 크지 않다. 다만 쉽게 자르고 쉽게 또 쓸 수 있는 사람들이 파견이다. 그래서 공단의 파견노동자들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회사, 저 회사를 몇 개월씩 다니다가 같은 회사에 몇 번이나 다시 들어가기도 하고 그렇게 최저임금으로 잔업 따먹기를 하는 사람들. 그렇다보니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이들은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그런데 여기 자신의 이름을 걸고 회사와 사람들 앞에서 ‘권리’를 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4만 1680원에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김건희, 권미정, 이은미 씨는 삼성에 전량을 납품하는 핸드폰 케이스 제조 회사 ‘모베이스’에서 얼마 전까지 파견직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여름휴가 기간의 주휴수당(주차)를 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계약 만료되어 회사를 쫓겨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물량감소였지만 다른 파견직들은 모두 계약 연장된 데다가 사람을 더 뽑기도 하고, 조장까지 맡고 있었던 사람을 자른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시위를 하게 된 것은 회사에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1년 10개월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회사를 위해 일해 왔다고 자부하지만 그 동안 받은 수모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아파도 병원을 못 가는 것은 당연하고, ‘이 새끼’ ‘씨발’ ‘이 닭대가리야’와 같은 욕을 일상적으로 들었고 입을 자로 때린다거나 목덜미를 만지는 성희롱도 일삼았단다. 회사에 불이 나서 경보가 울리는데도 아무도 대피하라는 말을 안 해줘서 민방위 훈련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 화장실과 세면대를 안 고쳐줘서 줄 서다가 쉬는 시간이 다 지나간다는 얘기, 저녁밥도 안 주고 잔업을 시킨다는 이야기가 서럽다.
무책임하고 더러운 회사
그 전에는 노동법에 대해서 잘 몰랐던 그녀는 모베이스에서 처음으로 회사에 당당하게 요구라는 것을 해봤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의 반응을 떠올리며 그녀는 “주차수당 달라고 했다고 우리를 자른 거 아녜요. 무책임하고, 더러워요.”고 말했다.
김건희 씨가 기억하는 모베이스는 ‘오늘 일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회사였다. 다른 회사도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모베이스는 유독 일이 들쭉날쭉했다. “물량 변동이 있더라도 그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는 청소를 하더라도 5시 반까지는 현장에 있었는데, 여기는 뻑하면 집에 가라고 하고, 사람을 잘랐어요.”사람을 몇 십 명씩 자르고, 무급으로 격주 근무를 시키다가도 물량이 많아지면 다시 알바를 수십 명씩 쓰고 급하면 새벽 2, 3시까지 일했다.
모베이스 파견노동자들은 3개월 혹은 6개월씩 계약을 하고 계약이 만료되면 자동으로 퇴사와 입사를 반복한다. 일은 계속 모베이스에서 하지만 소속된 파견업체를 6개월마다 돌려막기 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모베이스에 인력을 공급하는 3개 파견업체가 돌아가면서 퇴사와 입사를 시키고, 이 파견업체들도 때가 되면 대표와 업체명을 변경한다. 이런 식으로 파견노동자들은 아무리 오래 일해도 퇴직금도, 연차도 받을 수가 없다.
경력 1년 2개월, 24살 그녀는 고참입니다
그녀들이 일했던 모베이스 조립부는 총 80여 사원 중 관리자를 제외한 정규직은 단 2명에 불과하다. 다른 부서인 도장, 사출에서도 정규직은 80여 명 중 각각 7명, 10명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파견직이다. 김건희 씨는 2013년 2월부터 5월까지 모베이스에 다니다가 같은 해 11월에 다시 입사해서 2014년 10월까지 총 1년 2개월을 일했지만 모베이스에서는 ‘고참’이었다.
김건희 씨의 업무는 투입 검사였다. 외관 검사를 해서 라인에 빨리빨리 놔줘야 하는데 하나를 못 놔주면 수량 하나가 비기 때문에 그냥 라인에서 일하는 것보다 까다롭고 어려워서 사람들이 꺼려하는 일이다. 힘든 조건에 힘든 업무였지만 참고 회사를 다녔던 이유는 돈을 벌어야 해서가 아니라 ‘책임감’ 때문이었다.
“검사자리라는 게 나를 대신할 사람이 없어요. 너무 막 굴려먹으니까 하려는 사람도 없고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어지고. 그런데 내가 빠지면 할 사람이 없으니까 아파도 회사 나가고 그런 거예요. 제가 없으면 1명 할 일을 3명이서 해요. 그런 걸 보면 좋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해요.” 회사를 다녔던 기간은 1년 2개월밖에 안되지만 ‘고참’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했다는 그녀의 말이 참 아이러니하다.
난생처음 경험해본 ‘시위’
11월 3일, 첫 번째 유인물은 왜 이렇게 시위를 하게 되었는지 깨알 같이 쓴 손 편지였다. 직접 쓴 피켓도 만들었다. 그림도 그렸다. 그러자 놀라서 달려온 파견업체 직원이 몰려와서 피켓을 빼앗아가기도 하고, 회사는 CCTV를 설치하고 쓰레기통을 놓고 회사에 들어가는 노동자들에게 유인물을 빼앗았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응원의 문자가 쏟아지고, 유인물을 안 빼앗기려고 사람들은 받자마자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내놓지 않았다. 회사 안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이자 딸 같은 그녀들을 본 회사 언니들은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회사 주변의 청소노동자도, 야쿠르트 아줌마도 그녀들을 응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반응은 모르는 아줌만데 힘내라고 홍시 2개를 주고 가더라구요.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야쿠르트 2개, 커피, 손난로 같은 것들을 줬어요. 이런 것들 아니더라도 사실 웃으면서 ‘힘내세요’ 이 한 마디만으로도 힘이 생기고 마음이 따뜻해지더라구요.
억울해서 시작한 시위는 생계를 뒤로하고 6주 동안 매일매일 이어졌고, 현재는 그녀들 외에 다른 노동자들도 함께 불법파견 진정과 비정규직 차별시정구제신청을 진행하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용기를 낸 그녀들 곁에는 ‘인천지역 노동자 권리찾기 사업단’이 있었다. 사업단은 2012년 만들어져 부평공단 일대에서 근로기준법 감시 활동을 해 왔다.
세상은 한꺼번에 변하는 게 아니잖아요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생계도 어려웠고, 믿고 의지하던 동료가 악덕관리자로 내몰려 부당해고 당하기도 했고, 회사는 조립부 자체를 없애버렸다. 하지만 김건희씨는 “이런 경험 못 해본 사람도 많을 텐데 이런 경험도 해보고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그래도 잘 한 것 같다”고 말한다. 원래 이런 일은 맨 앞이랑 맨 뒤가 제일 힘든 거라는데, ‘하필 우리가 총대를 멘 것 같다’며 웃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회사와 맞서고 공단의 노동자들을 만났던 시간, 공단의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회사와 맞서고 공단의 노동자들을 만났던 시간, 공단의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세상은 한꺼번에 변하는 게 아닌데 나부터 먼저 실천하면 조금씩 변하는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사람들이 조금씩 바뀌어야 세상도 바뀌고 민주노총, 금속노조도 더 힘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