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건강과 사회
  • 2015/06 제5호

건강보험 국고지원 더 늘려야 한다

국고지원을 축소하려는 정부의 속내

  • 유지혁 의사
지난 2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2014년 건강보험 재정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건강보험 당기흑자는 4조 6000억 원, 누적흑자는 자그마치 12조 8000억 원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적자는 나쁜 것이고 흑자는 좋은 것이지만, 건강보험의 흑자는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재정 흑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그해 국민들로부터 징수한 건강보험료를 환자의 치료비로 알맞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이 지속적으로 흑자를 내고 있다면, 의료보장의 범위를 확대하거나 보험료를 낮추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맞다.
 

돈 없어서 병원 못 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보건복지부는 4대 중증질환과 3대 비급여 등 국정과제나 생애주기별 필수의료 보장성 강화에만 이 돈을 쓰겠다고 밝혔다. 1년에 3000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국민건강보험법 시행령을 개정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장기입원을 줄이기 위해 입원일수가 15일이 넘으면 현행 20퍼센트인 본인부담금을 30퍼센트로 올리고, 30일이 넘으면 40퍼센트까지 올리겠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건강보험 재정을 계속 누적시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질병관리본부의 <2013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병원에 가고 싶으나 가지 못한 환자의 21.7퍼센트는 경제적 이유를 그 원인으로 꼽았다. 본인부담금이 높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케이스가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 국민이 낸 건강보험료로 운영되는 건강보험은 보험료를 남겨 축적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최근 4년간 이어지고 있다. 그 때문에 정부가 흑자를 누적하는 데 숨겨진 의도가 있는지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부의 의도는 지난해 말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계획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건강보험 재정의 일부를 국가가 지원하도록 한 법률 규정이 2016년에 만료되는데, 재정지원 방식 등을 재점검 하겠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건강보험 국고지원금을 축소하려는 속셈이다. 

문제는 기획재정부의 이런 시도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보험 국고지원이 지금과 같은 제도로 거듭난 것은 2006년이었다. 국고지원 규모는 보험료 예상수입액의 20퍼센트이고 일반회계에서 14퍼센트, 국민건강증진기금에서 6퍼센트를 충당했다. 그러나 국고지원은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자 2011년 국고지원 만료를 앞두고 기획재정부는 국고지원금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국회에서 국고지원 5년 연장안이 통과되면서 2016년 말까지 건강보험 국고지원은 지속될 수 있게 되었다.
 

건강보험 국고지원은 세계적 상식

기획재정부는 국고지원 축소를 주장하며 “국민건강보험은 사회보험이기 때문에 보험료를 통해 운영하는 게 원칙”이라는 입장을 내세워왔다. 하지만 건강보장 재정 체계를 사회보험 방식으로 구축한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보험 재정에 국고지원을 하고 있고, 모두 국고지원금이 존재한다. 대다수 국가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더 높은 수준의 국고지원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일부 국가들은 최근 사회보험 재정에 대한 조세 지원을 높이고 있다. 프랑스는 1997년부터 준조세형태의 사회보장금 분담금을 건강보험 재원으로 할당하여, 2012년에는 이 분담금이 건강보험 재원의 36.9퍼센트를 차지했다. 사회보장 목적세가 건강보험 재원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크게 증가해, 2002년에는 1.63퍼센트였지만 2012년에는 12.16퍼센트에 이르렀다.
독일의 경우 2003년까지만 해도 국고지원금이 없었지만 2004년부터 조금씩 늘기 시작해 2007년부터는 재정의 일부를 조세로 충당하는 건강기금을 신설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국고지원을 시작했다. 이는 건강보험조합의 부족한 재원을 우선 충당해 피보험자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의미에서 사회조정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효율적인 의료시스템 만들려면

이렇듯 사회보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국고지원금을 유지하거나 늘리는 사례들은 “건강보험은 사회보험이기 때문에 보험료만으로 운영하는 게 원칙”이라는 기획재정부 주장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증이 된다. 정부 입장과 달리 오히려 사회보험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국가의 책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사회보험에 재정적 기여를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국가는 국민들의 질병 예방과 조기 치료에 중점을 두는 통합적 의료공급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책임도 있기 때문이다.
2009년 세계은행은 OECD 국가들을 대상으로 효율적 보건의료체계 구축과 국가의 재정 책임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소득분배 기능이 강하고 보건의료에 있어 국가책임을 강조하는 조세를 기반으로 하는 의료체계에서 의료 재정과 공급체계에 있어 국가의 책임성이 더 낮은 사회보험 방식으로 보건의료체계가 변화한 나라들에 대한 연구다. 조세 방식에서 사회보험 방식으로 옮겨간 국가의 경우 잠재수명손실연수(조기 사망에 대한 요약 측정치로 젊은 연령의 사망이 많을수록 수치가 올라간다) 지표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1인당 의료비 지출이 3~4퍼센트 증가했고, 유방암 등의 일부 질환에서는 사회보험 방식을 택한 사회의 건강수준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그 원인을 “사회보험 방식을 채택한 국가는 조세 방식의 국가에 비해 통합적 공공의료 시스템 구축에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조세 방식에서는 의료주체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기 때문에  일관성 없는 의료행위를 펼치는 반면, 사회보험 방식에서는 건강증진과 질병 예방에 초점을 맞춘 통합적 공공의료가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가 스스로 건강보험 재정에 대해 책임성을 높이면, 보다 효율적인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로 의료비 절감과 건강수준 향상이 동반된다. 이 연구 결과는 국고지원금 법조항이 만료되는 시기가 다가올 때마다 국고지원금 축소를 시도하고 있는 한국 정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건강보험 국고지원을 확대하고 법조항 명시해야

건강보험이 보험료로만 운영되어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은 틀렸다. 앞서 살펴봤듯이 포괄적 사회보험을 도입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이 국고지원금을 도입하고 있으며, 그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건강보험 국고지원 만료 시기마다 제기되는 쓸데없는 논쟁을 이제는 중단해야 한다. 

국고지원금의 기간 제한을 없애고 법조항으로 명시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국고지원금 규모도 확대해야 한다. 더불어 지금까지 미납된 8조 5000억 원의 국고지원금을 채우고, 국가가 약속한 국고지원을 미납하는 사태를 방지하는 정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를 위해 보험료 인상 결정 시기를 정부의 예산 수립시기와 통일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보다 나은 보건의료체계를 위해 정부가 할 일은 당연히도 더 많은 재정 책임을 지는 것이다. 높아진 재정 책임은 더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 동기부여로 작용할 것이고, 이러한 선순환은 국민건강증진으로 이어진다.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국가 책임을 높이는 것은 헌법에 규정된 국가의 사회보장 증진의무와 국민의 건강 권리 보장을 이행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길이다. ●
 
건강보험이 4년 연속 흑자를 내고 있는데도 정부는
입원일수가 15일이 넘으면 본인부담금을 늘리겠다는 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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