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특집
  • 2015/07 제6호

인문학의 위기와 대안지식공간의 가능성

  • 최철웅 《문화/과학》편집위원
마이클 샌델의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연세대 노천극장을 가득 메웠다.
 
 
인문학은 위기에 처했는가, 아니면 열풍의 대상인가? 상반된 현실 인식을 보여주는 이러한 물음은 오늘날 인문학이 처한 모순적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먼저 대학으로 눈을 돌리면 인문학의 위기는 자명한 듯 보인다. 대학 구조조정의 일차적인 대상이 인문계열 학과들인 데서 알 수 있듯 학문으로서 인문학의 지위는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 오늘날 인문학을 전공했다는 것은 취업시장에서 배제되고 소외될 운명임을 뜻한다. 

그러나 대학 바깥을 둘러보면 인문학은 그 어느 때보다 제 존재와 필요성을 과시하는 듯도 보인다. 정부와 기업이 앞 다투어 인문학적 통찰과 감성을 강조하고, 백화점, 문화센터, 공공기관 등지에서는 인문학 강좌가 성행을 이루고 있다.

바야흐로 ‘인문학의 대중화’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는 인문학이 전문가들의 전유물이기를 그치고 대중들 곁으로 한층 다가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인문학의 위기는 도태되어 마땅한 인문‘학과’와 인문‘학자’들의 볼멘소리 아닌가? 

우리가 인문학이라는 말로 비단 분과학문(문·사·철)만이 아니라 삶의 기예이자 교양을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과 실천을 지칭하고자 한다면, 이런 반문은 꽤나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인문학이 새로운 시대적 요청(산업적 필요에서부터 학문적 쇄신에 이르기까지)에 부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화에 젖어있다는 비판 또한 나름 수긍할 만한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니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우리가 아쉬워 할 이유가 무엇이랴?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를 인문학자들의 엘리트주의와 특권이 해체되고 지적 평등이 실현되는 지식의 민주화 과정으로 이해하기엔 어딘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다. 분과학문으로서의 인문학과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을 대비시키는 이런 유의 인식은 은연중에 인문학의 또 다른 면모를 무대에서 지우고 있다. 바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비판적 사유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도구로서 인문학의 가능성이다. 오늘날 진정 위기에 처한 것은 특정 인문학과 따위가 아니라 ‘비판의 정신’ 그 자체이다. 

대학이 인문학을 추방하려는 것은 단지 취업률이 낮아서가 아니다. 일부 구성원들이 인문학의 이름으로 대학 구조조정과 기업화에 공연히 저항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인문학을 대중화하는 것은 비판적 사유가 거세된 인문학이 오히려 지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인문학의 부족이나 쇠퇴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인문학의 변형’이다.
 

프로젝트 수주형 인문학의 범람

지난 10여 년간 대학에서 설 자리를 잃은 인문학은 대중을 찾아 점차 대학 밖으로 진출해왔다. 그 첫 번째 흐름이 수유+너머나 다중지성의 정원 등 비판적 연구자들 중심으로 자생적인 대안지식공간들이 출현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흐름은 정부와 지자체, 기업이 직접 시민들에게 인문학 관련 강좌를 제공하고 지원하는 각종 사업들의 확산이었다. 

한때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전자의 영역은 급속히 축소되는 한편, 후자는 안정적인 재정적 조건과 공간을 바탕으로 갈수록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최근 경향은 사실상 후자가 전자의 영역을 침식해 들어가고 있는데, 양자의 경계를 분명히 인식하는 이들에게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주도하는 인문학 강좌 사업의 경우 예산을 지원하고 민간단체에 운영과 기획을 위임하는 형태가 주를 이룬다. 여기서 비판적 연구자들은 정책수립과 기획 과정에 전문가로 참여하거나, 집단을 이루어 프로젝트 사업에 공모하기도 한다. 

대학 바깥으로 나간 비판적 연구자/집단들은 사회 전반적으로 비판적 학문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면서 대부분 자체적인 재생산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결국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하는 각종 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조직을 유지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가까스로 활동을 이어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최근에는 협동조합을 결성해 자체적인 조합비로 운영비를 충당하려는 시도들도 행해지고 있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를 내며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연구재단의 프로젝트 수주집단으로 전락한 대학(원)이 싫어 대학 바깥으로 탈주한 비판적 연구자들이 다시 정부지원 프로젝트에 의존해 조직과 생계를 유지해가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다.

국가와 자본의 지원을 받더라도 커리큘럼 구성의 자율성이 보장된다면 비판적 인문학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현실적으로 충족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원 사업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예술 관련 지원 사업들도 심사 과정에서 정부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크게 반영된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녹색관련 사업이, 박근혜 정부에서는 문화융성과 창조경제 관련 사업이, 박원순의 서울시에서는 사회적 경제와 마을 만들기 사업이 우대받곤 하는 것이다. 국가와 자본이 지원하는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사회취약계층을 위한 복지 및 자활수단으로서의 인문학(미혼모·탈북 청소년·교도소 수감자·노인들을 위한 인문학 등)이거나, 중산층을 위한 한가로운 교양 내지 자기계발로서의 인문학(시민들을 위한 고전 읽기·힐링으로서의 인문학·외국어 배우기 등)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인권, 노동, 페미니즘, 과학기술 등 사회에 대한 거시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을 길러줄 주제들은 명시적으로 배제되거나, 지원자들의 자기검열에 의해 우회된다. 심도 깊은 이론적 논의와 치밀한 사유를 훈련하기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보급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이다.

프로젝트 수주형 인문학들이 인문학 고유의 비판성과 정치성을 탈각시키는 것은 단지 내용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 형식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주로 강좌 형식을 취하는 인문학 사업들은 전통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통해 학습이 이루어진다. 소비자들은 굳이 강사의 권위를 존중할 필요가 없으며, 언제든 자유로이 학습과정에서 이탈할 수 있다. 강사들 또한 엄한 스승이라기보다 친근한 조언자로서 다가간다. 피교육자가 기존의 인식론적 한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주체성으로 이행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은 교육자의 지적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장기간에 걸친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전적으로 스승에 대한 전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교육의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신분석을 받으러 간 피상담자가 정신분석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어디 한번 나를 분석해봐”라는 태도를 취한다면 상담의 효과는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진정한 교육의 과정은 피교육자가 교육자에게 배울 뿐만 아니라,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는 변증법적 계기를 포함한다. 그러나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소비하는 관계에선 이 과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안지식공간으로서 대학의 붕괴와 탈환

물론 국가와 자본이 제공하는 인문학 교육이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보급하길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한 요구일지 모른다. 대중들은 고단하고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헬스장에 나가 육체적 에너지를 재충전하듯 문화센터에 들러 정신적 재충전을 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탈정치화된 교양과 자기계발로서의 인문학은 단지 대학 바깥의 특수한 영역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문학 자체의 변형을 의미한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대학 내에서도 인문학은 각 전공영역에서 밀려나 ‘교양대학’으로 묶이는 추세이며, 아예 정규 커리큘럼에서 제외해 독서프로그램 등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국가와 기업은 인문학의 의미 자체를 교양 내지 자기계발의 수단으로 탈정치화하는 담론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대학 내 비판적 지식의 생산과 유통의 조건들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중이다. 그 결과 비판적 사유와 담론에 목마른 일군의 학생들이 대학 바깥의 대안지식공간을 찾아가거나, 각종 인문학 강좌들을 기웃거리고 마는 것이다.

1980~90년대에 대학이 비판적 사유의 주된 생산과 유통의 공간일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이 제공하는 정규 교육과정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자생적이고 독립적인 지적 교류의 형식과 조건들을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선후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학회와 세미나의 형식들, 직접 생산해낸 대안적 커리큘럼과 담론, 학습과 실천을 일치시켜 나아가려는 운동의 흐름들이 있었다. 

그러한 조건들은 학생운동의 몰락과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에 의해 하나둘 파괴되었고, 탈정치화한 대학사회에서 비판적 사유는 심지어 불쾌하고 불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대학가에 팽배한 탈정치적 태도에 따르면 ‘비판’은 정치적 행위이고, 정치는 불순한 것이며, 불순한 것은 박멸되어야 한다. 비판적 태도는 아무런 대안도 없이 대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비생산적 행위이고, 기껏해야 경쟁에서 도태된 자들의 불만표출이거나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외부세력의 음모이다. 현 질서에 대한 비판 없이 대안적 사회에 대한 상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비판적 사유 자체를 거부하는 이러한 반-정치적 태도에 지배당하는 한 대안지식공간은 물론 대안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상상력도 들어설 자리는 없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인문학의 위기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불모성의 위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학은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공간이자 공유자원을 착취하는 기계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는 애초에 시민과 학생들의 것이어야 할 대학의 공간과 자원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탈환해야 한다. 대안적 지식과 삶의 교류의 장으로서 대학공간은 여전히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전장이자, 대안사회 건설을 위해 우리가 활용해야 할 긴요한 무기고가 아닐 수 없다. 

대학 바깥의 대안지식교육운동은 대학이나 지역의 자원을 전략적으로 공유·활용하면서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최대한 지켜가는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저항의 거점들을 하나둘 만들어내고, 이데올로기화한 지식과 담론을 급진화하고, 해방적 주체성을 길러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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