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테러와 같은 폭력적 저항이 내부 구성원들에게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감정적 구조


△ 권인숙/ 명지대 교수 · 여성학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뉴욕에 있었다. 가까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나는 한동안 무덤덤하게 지냈다. 텔레비전을 연결하지 않는 상태로 있었던 이유도 컸는데, 텔레비전을 연결한 뒤 나에게 쏟아질 정보의 홍수가 두려웠다. 미국이 지닌 엄청난 정보독점력이 나에게 쏟아부을 이미지에 조종당하기 싫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잘못된 외교정책에 의한 자업자득론에 솔깃해지기도 했고, ‘그동안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험하게 살았는데’라며 인근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한 나의 무덤덤한 반응을 합리화해보기도 했다.


그 무수한 ‘의미없는’ 죽음들


재미있는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꽤 많은 제3세계 친구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게 무덤덤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지척에서 3천여명이 죽어나가도 분석만 하고 있고 무덤덤을 합리화할 논리를 꽤나 가지고 있는 나나 내 3세계 친구들이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3천여명의 처참한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지도 못할 만큼 감정구조가 식민지·신식민지적 역사 갈등, 개인의 민족적·국가적 경험 등의 틀 속에 철저히 가로막혀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 하나하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감수성의 기초를 유지하기에 많은 이들의 감정은 너무 정치화됐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각종 죽음을 낳는 폭력에 대한 기준이나 생명윤리 등이 나에게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를 볼 때 그런 것을 자주 느낀다. 한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수많은 영화들을 대하면서 ‘왜 그래야지’ 하며 의문을 느낀 것도 최근이다. 007 영화나 많은 액션영화들은 한두명의 죽을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이들과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 우리는 영화를 통해 오직 '주인공'의 죽음에만 반응하고 주변 인물의 생명에는 둔감해지는 훈련을 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맨위), <태극기 휘날리며>.



<미션 임파서블 2>에서 주인공 여성의 백신을 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수수 죽어간다. 사람의 죽음이 마치 액세서리라도 된 듯 부담 없이 장식효과로 사용되는 영화는 정말 많다. 조금 더 극단적인 영화로는 네 번째 아들까지 죽게 할 수 없다는 국가적 명분 아래 행해진 <라이언 일병 구하기>다. 그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많은 미국 병사가 죽고, 여러 접전을 치르며 또 많은 적군이 죽어간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쓰러져도 관객들은 부담을 느끼지 않고, 그런 모순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국가, 어머니 그리고 그의 네 번째 아들, 전우애, 승전 등 명분 조작뿐만 아니라 관중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주인공이나 주인공이 중요시 여기는 사람으로 관중에게는 구체적 실체를 가진 그들만의 삶이 중요해진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자기 동생을 구하기 위해 정말 무수한 살인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무수한 불필요한 살인에 대해 질문하는 대신 감동적인 형제애에 주로 감동받은 것 같다. 많은 평론을 읽었지만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형제애에 대한 언급 외에 위와 같은 질문을 한 글은 본 기억이 없다.

문제는 영화 속의 이 구조가 어쩌면 우리의 현실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구조 속의 작위적 명분에 철저히 조종당하거나 별 생각 없이 동의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최근의 김선일씨 인질살해 사건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결국 테러리즘은 이렇게 정치화된 감정구조, 편리하게 조성되는 폭력의 정당성에 기반해서 성장한다. 어떤 추측에 의하면 아직도 군주제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선거를 치른다면 빈 라덴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현실에서는 다수가 이 폭력적 근본주의와 그 실행자들을 지지하고 있다.


저항폭력은 쉽게 내부 갈등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저항하여 폭탄테러 등을 하는 사람들은 폭탄이 누구를, 몇명을 죽였든 순교자로 대접받는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많은 이들이 두려워한 것은 폭력적 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 확대였다. 실제로 파키스탄의 경우 지난해 의회선거에서 이전 의회에서는 서너명밖에 안 되던 근본주의자들이 60명 이상 당선됐다. 이는 결국 많은 사람들이 9·11 테러나 스페인 열차 폭발, 김선일씨 같은 일반인 인질 살해 등을 하는 폭력적 근본주의자들의 활동 방향을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적 구성원이 아니라면 도저히 동의하기 힘든 수단들도 내부적 동력으로 쉽게 정당화하고 힘을 펼쳐나갈 수 있다. 그것은 집단 내의 많은 구성원이 공감하는 공통의 적이 존재하고 민족적 생존 혹은 침략과 저항의 카테고리가 무엇보다 우세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 윤봉길의 테러리즘은 '항일'이라는 저항의 맥락에서 순수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사실 저항집단에서 군사적 저항이나 폭력적 저항은 제일 순수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우리의 일제시대에 대한 역사 평가도 그런 면이 분명 있다. 김일성의 정통성도 그의 군대 양성과 보천보 전투에서의 승리로 확실시됐고, 윤봉길이 열사로서 누구보다 강하게 인상을 남긴 것은 폭탄 투척이라는 폭력적 테러리즘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을 보니, 윤봉길의 폭탄 투척으로 군관민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특정인과 불특정인이 같이 죽을 수 있는 폭탄 투척이라는 수단에 대해 논의해본 기억은 없다. 그만큼 집단 내적인 기준에서 테러는 더 적극적인 저항의 모습으로 평가되고, 목숨을 바친 이들의 헌신에 대한 미화는 쉽게 일어난다.

반면 수단을 윤리적 기준으로 재평가하는 것은 문제의식 자체가 발생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는 저항폭력의 명분이 저항해야 할 이유를 제공한 세력이나 집단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현실에서 자신을 자성적으로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저항수단으로 폭력이 사용되면 다른 저항의 의미는 상당히 소극적으로 때로는 기회주의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싸움의 주체가 남성이 되고 군사화되면서 결과적으로 남성적 가치만이 우세하게 된다.

폭력적 저항이 저항 형태의 측면에서 더 순수하고 적극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저항의 내용에서 순수성을 보장받고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저항폭력은 쉽게 내부의 갈등으로 전화돼서 시민전쟁화되곤 한다. 테러의 명분을 위해 아랍민족 또는 이라크 국민이라는 독자성이 강조되지만, 이라크의 경우 소수 집권파이던 수니파와 이들에 의해 엄청난 수가 죽고 하층민이 된 인구의 60% 이상을 형성하는 시아파의 갈등이 있다. 이들의 갈등은 생각 이상으로 근본적이고 복잡하고 첨예하게 진행됐고 점점 시민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실 종교적·인종적·종족적 갈등이 큰 사회에서는 싸움이 억압받는 민중 대 억압하는 미국 등의 제국주의자라는 단순 구도로 진행되지 않는다.


우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저항폭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저항폭력에 대한 비판이 내부 구성원에게 어떤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가?’와 ‘철저히 민족(종족)이나 국가단위화될 수밖에 없는 인권 개념을 뛰어넘어 개인의 인권을 위한 보편성이나 동등한 가치는 실제적으로 어떻게 찾을 것인가?’이다. 민족적 저항이나 주권 수호를 위한 행동이 절대적인 명분을 지니는 민족주의·국가주의적 담론이 팽배한 상태에서 테러리즘 등 저항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불가능하다. 이미 폭력의 내부적 합리화와 그것을 지지하는 근거적 정당성 모두를 인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폭력은 나쁜 것, 인간의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원론적이면서 내부 구성원들에게는 현실성이나 효과가 결여된 비판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민족, 주권, 국가 등 큰 패러다임에 대한 현재의 절대적 가치 규정과 함께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생명윤리는 무엇인지 고민스러워진다.




• 보복하는 대한민국이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