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꼼꼼히 읽어 보았습니다.
IMF 이후의 민주노총 주도의 운동방식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결정적으로 필자의 입장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싶은 부분은
지금까지의 민주화 운동은 '저항의 민주화 운동'에서 '참여의 민주화 운동'이었지만,
앞으로는 '성찰의 민주화 운동'으로 가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몇 가지 문제제기를 느끼는 대목을 간단히 간추려 보면,

"이제 노동운동은 이주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 등 주변부노동자를 조직하는
풀뿌리 노동운동으로의 전환과 함께 생태적 전환의 녹색운동으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생산협동조합, 소비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
협동조합운동을 비롯한 공제조합과 생활공동체운동 등 모든 조직 형태를 창조와 도전정신으로 폭넓게 모색하면서 정책과 일상생활의 실천까지
생태적 전환이라는 시각으로 재편해야 한다."

더불어, 시민운동의 기여를 고려하여 "계급운동 시각을 과감히 재검토"해야 하고, 그 운동방식 또한 새만금투쟁 때 보여주었던 '삼보일배'식의 "비폭력평화의 운동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점 또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또한, '참여의 민주화 운동'을 주장하면서 '참교육'과 '참의료'는 어디갔는지 안타까워하는 대목에서는 교육과 의료분야에서의 '참'이라는 글자의 뜻이 '참여' 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협소하게 재설정되고 있다는 데서 심각한 왜곡과 현실인식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은밀한 재정의 오류나, 자기 논에 물대기식의 오류만이 아닌, 필자의 정세인식에 대한 문제점이 드러나 있는 거죠.


여러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혹시 이 글을 가지고 집중토론한다면 좀 더 세밀한 분석을 곁들여 집중해부해보고, 문제제기했던 내용과 대안운동에 대해 우리를 '돌아보면서' 이 글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크게 하나만 지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운동을 돌아보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논의할 때
가장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필자가 말한 '성찰', 즉 자기반성일 것입니다. 그 자기반성이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반성이 아닌, 나와 너를 살리고 나아가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한 '참' 모색, '상생'의 길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그 자기반성은 자기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가는 늘 자기반성을 운동의 기본소양이라고 전제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자기반성은 운동의 기본전제이지 이것을 밖으로 연장해서 사회와 인류의 전망으로 제시했을 때는 곧바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기제로 둔갑될 소지가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반성하자, 성찰하자는 말이 지난 세기의 끝무렵과 21세기의 화두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화두가 생존이 걸려있는 피튀기는 계급투쟁의 한복판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작업현장과 투쟁현장에서의 '노사대타협'이나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노사정 대타협' 아닙니까? 이것을 필자는 '비폭력 평화의 운동방식'으로 부르고 있구요.
새만금을 살리기 위해 삼보일배를 벌였던 내공이 높은 분들(!)의
그 뜻을 모르진 않습니다. 그 분들의 의지와 신념은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그 순간에도 씽씽 돌아가는 자본의 회전력에 맞서 더욱더 강도 높아지는 불안정노동에 종사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탄압과 폭력에 대해서 어떠한 지원과 연대활동을 해 줄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 자체로 의미있는 '삼보일배'운동입니다. 그것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평가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운동방식을 앞으로 가져가야 할 대안운동쯤으로 평가하는 것은 개인적인 '자기반성'과 '사회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혼동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태운동은 우리 인류의 미래의 '참'된 삶을 그려보인다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하는 사이에도 자본의 공세는 400년 전이나 70년 전이나 오늘, 지금 이 순간이나 우리에게는 더 큰 시련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욕망을 부채질하며 투쟁의 의지와 열기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는 이 시점에 미래에 그려보는 우리 운동의 전망보다 이것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지를 먼저 고민하지 않는다면 생태운동은 '에코파시즘'이 될 것입니다.

자기반성과 이를 통한 현실의 객관적인 평가, 그리고 시급히 조직해야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계급투쟁적인 시각에서 폭넓은 연대활동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계급와해와 계급타협으로, 투쟁중심보다 평화운동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는 우리가 그렇게 비판해왔던 '타협'과 '배반'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글을 '항복문서'라 부르지요.

사족을 붙이면,
쇠파이프와 화염병은 정세가 만들어내는 효과라고 봅니다. 우리 현실은 '비동시대성의 동시대성'이 투쟁현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태일 열사가 살아있을 때보다도 더 살인적이고 억압적인 노동조건과 임금조건 속에서 목매달아 죽고 분신해서 죽고 싸우다 죽은 노동열사들이 남북노동자경평축구대회를 하고 있는, 자동화, 첨단화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노동현실에서도 수도 없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오늘날은 과격시위를 하지 말고 '평화시위, 평화운동'을 하자는 것은 국가권력과 자본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