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운동에 대한 좌익적 비판과 우익적 비판
- 사회진보연대의 박준형동지 글이네요.


박승옥의 글은 어찌보면 노동자운동의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
청할 가치가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 되어 버린 노동자운동의 문
제를 나름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상에 대한 진단/정리는 대부분 인정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실 그건
모두가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끌어내는 결론을 수용하기
는 어려운데, 박승옥이 주장하는 바의 맥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승옥은 이전에 92년 당시 전노협 위기논쟁의 과정에서 논쟁에 참여했습
니다. 당시 입장은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운
동이 전투적 임단투 일변도에서 벗어나서 주택, 환경 등 국민적 쟁점들에
착목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쟁점을 제기해야한다는 주장 자체
는 의미가 있지만 문제는, 당시의 정세에서 노동운동 위기론의 일환으로
제기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92년이 되면 전노협의 파업률, 조직률이 급
격히 하락해가는 국면이었는데, 이 때 개량주의 진영에서는 노동운동의
(파업률, 전노협 조직률 등에 있어서) 상대적 침체가 노조운동의 전투적
성향 때문이라는 비판이 전면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93년에는 전노협 선거가 있었는데,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이든 '진보적
노동운동론'이든 당시에 제기된 노동운동 위기론들의 주장을 대변한 선본
이 김영대 선본이라고 평가되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변혁적 전망을 유지
한 것이 양규현 선본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노동자운동이 임단협에만 몰입하는 것은 문제였지만, 당시
상황에서 단위사업장의 전투적 투쟁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위
한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전투성이 곧 변혁성은 아니지만, 전투성 없이
는 변혁성도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전투성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주장
들은 노동운동의 변혁이념에 대해서도 동시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었습니
다. 또한 노동운동의 위기를 전투적 조합주의에서 찾으면서 전투성 기각
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위기는 전투성으로 인한 '여론에서 고
립'이 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가혹한 탄압과 3저호황의 종결로 인한 구조조
정 공격이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전노협이 계급
적 대표성을 담보한 가운데 정권을 상대로 정치투쟁을 활성화하는 것이 오
히려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박승옥의 주장이 92년과 거의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92년과 04년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주장이
라도 그 의미는 다를 것입니다. 전투적 임단투의 한계에 대해서는 현재 시
점에서는 '정규직 노조'들에게 전노협과는 다른 비판이 가능한 시점입니
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이런 식의 비판이 가져오는 효과는 노동운동
내부의 노선적 혁신을 끌어낸다기 보다는 외부에서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침식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효과도 효과이지만 박승옥의 결론도 꼼꼼히 읽어보아야합니다. 결론 부분
에서 박승옥이 주로 인용하는 논자들은 노동연구원 최영기, 박태주, 그리
고 임영일 교수입니다.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해서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운동을 거꾸로 군사화시켜 노동조합을 전투부
대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보루 역할에서도 빠르게 밀
려나 버리게 만들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전투’는 노동운동을 일반 국민
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에게도 납득할 수 없는 정당성의 혼란에 지치
게 만들었다."

문제는 동일한데, 비정규직이든 여성노동자든 이들의 투쟁은 전투적이라
는 겁니다. 한통계약직노조의 처절한 전투적 투쟁을 기억해야합니다. 또
한 정규직 노조의 반성을 요구하는 지점이 전투성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밖에도 폭력사용의 문제, 계급개념의 문제등도 제기합니다. 폭력 사용
은 강제된 것이라는 점에서, 최근 유일하게 기획된 폭력투쟁인 작년 노동
자 대회 투쟁마저도 계속되는 정권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노동
자 운동의 '폭력'을 운운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계급개념에 대해 문제제
기 하면서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이야기하지만, 글의 중간에 보면 '사회운
동적 노동조합주의'를 박태주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에 대한 우익적 판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박승옥이 진단하는 현실은 대부분 정확합니다. 왜냐하
면 그것은 객관적 현실이기 때문에 입장이 어떻든 공유하는 내용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제기되는 결론에 대해서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그 비판은 현재의 문제에 대한 죄익적 비판이 아니라 우
익적 비판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혁신'을 부르짖으면 나왔던 민주노
총 이수호 집행부의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니다.

따라서 이러한 논쟁은, 논쟁이 촉발되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현상
에 대한 우익적 비판이 주도하는 상황이 만들어져서는 안됩니다. (이 논쟁
에 개입할 것인지는 전술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벌써부터 프레시안의 황
광우 반론과 중학교 교사의 재반론을 보면, 이 판이 뻔한 우익적 비판의
잔치가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게 됩니다.

여튼, 이러한 현실에 기반해서 좌익적 비판을 위한 논의를 운동 내에서 활
성화하는 것은 별도의 과제입니다. 우익적 비판이 여론몰이와 정권의 공격
에 힘을 받으면서 상황을 주도하는 데 맞서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주장하는 우익적 '혁신'이 아니라 좌익적 혁신의 실제 내용이 무엇인지를
대중적으로 제기해가야할 것입니다. 지난 민주노총 선거에서 유덕상 집행
부가 단지 기존이 활동방식을 옹호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던 조건은 노동
자운동 내 좌파들에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