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민주노총진단연속기고](3) - 이른바 민주노총 사태에 대하여


김승호(사이버노동대학)

민주노총이 커다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다.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택시 사업자 협회 측으로부터 수천만 원의 돈을 받아서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장인의 빚을 갚는 데 썼다고도 하고, 적금을 붇는 데 썼다고도 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나는 민주노총과 관련해서 이보다 훨씬 더한 사건이 터진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강심장이어서 그런가? 나는 겁이 많아서 감옥에도 한번 가지 않고 수십 년 간 도망만 다닌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사건에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민주노총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출범하던 1995년 11월, 나는 김영삼정권에 의해 국가전복세력으로 낙인 찍혀서 쫓기고 있었다. 정말 구멍가게에 나가, 라면 한 봉지 사먹을 수도 없었다. 김영삼정권이 철통같이 온 서울시내의 골목골목을 감시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 때 민주노총 준비위는 그러한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자신이 체제내적 존재임을 인정받고자 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민주노총 합법화 노선이었다. 그 합법화를 위해 민주노총은 많은 것을 기꺼이 내주거나 내버렸다. 그렇게 내버려진 것 가운데 하나가 노동운동가 김승호였다.


그러나 나는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그 역사적인 민주노총 출범식의 단상에 모자와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올라가 지도부에게 일일이 축하 인사를 했다. 승용차 두 대를 동원하여 63빌딩 라운지에서 출발해서 KBS 주차장을 거쳐 여의도 광장에 진입했던 것이다. 안기부 놈들은 내가 그러한 방법을 동원하여 거기까지 올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역사적인 자리에 갔고, 고 김진균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반겨주셨다. 언론노조 전영일 위원장이 내려가지 말고 단상에 같이 앉아 있자며 붙잡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그게 이제는 다 아득한 옛날 이야기들이다. 그러므로 요즘같이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를 버리고 어찌 진보나 혁명이 가능하랴? 미래에 대한 꿈이 없이 그것을 추구하기도 어렵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이 그것을 옳게 도모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역사! 그렇다. 그것이 벌써 역사가 되었구나.


민주노총은 남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시민권을 얻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것들을 내주었다. 좋게 말해서 내준 것이고 심하게 말하면 팔아 넘겼다. 민주노총은 전노협을 청산했다. 말로는 계승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기억에서조차 말살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과연 전노협 진군가를 기억하는가?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민주노총이 누구의, 그리고 어떤 투쟁의 성과 위에서 생겨났는지 잘 모른다. 아니 그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잘못 알고 있다. 전노협이 없이 민주노총이 있을 수 없다. 현총련과 대노협 또는 업종회의가 산술적으로 모아져서 민주노총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전노협-전노협은 대기업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중소ㆍ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전투적이고 변혁지향적인 투쟁의 구심점이었다.-이 수행한 전투적 노동운동의 성과 위에서만 민주노총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어찌 그 치열하고 아픈 사연들을 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처럼 전노협의 성과 위에 민주노총이 출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말로는 전노협을 계승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정신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인적으로나 그것을 청산함으로써 시민권을 얻었다. 이것은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것만큼이나 엽기적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느낀다. 이 지점에서 이른바 좌파와 우파, 노힘과 전국회의 등등의 정파ㆍ계파들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이번 사태에 접하여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좌절하고 흥분하고 있다. 사무총국 간부들이 집단 사퇴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나는 그런 움직임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한다. 민주노총을 전투적 노동운동의 구심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지와 양심으로만 무장하고서 이 어려운 자본주의 현실을 헤쳐 나가기는 어렵다. 민주노총은 원래 전투적 노동운동의 구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민주노총은 노동해방의 구심이나 혁명의 기관차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전투적, 변혁적 노동운동을 거세하고 관료적ㆍ개량적 노동운동으로 대체하는 노동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국제자유노련(ICFTU)의 지지ㆍ지원 하에서.


그리고 지금 좌파니 해방이니 하는 표현들을 즐겨 쓰는 많은 정파나 활동가들도 '천만 노동자의 희망'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민주노총의 출범에 동의하고 동참했던 것이다. 이 잘못된 출발, 잘못 끼어진 첫 단추에 다들 같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란 말이다!


한쪽 편에서는 최대한 현 지도부를 유지하려 하고, 다른 편에서는 가능하면 빨리 현 지도부를 끌어내리려고 하고.... 유지하면 무슨 수가 있으며, 끌어내리면 또 무슨 수가 있는가? '혁신'이라는 말조차 식상해서 정파적ㆍ계파적 논리에 따라 아전인수격으로 사용되고 있는 판에... 누구는 직선제가 혁신이고 누구는 산별체계가 곧 혁신이다. 그러나 어느 쪽에도 돈과 권력보다 노동과 인간을 귀중하게 여기는 인간해방의 지향과 운동적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역사는 끝났다"고 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노동과 인간의 가치는 상품과 자본의 가치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 실패 이후 자본은 내세울만한 긍정적인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자신의 명령을 따르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이런 협박에 대해 다른 대안을 갖지 못하는 한 제2, 제3의 민주노총 사태는 반복될 것이고, 민주노동운동은 더욱더 참담하게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 위기는 노동력 상품 소유자로서의 노동자, 그리고 그 상품판매자의 이익 보호에 급급하는 노동운동을 고수하는 낡은 사고와 실천으로는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의 인간해방-자본가를 닮은 인간이 아니라 자본가와 질적으로 다른 새 인간으로의 노동자의 자기변혁-은 낡은 체제가 무너지고 사회혁명이 이루어진 이후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그리고 일상적 삶과 활동에서부터 관철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한국의 민주노동운동이, 기존의 정파 혹은 계파들 그리고 거기에 속한 활동가들이 이런 역사적 과업을 짊어지고 나갈 수 있을까? 과연 이 진통을 산고로 삼고서 노동운동의 신새벽을 열어 제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