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는 돼지처럼 팔자 좋다? 속터지는 소리!
'만능 일꾼’ 주부의 할 일 무려 1555가지
품삯이 지급되지도 않는 ‘그림자 노동’이다
독일 전업주부들은 허리춤에 청소 솔 꽂고 ‘주부혁명’
영국의 여성학자는 삭제된 절반의 역사 다시 썼다
시공 달라도 똑같은 신세타령 ‘봇물’


오철우 기자



▲ 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미토 펴냄. 1만3000원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로잘린드 마일스 지음. 신성림 옮김. 동녘 펴냄. 1만8000원
주부와 돼지, 혁명을 꿈꾸다
마리 테레스 크뢰츠-렐린 엮음. 김라합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1만원



“주부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주부들은 매일 아내, 어머니, 연인, 청소부, 요리사, 간호사, 정원사, 운전사, 이벤트 진행자, 가정교사, 비서, 육아전문가, 정신과 의사, 실내장식가, 교육자, 회계사 등 1인 다역의 만능 재주꾼 노릇을 하며 산다. 즉 주부들은 엄청난 융통성과 참을성, 이해심과 시간 및 사랑을 투자한다. 그러나 이런 ‘무급 경영자’의 미래상은 처량하기만 하다.”
배우 출신인 전업주부 독일인 크뢰츠-렐린이 <주부와 돼지, 혁명을 꿈꾸다>(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서 털어놓은 폭풍 전야의 푸념이다. 그는 마침내 ‘체 게바라’를 꿈꾼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돼지 로고를 달고 허리춤에는 청소용 솔을 꽂은 채 나의 날카로운 이성과, 주부 상에 낀 먼지를 투쟁적으로 닦아낼 걸레를 무기 삼아, 일상의 밀림을 포복으로 헤쳐나가는 주부들의 체 게바라. 난 ‘주부혁명’을 시작할 거야!”


‘주부와 돼지…’ 여성 애환 발칙하게


주부는 어제나 오늘이나, 중세에나 현대에나, 그에게 떠맡겨진 잡다한 집안일로 정신없다. 스트레스는 폭발 직전이다. 오랜 역사적 존재인 주부와 가사노동이 요즘 인터넷 가상공간의 수다는 물론이고 정치사상과 역사를 통해 다시 생각해볼만한 이야깃거리를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신간 <주부와 돼지…>는 크뢰츠-렐린이 인터넷에 돼지 로고를 단 ‘주부혁명’ 홈페이지를 열자 몰려든 전업주부들의 갖가지 애환을 모아 엮은 유쾌발랄하고 발칙한 책이다. 돼지 로고는 주부와 돼지가 닮은 점들이 많아 달았다고 한다. 주부와 돼지의 닮은점? 주부들의 자조 섞인 말을 들어보면, 주부와 돼지는 모두 ‘팔자가 좋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또 대개 남편과 아이들은 집안일에 전혀 도움이 안 되니, ‘깨끗한 걸 좋아하면서도 더러운 곳에 살 수밖에 없다’, 또 있다. ‘가치를 평가절하당하고 있다’ ‘새끼들에 헌신한다’ ‘아플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억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엮은이는 돼지가 날개를 달아 날아오르듯이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주부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 <주부와 돼지, 혁명을 꿈꾸다> 책에서(일러스트레이션 이은호)



가사노동 분석서 ‘그림자 노동’


이 책이 요즘 주부들의 속 터지는 이야기를 담았다면, 최근 출간된 <그림자 노동>(미토 펴냄)은 저명한 사상가 이반 일리히가 지은, 전혀 다른 진지한 분위기의 여성 가사노동 분석서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간생활의 노동은 지불되는 ‘임금노동’과 지불되지 못하는 ‘그림자 노동’으로 나뉘어 격리돼 있다고 지은이는 통찰하면서, 그동안 정치경제학이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던 그림자 노동에 관심을 돌릴 것을 제안한다.

일리히의 주장을 들어보면, 인간생활의 고유한 가치는 19세기 부르주아가 인간생활의 자립·자존에 도전하는 전쟁을 감행하면서 파괴됐다. 남성은 지불받는 임금노동자가 됐으나, 여성은 공식적 경제학의 범주에서 제외된 가사노동자가 됐다. 남성은 자신의 고용주와 공모했다. 자립·자존의 파괴 전쟁에서 자본과 노동의 이런 결탁은 계급투쟁이라는 의식에 의해 은폐됐다.

일리히는 가사노동을 그림자 노동의 원형으로 바라보면서, 그것이 가정생활의 노동 외에 직장을 오가는 통근, 소비 스트레스, 수험생의 학습, 치료자에 대한 종속, 관료에 대한 맹종 등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바라본다. 그러므로 화폐로 지불되지 않으면서도 임금노동 체제를 뒷받침하는 그림자 노동의 영역은 날로 커지고 있는 셈이다. 옮긴이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밝히듯이, 이 책은 인간생활의 자립과 자존을 위한 ‘고유한 가치’를 없애버린 서구 산업사회 문명에 대한 비판서에 가깝다.

여성주의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 기대지 않으면서, 맨눈엔 잘 포착되지 않는 비공식 부문의 노동활동과 인간생활의 관계에 섬세한 눈길을 던지는 일리히의 사유는 새로운 관점을 던져준다.

여성 노동의 그림자는 ‘남성, 당신들의 역사’에 묻혀 있던 여성의 세계사를 본격 채굴하는 로잘린드 마일스의 저작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동녘 펴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풍부한 사료 조사와 재기 담긴 글솜씨를 통해 세계사를 다시 쓰는 이 책은 ‘여성의 일’(제7장)에서 기나긴 역사와 세계 곳곳에서 되풀이되는 여성의 가사노동을 들여다본다. 영국의 근대 사료 <가사에 대한 책>은 만능일꾼인 여성이 실제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집안을 아주 질서정연하게 정돈해라. 젖소의 젖을 짜고, 가축 새끼들을 기르고, 우유를 가공해라.…밀과 맥아를 갈아 빵을 굽고 양조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시간이 날 때 버터와 치즈를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돼지를 먹여라...갖가지 곡식을 모두 키질하고, 엿기름을 만들고…건초를 만들고 곡식을 베고, 필요할 때면 남편을 도와 거름수레나 똥을 나르는 손수레를 채우고….” 그리곤 ”벌어들인 돈과 지불한 돈을 잘 계산해서 남편에게 보고해야 한다.” 사료에 나타난 ‘아내가 해야 할 일’은 무려 ‘1555가지’였다.


여성의 세계사 ‘최후의 만찬…’


이 책은 여성이 태초와 선사시대, 그리고 중세·근대·현대에 이르는 세계사에서 언제나 그림자처럼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들을 하나하나 들춰낸다. 여신의 시대와 남근의 도전, 여러 여성 위인들에 대해 잘못 각색된 역사들, 혁명과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전투를 이끈 여장부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뭇 여성들의 삶을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는 일은 흥미롭다.

세상의 절반을 지탱하면서도 그림자의 존재로 살아온 아줌마와 주부는 이제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세계 역사에서 그들이 걸어온 굳건한 발걸음에 대해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당당하게 더욱 자주 발언해야 할 때다. 아줌마와 주부를 진지하게 바라보기를 낯설어하는 한국사회에서도.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