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APEC이다
- 빈곤과 폭력의 세계화에 맞서 대안세계화로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금융이 주도하는 오늘의 세계화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의 일반화된 발전이나 세계인민의 생활조건의 개선과는 하등 상관없는 약탈적 체계다. 자유시장-자유무역을 기치로 1990년대 이래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공간은 미증유의 규모로 확대되었지만 수많은 나라와 지역은 심각한 부의 파괴를 경험했다. 세기말 아시아의 충격에 뒤이은 아프리카, 러시아(및 일부 동유럽), 라틴 아메리카의 연쇄적 위기,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미국과 서유럽으로의 자본집중은 세계화가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과정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특히 반공-발전주의의 해소 이후, 제3세계에 대한 일반화된 발전모델은 폐기되고 대신 신흥시장으로 육성된 일부 국가들의 선별적인 포섭과 나머지 국가들의 배제(심지어 절멸)가 위계화된다. 냉전 이후 세계화의 안정성 유지를 자신의 사활적 이익으로 정의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도 고강도(MD/핵태세)-중강도(지역강국에 대한 선제공격옵션)-저강도(대테러/마약) 전쟁으로 세분화되며 이미 '열전(hot war)'으로 접어든지 오래다. 때때로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명 하에 제시되는 대안 역시 지속가능한 세계화를 위한 궁여지책일 따름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반란

1980년대 2차례에 걸친 외채위기의 충격과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이 제시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라틴 아메리카를 황폐화시켰다. 자본시장 개방, 무역자유화, 공기업 사유화 등 초민족 자본에 호의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고 금융개혁이 이루어졌다. 천연자원의 수탈과 원주민 노동력의 착취, 환경파괴 등 부의 이전과 파괴적 약탈이 빈번하게 자행되었다. 지속적인 성장 잠재력은 금융자본의 이해에 따라 철저히 무시되었고 저성장과 경제침체, 위기의 악순환은 일상이 되었다.
한편 '플랜 콜럼비아'에서 드러나듯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무적의 제국'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비가역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콜럼비아-베네수엘라-에콰도르 등 '급진3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서슴지 않았다. 반대파를 폭력적으로 전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파 정당, 무장조직, 기업가나 종교단체를 미국이 지원하는 전형적인 저강도 분쟁이 최근 아이티에서도 반복됐다.
11월 4-5일 문제의 미주정상회의에서도 미국은 민주주의와 법치 수호, 경제(금융) 개혁의 심화, 자유무역의 확대라는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재확인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빈곤해결 및 고용창출을 위해서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창설을 목표로 일관된 정치/경제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즉 역내에 뿌리 깊은 "인민주의"적 경제정책이야말로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침식하고 빈곤을 확대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역내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반세계화-반미 감정과 함께 이를 부추기는 일부 정권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미국의 인식이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자신의 배후지였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베네수엘라(1999), 브라질(2002), 우루과이(2004) 등에 이어 장차 볼리비아/니카라과/멕시코 등에서 "좌파"가 집권할 것으로 예상되는 현 상황은 미국에게 충분한 위험요소다. 일각에서는 베네수엘라가 중심이 된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ALBA)'에 대한 지지의 확산을 두고 미국을 배제한 블록화 가능성마저 타진하고 있다. 정상회의 개최국인 아르헨티나마저도 국가부도위기의 책임을 '워싱턴 컨센서스'로 지목했고 브라질 등 5개국은 미국의 농업보조금을 이유로 FTAA 협상을 거부했다.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를 더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의 근거로 활용하려던 미국의 시도는 광범한 저항에 부딪혔다. 1999년 시애틀 WTO 각료회의, 2000년 워싱턴/프라하 IMF/세계은행 연차총회, 2001년 제노바 G8 정상회담 등에 이어 지난 주말 아르헨티나에서 펼쳐진 FTAA 반대 투쟁은 비범했다. 미주정상회의에 반대하여 미주민중회의를 개최한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은 불평등과 빈곤, 미국에 의한 대륙의 군사화를 단호히 비판했다. 34개국 8억 인구와 13조 달러에 달하는 통합시장을 연내 출범시키려던 미국의 시도도 저지됐다. 연말의 홍콩 각료회의를 앞둔 시점에서 WTO 도하개발의제의 타결을 위한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미국의 절박함은 이제 아펙(APEC)을 향하고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태평양 정책과 APEC

한편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미군이 주둔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듯 미국은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사활적 이익을 갖고 있다. 이는 미-일 동맹을 중심으로 아시아지역 경제 주도권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 구상에서도 확인된다. 1994년 APEC의 저명인사그룹(EPG)의 정의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란 역내에서 최대한 시장개방을 실시하고 개별국가들은 역외국에게는 역내자유화조치 혜택을 선택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9년 창설 이후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면서 자유무역 확산의 선도적 역할을 자임한 APEC의 위상은 단적인 사례다. 나아가 미국은 APEC을 통해 아시아지역의 배타적 블록화는 물론 EU와 NAFTA 등 역내 무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블록들의 배타성을 경계하면서 WTO 체제의 순항과 자유무역 완성을 추구하고 있다.
'무역자유화의 진전'과 '안전하고 투명한 아-태지역'이라는 표제 하에 개최되는 이번 APEC 정상회담 역시 미국 주도의 세계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다. 그 결과가 역내 금융 불안정성의 증대와 노동력 신축화, 미-일(남한) 동맹에 의한 역내 군사적 긴장감의 고조, 민중생활의 악화로 드러날 것이라는 점은 명명백백하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번 회담이 '평화번영정책'과 '동북아 중심국가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사례인양 선전해대는 노무현 정부의 기만성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다시, 빈곤과 폭력의 세계화에 맞서

APEC 정상회담을 목전에 둔 현재, 우리는 미국 헤게모니 하에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가속이냐 저지냐를 두고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지구 저편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이 자신이 처한 고통의 원인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미국이라고 정확히 지목했음을 상기하자. 빈곤과 폭력의 세계화를 단호히 반대함으로써 대안세계화 운동의 일부로서 스스로를 각인시켜내는 것이 바로 오늘날 남한 사회운동에게 주어진 일차적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