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사랑한다면 배용준처럼'이라는 글을 퍼왔었는데.. 아래 퍼온 글도 정희진
이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얼마 전에 '페니미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정말 감동을 받은 책이었습니다.
그녀가 내린 '사랑'에 대한 정의를 보세요..ㅋㅋ "= 보살핌, 대화, 정치적 연대 등을 타인과 공유하는 활동" 정말 .. 적절한 표현인 것 같지 않습니까?
정희진씨는 '연령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입장 중에 하나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녀의 입장을 읽으며 매우 위안을 받고, 자신감도 생기고 그렇습니다.^^ 흑흑.. 제가서른이 넘어서 3-4살 아래인턴들과 병원생활하다보니.. 알게 모르게 위축되는게 있었나봐요~^^..

정희진 씨의 최근 칼럼 두 개 올립니다.즐독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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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이 아니라 ‘유혹’
[야!한국사회] ▲ 정희진 서강대 강사·여성학


종교는 우리에게 죽음 뒤에 삶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랑은 죽음 전에 삶이 있다고 말한다. 노동처럼 사랑(보살핌, 대화, 정치적 연대 등을 타인과 공유하는 활동)과 섹스는, 생존의 조건이자 인간의 존재 형식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과 같다. 〈마더〉라는 영화에서 70대 여성이 30대 남성과 사랑을 나눈다. 게다가 그는 딸의 애인. 고통 받는 그 여자는 “난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되었나 봐”라고 흐느낀다. 죽을 준비 중의 하나는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시한부 환자나 노인에 대한 사회적 투자는 회수하기 힘들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효율성을 둘러싼 회의와 논란에 부닥친다. 이들을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죽기 전까지는 죽은 것이 아니다. 삶은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 이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시간의 가치는 평등하다는 의미다. 젊음은 ‘좋은 시절’이고, 중년은 ‘해질녘’인가? 나이를 계절이나 하루 일과에 비유하는 것은, 위계적이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일흔살은 성인의 경지에 이른다는 ‘종심’(從心所欲 不踰矩)인가? 그렇다면 성인은커녕 불법적인 사랑의 욕망에 괴로워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한심함을 넘어 노추(醜)일까? 열다섯 지학, 서른 이립, 마흔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연령주의는, 어떤 면에서 서구 근대성의 핵심 논리인 생애주기와 닮아 있다(정확히 말하면, 생애주기가 연령주의의 일부지만). 특정한 나이에 맞는 사회적 역할과 규범을 정의하는 생애주기는, 젊은 비장애인 남성, 즉, 가장 ‘생산력 있는’ 인간을 노동자 모델로 확보하기 위한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중세에는 아동기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성차별과 함께 연령차별이 근대 국민국가의 주요 조직 원리가 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사십 이후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식의 언설은 문제다. 자기 성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젊은이’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죽음 직전까지 불안정하게 흔들리면서, 혼돈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인간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옥죄고 있는 권위주의, 계급과 교육 문제, 획일주의의 상당 부분은 나이에 적합한 정상성을 요구하는 생애주기 문화 때문이다. 나이 듦이 인생 포기가 아니라면, 왜 황혼 이혼이 뉴스거리이며 예순 넘어 대학에 들어가고 오십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안 되는가?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누구나 언제든지 모든 분야의 초보자가 될 수 있는 사회가 가장 민주적인 사회가 아닐까.

욕망은 결핍에 대한 것. 결핍이 충족되면 욕망도 사라진다. 그래서 ‘불혹의 마흔살’은 어불성설을 넘어 잔인하다. 대개 보통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원을 잃게 된다. 때문에 ‘늙을수록’ 결핍에 괴로우며, 그만큼 욕망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사십 불혹설’을 퍼뜨리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 성별과 계급 자원으로 나이를 극복할 수 있어서 결핍의 고통을 덜 받는 ‘가진 자’거나, 자기 꿈을 좇기가 두려우니까 남의 꿈도 비웃는 비겁을 ‘집착 초월’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안전은 미신이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유혹당하면서, 자신을 가능성에 개방시키고,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는, 도전에 매료되는 삶은 개인의 성장일 뿐 아니라 모두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겨운 촘스키
2006.01.20 15:00


“페미니스트도 남자한테 꽃다발 받으면 기분 좋아요?”, “선생님 말이 잘 안 들려요”. 여성학 강의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과 불만 사항이다. 일상 대화와는 달리 나는 강의, 특히 대학 수업에서는 천천히 또박또박 반복적으로 말한다. 목소리도 큰 편이다. 사람들이 “안 들린다”고 호소하는 이유는 두 가지. 내가 최대한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사회운동이다. 예를 들면, “가정폭력으로 가정이 깨져서 문제라기보다는, 웬만한 폭력으로도 가정이 안 깨지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라는 식이다. 기존의 전제 자체를 질문하는 이런 식의 말하기는 듣는 사람에게 노동을 요구한다.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당연히 잘 들리지 않는다. 두 번째 이유가 오늘의 본론이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 지식인, 흑인 지식인, 동남아시아 지식인은 ‘어색한’ 존재다. 말하는 사람의 몸은 그가 말하는 내용에 대한 평가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미국 백인들은, 원어민이라도 아시아인의 외모라면 그/그녀의 영어를 의심하며, 내 학생들처럼 “잘 안 들린다”고 ‘호소’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진보’ 언론의 신년 인터뷰에는 ‘세계 최고 지성’이라는 노엄 촘스키가 등장했다. ‘보수’ 언론에는 폴 케네디, 로버트 코헨 같은 이들의 ‘한 말씀’이 실린다. 그들로부터 세계 정세, 심지어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나아갈 길’에 대해 듣는다. 백인 남성이 전세계 지식인을 대표하는 것처럼 간주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전으로 삼는,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문화적 식민주의의 반영이다. ‘진보 인사’ 촘스키가 ‘의식화’해야 할 주요 대상은, 미국의 보수 우익 대중이지 그들로부터 피해받는 한국이 아니다. ‘세계적 석학’을 불러놓고 “한국 노동운동의 방향을 말해달라”, “한국 여성운동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 지식인, 사회운동가를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러면 ‘석학’들께서는 “당신이 답해야 할 문제를 왜 나한테 물어보나?”고 말하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된다.

나 역시 그다지 탈식민화된 인간은 아니다. 연말에 모 여성단체가 주최한 학술 모임에 갔다. 질문과 토론시간이 너무 짧고 전체적으로 일방적인 분위기여서 말들이 많았다. 쉬는 시간에 여성들은 불만을 토로했지만, 아무도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토론자로 초청된 남성이 “토론회 분위기가 경직되고 억압적이다”라고 지적하자, 그제야 청중석이 술렁이면서 여성들은 ‘안심’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행사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내가(여성이) 문제 제기했으면 욕먹었을 것”이라고 한마디씩 했다. ‘훌륭한 남성’이 여성주의를 여성에게 ‘지도’하는 모습. 마치 미국에 저항하기 위한 지식도 미국인에게 배우고, 서울 중심주의가 왜 문제인가를 서울 사람을 불러 강의를 듣듯 말이다. 이러한 현실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는 나도, 얼마 전 레즈비언 친구가 영화 <양들의 침묵>의 레즈비언 코드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과잉 해석”이라고 일축했다가, 친구와 같은 의견을 주장한 영어 문헌을 읽고서야 “그렇군!” 깨달은 적이 있다(친구에게 사과했고, 엄청 비판받았다).

여성이 여성의 말보다 남성의 말을, ‘비서구인’이 자신보다 서구인이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 신뢰하며, 동료보다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 이것이 식민성이다. 이렇게 ‘본국’을 ‘열망’하는 모습은 여성운동가,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입장은 숭미(崇美), 반미(反美), 용미(用美) 등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내가 들은 어처구니없는 말은 독미(讀美)였다. 미국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학자 김은실의 지적대로, 미국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미국=세계”로 보고 ‘우리’상황을 미국과의 관계로부터 설명하는, 미국을 유일한 참고문헌으로 삼는 발상. 우리 사회의 광적인 미국 혹은 일본에 대한 관심(비판, 숭배…)은 ‘전문가’부터 ‘일반 대중’까지 차이가 없지만, 사실 미국이나 일본은 한국에 별 관심이 없다. 우리는 왜 그토록 자발적으로 그들의 지식 시장, 청중이 되려고 하는가. 내년부터는‘백인 남자 어른’의 ‘한 말씀’을 좀 덜 들었으면 한다.

사족. 이 글 첫 문장에 대해 나는 대개 이렇게 답한다. “맥락에 따라 다르지요. 그 페미니스트가 레즈비언이라면 무심하거나 곤란할 테고, 시상식장에서라면 기쁘겠죠. 이성애 관계라도 남자가 폭력과 거짓말을 일삼은 뒤에 가져오는 꽃다발이라면 문제죠. 받고 싶은 상황에서 받고 싶은 사람에게 받는다면 누구나 너무 좋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