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종과 주인> 김남주

투쟁하는 민중의 편에서 518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노래했던 김남주 시인의 <종과 주인>이라는 시는 20세기 초중반에 있었던 농민봉기의 모티브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토지개혁으로 소유권을 뺏길 위기에 처한 지주가 논을 염전으로 만들려는 꼼수를 부려 논에 바닷물을 대자,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온 소작인이 분노하여 낫으로 지주를 죽이고 도망친다.

이러한 사건이 시와 소설 속의 허구에 불과할까?

포크레인과 덤프트럭같은 중장비가 없었던 시절, 전라남도 해안지역의 수많은 간척지들은 뻘밭에서 등짐지고 도굿대질 했던 농민들의 고된 노동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농지를 농민들이 소유한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는 법과 공권력의 이름으로 빼앗겼다. 김남주의 시나 조정래의 소설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한미 FTA로 인해 농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러한 분노는 몇몇의 선동가와 불순분자들에 의해 조작된 허구일까?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국가는 농업을 포기했다. 농림부의 농업정책이라는 것은 농산물개방에 대한 보상이나 대응차원의 정책이고, 지방자치단체는 농촌지역을 관광 상품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로서의 농촌은 붕괴되기 일보직전이다.
쌀 개방만은 막겠다던 정부의 호언은 이미 휴지조각이 되었고, 추곡수매제는 폐지되었다. 빚을 내어 만든 기반시설은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가격 불안정으로 농산물 가격은 폭락하고, 전염병 파동으로 농약을 마시는 농민들이 줄을 잇고 있다.
뿐만 아니다. 씨앗공급의 70-80%는 이미 초민족 농업메이저에게 넘어가 있는 상태여서 농업분야의 대외 종속성도 점차 심화되어가고 있다. 국민에게 안정적으로 안전한 농업생산물을 공급하고 이를 통해 농업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선순환 구조는 농업분야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초토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맞서 농민들은 ‘농산물 시장개방’을 계기로 대정부 투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정부는 한 번도 성의 있는 답변을 해준 적이 없다. 보다 못한 농민단체들은 정부가 해결의지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농업메이저와 WTO를 상대로 해외원정투쟁까지 벌였다. 게다가 시위와 저항의 과정에서 몇몇 농민들은 자결로 항의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권력은 탄압으로 일관했으며 농민 전용철, 홍덕표 씨는 공권력에 의해 타살되었다. ‘무지한 농민들이 국가경제를 걱정하는 정치하는 분들의 높은 뜻을 어찌 알겠느냐’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부의 태도였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깔보는 주인’을 닮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현 시기 농민들의 절망과 분노가 정말 비정상적인 것인가?

한미 FTA 반대집회의 폭력성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러나 비판의 대부분이 정당하지 못하다. 정부는 애초부터 한미 FTA반대 여론을 물리적으로 봉쇄했고, 시장과 도지사들은 집회참가자들의 간담회요청과 의견전달을 무시했다. 당일 집회참가자들이 느꼈을 수모를 생각한다면 대중들이 보인 폭력성은 필연적인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부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집회결사의 자유의 제한한다고 하지만, 한미FTA가 가져올 결과물이 과연 ‘공공의 안녕’에 부합하는 것이며, 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질서’가 과연 누구를 위한 질서인지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다.

현재 세계최대의 농업생산국인 미국과의 FTA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농민들이다. 그러나 결코 농민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한국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인해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노동자들은 임금삭감과 고용불안 그리고 비정규직화를 감내하고 있다. 규제되지 않은 투기자본이 부동산가격의 폭등을 초래하고, 무한경쟁사회가 사교육비의 급증을 가져오고, 민영화가 공공서비스의 위축을 가져오고 있다. 이는 있는 자에게는 더 많은 이윤을, 서민들에게는 생활고를 의미한다. 그 심각성은 10% 이하로 하락한 현 정부의 지지율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사회의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더욱 확대시키기 위한 의도로 추진되는 한미 FTA가 현재의 위기를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IMF구조조정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어온 시민들에게 경험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게다가 10년 전에 미국과 FTA를 체결한 멕시코의 ‘심각한 빈부격차와 사회기반의 붕괴’가 시사하는 바가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노무현 정부가 군사독재 못지 않고 국회가 국민의 대의기관으로서 최소한의 기능도 못하고 있다. 역사적 안목과 이성에 기반한 사회운동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 광주드림 독자기고용으로 보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