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해고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출근합니다

광주시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출근투쟁 현장을 가다



이경진 현장기자 / 2007년03월13일 10시43분



8일, 알몸으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출근투쟁을 시작했다.
공공노조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늦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결국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광주시청으로 향했다. 그래도 30분이 늦었다. 이미 시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새벽시장의 노점 상인들처럼 시청 앞 도로에 좌판(?)을 깔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3월 8일 광주시청에서 고용승계를 외치며 13시간 점거농성을 벌이다, 끌려나온 24명의 시청비정규직 노동자(공공노조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조합원)은 다음날인 3월 9일부터 출근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집단해고가 되기 전의 출근시간인 7시까지 시청 앞에 모여 매일 선전전을 진행한다.


“시장이 우리를 한번이라도 만나줬으면 좋겠네!”


아침 이른 시각부터 광주시청 주위를 긴장감이 흐른다. 전투경찰부터 시작해서 정복, 사복 경찰들 수 백 명이 예기치 못한 돌발사항(?)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이름 아래 시청주위에 서성이고 있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청사 건물로 접근하려고 하면 수 십 명의 경찰들이 떼를 지어나타나 출입 및 접근을 막는다. 그 뒤로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어디에 쓰려는지 카메라를 든 시청 직원들이 조합원들의 행동을 살피며 바삐 눈빛을 마주치고 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조합원들을 찍어대는 시청직원
공공노조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아침 8시 박광태 광주시장의 출근시간이 되자, 몇몇 조합원들이 입구에 서서 "문제해결을 위해, 박광태 시장의 얼굴이라도 봐야겠다“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박광태 시장은 무엇이 두려운지 평소 타고 다니는 차의 번호판을 바꿔단 채 몰래 출근을 해야만 했다.


박광태 시장이 말하는 ‘인권의 도시, 광주’에 비정규직 노동자는 없다?


계약만료로 거리로 내몰린 광주시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04년 시청이 새 건물로 이사한 이후 청사의 깨끗한 환경을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궂은일을 도맡아온 미화, 청소용역노동자로 70만원이 조금 넘는 임금을 받으며 성실히 일한 노동자들이다. 공공노조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는 이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06년 2월부터 계속해서 박광태 광주시 시장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박광태 시장과 광주시청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책임회피와 집단해고였다.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를 하루 앞둔 3월 7일 오후 2시에 박광태 시장의 면담을 요구하면 점거농성에 들어갔고, 13시간을 넘겨 다음날 새벽 3시에 일부조합원은 청사 밖으로 끌려나오고 나머지 여성조합원들은 시장실 옆 세미나실로 격리 수용되었다.




웃옷을 벗고 점거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조합원을 강제로 끌어내고 있는 시청직원들

공공노조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웃옷을 벗은 상태에서 속옷만 걸친 채 결사적으로 저항을 하던 여성조합원들은 시청 공무원들이 준비한 담요에 온 몸이 쌓여 이리저리 들리고, 끌려 다녔다. 이 과정에서 몇몇 여성조합원이 담요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해 실신하였고, 발목과 무릎 등 온몸이 구두 발에 짓밟혀 급히 병원에 이송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자리에 줄곧 있었던 이 모 조합원은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시청 직원들이 술 냄새 풍기며 우리들을 소 돼지 잡듯이 끌어냈다”고 말하며 “그 날 인권의 도시라는 광주의 중심에서 우리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인권은 없었다”고 분노했다.


“자칭 민주투사, 518의 계승자라는 박광태 시장이 총칼로 80년 광주를 짓밟았던 전두환과 무엇이 다르냐”라며 “왜 50~60 먹은 늙은 여성노동자들을 그렇게 시청에서 매몰차게 내몰아야 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하며 윤 모 조합원은 그 날을 기억해내는 도중 못내 눈물을 감췄다.




강제해산 과정에서 시청직원에 의해서 무릎과 발목이 짓밟혀 병원에 입원한 여성조합원과 시청직원들의 구두발에 짓밟힌 여성조합원(왼쪽부터)

공공노조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우리가 해고된 이유는 "노동조합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윤 모 조합원은 자신들이 해고된 이유를 “노동조합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청에서 노동조합 없이 일 할 때는 마치 노예처럼, 기계처럼 일했습니다. 용역소장이 시켜서 담당공무원 자가용 세차도 하고 재활용한다면서 고무장갑, 집게, 쓰레기봉투도 지급하지 않아 맨손으로 똥 묻은 화장지를 풀어헤치고 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무거운 집기 옮기는 일에 동원되거나, 퇴근시간이후에도 남아서 시간외 수당도 없이 11시까지 실내 이곳저곳을 왁스청소를 했습니다. 수당을 못 받은 것은 둘째 치고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없는 것이 더 서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외벽청소는 전문적인 인력들이 해야 하는 일인데, 높다란 사다리에 올라 걸레질할 때는 무서워서 오금이 저렸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을 만드니 달라졌다고 한다. "우선 반말하던 시청직원들과 용역업체 소장의 대우부터 달라졌고, 부당하게 해야 만했던 일을 노동조합이 있어서 거부할 수 있어서 오히려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서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며 이 모 조합원은 노조를 만들고 나서의 상황을 회상했다.

하지만 노동조합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는 시청직원들과 용역업체에서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눈에 가시였다. “조합원들만 빼고 비조합원들이 고용승계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며 우리가 해고된 진짜 이유는 “계약만료가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는 이유라고 조합원들은 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 갈 겁니다.
이제 우리의 싸움은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이니깐요“



"아침에 출근 투쟁하다가 뒤쪽으로 화장실을 가다보면, 아들 같은 젊은 전경친구들을 만납니다. 우스갯소리로 애들아, 너희들도 제대하고 나면 비정규직이야! 우리 엄마들은 너희들은 비정규직되지 말라고 싸우는 것이니깐, 우리 엄마들한테 심하게 하지마!" 라고 하면 "저희들도 알아요. 저희들은 아주머니들하고 악한 감정이 없어요"라고 한다고 윤 모 조합원이 말한다.




강제진압에 항의하며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여성조합원
공공노조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이렇듯 조합원들은 이 싸움이 자신들의 고용승계 쟁취를 넘어 이제는 광주시청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 땅 어느 곳에서 비정규직의 차별과 서러움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모 조합원은 “시청에서 일하면서 우리는 23개월짜리 인생이었다”라며 “이제 비정규직 개악법이 통과되었기에 누구하나 이 계약직 인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목 박았다. 더불어 “우리가 잘 싸워서 우리 아들, 딸은 비정규직 인생이 안 되게”하는 길의 밑거름이 되고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굳은 결의를 밝혔다.


기자가 질문 중에 한미 FTA의 문제며, 비정규직 개악법의 문제를 어찌 다 잘 알고 있냐며 묻자 “나도 노동조합 하는 사람인데”라며 웃는다.


누가 그/녀들을 투사로 만들었을까? “아마도 지금의 노동조합이 살아서 첫 번째 노동조합이자, 죽을 때까지의 마지막 노동조합이 될 것”이라며 결의를 밝히는 투사로 만들었는가? 돌아오는 길에 방송 마이크를 잡고 시민선전전을 진행하던 전 욱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지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박광태 시장이 져버린 인권과 민주주의 도시, 광주를 이제는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광주시민이 되찾아야 한다.”


누군가는 민주주의를 팔아, 80년 광주를 팔아 대통령이 되고 시장이 되었지만 이렇게 자꾸 세상의 밑바닥에서 늙은 민주투사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80년 광주의 진정한 계승자는 그/녀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되살아나는 ‘5월 광주’의 새싹은 이처럼 이른 봄 해방을 시샘하는 신자유주의라는 꽃샘추위 언 땅에서 “비정규직 철폐, 고용승계 쟁취”를 외치며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