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뭘 잘못했다고…

[조선일보 2007-05-23 10:13]


비정규직이 대출하려면 ‘NO’하는 은행들


전남의 한 공단(工團)의 기계설비 하청업체에서 근무하는 서모(36)씨는 지난해 8월 아버지 입원비로 300만원이 필요해 은행을 찾았다. 직장 생활 5년차인 데다, 많지는 않지만 전세금도 있으니 300만원은 충분히 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서씨, 은행 창구 직원 질문에 얼굴을 붉혀야 했다. “죄송하지만 정규직이신가요?”

그는 비정규직인 파견 근로자라는 이유로 대출을 거절당했다. 은행에서 문전박대당한 서씨는 결국 신용협동조합에서 퇴직금을 담보로 잡히고 연 16%의 고금리에 250만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대출금과 이자를 합해 매달 13만원씩 갚는데, 지금까지 연체 한 번 하지 않았다.







◆“정규직에 한함”

지난 15일 오전 8시, 서울의 A카드회사 본사 후문. 정장을 차려 입은 하나은행 직원 3명이 출근길 직원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주고 있었다. 유인물에는 “임직원을 위한 특별한 혜택. 최저 연 6.33%로 신용대출 받으시고, 전자금융 수수료도 면제 받으세요”라고 쓰여 있다.

유인물을 받아 든 이모(여·29)씨는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특별한 혜택’을 선전하는 유인물 한 구석에 ‘정규직에 한함’이라고 명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콜센터에 3년째 근무 중인 이씨를 포함, 이 기업 본사 직원 2000여명 중 절반이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금융 차별은 은행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은행의 ‘직장인 우대 신용대출’은 대외적으로 ‘재직기간 1년 초과, 연소득 2000만원 이상’ 직장인이면 받을 수 있다고 돼 있지만, 비정규직은 해당되지 않는다.

국민은행은 공기업·금융기관·상장기업 등에서 1년 이상 근무한 임직원에게 직장인 신용대출을 해 주고 있지만, 비정규직은 열외다. 신한은행도 마찬가지. 우량기업 2000여 곳 직원을 대상으로 한 직장인 대출에서, 비정규직은 여지없이 빠져 있다.

은행들은 ‘회수 위험성’을 이유로 든다. 한 은행 가계여신 담당자는 “비정규직은 쉽게 직장을 그만둘 수 있기 때문에 대출을 꺼리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자가 각 은행들에 물어보았더니,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연체율이 높다거나, 신용등급이 낮다는 통계 같은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는 곳은 없었다.








◆금융당국도 차별 앞장?

금융감독원 후원으로 만든 서민 신용대출 사이트 ‘이지론’(www.egloan.co.kr)에서도 비정규직은 소외되고 있다. 이지론에서 대출신청을 하려면 우선 자신이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연봉계약직)인지부터 표시해야 한다.

이를 토대로 대출 가능한 상품도 차별 받고 있었다. 기자가 ‘연봉 4500만원 받는 정규직 회사원’으로 이지론에 접속해, 1000만원 신용대출을 신청해 봤다. 그랬더니 은행 1곳과 대부업체 2곳을 포함, 모두 11곳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 나왔다.


하지만 연봉 등 다른 모든 조건을 똑같게 한 뒤,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만 바꿨더니 대출 가능한 곳이 8곳으로 줄었다. 정규직일 때 대출 가능했던 은행 대출은 비정규직이 되자 사라졌고, 대출금리가 비교적 낮은 저축은행 상품들도 대출 가능 리스트에서 없어졌다. 다시 ‘6000만원 정규직’과 ‘6000만원 비정규직’으로 대출신청을 해 봤다. 정규직일 때는 2개였던 은행 대출 상품이 비정규직으로 신청했더니 1개로 줄었다. 연봉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에 대한 구조적인 금융 차별인 셈이다.

◆“금융 안전망 만들어야”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소외당하는 비정규직은 고금리 대부업체(옛 사채를 양성화한 대출업체)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대부업체 대출 실태를 조사했던 금감원 관계자는 “대부업체를 이용하는 회사원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라고 전했다. 그 결과 비정규직은 금융의 좁은 문에 시달리는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전문가들은 미국처럼 ‘대출 받으려는 사람을 인종·피부색·종교 등에 의해 차별할 수 없다’는 ‘평등신용기회법’(Equal Credit Opportunity Act)까지는 못 만들더라도, 비정규직에 대한 최소한의 금융 안전망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대안으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뱅크’처럼 서민층에게 소액을 신용 대출해 주는 마이크로 크레딧(micro credit) 사업이 제시되고 있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은행들이 자(子)회사를 만들어 서민 대출을 하는 방법도 검토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