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기타] 2004년 02월 09일 (월) 13:12

[오마이뉴스 홍성식 기자]
▲ 생전의 김남주 시인.
ⓒ2004 작가회의 제공
"시인이여, 입을 열어 피압박대중의 자유를 노래하지 않고 그들의 해방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말하는 문학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며 80년대를 절규했던 <나의 칼 나의 피>의 시인 김남주.

오는 2월14일은 80년 5월 광주에서의 살육으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 소장을 '아메리카 카우보이가 책봉한 세자'로 명명할 만큼 담대했고, "학살의 원흉이 옥좌에 앉아있다"는 단 한마디로 질곡과 폭력의 시대를 갈파했으며, 자신의 지향하는 세상의 건설을 위해 재벌집 담장을 넘은 혁명시인 김남주가 췌장암으로 우리 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저항과 항쟁, 투옥과 고문, 억울한 징역으로 점철됐던 김남주의 48년 삶은 척박했던 한국의 현대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전남대 영문과 재학시절 반유신 지하신문 '함성'지(誌) 배포사건으로 시작된 그의 수난(국가보안법 위반혐의 구속)은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도 계속됐다. 신군부의 우두머리 전두환은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 사건'으로 수감된 그를 정권이 끝나던 날까지 석방해주지 않았다.

88년 12월. 9년이 넘는 징역살이 끝에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후 가정을 꾸리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로 일하는 등 잠시잠깐 시인이자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왔지만 소박했던 그 행복도 잠시. 오랜 영어(囹圄)생활이 불러들인 옥독(獄毒)과 눈에 보이는 명백한 적이 사라진 90년대의 절망은 김남주의 췌장에 암덩어리를 키웠다.

아지랑이 피어오를 봄을 눈앞에 둔 94년 2월 중순. 결국 김남주는 자신의 동지들이 묻혀 있는 광주 망월동 묘역에 고단했던 지상에서의 마흔여덟 해 생을 눕힌다. 그는 가고 <진혼가> <조국은 하나다> <사상의 거처>로 이름 붙인 그의 노래만이 우리 곁에 남은 것이다.

생전에 김남주가 몸담았던 문인단체인 작가회의(이사장 염무웅)는 올곧은 정신과 정열적인 실천으로 강팍한 시대를 꼿꼿하게 살아냈던 김남주의 삶과 문학을 추억하는 각종 행사를 준비중이다.

2월13일과 14일 김남주의 고향인 전남 해남과 '5월 항쟁'의 도시 광주에서 가수 안치환과 극단 '토박이', '신명', 민예총 영상분과위원회, 청년노래단 등이 함께 할 '민족시인 김남주 10주기 추모문화제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가 바로 그것.

해남문화예술회관, 5.18 기념문화관, 김남주 생가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이번 행사를 통해 작가회의는 김남주 시인을 반추하는 것은 물론, 시대가 요구하는 문인의 자세를 다시금 다진다는 계획이다.

위 행사와 함께 14일에는 소설가 황석영이 '내가 만난 김남주'라는 주제로 강연을 가질 예정이고, 15일에는 김남주의 묘소가 자리한 망월동 묘역에서 '김남주 추모제'가 열릴 예정이다.

1980년대 김남주는 자신의 시를 통해 미국의 본질을 "살인과 약탈, 공갈과 협박"으로 규정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은 쉬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예측했다. 이후 20년의 세월. 최근 이라크의 상황은 김남주의 규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좋은 시인은 예언자에 다름 아니다'라는 말은 옳았다.

작가회의는 김남주 10주기 추모문화제 참석자를 선착순 접수받고 있다.

/홍성식 기자 (hss@ohmynews.com)


덧붙이는 글
관련문의: 02)313-1486(작가회의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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