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개혁세력에게 면죄부를 안겨주지 마라



김세균 (서울대 교수) 읽음: 506
작성일: 2004년03월14일 18시28분33초




3.12.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은 국면 전환을 통해 자신이 처한 궁지에서 벗어나려는 수구세력의 대반격이었다. 이 반격은 그러나 대다수 국민에게 합법을 가장한 의회 다수세력의 폭거로 비췸으로써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어떻게 나든 이들 수구세력의 몰락을 재촉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탄핵정국이 초래된 데에는 노무현 역시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수구세력의 악수로 이른바 개혁세력이 이번 사태의 최대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국 제도권정치의 대립구도는 그간 '수구 대 개혁'에 의해 특징져 왔다. 이와 관련해서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문민정부' 출범 이후 집권세력은 개혁세력이었지 수구세력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간의 한국사회 발전과정에 대해 가장 중요한 책임을 져야 할 세력은 수구세력이 아니라 개혁세력이다.
둘째, 개혁세력이 추진한 핵심적인 개혁은 '민주개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개혁'이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개혁은 말만 개혁이지 본질적으로는 자본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새로운 '반동'이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한 민주개혁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간 민주개혁이 지체되고 지지부진했다면 그건 수구세력이 발목을 잡은 데에도 기인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개혁세력이 민주개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개혁세력은 이라크 파병결정 등에서 드러나다시피 미국의 '무장한 신자유주의 정책'까지도 지지했다.
셋째, 수구세력 역시 개발독재 정책을 추구한 과거와는 달리 신자유주의 정책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변했다. 때문에 개혁세력과 수구세력 간에 차이가 존재했지만 그 차이는 그들 간의 본질적인 동질성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넷째,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대립구도는 지배세력과 다수 대중 간에 형성된, 신자유주의 문제를 둘러싼 대립구도로 변했다. 이 대립구도에서 수구세력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신자유주의세력으로, 개혁세력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신자유주의세력으로 서로 동맹을 맺는 가운데 노동자 민중세력과 대치해 왔다. 이 점에서 수구 대 개혁의 대립구도를 중시하게 되면 수구세력과 개력세력 간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동질성에 눈을 감게 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지배세력과 다수 대중 간에 형성된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대립구도도 은폐하게 만다.
우리 사회에서 개혁 담론은 부르주아 지배질서를 합리화시켜 신자유주의세력의 범국민적 헤게모니를 강화하려는 담론으로 기능해 왔다. 지배질서의 합리화 없이는 부정부패, 민생파탄 등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대중을 지배세력에게 다시 복속시키는 것은 이미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수구세력이 범한 최대의 실수는 정권 탈환에 눈 먼 나머지 사실상 자신들의 지도자로 변모한 노무현을 끌어내리는 데에 골몰한 점이다. 그러나 부패의 원조가 수구세력이라면, 민생파탄의 주범은 개혁세력이다. 때문에 탄핵정국에 대한 노동자 민중세력의 대처방식은 친노세력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친노세력이 노무현과 개혁세력에게 면죄부를 안겨주는 방향으로 사태를 진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탄핵 무효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나서고 있거나 수구세력 타도를 위한 제2의 시민혁명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 그런 노력들이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세력은 '한나라당-민주당 해체', '노무현 퇴진'을 주장하고, 다가오는 총선이 수구세력만이 아니라 개혁세력을 심판하는 장이 되도록, 그리고 그러한 모든 노력이 '반전반제, 신자유주의반대 전선'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데에 힘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노동자 민중세력은 이미 민중의 적이 되었지만 민중의 벗인 양 가장하고 있고, 개혁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보수의 입지를 넓히고 있는 개혁세력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닌다면 노동자 민중세력의 미래는 어둡다. 수구세력이든 개혁세력이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싸운다. 노동자 민중세력 역시 자신의 미래를 쟁취하는 데에 주저할 이유가 없다. 우리 역시 우리의 자신의 미래를 쟁취하는 활동에 당당하게 나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