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 긴 글입니다. 현 정국에 대한 비교분석을 꼼꼼하게 하고 있는 글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글입니다. 힘들더라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논의를 해 보았으면 합니다. - 청일



탄핵정국 민중진영 대응방침 비교분석



최원 읽음: 41
작성일: 2004년03월17일 08시09분49초




탄핵이 가결되고 많은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즉시 한나라당, 민주당을 규탄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하지만 탄핵가결은 '수구정당들'의 당리당략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또한 마찬가지로 '재신임' 드라이브를 걸고 '올인'의 로또정치를 해왔다. 탄핵이 가결되기 전, 국회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유시민은 한나라-민주당 의원과 몸싸움을 벌이다 '이건 정치도 아냐!'라고 절규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의회에는 더 이상 민중의 삶과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그 어떤 '정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그것은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에 철저히 지배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소위 '민족주권'의 위기가 '정치의 위기'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돌아보자. 노무현은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어, 지난 1년간 줄곧 같은 립-서비스를 해왔지만, 그 '개혁'의 토대는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에, 차례차례 자신이 한 약속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노무현의 지지자들이 믿듯 단지 한나라당-민주당의 방해로 인해 발생한 일이 아니었다. 노무현은 지난 민주노총과의 간담회에서 실제로 '대통령이 된 후 나는 변했다'고 실토하지 않았던가? 개혁의 토대가 없기 때문에, 타당과의 어떤 내용 있는 차별성도 가질 수 없고, 국민의 지지를 실제로 끌어낼 수도 없다. 결국 남은 것은 이러저러한 '정치 쇼'를 벌여서 수동적인 대중을 동원하는 인민주의 도박정치를 행하는 것이었다. '수구정당'도 이에 질 세라 그간 우익 거리집회를 개최해 대중을 동원해왔고, 총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대통령 탄핵이라는 '올인'을 행한 것을 보면, 이러한 도박정치는 이미 정치권에 일반화된 어떤 것이지 어느 한 인물이나 정당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위와 같은 사태파악에 기초하여 탄핵정국을 둘러싸고 제출된 민중진영의 대응방침들을 비교분석하고 올바른 방침이 무엇일까 고민해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제출된 대응방침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1. 탄핵반대(혹은 탄핵무효)를 통한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 및 국회해산
2. '민생정치' 쟁점부각을 통한 신자유주의 보수정치권 심판
3. 신자유주의 의회정치 파탄 선언, 총선 보이콧, 시민발의권 및 시민소환권 제도화를 통한 새로운 민주주의 건설

이외에도, 탄핵정국은 총선을 둘러싼 부르주아 분파간 권력 싸움에 불과하므로, 민중진영은 거리를 두고 기왕 해오던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조직화, 반전투쟁, FTA 반대투쟁에 총력을 기울이자는 입장이 있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준), 노동자의 힘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투쟁들을 수행하는 일은 위에 제시된 세 입장과 반드시 상충된다고 볼 수 없다. 또 이 입장은 정세 외부에 머물겠다는 이야기로, 탄핵정국에 대한 대응방침이라고 볼 수 없다. 즉, 그것은 모든 정세에서 변함없이 할 수 있는 주장에 불과하다.
현재로선 위에 제시된 세 입장 사이에서 다양한 잡종이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예컨대, 민주노총은 최초에 1번 입장을 보이다 내부 반발 등으로 인해 2번 입장을 기계적으로 결합시켜 '탄핵무효/신자유주의적 보수정치권 심판'이라는 모순되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유사하게 움직이다가 3번 입장의 일부를 수용해서 아예 백화점을 차리고 있다. 그리하여 민주노동당은 캐치-올 정당(catch-all party, 계급적/비계급적 차별성을 떠나 모든 요구를 다 수용하는 정당)이 단지 신자유주의 보수정당들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사회진보연대 같은 경우, 2번 입장을 주요 입장으로 내걸면서도, 3번에서 이야기된 '의회 일반' 비판이라는 관점을 결합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아직 '의회 일반' 비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슬로건화 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목표로 싸우자는 것인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3번 입장을 취하는 조직들 가운데 일부도 총선 보이콧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의회정치 파탄 선언' 없는 발의권/소환권 제도화를 주장하는 셈이다. 이는 곧 운동을 단순한 법개정 차원에 가두어 버리고, 특히 민중진영 내 강화되는 의회주의 경향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대응방침 상의 혼선과 잡종 출현은 현 국면에 대한 민중진영의 정치적 개입의 무능력으로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한마디로 대중들에게 혼란만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위에 제시된 세 가지 대응방침이 서로 모순되며, 쉽게 섞어 놓을 수 없는 입장들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애써 부인하려는 데서 온다.

기본적으로 1번 입장은 노무현 정권 편에 가담한다는 성격을 띠기 때문에 논할 가치가 없고, 여기서는 2번과 3번 입장 차이를 살펴보자. 2번과 3번 입장은 공히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보수정치권 심판이라는 2번 입장은 기본적으로 현 정치권을 구성하는 정당들과 권력을 비판하는 것에 초점이 가 있다. 반면, 3번 입장은 여타 보수정당이나 권력 주체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국가장치(제도) 및 신자유주의 하에서 민중배제적 반-정치(anti-politics)의 일반화를 비판하는 것에 초점이 가있다.

이러한 입장 차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갖게 된다. 2번 입장은 기본적으로 보수정당들과 진보정당(특히 민노당) 간의 차별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의도와 상관없이 진보정당의 의회진출을 지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때문에 민노당은 2번 입장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민중진영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한 얕은 수법으로 1번과 3번 구호를 조금씩 섞어놓고 '표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확히 국가장치 개조와 국가의 민주화라는 문제를 망각하고, 특히 파탄 난 '의회정치'를 정면에서 비판하기보다는 기존 부르주아 정치 판 안에서 자기 정당 쪽으로 대중을 동원하길 꾀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정치의 대명사인 노무현식 인민주의 동원정치의 변종이 되길 자처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3번 입장은 명확한 국가장치 개조와 국가의 민주화 문제를 제기한다. 이 입장은 대중을 수동적으로 동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대중이 자신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정치화(발의 및 결정!)할 수 있는 제도적 경로를 뚫어내려는 것이다. 이는 자체로는 대중의 요구들이 갖는 특정한 내용 하나 하나에 집착한다기보다는, 그 요구들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즉 "권리들을 가질 수 있는 권리"(한나 아렌트)를 요구한다. 실로,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에티엔 발리바르)로서 '시민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3번 입장은 이러한 단호함과 동시에 현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상당한 유연성을 갖고 있다. 탄핵정국으로 인해 광화문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듯, 지금 대중들은 노무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동일시(identification)에 사로잡혀 있다. 노무현은 가장 강한 자(대통령)이면서 수구 세력에게 탄핵 당한 '희생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동일시는 상당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대중은 가장 강한 자 노무현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이 이 시대의 '주류 시민'이 될 수 있으며(프로이트는 이를 나르시시즘 효과로 설명한다), 동시에 '희생자' 노무현과 동일시함으로써 가장 '정당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3번 입장은 권력자나 혹은 정당과 같은 '주체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제도'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이러한 동일시의 자장을 피해간다. 반면 2번 입장이 주장하는 '보수정치권 심판'이라는 슬로건은 기본적으로 보수정치권의 주체들에 대한 '증오'와 '원한'을 조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노무현과 동일시하는 대중들을 오히려 위협하고 그 동일시를 더욱 강화한다. 2번 입장을 제출한 정치조직들이 구체적인 투쟁 방향에 침묵하거나 광화문 촛불집회에 모인 대중들에 대해 아무 효과도 없이 적개심만을 자극하는 '정념의 정치'를 행할 수밖에 없는 무능력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비교분석을 통해서 필자는 현 국면에서 가장 올바른 대응방침은 '신자유주의 의회정치 파탄 선언, 총선 보이콧, 시민발의권 및 시민소환권의 제도화를 통한 새로운 민주주의 건설'을 주장하는 3번 입장이라고 결론 짓는다. 또 그 입장을 다른 입장과 섞어놓음으로써 쟁점을 흐리려는 그 어떤 시도도 정당치 못한 것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