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지배정치는 파탄났다

박준형 ((공공연맹 조직차장))



오늘 출장갔다가 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민주노총 법률원 권두섭 변호사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놀랐다. 여간해서 기대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전
화인터뷰의 내용은 야간 촛불집회의 합법성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 촛불집회를 경찰이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많다. 이것은 이번
탄핵사태에서 대중의 움직임에 대해 지배계급의 입장이 혼란스럽기 때문이
다.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은 대중을 동원해서 반대 정파를 고립시키고 총선
을 거치면서 권력을 강화하려고 한다. 따라서 한나라당 등 보수세력들이
이러한 대중동원에 극도의 반감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한나라당의 우려는 단지 이 대중동원이 노무현과 열우당에 유리하기 때문
만은 아니다. 이들은 대중이 자발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정치적 발언을 한
다는 것에 본능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알레르기적인 반응
을 보인다. 80년대 말에는 대중의 자발적인 요구 때문에 '하마터면' 정권
을 잃을 뻔했지 않은가.

그러나, 최근 정동영의 시위 자제 호소에도 보이듯이 신자유주의 개혁세력
도 촛불집회 등 대중의 움직임이 확대되는 것을 마냥 반기지는 않는 듯하
다. 대중이 관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폭발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모
든 것은 4.15에서 표로 심판되어야한다.

권두섭 변호사의 전화인터뷰 이후에 라디오 토론이 이어졌다. 경찰 인터뷰
도 나오고 (집시법에 따른) 법적인 허용가능성 여부에 대한 논란도 있었지
만 그것이 핵심적인 쟁점은 아니었다. 보수적인 토론자들은 이러한 시위
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부추기
기 때문에 자제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미묘한 시기에 특정한 정치적 목적
으로 진행되는 집회는 헌재의 법률적 판단에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중단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 한 청취자의 전화 발언이 명언이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목
적에서 탄핵도 하고 반대도 하면서 국민은 정치적 목적을 가지면 안 되는
가?"

그 보수적인 토론자들이 뭐해서 빌어먹는 인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발
언은 정곡을 찔렀다. 국민들은 정치적 발언을 할 권리가 없는가? 심지어
한 토론자는 '대의 민주주의의 원리' 운운하면서, 대의제 하에서는 법률
에 근거하지 않은 집단행동을 해서 안 될 뿐 아니라 대의기구에 절차를 맡
기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발언까지 서슴치 않았다. 시민들에게는 정치적 권
리란 투표하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렇겠지, 정치는 오직 지배계급
인 부르주아들의 몫일 테니까!

그럼 이런 보수적인 토론자가 아닌 반대편은 어떨까. 집회 시위의 법적 권
리를 열열히 옹호하는 다른 편의 토론자는 시민의 민주주의의 권리를 인정
하는 것일까? 글쎄, 아마 열우당 지지라는 정치적 색깔에 따라 '정세적으
로' 인정하는 척 하는 것일 테다. 그들도 지난 대선 이후 촛불시위를 억압
한 것처럼, 정치적 효용이 다하거나 혹은 대중의 요구가 스스로의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으로 변화하는 순간 돌변할 것이 뻔하다. 그들에
게 대중은 동원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참여'는 동원되는
시민들에게만 허용되는 용어다.

대의제 = 민주주의이며 그 외부는 없다고 믿는 자들과는 달리, 근대 민주
주의가 제도화된 프랑스혁명에서도 오히려 '대의제'는 '민주주의'와 논쟁
되는 개념이었다. 이 때 '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
다. 대의제라는 것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역사
에서는 최근의 산물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근대 대의제는 프랑스혁명을
거치는 형성초기에 부르주아계급의 이익과 사상을 국가에 직접적으로 반영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선출되기는 하지만 인민에게 책임지지 않는
정치제도다.(지금 국회의 행태가 바로 이렇다.) 루소는 대의제가 "선거 바
로 다음날부터 주권자인 국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정치제도"로
기능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대의제가 정치의 제도화의 하나일 뿐이라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다른 제도화도 여러가지로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대표가 선거구
민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는 평의회 민주주의 같은 형태가 있다.

그리고 최근 탄핵사태에서 보여진 지배정치의 파탄에 대한 대안으로 그 제
안이 확산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와 여러 제도들이 있다. '시민 소환
제' '시민 발안제' 등이 그 생생한 사례이다. 이때 제도화란 이데올로기
적 국가장치의 또 한 부분을 창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치를 가능하
게 하는 다른 공간을 확보하자는 의미라는 점을 상기하자. (따라서 충분
히 정세적으로, 정세적인 요구와 결합해서 제기되지 않으면 법전에 하나
의 제도를 기입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다.)

경찰은 촛불시위를 한동안은 '마지못해' 방치할 것이다. 대중이 관리가능
할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까지, 대의제 작동을 위한 415 총선을 방
해하지 않을 때까지만 그렇다.

아무튼 최근의 집시법 개악으로 인해, 도심 야간집회는커녕 어떤 집회도
못하게 되는 판국에 촛불시위가 합법이라는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은 신기
한 일이다. 노무현/열우당 등이 거리에 모이는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서 얼
마나 안달이 났는지 보여준다. 그들이 불과 100여일 전에 집시법 개악을
주도하지 않았나?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발언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 말이
다.

지금 많은 시민들이 자기 스스로의 정치적 발언을 위해 거리에 반평짜리
앉을 공간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제한
하는 법/제도-개악된 집시법과 국회의 대의제-가 어처구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 지배(이데올로기)의 모순, 그리고 대중(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작동시켜야한다. 우리에게는 어떤 시기에 어떤 발언만이 '허용'되
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기에 모든 발언을 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자.

시민들은 정치적 발언이 대의제에 제한되지 않고 자유롭게 가능해야한다.
그리고, 사실은 시민의 정치적 발언을 제한하는 것에 불과한 노무현/열우
당 등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에 의한 동원을 넘어 설 수 있어야한다. (이것
에 대한 폭로를 전제하지 않을 경우 직접민주주의 요구는 '탄핵반대' 요구
에 하나의 스펙트럼을 추가할 뿐인 손쉬운 타협이 될 수 있다.)

탄핵정국에서 우리가 느끼는 환멸은, 탄핵찬성 투표를 한 한나라당, 민주
당 의원들이 아니라 노무현과 열우당을 포함한 보수정치권 전체에 대한 것
이다. 지긋지긋한 2003년의 일들, 이라크파병, 노동탄압, 비정규직확산,
FTA 통과, 민생파단은 노무현/열우당이 '선봉'에서, 한나라당/민주당 '연
대투쟁'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점을 잊을 수 없다.

그 정치세력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를 믿을 수 있도록, 그
발언의 권리를 제도화할 수 있도록 요구해야한다. 그리고 단지 '제도'의
요구가 아니라, 이상을 외쳐야한다. 우리에게 제도화 이전에 이미 존재하
는 그 권리들을 활용해서 말이다.

신자유주의 지배정치는 파탄났다, 우리 스스로 너희를 탄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