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23 가을.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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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 장기침체와 부채위기의 정치적 함의

금융위기 이후 15년, 미국 경제의 변모

임필수 | 정책교육실장
마르크스 경제학은 단기적인 경기예측이나 정책처방을 내놓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장기적 경향, 달리 말하면 자본축적의 역사법칙 또는 역사동역학을 밝히는 것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목적이다. 

그런데 2007~9년 금융위기 이후, 부르주아 경제학도 자본주의의 장기적 흐름에 대한 진단을 제시하고 있다. 장기침체 또는 장기저성장, 자연이자율과 고정자본 투자수익률의 장기적 하락, 생산성의 장기적 하락, 거대한 부채를 반복적으로 축적하는 부채 슈퍼사이클 등등. 

필자는 이러한 진단들이 마르크스 이론이 제시하고자 했던 바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각각의 논자가 자본주의 위기 메커니즘의 어떤 특정한 측면만을 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의 진단을 입구로 하고 마르크스의 이론을 출구로 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 이것이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흐름을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수익성 있는 기술 진보의 어려움(고든) → 고정자본 투자수익률 하락(버냉키) → 만성적인 수요부족과 이력현상에 따른 장기침체(서머스)’라는 그림을 독자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초거대부채 슈퍼사이클(루비니)’은 현대국가에서 재정위기와 부채위기가 발생하게 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으로 보강한다. 

나아가 경제 현실을 진단하는 부르주아 경제이론은 각각 최선의 정책 처방을 내놓고자 한다. 그런데 필자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시각에 설 때 그러한 정책 처방의 함의나 한계를 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의 장기침체이론에 대비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정상상태 이론을 설명하면서, 경쟁과 위기의 심화, 붕괴의 위험이라는 관점에서 현시대를 조망할 때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이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검토하겠다. 
 
 

1. 금융위기 이후 장기침체 논쟁 

 
로렌스 H. 서머스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맡았고, 오바마 행정부 당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 하버드대학교 교수, 세계은행 수석경제학자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는 대략 2013년부터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경제학에서 장기침체란 경제성장이 매우 미약하거나 아예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여기서 장기침체는 순환적 침체, 또는 단기침체와 대비된다. (secular는 라틴어 saeculum가 어원인데, saeculum은 한 세기 또는 평생을 뜻한다.) 또한 장기침체는 경제 동역학에서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장기침체라는 개념은 앨빈 한센이 1938년에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는 1930년대 초반에 나타난 대불황 이후 미국 경제의 운명을 논하면서, 미국이 저성장 시대로 영구히 진입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 이후로 장기침체라는 용어는 만성적(장기적) 수요부족에 빠진 경제를 가리킬 때 쓰인다. 그렇다면 장기침체에 빠진 경제는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 역사적으로 보면 실업률이 낮고 국내총생산 성장이 높은 경제호황은 (즉 잠재성장률과 일치하거나 초과하는 경우) 임금과 생산물의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 하지만 장기침체에 직면한 경제는 심지어 겉으로 호황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잠재성장률 밑에 머물러 있고, 인플레이션도 발생하지 않는다. 
▵ 건강한 경제에서 만약 가계저축이 기업투자를 초과하면 이자율이 하락하고, 낮은 이자율은 지출과 투자를 자극하며, 저축과 투자의 균형을 맞춘다. 하지만 장기침체에 직면한 경제는 저축과 투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이자율을 영(0) 밑으로 떨어뜨려야 할 수도 있다. 나아가 투자에 비한 저축의 과잉은 금융자산과 부동산의 가격상승을 야기할 수도 있다. 

왜 서머스는 2014년 시점에 장기침체를 언급하는가. 그리고 정책적 함의는 무엇인가. 이를 파악하는 것은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흥미로운 입구가 될 것이다. 그가 2014년 2월 전미기업경제학회에서 행한 강연, 「미국 경제전망: 장기침체, 이력현상, 제로 하한」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에 관한 서머스의 답을 들어보자.  


1) 서머스: 장기침체와 이력현상  

(1) 왜 장기침체인가?
서머스가 장기침체를 우려하는 글을 발표하였을 때는 2014년으로, 미국 경제가 경기침체의 깊은 골에 빠졌던 2009년 초여름으로부터 5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 시기 미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고용도 증가했다. 그렇지만 실제 GDP와 잠재 GDP 간 격차가 얼마간 좁혀진 것은 경제성장이 가팔랐기 때문이 아니라, 잠재 GDP가 하락했기 때문이었다. (잠재 GDP는 물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생산요소를 완전히 고용하여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산출치를 뜻한다.) 

달리 말하면, 미국 경제가 성장을 재개하긴 했지만, 2007~9년 금융위기 발발 이전의 잠재 GDP 성장 추세는 물론이거니와 2013년에 다시 추정한 (즉 그 값이 하락한) 잠재 GDP 성장 추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고용률도 경기하강기에 급락한 이후 매우 느린 회복세를 보였다. 

왜 잠재 GDP가 5%나 하락했는가. 미국 의회예산국의 추산에 따르면 잠재 GDP 하락 요인 중에서 총요소생산성 하락이 기여한 바가 11%, 자본투자 감소가 기여한 바가 48%, 노동시간 감소가 기여한 바가 41%다. 서머스는 이 중에서 자본투자 감소와 그에 따른 노동투입 감소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금융위기 발발 전에는 어떠했나. 2002~7년, 미국 경제는 만족스러운 성장률을 보였고,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지도 않았으며, 설비가동률이나 고용률 수준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서머스는 2002~7년의 경제성장이 지속가능한 방식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특히나 주택가격의 급상승은 GDP에서 주택부문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의 급상승과 깊은 연관을 맺었다. 이에 따라 가계의 소득 대비 부채 비율도 급상승했다. (금융위기 발발 이후에도 이 비율은 단지 조금 하락했을 뿐이다.)  

또한 이 시기의 거시경제정책을 살펴보면, 금융안정을 추구하는 건전성 정책은 불충분했고, 재정정책은 과도하게 팽창적이었으며, 통화정책은 지나치게 느슨했다. 그렇지만 만약 신용기준을 강화한 건전성 정책을 펼쳐서 주택 거품이 마구 팽창하지 않았다면,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달랐다면 2002~7년 경제회복이 가능했을지 질문해야 한다. 사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후반의 경제성장은 주식시장 거품과 깊은 관련이 있었고 그 거품이 꺼진 후 2001년 경제의 하강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까지 고려하면, 결국 1990년대 후반 이래로 지속가능한 금융이라는 조건에서 만족스러운 경제성장이 나타난 때를 과연 식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다른 선진국 경제를 보더라도 비슷한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처음 10년간 유로 지역의 경제실적은 인상적이었지만, 이는 유로 지역 경제에 금융자본이 유입된 결과로, 지속불가능한 거품에 의존한 것이었다. 지난 2009~14년 유로 지역의 경제실적을 보면 미국보다 더 불만족스럽다. 일본은 20년간 가까스로 1% 수준의 성장률을 보였다. 
 

다시 정리하면, 지난 15년간 선진국 전반에서 드러난 사실은 금융안정을 유지하면서도 만족스러운 경제성장을 달성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서머스는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경제구조가 변화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저축과 투자의 자연균형이 변화하여,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한 균형 실질이자율이 하락했을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균형 실질이자율이 계속 하락한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명목이자율의 하한은 영이기 때문에, 즉 명목이자율을 그 밑으로 더 내릴 수 없기 때문에, 특히나 경기하강기에 완전고용과 강력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한 통화정책을 구사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다른 한편, 실질이자율이 매우 낮고, 인플레이션율도 매우 낮다는 것은 당연히 명목이자율이 매우 낮다는 의미다(실질이자율=명목이자율-인플레이션율).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투자자가 고수익을 노리는 위험 추구 성향도 커질 것이다. 즉 투자자가 빚을 내서 빚을 갚는 폰지 재정에 의존할 가능성이 더 커지고, 따라서 금융불안정성도 증가할 것이다.  
 
(2)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한 균형 실질이자율은 왜 하락했는가 
서머스는 균형 실질이자율이 하락한다는 가설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여섯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부채로 자금을 조달하는 투자수요가 감소했다. 이는 과도한 레버리지(부채를 끌어다가 자산을 매입하는 투자전략)가 남긴 유산이기도 하고, 금융위기 이후 금융중개에 가해진 제약이 커진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머스는 생산적 경제활동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애플이나 구글처럼 선두의 테크기업은 거대한 규모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으나, 동시에 축장된 이 현금으로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모바일 메신저) 와츠앱은 소니보다 시장가치가 크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소니만큼의 자본투자는 필요 없었다. 과거에는 상당한 규모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면 보통 수천만 달러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수만 달러만 있으면 된다. 이러한 사실은 투자수요가 감소하고, 균형 이자율이 하락하는 결과를 낳는다. 

둘째, 앨빈 한센이 지적한 것처럼, 인구성장률의 하락은 자연이자율 하락을 의미한다. 즉 인구고령화가 나타나면 노후생활을 위한 저축이 증가하면서 수요에 영향을 끼치며, 경제활동인구 비중이 감소하면서 혁신적 경제활동도 줄어들어 공급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국의 노동력 증가율은 지난 20년에 비해 앞으로 20년 동안 상당히 감소할 것이다. (노동력의 교육수준도 악화될 수 있다.) 또한 기술혁신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도 동일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셋째, 노동소득과 자본소득 간 소득분배의 변화나, 자산을 더 많이 보유한 자와 덜 보유한 자 간 소득분배의 변화도 저축성향에 영향을 끼친다. 즉 자본소득에 유리한 소득분배는 기업의 유보이익을 증가시키며, 자산을 더 많이 보유한 자에게 유리한 소득분배도 저축성향을 높인다. 

넷째, 자본재의 상대가격이 하락했다. 그리고 자본재의 하락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내구소비재의 상대가격도 하락했다. 예를 들어, 지난 30년간 중위임금은 정체상태에 머물렀지만, 자동차 가격 대비 중위임금은 거의 두 배로 상승했다. 

다섯째, 세전 실질이자율이 아니라 세후 실질이자율을 고려해야 한다. 인플레이션율이 낮아진 상황(즉 디플레이션)을 고려하면, 같은 값의 세후 실질이자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전 실질이자율이 더 낮아질 필요가 있다. 

여섯째,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안전자산, 특히 미국 재무부증권의 보유고를 불균형하게 늘렸다. 이러한 요인 역시 균형 실질이자율을 하락시키는 작용을 했다. 그렇다면, 자연이자율 추정치는 가설에 부합하는가. 연준의 라우바흐와 윌리암스는 (실제 GDP와 잠재 GDP의 격차를 뜻하는) 산출 갭과 실질 이자율을 검토함으로써 자연이자율 추정치를 계산했다. 그들의 방법론을 따를 때, 자연이자율은 상당히 그리고 지속해서 하락했다. 더 간단한 방법으로, 10년물 물가연동국채(TIPS)의 그래프를 살펴보더라도 같은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물가연동채권은 수익률이 만기까지 불변인 반면, 원금이 물가에 연동되어, 물가가 오르면 채권의 액면가도 그에 따라 올라가고 물가가 내리면 액면가도 떨어지기 때문에, 리스크가 낮은 채권이다.) 
 
 
(3) 균형실질이자율 하락이 통화정책에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런 조건에서 거시 경제정책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나. 논리적으로 보면,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인내심을 갖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상황은 이미 벌어졌으나, 정책적 영향력에는 제한이 있다. 또 누군가는 정부 부채가 과도하게 증가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따라서 실행할 수 있는 정책에는 제한이 있다. 서머스는 이러한 전략이 일본이 지난 수년간 추구했던 것이자, 미국 재정당국이 지난 3~4년간 행했던 바라고 본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잠재산출량 하락은 지속적이고 장기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둘째, 자연이자율이 하락했다면, 실질 이자율도 하락시켜서 적절한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것이다. 지난 3~4년간 연준이 취했던 정책의 의미를 해석해보면 사실 이와 같은 것이다. 서머스는 이러한 대응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만,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기준금리, 즉 연방기금 금리가 이미 영에 도달했을 때, 경제활동을 추가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그리고 이자율이 영이고, 상당 기간 영을 유지하고, 리스크 프리미엄을 낮추기 위해 추가적인 개입을 할 때, 금융거품이 생길 가능성을 무시할 수 있나. 또한 연준의 대차대조표가 거대하게 팽창할 때, 이를 무한히 지속할 수 있냐는 문제도 있다. 또한 이러한 정책은 자산가격 수준을 올림으로써 소득분배 악화라는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덧붙여 일본의 경험을 보면, 이자율이 영이거나 매우 낮으면, 상환연장이 매우 쉬울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효율성이 매우 낮은 기업이나, 심지어 좀비 기업이 부채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할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에 의존하여 실질이자율을 하락시키려는 전략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상당한 비용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셋째, 서머스가 지지하는 대안은 이자율 수준이 어떻든 간에 수요의 수준을 올리는 것이다. 즉, 균형이자율 수준을 올리고, 그에 부합하여 산출을 늘리며, 이자율이 낮을 때 발생하는 다양한 리스크를 완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서머스는 다양한 접근법이 있을 수 있고 경제학자마다 그 효능에 대해 의견 차가 있을 수 있으나, 수요를 자극하는 정책은 무엇이든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재정긴축은 수요의 순증가를 낳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역효과를 낳을 것이다. 여기서 서머스는 몇 가지 강조점을 설명한다.

첫째, 미국의 규제개혁과 세제개혁은 분명히도 민간투자를 촉진할 것이다. 서머스는 연방예산 적자 감축에 높은 우선권을 부여하는 데 동의하지 않으며, 나아가 수요를 자극하는 재정정책을 장기적으로 유지한다는 공약이 신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무역협정을 맺거나 수출통제를 완화하거나, 또는 미국의 수출을 촉진하거나 외국의 중상주의 정책을 저지하는 방법을 통해서 수출을 촉진하는 정책은 수요를 증대시킬 것이다. 

셋째, 공공투자는 잠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바로 여기서 주기적인 수요충격이 이력현상을 통해서 경제에 영구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원래 이력현상은 노동시장에서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증가했던 실업이 경기가 회복되어도 다시 감소하지 않고 높은 수준으로 정착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경제위기가 장기적 성장 경향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이력현상을 더 넓은 맥락에서 활용할 수도 있다. 만약 경제성장이 내생적 현상이라고 본다면, 이력현상이 경제위기의 기본적 결과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경제위기로 물적자본 투자, 연구개발 지출, 신기술 채택과 같은 모든 것들이 일시적이라도 느려진다면 GDP 수준에 영구적 영향을 미치고 이력현상을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력현상을 고려하는 경제모델을 구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력현상이 실존한다는 경험적 연구는 여럿 있다.) 

서머스는 연준의 표준 거시경제모델을 활용해서, 정부지출을 위한 재정적자의 1% 증가가 실질 GDP와 재정지출 승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경제가 완전고용에 접근할 때까지 이자율이 영을 유지한다고 가정했다.) 이에 따르면, 이력현상이 발생한다고 가정했을 때, 재정적자와 정부지출이 실질 GDP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매우 긴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이력현상을 고려할 때, 경제위기 시에 재정적자를 줄이려는 정책은 실질 GDP를 악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발휘한다.

2016년 VoxEU에 발표한 글에서 서머스는 이제 정책입안자들도 이력효과를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라가르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했다. “수요 약세가 오래 지속될수록 기업이 생산능력을 줄이고 실업자가 노동력 [시장]을 떠나고 핵심적 숙련이 약화되면서 장기 성장에 해를 끼칠 위험이 커집니다. 수요 약세는 무역을 위축시키고 이는 실망스러운 생산성 증가로 이어지게 합니다.”  

넷째, 위에서 언급한 표준 모델을 활용했을 때, 수요의 증가는 일시적으로는 GDP 대비 부채비율을 높이지만, 경제성장을 가속화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부채 비율을 줄일 수 있다. 

종합해보면, 서머스의 결론은 통화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는 한편, 이력현상을 강조하면서 정부의 경제정책이 재정적자와 공공투자 지출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버냉키: 고정자본 투자수익률 하락 

서머스는 2010년대 상반기 연준의 정책이 안 한 것보다는 낫지만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셈이었다. 2006년부터 2014년 1월까지 연준 의장이었던 버냉키로서는 여기에 어떤 식으로든 본인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이자율이 현재 왜 이렇게 낮은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이어질 수는 없다, 즉 장기침체의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는 결론을 맺는다. 
 
 
(1) 왜 이자율이 이렇게 낮은가
버냉키는 서머스와 다른 방식으로 이자율이 낮은 이유를 설명했다. 버냉키도 낮은 이자율이 단기적 일탈이 아니라 장기적 경향의 일부라는 점은 인정한다. 위 그림4처럼 미국의 10년물 정부 채권 수익률은 1960년대에 상대적으로 낮았다가, 1981년에 15%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하락했다. 이런 패턴은 부분적으로는 인플레이션율의 상승과 하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투자자는 인플레이션율이 높을 때 더 높은 수익률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가연동국채의 수익률도 매우 낮아서, 5년물 국채의 실질 수익률은 현재 약 마이너스 0.1%다.
 
그렇다면 이자율이 왜 이렇게 낮은가. 버냉키는 길거리의 시민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 미국 연준이 이자율을 낮게 잡아놓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라 말한다. 그렇지만 이는 매우 좁은 의미에서만 진실이다. 물론 연준 정책은 기준 명목 단기이자율(연방기금금리)을 설정한다. 그리고 인플레이션과 기대 인플레이션은 연준의 정책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며, 이자율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경제에서 실제로 중요한 것은 실질이자율이다. (실질이자율은 명목이자율에서 인플레이션율 뺀 것이다.) 그리고 실질이자율과 가장 관련성이 높은 것은 (고정자본) 자본투자 결정이다. 그러나 연준이 (고정)자본 투자의 실질수익률, 특히 장기 실질수익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은 일시적이며 제한적이다. 단기를 제외하면, 실질이자율은 광범위한 경제적 요인, 예컨대 경제성장 전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균형 실질이자율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균형 실질이자율은 (일정한 조정기간을 거친 후에) 노동과 자본이 완전히 활용될 수 있게 하는 실질이자율인데, 다양한 요인이 여기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균형이자율 자체가 시간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예컨대 빠르게 성장하는 역동적인 경제에서는 균형이자율이 높을 것인데, 자본투자에 대한 예상 수익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성장이 느리거나 침체에 빠진 경제에서는 균형이자율이 매우 낮을 것인데, 투자 기회가 적고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나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요인으로 정부지출과 조세도 균형이자율에 영향을 준다. 대규모 재정적자는 균형 실질이자율을 상승시키는데, 정부의 차입이 증가하면 저축이 민간투자에서 빠져 나와 정부 쪽으로 가기 때문이다.

균형이자율이란 연준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궁극적으로 수익률을 매개로 저축자와 투자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연준은 무엇을 할 수 있나. 연준은 균형 실질이자율과 일치하는 수준으로 시장이자율(명목이자율)이 움직이도록 영향을 미침으로써 자본과 노동의 완전한 활용(잠재성장률의 달성)을 추구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균형 실질이자율이란 엄밀히 말하면 그 추정치다. 왜냐하면 균형 실질이자율이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연준이 균형이자율에 비해 시장이자율을 너무 높게 유지하면 경제가 침체에 빠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차입비용이 자본투자의 잠재수익을 초과하여 자본투자의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연준이 시장이자율을 너무 낮게 유지하면 경제가 과열되고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것이다. 

버냉키는 이런 설명이 지나치게 교과서 같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지만,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그릇된 경제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상원의원은 연준이 저금리를 유지함으로써 투자수익으로 생활해야 하는 은퇴자들을 곤경에 빠뜨린다고 비난했다. 그렇지만 균형이자율이 매우 낮은 상황에서, 연준이 이자율을 섣부르게 올리면 바로 경기침체가 나타나 투자수익률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연준이 이자율을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함으로써 금융시장을 왜곡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렇지만 연준은 어쨌든 간에 화폐공급을 결정하기 때문에, 단기 이자율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연준은 어느 수준이든 간에 이자율을 설정해야 하는데, 균형이자율에 부합하게 설정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버냉키가 보기에, 현재 균형이자율 수준이 어디인가를 두고 논쟁을 할 수는 있지만, 연준이 이자율을 ‘인위적’으로 설정한다는 비판은 초점을 벗어난 것이다.
 
(2) 장기침체 가설에 관한 버냉키의 평가 
버냉키는 서머스의 장기침체 가설을 이렇게 정리한다. 연준은 시장(명목)이자율을 영 밑으로 내릴 수 없고, 따라서 현재 인플레이션율 목표가 2%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실질이자율은 –2% 밑으로 떨어질 수 없다. 장기침체 때문에 균형 실질이자율이 –2% 밑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연준이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정책은 두 가지다. 첫째,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높임으로써 실질이자율이 더 낮아질 수 있는 공간을 여는 것이다. 둘째, 소비자와 기업의 지출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금융거품의 재발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정책의 세 가지 목표는 완전고용을 달성하고, 인플레이션율을 낮게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금융안정성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연준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이 인플레이션율을 올리거나 금융거품을 유도하는 것이라면, 장기침체라는 상황에서 이 세 가지 경제정책의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서머스는 이런 딜레마를 풀기 위한 해결책으로 재정정책, 특히나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한 공공인프라 지출로 되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버냉키는 인프라 지출을 늘리는 것은 현재 상황에 바람직하다고 동의하지만,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장기침체 상태에 있다면 재정지출을 더 늘리는 것은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장기적 대응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첫째, 정부부채가 역사적 기준에서 볼 때 이미 매우 큰 규모로 쌓였고, 둘째, 공공투자 역시 궁극적으로는 수익체감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버냉키는 미국 경제가 장기침체에 직면했다는 분석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왜 그런가. 

첫째, 버냉키는 서머스의 삼촌인 폴 새뮤얼슨이 MIT 대학원에서 실질이자율이 무한히 음의 값을 유지할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거의 모든 투자가 수익성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사실을 회고한다. 예를 들어 이자율이 음의 값이라면 (또는 영이라면) 길을 내기 위해 로키산맥을 깎아내는 것도 이득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균형 실질이자율이 장기간에 걸쳐 음의 값에 머물 것인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둘째, 지난 수십 년간 금융거품 없이 완전고용을 달성한 적이 없다는 서머스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펼친 연구에 주목해야 한다. 그 연구에 따르면, 테크기업 주식의 거품은 1990년대 호황에서 매우 늦게 찾아왔다. 그리고 2000년대 주택거품이 소비자 수요의 증대에 미친 영향은 여러 가지 요인, 예컨대 유가의 급상승, (미국 산출의 6%에 달하는) 무역적자와 같은 요인이 야기한 수요 고갈에 의해 상쇄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 후반 이래의 경제성장은 금융거품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느린 경제성장은 장기침체라기보다는 일시적 ‘역풍’이며, 그조차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 역풍이란 금융위기의 후과가 남아 있는 데다가, 주택시장의 회복이 더디고, 재정정책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셋째, 버냉키는 서머스가 국제적인 시야를 놓치고, 국내 자본투자와 가계지출에 영향을 주는 요인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에 가장 큰 우려를 표명한다. 해외에서 수익성 있는 자본투자는 미국에서 장기침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달러 환율은 이를 실현하는 한 가지 경로가 될 것이다. 즉 미국 가계와 기업이 해외투자를 하게 되면, 금융자본이 미국으로부터 유출되므로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고, 이는 곧 미국의 수출을 촉진할 것이다. 수출증가는 미국 국내에서 생산과 고용을 늘릴 것이다. 즉, 개방경제에서 장기침체가 벌어지려면 세계 모든 곳에서 자본투자 수익률이 매우 낮아야 한다. 

요약하면, 버냉키는 서머스가 주문한 재정정책에 대해 비판적이다. 부채가 증가하고 결국 투자수익률이 하락하여 균형 실질이자율을 올리는 데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버냉키는 현재 경제를 장기침체로 볼 수도 없다고 말하는데, 금융위기의 일시적 역풍도 결국 점차 사라질 것으로 전망하기 때문이다. 균형 실질이자율이 마이너스라면 투자가 살아날 수밖에 없고, 해외에서 수익성 있는 투자 기회도 미국 경제가 완전고용으로 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3) 서머스의 반론 

버냉키가 글을 발표하자, 서머스는 즉각 답변을 작성했다. 그 핵심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머스는 다시금 연준의 통화정책이 지닌 한계에 주목한다. 예컨대 버냉키는 2% 인플레이션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실질이자율이 –2%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데, 중앙은행이 언제나 인플레이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기대 인플레이션 측정치를 보면, 오히려 앞으로 10년 이상 인플레이션율이 2%에 미달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와 별도로, 어떤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한 저축을 생각해보면, 이자율이 하락하면 저축량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자면, 매우 낮은 금리가 이어지면 자본화율이 증가하고, 자산 만기가 늘어나고, 고수익을 노리는 리스크 추구 성향이 강해지고, 금융규율이 이완되면서 금융불안성이 촉발된다. 

둘째, 버냉키는 새뮤얼슨을 언급하면서 영구적인 네거티브(마이너스) 실질금리는 성립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버냉키도 영의 금리를 야기할 수 있는 메커니즘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언급하긴 한다.) 하지만 네거티브 실질이자율은 실제로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현상이다. 버냉키가 인용한 논문에 따르면, 미국의 이자율은 20세기 동안 최소 30%는 네거티브였다. 독일의 현재 10년물 명목이자율은 0.18%인데, 이는 네거티브 실질이자율을 의미한다. 영국 50년물 인덱스 채권 수익률은 오랫동안 네거티브였다.

셋째, 버냉키는 다른 연구를 활용해서, 지난 15년간 미국 경제가 금융거품 없이 만족스러운 성장과 고용을 달성한 적이 없었다는 서머스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한다. 이 쟁점에 관해선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2007~9년 거대한 금융위기가 촉발되기 전에 가계부채가 지속불가능한 속도로 늘어났고, 이것이 경제성장을 매우 크게 자극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넷째, 버냉키는 수익성 있는 해외투자는 미국 달러의 가치하락을 이끌고 미국의 수출을 촉진하기 때문에 미국이 장기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유럽과 일본을 보면, 이자율이 낮고, 디플레이션 경향도 크며, 산출 실적은 미국보다도 떨어진다. 즉 유럽과 일본이 장기침체라는 늪에 더 깊이 발을 담그고 있는 셈이므로, 수익성 있는 해외투자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사실 2003~7년의 저축과잉도 해외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본시장이 통합된 세계에서 세계 모든 곳의 실질이자율은 세계 모든 곳의 경제적 조건에 의존한다. 과잉투자 경향이 있는 국가보다 과잉저축 경향이 있는 나라들이 더 많으면, 세계적 수요부족이 존재할 것이다. 과잉저축과 침체를 향한 세계적 경향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과잉저축을 지닌 국가들이 그들의 저축을 줄이거나 투자를 늘리도록 자극해야 한다. 버냉키가 말한 것처럼, 환율을 통해 수요를 자극하려는 정책은 사실 제로섬 게임이다. 환율 변화로 한 곳에서 수요가 늘어나면 다른 곳에서는 수요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버냉키는 정부가 부채를 무한히 확장할 수 없으므로 영구적인 확장적 재정정책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실현 가능한 재정정책의 전망을 구체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실질금리가 영인 장기침체 경제라면, 정부에 갚아야 할 부채 이자는 매우 저렴할 것이며, 공공투자 프로젝트가 양의 수익을 낳는 한, 부채를 상환할 충분한 수입을 산출할 수 있다. 게다가 이력효과를 고려한다면, 공공투자 프로젝트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이론적 논점이 아닌데, 2014년 10월 IMF가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은 이자율 하한이 거의 영에 가까운 나라들에서 공공투자가 GDP 대비 부채비율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고 시사했다. 덧붙여, 중앙은행 정책이 기대인플레이션을 상승시키리라 희망하기 어려울 때 팽창적 재정정책은 기대 인플레이션을 높임으로써 실질 이자율을 낮추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4) 장기침체 논쟁, 평가와 함의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경제성장이 저조한 상태는 (당시 버냉키가 말한 것처럼) 위기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일시적 상황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서머스가 말한 것처럼) 장기침체에 빠진 것인가. 

필자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나아가 세계경제 전반에서 경제성장률이 매우 낮고, 잠재산출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이자율이 매우 낮다(영이거나 마이너스)는 관찰이나, 이러한 상황이 단지 일시적인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요인에 의해 추동되는 장기적 현상이라는 진단에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를 지칭하기 위해 ‘장기침체’라는 표현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서머스와 버냉키는 모두 균형 실질이자율(자연이자율)이 하락하는 추세에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런데 서머스는 그 원인으로 생산적 경제활동의 성격이 바뀌었다, 인구증가율 하락–인구고령화가 나타났다, 저축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소득분배가 바뀌었다, 자본재 가격이 하락했다, 안전자산 선호 경향이 강해졌다 등의 현상을 나열한다. 

반면, 버냉키는 균형 실질이자율이 하락한 근본적 원인은 투자수익률이 하락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투자기회가 적고 수익성이 나쁘기 때문에 저축에 비해 투자가 과소하고 이자율이 낮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우리가 이를 고정자본 투자수익률이라고 생각한다면, 기업의 이윤율이 낮기 때문에 고정자본 투자수익률이 낮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이윤율이 낮아서 이자율이 낮은 것이고, 이자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이윤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버냉키가 (고정)자본 투자수익률 하락을 지적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버냉키가 당시 상황을 일시적 역풍이라고 부른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재무부 장관 출신의 서머스가 장기침체라는 조건에서 연준 통화정책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반대로 연준 의장 출신의 버냉키는 재무부 재정정책의 실행 가능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서머스는 명목금리가 영 밑으로 떨어질 수 없다는 조건에서, 인플레이션율을 높여 실질금리를 떨어뜨리려는 연준의 정책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특히나 금융불안정성을 야기하기 때문에 통화정책에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버냉키는 정부부채가 이미 대규모로 누적된 상태에서 부채를 더욱 축적하는 정책이 지속 가능하지 않고, 공공투자 역시 투자수익률 체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재정정책의 한계를 강조했다. 

두 사람의 주장이 각각 타당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면, 우리는 장기침체와 정부부채 누적이라는 조건에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즉 정부의 모든 거시경제정책이 벽에 부딪힌 상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제 거시경제를 관리하기 위한 일관된 패러다임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서머스의 말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에서 정부의 정책적 대응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는 평가로 해석될 수 있다. 
 

5) 2023년, 장기침체는 끝났는가

서머스-버냉키 논쟁 이후로도 세계 경제는 크나큰 도전에 직면했다. 2017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고, 2018년 여름부터 미중 무역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어 2019년 말과 2020년 초부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전 세계로 확산했다. 그리고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개시되고, 2022년 상반기부터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로 연준이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즉 무역분쟁, 코로나 경기침체, 인플레이션 등 굵직한 이슈들이 화제에 오르면서 장기침체 이슈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장기침체 경향은 사라졌는가, 아니면 엄존하는가. 

흥미롭게도, 2023년 초 미국경제학회는 “우리는 장기침체의 시대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올리비에르 블랑샤르는 “장기침체는 끝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먼저 블랑샤르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는 장기침체에 대해, 민간수요가 구조적으로 적어서 고통받으며, 수요를 유지하고 잠재산출을 달성하기 위해 매우 낮은 이자율을 요구하는 경제, 특히 이자율은 성장률보다 낮아야 하는 경제라고 정의한다. (이자율 r, 성장률 g라고 할 때, r<g.) 그는 현재의 인플레이션이 장기간 지속되지 않을 것이지만, 저금리는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세계적 장기침체가 심층적인 구조적 요인에 의해 야기되었고, 코로나19나 인플레이션을 통해서 역전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는 이자율이 낮지 않고 높은 쪽이지만, 일단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중앙은행이 승리를 거둔다면, 코로나19 펜데믹 이전과 극적으로 다르지 않은 거시경제 환경, 즉  r<g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는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와중에도, 실질 이자율은 놀라울 정도로 낮다. 미국 국채의 10년물 명목이자율은 현재 3.4%이며, 의회예산국(CBO)이 전망하는 10년치 인플레이션은 2.4%로, 이는 10년물 국채의 실질이자율이 1.0%라는 뜻이다. 또한 의회예산국의 10년 경제성장률은 전망치는 1.7%이므로, r-g는 여전히 음의 값으로 –0.7%다. 이 값은 유로존의 경우, -1.3%, 일본은 -1.2%다. 

둘째, 구조적 요인이 엄존한다. 이자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저축과 투자(자본축적), 투자자의 안전자산 선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저축 측면을 보면, 기대수명 상승과 소득수준 상승은 저축을 늘리는데 이러한 기본적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투자가 어떨 것인냐는 예상하기 쉽지 않은데, 특히나 기술진보의 속도는 악명 높게도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난 40년간 기술적 폭발은 발생하지 않았고, 비상한 투자 호황이 베이스라인 시나리오일 수 없다. 안전자산에 대한 높은 수요도 바뀌지 않을 것이고, 안전 자산(국채)이라고 간주되는 국가도 적어질 것이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은 이자율이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 것이라고 시사한다. 

그렇다면 서머스는 왜 장기침체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첫째, 팬더믹 동안 이미 대규모 정부부채가 발행되었고, 앞으로도 미중 긴장 때문에 방위비지출이 계속 클 것이며, 녹색경제로의 이행은 더 많은 지출을 이끌 것이다. 의회예산국(CBO)는 GDP 대비 부채 비율이 앞으로 10년 20%p 올라간다고 예측하지만, 서머스는 그 두 배로 보는 게 적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GDP 대비 부채비율이 이자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신뢰할 만한 계량경제학적 추정방식이 없지만, 부채비율이 GDP 대비 1%p 올라갈수록, 이자율은 0.03%p 올라간다고 추정하는 것이 최선의 경험법칙이다. 따라서 이자율의 1%p 상승이라는 추정을 쉽게 얻을 수 있다. 

둘째, 연준이 금리를 올리는 동안, 기대인플레이션은 상승하지 않았고, 경제는 사람들이 예상하는 만큼 침체에 빠지지 않았다. 이는 균형 실질이자율이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았다는 뜻이다. 균형 실질이자율이 높아진 요인 중 일부는 일시적일 수 있으나, 모든 요인이 일시적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부의 팽창적 재정정책이 적절한 수준을 넘어 과대한 수준에 이르러, 균형 실질이자율이 실제로 상당히 상승했고, 따라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연준이 금리를 올려도 경기침체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연준이 지금보다 더 강한 기조로 금리인상을 단행해야 한다는 서머스의 최근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요약하면, 만약 실질이자율이 대체로 2% 범위 내로 진입한다면, 서머스는 이를 장기침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인 반면 블랑샤르는 여전히 r이 g보다 낮은 장기침체의 시대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서머스는 둘의 불일치가 너무나도 근본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인플레이션은 완연하게 수그러들지 않았고,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금리인상 정책도 끝난 게 아니므로,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이 끝난 후 경제성장률과 이자율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직접 관찰할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경제성장률이 낮고 이자율은 그보다 더 낮아야 하는 상황으로 되돌리려는 구조적 요인이 작동한다는 블랑샤르의 진단에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만약 잠재산출량 성장세도 계속 하락하고 실제 경제성장률은 여전히 그에도 못미치는 상태에 있으나, 정부지출이 과대하고도 비생산적이며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높은 이자율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이러한 상황을 부르는 이름은 그 악명 높은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위에서 블랑샤르는 투자수요나 기술진보의 속도를 예상하긴 매우 어렵지만, 어쨌든 지난 40년간 기술적 폭발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제 그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이는 사실 자본주의의 미래에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2. 장기침체가 역풍을 만나다  

 
로버트 고든은 2014년 8월에서 발표한 「거북이의 전진: 장기침체가 역풍을 만나다」라는 글에서 저성장이 25년에서 40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2016년 『미국 경제성장의 흥망성쇠: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생활수준』이라는 두꺼운 책을 발표하여 자신의 논지를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다. 

논지를 압축적으로 제시한 앞의 글을 보면, 그는 먼저 “서머스와 나는 현재 미국의 경제성장이 겪고 있는 딜레마에 관해서 서로 다른 측면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즉 서머스의 분석은 수요측면을 다루고 있는데, 영의 명목금리가 만성적이고 경제활동을 체계적으로 억제하여 미국 경제가 잠재산출을 달성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환경에서 어떻게 경제를 관리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고든이 말하는 미래 성장의 감속은 잠재산출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실업률이 정상수준으로 (즉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지 않고 일정한 상황과 부합하게) 하락한다면, 정의상 실제 산출은 잠재 산출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런데 고든이 추산한 바에 따르면 앞으로 몇 년간 잠재 실질 GDP는 고작 연간 1.4~1.6% 성장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다. 잠재 GDP 성장률이 하락하기 때문에 GDP 갭이 줄어들 것이다. 즉 현재 경제성장에서 핵심적 문제는 GDP 갭의 축소가 아니라, 잠재 GDP 성장률의 하락이다. (이 글이 발표된 시점 이후로 서머스 역시 잠재산출 성장률의 하락을 논하기 시작했다.)

한센이 1938년에 장기침체를 말했을 때는 잠재 GDP나 실질 GDP라는 개념조차 없었고, 따라서 총생산성이나 총생산성성장률 개념도 없었다. 우리가 현재 1930년대 후반의 미국 경제통계를 다시 보면, 잠재 GDP 성장은 건강했으나 GDP 갭이 거의 20%에 달한다. 즉, 이 시기 생산성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한센이 제기한 장기침체 우려를 기각한다. 나아가 어떤 낙관론자들은 1930~40년대의 급속한 생산성 증가가 다음 20년간 다시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1) 기술혁신의 감속, 생산성 하락 

하지만 《이코노미스트》 표지에서 미국 경제가 “특별한 매력을 잃다”고 부른 바는 1972년 이후에, 즉 (1870년대) 2차 산업혁명의 혁신으로부터 1세기가 지난 후에 나타났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에어컨, 상업적 항공여행, 고속도로 체계는 1870년대 기술혁신의 최종적 이행이었다. 1972년 이후 혁신의 감속은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수십 년간 거시경제학은 1970년 이후 생산성 성장의 감속을 이해하고자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고든은 질문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즉 1972년 이후 왜 생산성 성장률이 감속했느냐가 아니라, 1920년부터 1970년까지 미국경제에서 발생한 생산성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를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낙관론자들은 이 그림을 볼 때 실망할 수밖에 없다. 미래는 과거보다 더 좋아질 수 없다. 왜냐하면 1920~70년의 경제는 1920년 이전이나 1970년 이후에 비해 엄청난 속도의 총요소생산성 성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기술낙관론자들은 미래에 전례가 없는 기술적 돌파가 이뤄질 것이라는 데 희망을 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빅 데이터, 소형 로봇, 의학적 기적, 무인 자동차와 무인 트럭 등. 그런데, 사실 디지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90년대 중후반, 인터넷·웹브라우저·이메일이라는 형태로 개인컴퓨터와 통신이 결합한 것이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10년여 전에 이미 소비자 잉여나 무료 정보의 원천이 확립되었다. (1994년 아마존, 1998년 구글, 2001년 위키피디아, 아이튠스.) 스마트폰, 지메일, 구글맵 등등의 혁신은 1990년대에 비해 2차 혁신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도, 2010년대에도 총요소생산성의 상승은 저조했다.

나아가 기술낙관론자들은 앞으로 언급할 역풍을 무시한다. 따라서 그들은 하위 99%의 가처분소득 성장이 느려질 것이라는 고든의 핵심 주장에 대해서는 말하는 바가 없는 셈이다. 
 
 

2) 장기침체를 재촉하는 역풍: 인구, 교육, 불평등, 정부부채  

고든은 25~40년의 저성장(또는 성장의 소멸)이라는 예측이 기술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즉 기술변화 속도가 더 느려지지 않고, 지난 40년간과 비슷한 속도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잠재성장률 하락이 나타난다고 예측한다. 만약 기술변화 속도가 더 느려진다면,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될 것이다. 그에 따르면 1891~2007년 실질 일인당 GDP의 성장률은 연간 2.0%였던 반면 2007~2032년은 연간 0.9%일 것이다. 소득분배 하위 99%의 실질 처분가능소득의 성장은 그보다 훨씬 더 낮은 연간 0.2%에 불과할 것이다. 왜 그런가. 이미 지금도 강풍 급으로 불고 있는 역풍 때문이다. 그는 역풍을 일으키는 네 가지 원천을 꼽는데, 인구, 교육, 불평등, 정부부채다. 

첫째, 인구. 고든의 정의에 따르면 일인당 산출은 노동생산성(노동시간당 산출) 곱하기 일인당 노동시간이다. 20년 전에 시작된 생산성 감속은 1972~96년 노동력 참가율의 연간 0.4% 상승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되었다. 특히 여성과 베이비붐 세대의 십대가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반면 2004~14년은 연간 0.5%씩 하락했고, 특히 2007~14년은 연간 0.8%씩 하락했다. 0.4% 증가에서 0.8% 하락으로의 이행은 일인당 실질GDP의 성장을 1.2% 감소시켰다. 

2007~14년 노동시장 참가율의 하락 중 절반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에 따른 인구고령화에 기인한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경제적 여건이 나빠서 경제활동연령이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아서 발생했다. 경제여건이 괜찮아서 오로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인해서만 노동시장 참가율이 하락했다고 하더라도 (즉 연간 0.4% 정도 하락했다고 하더라도) 생산성 증가율의 하락을 상쇄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둘째, 교육. 20세기 대부분 기간에 고등학교 졸업 비율의 상승은 노동자의 생산능력을 높였다. 그러나 1970년에 이러한 변화가 끝났다. 특히 소수인종 학생의 중퇴로 인해 졸업률이 더는 상승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중등학교 졸업 비율이 16위에 불과하다. 이와 비슷하게 대학 졸업률도 16위에 머문다. 게다가 학자금 부채가 1조 달러에 불과하며, 대학 졸업자의 40%가 대학교육에 부합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셋째, 소득불평등. 최고경영자와 유명인사들은 봉급이 가차 없이 올라가고, 주식시장에서 수십조 달러의 부를 창출한다. 하지만 하위 90%의 경우, 기업이 임금과 수당을 인하하고, 확정급여형 연금을 확정기여형으로 전환하고, 오바마케어를 핑계로 전일제 일자리를 파트타임으로 바꾼다.

넷째, 연방정부의 GDP 대비 부채비율의 상승. 의회예산국의 공식적인 추정치는 사태를 과소평가한다. 무엇보다 잠재 GDP의 성장을 지나치게 낙관한다. 실제로 이 비율은 2030년대 말 150%에 도달할 수도 있는데, 이는 규모가 큰 주, 지방정부의 연금부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역풍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들이 제안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구에 관해선) 기대수명 증가에 부합하여 은퇴연령을 높이고, 합법 이민 한도를 과감하게 늘리며, 마약을 합법화하고 비폭력 범법자를 석방하고, (교육에 관해선) 캐나다가 교육재정을 조달하는 방식을 배우고, (소득불평등과 정부부채에 관해선) 시민권의 하나로서 보건의료시스템을 갖추고, 이를 운영하기 위한 부가가치세를 거두고, 탈세를 막기 위한 대규모 세제개혁을 달성하고, 배당과 자본이득에 대한 세율을 1993~7년 클린턴 행정부 수준으로 높이고 등등. 

하지만 고든은 아무리 이러한 정책을 실행한다고 하더라도, 미래 세대는 거북이 같은 성장속도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2007년 이전 200년 동안, 특히 1920~70년 50년 동안 성장이 그렇게나 빨랐던 것에 놀라움을 느끼면서 말이다. 
 

3) 기술혁신의 감속, 평가와 함의 

기술혁신의 감속, (총요소)생산성 성장률의 하락은 ‘수익성 있는 기술진보’가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노동생산성 상승에 비해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상승이 과대하여 즉 ‘자본생산성’이 하락하고, 결국 이윤율이 하락한다는 마르크스의 진단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고든의 논의에서는 이윤율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윤분배율이 일정하다고 할 때, 노동생산성 상승 폭에 비해 자본의 기술적 구성(일인당 고정자본)이 증가 폭이 크면 이윤율이 하락한다. 달리 말해, 경제성장 과정에서 수익성 있는 기술진보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일인당 고정자본의 증가 폭에 부합하게 노동생산성이 상승하지 못하면 이윤율이 하락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서머스와 버냉키, 고든은 각각 자본주의 위기 메커니즘 중 특정한 측면들을 강조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를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종합해보면, “수익성 있는 기술 진보의 어려움(고든) → 고정자본 투자수익률 하락(버냉키) → 만성적인 수요부족과 이력현상에 따른 장기침체(서머스, 블랑샤르)”라는 그림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주제가 있다. 왜 자본주의의 위기 메커니즘은 결국 국가의 재정위기, 부채위기로 나타나는가. 
 
 

3. 부채경제와 초거대위협 

 

1) 현대국가의 재정위기: 마르크스주의 분석

미국의 정부지출은 1907년 GDP 대비 6.55%에 불과했으나, 2022년에는 47.66%에 달했다. 사실 20세기 초반까지도 GDP의 10%를 과세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국가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과 1930년대 대불황을 거치며 조세제도의 급격한 변화가 벌어졌다. 1차 세계전쟁 이전, 사회주의운동이 확산되고 이와 공명하는 사회개혁운동도 출현했다. 이들은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하고, 조세부담도 더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지불할 수 있는 능력에 비례하는 조세를 요구했는데, 즉 자본가의 소득과 이윤에 대한 과세와 ‘누진세’를 요구한 셈이었다. 정부는 소득과 이윤에 과세하는 게 정부수입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이라고 인식했고, 일부 국가가 이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매우 부유한 개인과 기업만이 세금을 냈고, 정부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었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이라는 긴급한 상황이 벌어짐에 따라, 정부는 드디어 기업가와 부유층에 대한 ‘초과이윤세’, ‘전비세’, ‘국방세’를 본격 도입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다. 점차 법인세와 개인소득세가 정착되고, 누진세의 원리도 확립되었다. 그에 따라 선진국에서 1930~45년 사이에 GDP 대비 조세수입이 두 배로 상승했다. 

포괄적인 소득세 체계가 확립되던 때, 사회보장체계도 확립되었다. 일정 소득 이상의 노동자는 사회보장세(기여금)도 납부한 반면, 소득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세금이 면제되었다. 노동자의 사회보장 기여금은 정률 직접세 형태를 취했고, 소득세와 마찬가지로 고용주가 징수를 대행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현대 조세국가가 확립된 이유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현대국가의 재정을 분석한 오코너의 『미국의 재정위기』(1974)은 현대국가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두 가지 기능은 축적과 정당화인데, 국가는 한편으로는 자본축적이 가능한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조화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오코너는 축적을 위한 정부의 지출을 사회적 투자와 사회적 소비로 분류한다. 사회적 투자란 만약 정부지출이 없었다면 기업이 스스로 투자해야 했을 항목들을 말한다. 이는 다시 물적 자본 투자(인프라)와 인적 자본투자(교육, 연구개발)로 나눌 수 있다. 사회적 소비란 만약 정부지출이 없었다면 노동자계급 가계가 스스로 지출해야 했고, 사실은 이를 위해 기업이 임금으로 지불해야 했을 항목들을 뜻한다. 노동자계급이 집단적으로 소비하는 재화·용역이나 사회보험 관련 정부지출이 여기에 포함된다. 결국 사회적 투자와 사회적 소비는 기업의 비용을 절감해줌으로써, 자본축적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한다. 

다음으로, 정당화(legitimation)를 위한 정부지출은 사회적 손비(social expense)를 구성한다. 사회보험 외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다종다양한 복지프로그램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소비로 분류될 수 있는 실업보험 외에, 실업자들을 위해 고안된 복지제도(예컨대 구직훈련)에 지출되는 항목도 사회적 손비에 포함될 수 있다. 또한 체제 반란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경찰, 군대 유지비용도 손비 지출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왜 재정위기가 발생하는가. 오코너는 경제상황이 악화될수록 사회적 투자와 소비, 손비 지출은 증가하는 데 반해 사회 각계의 조세저항도 강해지므로 재정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보았다. 특히 오코너는 위기가 발생할 때, ‘생산적’인 성격을 띠는 사회적 투자에 비해 ‘비생산적’ 성격을 띠는 사회적 소비, 손비 지출이 더 빠르게 증가하므로, 즉 산출증가를 통해 위기를 극복할 여력이 더 줄어들기 때문에 위기가 점점 더 악화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다시 간단히 말해보자. 경기침체가 길고 강해질수록 기업가, 노동자, 빈민과 실업자 각각의 요구가 분출할 것이다. 예를 들어, 물류비용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인프라 투자를 늘려야 한다, 기업의 투자나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또는 감세)을 확대해야 한다, 사회보험에 대한 정부기여분을 높여야 한다, 노동자 가계의 돌봄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정부지출을 더 키워야 한다, 빈곤층에 대한 정부지원을 늘려야 한다 등등. 반면 경기침체기에는 이윤과 임금의 성장이 감소하므로, 세금을 늘리기도 쉽지 않다. ‘축적과 정당화’를 위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크고 강해지나, 국가의 재정여력은 점차 축소된다.  

그런데 1970년대 오코너가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연방정부나 주·지방정부가 조세가 아니라 채권을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할 가능성에 대해 얼마간 회의적이었다. 정부채권은 궁극적으로 조세수입으로 갚아야 하는데, 근본적으로 정부의 징세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74년 GDP대비 30% 수준이던 정부부채는 금융위기 직전에 60%, 2007~9년 금융위기 이후 2013년에는 100%, 코로나19 감염병이 폭발한 2020년에는 134%로 끊임없이 상승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가능했나. ‘금융세계화’와 함께 국채가 또 하나의 금융자산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전 세계 공공부채의 80% 이상을 상대적으로 소수의 은행과 연금기금, 보험회사, 헤지펀드 등 기관투자자가 보유한다. 기관투자자는 각국의 국채를 보유하며, 이를 담보로 한 파생금융상품 사슬이 구성된다. 또한 국가부채는 국부펀드의 담보가 된다. 요약하면 금융세계화라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국채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결국 국채는 사적 부채가 확대될 수 있는 토대가 된 셈이었고, 따라서 2000년대에는 공공부채의 증가와 함께 민간부채도 동시에 증가했다. 이렇게 우리는 ‘부채의 시대’와 직면하게 되었다. 
 

2) 초거대 위협: 거대 스태그플레이션과 부채 위기 

줄곧 어두운 전망을 제시하여 닥터 둠(종말의 날)이라고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는 2022년 『초거대 위협』(megathreats)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는” 열 가지 초거대 위협의 목록을 뽑았다. (① 부채축적과 부채의 덫, ② 장기간 지속된 저금리 정책과 금융위기, ③ 인플레이션과 스태그플레이션, ④ 통화붕괴와 금융불안, ⑤ 탈세계화, ⑥ 인공지능과 업무자동화, ⑦ 소득불평등과 포퓰리즘, ⑧ 강대국 간 지정학적 충돌, ⑨ 세계적 유행병, ⑩ 기후변화.) 

루비니는 이들 문제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고, 각 문제는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방해가 되며,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부채가 누적되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으므로, 이 글에서는 부채 위기를 치유하는 게 왜 그렇게나 어려운가에 대한 루비니의 설명을 들어보자. 
 
(1) 부채위기를 치유하는 일은 왜 그렇게 어렵나 
그에 따르면, 부채위기를 치유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독한 약과 고통스러운 재활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실행하기가 매우 어렵다. 부채 문제에 관해 당국이 구사할 수 있는 정책을 살펴보자. 

첫째는 부채를 줄이기 위해 당국은 긴축정책을 쓰고 민간도 부채를 줄이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는 응당 해야 할 일로 들리지만, 경기침체에 직면할 때 이러한 정책은 침체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버냉키가 실행한 통화정책은 민간이 낮은 이자율에 힘입어 부채를 늘려 투자나 소비를 확대하라는 뜻이고, 서머스가 강조한 재정정책은 정부가 역시 낮은 이자율에 힘입어 부채를 늘려 공공투자를 확대하라는 의미였다. 즉 장기침체라는 진단 그 자체가 긴축이나 저축과 반대 방향의 정책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장기침체에 대한 치유책과 부채위기에 대한 치유책이 충돌한다. (물론 장기침체를 극복하는 정책으로 성장이 재개되면 부채위기가 완화될 것이라는 지극히 낙관적인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서머스의 초기 입장이 그러했다.)
 
둘째로는 정부가 조세수입을 늘리기 위해 자산세(부유세)나 소득세를 늘리는 방법이 종종 제안되기도 한다. 그러나 초고소득자는 세금을 회피할 여러 방법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세수를 크게 늘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요행히 초고소득자에 대한 세입을 늘린다고 하더라도 그 규모가 실상 그리 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부부채 규모를 인상적으로 줄이긴 힘들다. 노동자의 경우도 소득 정체로 쪼들리는 상황에서 조세부담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정부 재정적자나 부채 증가율은 실행 가능한 수준의 세수 증가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어섰다.
 
따라서 셋째, 인플레이션이라는 방법도 존재한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실질금리가 하락하기 때문에 돈을 빌린 사람이 유리하다. 즉 채권자와 예금자의 부가 채무자와 차입자에게 이전한다. 예컨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정부의 부채 부담이 사실상 감소하는 효과가 나타나지만, 이는 정부에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손해를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합해보자. 루비니에 따르면, 부채를 줄이기 위한 긴축은 경기침체라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다수의 정책결정자가 현대화폐이론(MMT)의 실천적 결론과 사실상 유사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했다. 즉 금리를 낮게 유지하고 계속 부채를 쌓는다는 합의 말이다. 게다가 이러한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동반하게 되므로, 예금자, 채권자의 재산과 소득을 차입자, 채권자에게 재분배한다. 이러한 새로운 합의야말로 정책당국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온화하고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이 된다. 

그러나 쉽고 값싼 돈은 더 많은 빚을 유도한다. 이는 자산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고 거품을 낳을 것이다. 그 거품이 터진다면, 채무불이행과 인플레이션·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거대한 붕괴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2) 거대 부채의 슈퍼사이클 
자산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루비니는 제로금리 시대가 장기간 유지되면서 금융시장이 공짜 돈으로 자산, 신용거품을 키우는 카지노로 변모했다고 평가했다. 중앙은행의 수량완화(신용완화) 정책은 공공과 민간이 돈을 빌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줄였다. 과도한 재정부양책은 좀비회사를 구제했고, 주식(특히 성장주와 기술주), 부동산, 사모펀드, 스팩(우회상장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회사), 암호화 자산, 밈 주식(소셜미디어에서 주목을 받은 주식), 국채, 고수익·고등급 회사채,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 그림자은행, 헤지펀드를 뒷받침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3월부터 시작된 연준의 추가 구제금융은 모든 유형의 자산가격을 다시금 높였다. 

그 결과 2021년 말 인플레이션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는 1980년대 초반 이후 처음 보는 수준의 인플레이션이었다. 2022년 초, 연준과 여러 나라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율 상승 때문에 엄격한 긴축적 통화정책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내자 자산가격이 하락했다. 금융긴축이 경기침체로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커지면서 자산가격은 더욱 하락했다. 

루비니는 저금리로 인한 호황과 자산거품의 붕괴에 따른 불황이라는 주기를 겪으며 거대 부채의 슈퍼사이클(10~20년 주기)이 형성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주기마다 점점 더 많은 부채가 누적된다고 경고한다. 
 
(3)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위협
루비니의 진단을 따를 경우, 현재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벌이고 있는 싸움이 마무리된다면, 경기침체에 대처한다는 근거로 다시금 느슨한 통화정책과 과도한 재정정책이 이어지고, 이에 기대어 부채가 누적되는 슈퍼사이클이 재개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경제정책 자체가 자산 인플레이션 위험을 다시금 동반할 것인데다가, 중기적으로 부정적인 공급 충격이 전 세계를 강타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초거대위협 열 가지 중 후반부가 바로 이러한 공급 충격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 탈세계화나 공급망 조정(리쇼어링, 프렌드쇼어링)은 생산비용을 증가시키고 공급망 병목현상을 유도할 수 있다. 또한 ▲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볼 수 있듯이, 강대국 간 지정학적 충돌, 예컨대 대만 관련 미중 무력충돌이라도 발생한다면 이는 일반적인 공급 충격을 초월할 것이다. ▲ 기후변화는 세계 각지에서 농업·축산업에 지장을 주고 있으며, 탈탄소화 흐름은 상당 기간 에너지 비용을 증가시킬 것이다. ▲ 한층 심각한 팬더믹이 더 자주 발생한다면 생산의 모든 단계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정리하면, 루비니는 오늘의 부채함정은 내일의 인플레이션을 불러올 것이며, 다가오는 위기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공급충격 위험을 고려할 때) ‘거대 스태그플레이션 부채 위기’ 정도가 적당할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3) 부채위기가 사회운동에 함의하는 바 

오코너의 분석을 소개하면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경제가 위기에 깊이 빠질수록 국가에 대한 기업과 노동자 각각의 요구는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때 재정긴축을 반대하고 재정팽창을 요구하는 게 진보운동이 응당 해야 할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부의 재정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GDP 대비 세입 비율을 올리는 일에는 한계가 있고,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도 무한히 높일 수 없다. 

혹자는 ‘부자증세’를 하면 팽창적 재정정책이 언제라도 가능하며, 따라서 부채위기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 세계 각국의 정부부채 누적 속도는 실행  가능한 ‘부자증세’를 통해 메울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처럼 팽창적 재정정책이 언제라도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다는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운동 일각의 시각은 두 가지 오해를 전제로 한 듯하다. 

첫째는 경제학적 오해다. 국가의 재정위기, 부채위기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그 자체가 위기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 즉 팽창적 재정정책을 쓰면 언제라도 경제성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위기론은 물론이거니와, 앞에서 소개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현실 진단과도 충돌한다. 어찌 보면, 팽창적 재정정책을 무한정 옹호하는 진보운동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해서는 가장 열렬한 낙관론자인 셈이다. 

둘째는 정치학적 오해다. 즉 설사 팽창적 재정정책이 국가의 위기로 폭발하더라도, 오히려 이 위기는 진보적 사회운동의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막연한 희망일 뿐이다. 이미 부채위기를 겪은 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격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포퓰리즘적 슬로건과 프리랜서 자경단·민병대로 무장한 권위주의 정권이 등장하곤 한다. 인민이 원한다면 국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은, 무능한 정권을 대체할 수 있다고 호언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열광적 지지로 이어진다. 하지만, 포퓰리즘 정권은 집권을 할 수는 있어도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사회의 위기는 가중된다.  

루비니가 언급한 것처럼 부채위기를 완화하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 누구든 피하고 싶어 하는 게 자연스럽다. 필자가 보기에 ‘진보운동’ 대부분은 차라리 초거대 부채 슈퍼사이클을 선택하겠다는 합의 외부에 있는 게 아니다. 
 
 

4. 전망: 장기침체와 정상상태  

 

1) 장기침체와 전략적 경쟁

지금까지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 상황과 그에 관한 부르주아 경제학계의 논의를 살펴보았다. 단순화하면, 장기침체에 초점을 맞추는 입장은 금융불안정성이나 부채위기 가능성을 얼마간 감수하더라도 이력현상이 영구화되기 전에 적극적인 경제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부채위기에 초점을 맞추는 입장은 초거대 부채사이클을 멈추기 위해선 경기침체의 고통을 얼마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오디세우스가 머리 여섯 개가 달린 괴물 스킬라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가 고뇌하는 상황과 유비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현실의 경제학자는 중도의 길을 찾기 위해 애를 쓰겠지만, 의도대로 경제를 관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가장 가까운 예를 들어 보면, 2022년 상반기 인플레이션율이 치솟는 상황을 연준은 미리 예측하지 못했고, 이를 인정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적 지체가 있었다. 이미 2021년 상반기부터 바이든 행정부의 재정부양책이 GDP 갭을 넘는 과도한 수준에 이르러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다는 일부 경제학자(서머스, 블랑샤르)의 주장이 나왔으나, 정책당국은 경제정책을 수정하지 않았다. 이런 우려가 정말로 현실로 나타날지 아닐지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정책당국이 한 번 정한 경제정책 기조를 바꾼다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관리 정책이 극단적인 공황의 발발을 막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난기류를 아무 일 없이 통과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장기침체나 부채위기를 인식한다면 최근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장기침체나 부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수준의 저축과잉을 해소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세계적 수준의 정책공조, 특히나 미중 간 정책공조가 중요하다. (이를 오바마 행정부 당시에는 세계적 불균형(global imbalance)의 해소라고 불렀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의 저축과잉을 해소하기 위해선 중국의 인위적인 환율조작 문제를 해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정한 무역·투자질서를 확립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리고 이는 세계적 수준의 저축과잉을 해소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미국뿐만 아니라 미중 양국과 세계 전반에 이익을 주는 길이었다. 그러나 오바마 시대 미중 전략경제대화(G2)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즉 중국의 경제적 행동방식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인식에 기반해, 트럼프 행정부 말부터 공화·민주 양당은 초당적으로 합의한 ‘전략적 경쟁’을 선언했다. (전략적 경쟁의 경제적 함의에 관해선 다음 글, 임지섭, 「심화하는 전략적 경쟁,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자세히 다룬다.) 장기침체나 부채위기가 단시간 내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미국이 선언한 ‘전략적 경쟁’은 오랜 기간 꾸준히 추진될 중장기적 정책기조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장기침체와 정상상태, 정치적 함의  

마지막으로, 장기침체 이론과 대비하여 마르크스의 정상상태(定常狀態, stationary state) 이론을 검토하겠다. 정상상태는 고정자본과 국민소득의 성장이 멈춘 상태를 의미하므로, 고정자본 투자가 과소하고 경제성장 속도가 매우 느린 ‘장기침체’와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 이전 고전파 경제학을 개척한 스미스와 리카도 역시 정상상태 이론을 담고 있었고, 이를 균형상태 즉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상태로 간주했다. 또한 고전파와 마르크스는 정상상태라는 균형에 도달하게 되는 원인이 이윤율 하락이라고 보았는데, 이윤율이 하락하는 원인이 무엇이냐는 설명이 각각 달랐을 뿐이다. 스미스는 시장규모의 제한 때문에 자본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윤율이 하락한다고 보았고, 리카도는 토지고갈이 곡가, 지대, 임금인상으로 이어져 이윤율 하락을 이끌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국 스미스나 리카도는 시장의 제한이나 자원고갈이라는 ‘외재적’ 이유로 이윤율이 하락한다고 설명한 셈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수익성 있는 기술진보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자본생산성이 하락하는 게 이윤율 하락의 원인이라고 본다. 즉 시장의 제한이나 자원고갈이 없더라도 이윤율이 하락한다고 제시한 셈이므로, 이윤율 하락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이유로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경제가 정상상태에 근접하게 될 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다. 어떤 경제가 정상상태에 이른다면 이미 상당한 경제성장이 이뤄졌기 때문에, 최소한 과거에 비해서는 생활수준이 높아진 ‘풍요’한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J. S. 밀은 나아가 정상상태에 도달하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가 실현되리라 예언했다. 이미 풍요하고 더 이상의 경제성장도 필요없는데다가, 이자율도 영일 것이므로 누구도 자기의 노동생산물을 넘는 몫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분배정의가 실현된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케인즈의 견해도 밀과 유사한데, 노동생산성이 높고 이윤율은 낮기 때문에, 소득분배는 평등하고 임금은 거대한 규모의 소득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물질적 소비보다는 여가와 자기계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을 것이다. 따라서 밀이나 케인즈가 보기에 정상상태는 행복이 최대화되는 사회다. 정말로 현실이 밀과 케인즈의 희망대로 그러하다면 장기침체나 정상상태를 우려할 필요가 있을까. 

밀과 케인즈가 정상상태를 풍요과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그렸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은 정상상태를 경쟁, 위기, 붕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생활수준은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경제의 단순재생산조차 쉽지 않기 때문에 자본 간 경쟁이나, 노동자 간 경쟁이 훨씬 더 치열해진다. 누구도 보편적 이익을 위해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양보하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이 축적될수록 노동자의 도덕적 타락이라는 비참한 상황이 축적된다고 매우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또한 정상상태에 가까워지는 게 곧바로 즉각적인 파국이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더라도, 경제적 경쟁은 정치적으로 극한 갈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사회정치적 위기를 낳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세계 전역에서 포퓰리즘 정치가 득세하는 상황은 경제성장이 점점 멈추는 상황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런데 포퓰리즘 세력이 집권한 후, 그들이 실행하는 부두(Voodoo) 경제학은 경제관리에 실패하고 경제상황을 아예 파국으로 이끌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상쟁하는 계급의 공멸’이란 이런 파국을 뜻할 것이다.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이 상쟁하는 계급 간 공멸을 부채질하는 포퓰리즘 정치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가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단절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포퓰리즘 정치가 부채 사이클을 폭발시켜 파국을 이끄는 게,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의 미래를 질식시키는 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포퓰리즘 정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역량을 축적해야만 위기의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길을 모색할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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