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23 겨울. 1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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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주년 기념좌담

사회진보연대 |
일시    11월 16일(목) 사회진보연대 사무실
사회    박준도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
참석자    임필수(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실장), 서보람(공공운수노조 충북지역본부 조직국장), 이희태(금속노조 전략조직국장), 서단비(사회진보연대 광전지부 사무처장), 이진호(교육공무직본부 인천지부 조직국장)  
 
 
 
 

박준도    참석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 박준도입니다. 사회진보연대가 2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민중운동 단체가 사반세기 동안 이름도 바꾸지 않고 유지된 것은 흔치 않은 놀라운 일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지한 것 자체만을 자랑삼을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정세란 변하기 마련이고 운동은 정세분석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늘 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다는 게 칭찬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25년 동안 사회진보연대가 어떻게 정세를 분석하고, 어떻게 대응하려 했는지 살펴보고, 이야기 나눠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창립 시기부터 함께했던 회원부터 2007-9 금융위기 이후 활동하기 시작한 회원, 2020년 전후에 가입한 회원까지 한자리에 모셨습니다.

참가하신 분들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사회진보연대 창립 멤버인 임필수 정책교육실장입니다. 그리고 서보람 공공운수노조 충북지역본부 조직국장, 금속노조 미조직 전략조직실에서 전략조직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희태 회원, 사회진보연대 광전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단비 광전지부 사무처장, 교육공무직본부 인천지부 조직국장인 이진호 회원까지, 반갑습니다.
 

1.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

박준도    알다시피 사회진보연대는 초창기부터 신자유주의 비판에 주력해왔습니다. 신생단체였고, 20~30대 활동가가 주력이었음에도 여기저기 강연도 많이 다녔습니다. 사회운동이 신자유주의 비판을 자신의 과제로 삼도록 하는데 사회진보연대가 상당히 기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반신자유주의라는 맥락에서 정세분석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민주의 비판이나 세계 각지의 권위주의 정권 비판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회진보연대를 20년 넘게 지켜봤던 독자들에겐 최근의 입장 변화에 많은 궁금증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좌담회 발제문을 작성하신 정책교육실장님이 먼저 이야기를 해주시죠.

임필수    사회자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출범 당시 가장 중요한 테마는 금융세계화 비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의 금융화와 노동의 신축화에 맞서는 사회운동을 조직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당시에 코파(투자협정/WTO반대 국민행동)와 파견철폐 공대위 활동에 주력한 것이죠. 그런데 지금 정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민주의 또는 권위주의/팽창주의의 난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전후 세계질서가 지금 세 번째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후 시기 냉전 국면이 있었다면, 그 후에는 탈냉전이라는 국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국의 WTO 가입이 상징하는 것처럼 전 세계적인 경제 통합이 진행되고, 미국이 관여정책(Engagement) 형태로 경제 통합을 관리하기 위한 정책들을 펼치는 시기였습니다. 러시아도 푸틴 초기까지는 서방과 적극적으로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탈냉전 시대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 금융위기를 전후로 인민주의나 권위주의, 팽창주의가 국제사회에 갑자기 난입하면서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비판에 대한 문제의식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인민주의, 권위주의, 영토적 팽창주의에 대한 투쟁의 시급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이라는 위험, 즉 문명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준도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포스트 탈냉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보충해주시죠.

임필수    최근 가장 두드러진 징후는 당연히 우크라이나 전쟁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만해협 문제라든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같은 중국과 주변 국가들 간의 갈등도 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13-14년 시진핑 주석의 등장이나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2008년 조지아 전쟁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탈냉전 시기 통합과 협력이라는 국제질서에 균열을 낸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측면에서요. 

그렇지만 세계적인 경제 통합이라는 흐름 자체가 완전히 역전된 것은 아닙니다. 트럼프 정부가 미중 무역전쟁을 벌였고, 바이든 정부는 미중 전략적 경쟁을 얘기하더라도 양국의 무역 규모는 매번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거든요. 경제 통합이 그만큼 깊숙이 이뤄진 상태라 그것이 완전히 역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처럼 낙관적인 관여와 협력이 통하지는 않을 거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변화, 탈냉전 이후 달라진 흐름을 뭐라고 규정할지 논의가 분분합니다. 그래서 전략적 경쟁, 협력적 경쟁, 상호의존 하의 경쟁이라는 규정들이 나오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변화의 향방을 주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준도    국제정세 부분을 주로 설명을 좀 해 주셨는데요. 경제상황에 대해 조금 더 보충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국제정세의 위험을 설명하면서 투쟁하는 두 계급의 공멸 가능성도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한 국제정세의 저변에 경제적 측면에서 최종적 위기, 그러니까 금융 세계화 비판 시기와 다른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임필수    아까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 미중 관계의 변화가 생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변화가 발생한 계기 중 하나가 2007-9년 금융위기라고 볼 수 있어요.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주도 세계 경제 질서가 취약하다는 점이 드러났지만, 반면 동아시아 경제는 위기의 직격탄을 피했습니다. 그러자 중국에서는 이제 미국식 경제 모델을 세계적인 모범으로서 다른 국가들이 모두 따를 필요가 없다는, 중국식 경제도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부상했습니다. 이는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인민주의나 권위주의 팽창주의가 등장하는 과정도 2007-9년 금융위기라는 경제적 조건을 반드시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미국식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믿음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흐름을 과연 대안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는 것이죠. 인민주의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반경제학이나 반세계화 같은 보호주의가 대안이 되긴 어렵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려면 과연 신자유주의가 무엇이었는가에서부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물론 간단하게 경제의 금융화와 노동의 신축화라고 신자유주의를 규정할 수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어떤 과정에서 등장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식의 환상이 횡행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이전에는 고용이 안정되고 경제도 좋았는데 신자유주의가 망쳐버렸으니, 과거로 돌아가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오해죠. 1970년대 말은 경기침체와 대량실업의 시기였습니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한편으론 경제를 금융화해서 실물 부분의 수익성 악화를 만회하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실업에 대한 처방으로 실업의 조직화를 시도했습니다. 실업의 조직화란 일종의 반(半)실업 상태인 비정규직을 통해 실업 사태를 완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민주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나쁘고 우리가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영국의 브렉시트나 반세계화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법이 될 수 없죠. 

다른 한편, 금융위기 이후 현재 미국이나 주류 경제학에서는 위기관리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위기가 일거에 폭발하는 것을 막으면서 계속 위기를 지연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 중앙은행은 수량 완화 정책 같이 중앙은행의 부채와 자산을 대규모로 늘리고 정부는 부채를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위기가 폭발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관리전략을 쓰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민주의 세력들이 그런 건 모르겠고 의지만 있다면 좋았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부두 경제학적인 주장을 대중들에게 선동하고 있습니다. 

박준도    인민주의적 요구가 위기관리 전략에도 미달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생각해보니 최근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운동의 요구가 인민주의에 경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사회진보연대 초창기와는 상당히 달라진 점입니다. 사회진보연대 초기에는 사회운동이 신자유주의 하위파트너로서 기능하는 NGO로 전락해선 안 된다고 했으니까요.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인민주의 비판으로 정세분석이 달라진 것과 동시에 사회운동의 역할에 대한 문제의식도 변한 것이죠. 

임필수    YS 시기 대표적인 시민단체는 경실련이었습니다. 금융실명제나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제시했죠. DJ 시기에는 참여연대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은 소액주주 운동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호응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액주주 운동은 결국 주주 권리를 우선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상당수 노동자가 주주인 역설적인 상황인데, 국민연금을 통한 간접투자일 수도 있고 동학개미 불개미 같은 개인투자자들도 상당하죠. 어쨌든 주주의 이해를 우선시한다는 건 당연히 노동자와 관리자 연합을 파괴하는 것이고 관리자-주주연합으로 가면서 기업의 금융화와 경제 금융화 메카니즘을 작동시키는 것이라 사회진보연대가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회운동이 갑자기 자신 스스로 NGO라고 부르는 흐름이 나타났는데 제가 보기에 굉장히 못마땅했어요. NGO란 말 그대로 유엔에서 정부가 아닌 기구로 공식적 권한은 없지만, 자문이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비정부 기구를 의미합니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NGO를 비판하는 글을 소개하기도 했는데요, 해외 마르크스주의 잡지에 실린 히르쉬의 「NGO: 국가의 새로운 외피」나 페트라스의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NGO」를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사회운동이 NGO를 자처하는 흐름이 결국 사회운동의 독립성을 상실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한 셈이죠.

요즘에는 사회운동이 민주당과 유착이 심각하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계 위성 정당에 시민단체 출신들이 대거 출마하기도 했죠. 그 지경이다 보니 시민단체가 민주당에 대한 비판 기능이 전혀 없고 거의 한 몸이 되어서 당동벌이 행태를 보입니다. 그런 부분을 비판하는 것에 현재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와 국제정세 변화의 맥락에서 사회운동의 평가를 덧붙이겠습니다. 2008년에 러시아 푸틴이 조지아를 침공했을 때 전 세계가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푸틴이 그런 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그 당시 예측할 수 없었죠. 그래서 미국 정보부가 러시아가 100%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 같다고 말해도 사람들이 설마 그러겠냐고 생각했습니다. 비슷하게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같은 인물이 진짜 당선될 줄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과거의 질서에 익숙하다 보니 이렇게 극단적인 일들이 벌어지면 변화를 조금씩 체감하는 거 같고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리는 거죠. 한편으로 한국은 세계 금융위기를 빨리 넘겼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미국처럼 MBS 때문에 은행이 파산하는 일은 없었거든요. 몇몇 은행들이 몇백억 정도 날리는 일은 있었어도 유럽처럼 은행 전체가 폐업할 정도로 미국의 MBS에 투자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국내적 이슈였던 광우병이라든가 용산 참사는 금융위기와 관련이 별로 없다고도 할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이명박 보수정부에 대한 정치적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운동 전반이 국제정세 변화나 세계 경제위기와 별로 상관이 없다고도 볼 수 있는 반보수 활동에 매진하면서 금융위기를 지났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이 국제정세 인식을 심화할 기회를 놓쳤다고 할 수도 있고요. 

박준도    중요한 부분을 잘 짚어주셨습니다. 사회진보연대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비판과 동시에 군사세계화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시진핑의 대만침공 위협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어요. 과거와 당시가 연결되는 지점이나 달라진 지점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주세요.

임필수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는 발리바르 식으로 얘기하면 세계의 분할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나뉜다는 것인데, 금융 세계화에 포섭된 지역은 생명의 지대고, 배제된 곳은 죽음의 지대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생명의 지대는 중심부 국가들이 서로 공동관리합니다. 그리고 그 밖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참혹한 일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아니면 선택적으로 개입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건 제국주의 이론과 다릅니다. 제국주의론의 핵심은 열강들의 상호 경쟁이지만, 군사세계화의 핵심은 중심부 국가들의 상호 공동지배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배제된 지역은 열강들의 지배를 받지 못해서 더 괴로운 그런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업자와 임금노동자의 관계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포섭된 임금노동자에 비해 배제된 실업자가 먹고살기 힘든 것처럼 말입니다. 배제된 지역은 제한적 자원을 둘러싼 종족/부족 간의 투쟁이 발생합니다. 중심부는 자신들만의 안전한 경계선을 둘러치려고 하지만,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사람들이 역수입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주변부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으니까 도망쳐서 중심부로 들어가서 이주민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시리아나 리비아 내전으로 터전이 초토화되니까 난민들이 유럽으로 이주했고 그것이 유럽에서 첨예한 정치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군사세계화 비판의 초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당시 중국이나 러시아도 대체로 공동지배에 협력적이었습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러시아는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2007-9년 금융위기를 전후로 중국이나 러시아의 행동방식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중국 같은 경우에는 미국이 구상하는 규칙 기반 세계질서에 대항하여 자기중심적으로 규칙을 바꾸려는 세력이라면 러시아는 규칙 자체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래서 미국 입장에서 중국은 경쟁자라면 러시아는 교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국제정세와 한국 노동자운동

박준도    국제정세 분석의 초점이 달라진 부분을 정리해 주셨습니다. 활동하는 공간에서 이러한 분석에 대한 활동가들의 반응이 어떤지 이야기를 해주시죠. 

서보람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쟁점이 되던 초창기에는 관심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현재는 관심이 처음보다는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민주노총이 세계정세에 관심이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지도 민주노총 공식 회의 체계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재 민주노총 내에서도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대단히 논쟁적인데, 어떤 활동가는 우크라이나의 동부지역은 기존에 이미 상시 분쟁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고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대단히 러시아에 우호적인 태도죠. 다른 한편으로는 양비론도 많습니다. 반면, 대다수 조합원들은 러시아가 전쟁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합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많은 운동세력들이 러시아를 옹호하거나 양비론적 태도를 보이죠. 

박준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민주노총이 주관하는 강의, 민주노총이 추천하는 강사들의 강연이 상당히 문제적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뉴스에서 말하지 않는 진실을 알려주겠다거나 미국이 나토동진으로 러시아를 위협해서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며 사실상 러시아의 침략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어떠셨나요?

이희태    금속노조에서는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교육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공유한 뉴스의 내용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미국 주류 언론이 말하지 않는 우크라이나의 진실’이라던가 ‘서방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악마화가 세계를 위태롭게 한다’는 내용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교육을 들은 조합원에게 물어봤더니 사실 공감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왜냐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정당하다는 주장은 비상식적이라는 거예요. 

박준도    서단비 씨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관련해서 여러 활동을 하셔서 잘 알고 계실 거 같은데요, 사회운동 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논쟁 지형이 어떤가요? 

서단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두드러진 쟁점은 반미진영주의입니다. 반미진영주의는 세계를 미국과 미국에 반대하는 국가들로 양분하고 후자에 대해서 막연히 낙관하거나 열렬히 찬양합니다. 반미진영주의는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의 경우에도 러시아가 미국에 반대하는 국가라는 이유로 러시아를 두둔하거나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의 행태야말로 고전적 의미의 제국주의, 달리 말해서 영토 팽창주의거든요. 2022년 2월 23일 침공 이후 푸틴은 우크라이나는 항상 러시아의 일부였다고 공개연설하며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노골적으로 부정했습니다. 푸틴은 나토의 위협 등 외부요인을 핑계 삼지만, 우크라이나 침공의 본질은 러시아의 구시대적 제국주의 침략 전쟁입니다. 침공 직전까지 러시아는 본토에서 우크라이나는 물론 나토병력에 의한 어떠한 물리적 공격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러시아가 어쩔 수 없이, 선제적 방어를 위해 침략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며 변명하거나, 러시아의 침략이 다극체제를 촉진하는 진보라며 옹호하거나, 심지어 민간인학살이나 강간, 고문, 납치 등 전쟁범죄의 참상이 거짓말이라는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기이한 일이죠. 이런 모습은 사실 처음이 아닙니다. 글로벌 좌파는 러시아의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크림반도 점령에 대해서도 러시아를 두둔했거든요. 러시아가 개전 초기부터 지금까지 개입하고 있는 시리아 내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사드 정권은 테러리스트를 박멸하려면 어쩔 수 없다며 푸틴 정권과 손잡고 무수히 많은 자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습니다. 그런데 글로벌 좌파는 아사드 정권과 러시아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시리아 반군을 지원했다는 이유로요. 

동유럽 좌파들은 이런 태도를 보이는 좌파들, 특히 서구 좌파들을 ‘탱키’라고 부릅니다. 러시아가 미국을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러시아가 주변국과 세계에서 벌이는 만행에 눈감거나 옹호하는 모습을 비꼰 것이죠. ‘탱키’는 과거 소련이 ‘해방전쟁’을 표방하며 탱크를 몰고 동유럽에 진입했을 때 이를 비판하지 않고 환호하던 서구 좌파들을 부르던 멸칭에서 비롯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사회진보연대 광전지부는 연대단체들과 함께 2022년 5.18민중항쟁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한다. 러시아는 철군하라’는 상식적인 현수막을 게시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이 저희가 걸었던 현수막을 철거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문제 제기했더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민간인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은 가짜뉴스다. 미국이 러시아를 도발했기 때문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시더라고요. 정말 충격이었어요.

서보람    생각해 보면 확실히 사회운동에서 소련과 중국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고 지연되고 있는 거 같아요. 물론 사회운동 내부에 다양한 입장이 있습니다만, 미국이 더 나쁘고 중국과 러시아는 옹호해야 한다는 당위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느낌입니다. 정돈된 논리라기보다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요. 386세계관과 연결될 수도 있는데, 운동을 떠난 사람들에게도 막연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 같기도 한 것 같아요. 그럴수록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중국과 러시아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안 되다 보니까 사회운동의 국제정세 인식이 왜곡되고 운동이 위기에 빠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박준도    올해 초 전국민중행동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왔던 이해영 교수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흔들릴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 자체를 불가피한 미래, 심지어는 ‘진보’로 간주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임필수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지향하는 세계질서를 바람직하다고 포장하면 권위주의 반민주주의 국제 블록을 형성하는 것과 유사한 결과를 낳습니다. 러시아나 중국이 직접 문제 행동을 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일종의 권위주의 반민주주의 블록을 만드는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0년부터 아랍의 봄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오바마는 지지를 표명했지요. 반면 러시아는 반정부 시위 시민을 학살한 시라아 아사드 정권을 비호했습니다. 최근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사우디 빈살만 왕자가 2018년 반체제 언론인 사망 사건의 배후로 지목됐는데, 바이든이 문제 삼으면서 관계가 소원해졌어요. 그러자 중국이 슬며시 다가갑니다. 중국은 내정간섭 하지 않는다며 미국 말고 자기 손을 잡으라고 하는 거죠. 그런 방식으로 권위주의 정부를 옹호하거나 결집해서 세력을 형성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흐름을 다극 체제로서 진보라고 주장하면 권위주의 정부와 그들의 반민주적 조치도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가다 보면 민플러스식 세계관에 도달합니다. 미국에 저항하니까 탈레반도 지지하고 미얀마 군부 쿠데타 세력도 지지하는 어이없는 결론이죠. 그래서 과연 그런 부류의 다극질서가 우리가 지향한 바람직한 미래인지, 위험천만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서보람    앞선 얘기랑 연결되는 거 같습니다. 지금의 경제 상황은 주류경제학조차 방법이 없어서 비통상적인 임시방편으로 위기를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막연히 과거에 대해 환상을 가지는 것이죠. 아예 신자유주의 이전 시기가 좋았다는 식으로요. 다극세계에 환상을 가지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아예 헤게모니 국가가 없던 시절이 좋았다는 환상 속에서 다극질서를 옹호하는 것이죠. 다극질서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다극질서냐가 더 중요한데, 지금처럼 영토분쟁과 권위주의가 확산하는 질서라면 찬성하기 어렵겠죠. 개인의 권리가 말살되는 다극질서가 미국의 자유주의적 헤게모니를 대체할 만큼 좋은 방향인지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는데, 러시아나 중국이 그래도 낫다는 식의 태도가 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미국만 아니면 독재를 하든 세습을 하든 전부 용인하는 것으로 흐르는 것이죠. 

박준도    말씀하신 경향이 사회운동의 일부 세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입장이라서 참 우려스럽습니다. 사회운동에 대한 대중적 신뢰가 떨어지면서 정치적 영향력도 감소할 테니까요. 

서단비    역사적으로 반미반제투쟁의 시작점에는 분명 정세에 맞는 대의가 있었습니다. 거칠게 일반화하자면 당시 미국을 포함한 제국주의 세력의 패권을 해체하고 압제를 일소하여 전 세계 민중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오늘날의 반미반제투쟁의 목표는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도 지배할 수 있는 세계인가요? 혹은 미국으로 상징되는 전후 국제질서의 눈치를 보지 않고 누구나 원하는 대로 지배할 수 있는 세계를 향해 가자는 주장일까요? 이러한 주장은 반미반제를 이유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옹호하거나, 아프가니스탄이나 미얀마, 시리아, 이란에서의 압제를 정당화하는 모습에서 실제로 등장했습니다. 이것은 보편적 가치의 실종입니다. 이런 목표로는 시민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사회운동이 진보라며 제시하는 미래 전망이 이런 모습이라면 신뢰의 추락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서보람    반제국주의가 곧 반미라는 관점은 이상한 거 같아요. 러시아의 영토적 팽창주의야말로 고전적 의미의 제국주의니까요. 제국주의는 20세기 초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열강과 일본이라고 생각하는데, 운동세력 중 일부가 주장하는 반미반제에서 반제는 그것과 개념이 다른 거 같습니다. 사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란 강대국의 공동지배 성격을 가진다고 보거든요. 이 질서를 대안 없이 무너뜨리면 지금 추세로 봐서는 강대국 간의 경쟁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질서로 향할 텐데, 미국만 없으면 서로 동등하고 평화롭게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란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군사력 경쟁으로 힘의 균형이 생기면 평화를 달성할 것이라는 환상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군사력 경쟁은 오히려 전쟁 위협을 높이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잠재웁니다. 그것처럼 다극질서라는 것은 국가 간 전쟁이 일상화되었던 19세기로 회귀할 수 있는 위험이 있어요. 

임필수    말씀을 잘 해주셨습니다. 레닌이 제국주의론을 쓸 때 홉슨이 저술한 제국주의론과 힐퍼딩의 독점자본주의론을 참조해서 쓰다보니 여러 이야기가 섞여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식민지 경쟁을 펼치는 국가 간에 전쟁이 필연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인지, 아니면은 중심부 국가가 주변 국가로부터 경제적으로 이익을 획득하는 메커니즘을 강조하는 입장인지 뒤섞여서 혼란스럽거든요. 

그런데 아까도 말한 것처럼 열강 간의 영토팽창을 위한 식민지 쟁탈전이라는 제국주의 개념으로 미국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리기는 미국을 자유기업 제국주의라고 했죠. 미국은 영토 욕심이 없고 다른 나라에서 기업할 권리만 보장되면 된다는 입장이죠. 무역과 투자가 자유로우면 되지 굳이 영토를 식민화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국주의를 전통적 의미의 영토적 팽창으로 규정하면,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러시아나 중국이 그에 가깝습니다. 한편 제국주의를 경제적 잉여의 메카니즘으로 규정한다면 미국이 여전히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강탈이나 수탈, 그러니까 과거에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에 가서 군대를 앞세워 강탈하고 뺏는 방식은 아니지요. 자유롭고 평등해 보이는 자유무역을 하더라도 잉여가치가 중심부 국가로 흘러간다는 의미거든요. 중심부 국가와 주변부 국가 사이의 생산성 격차 때문에 가치의 이전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물론 이에 더해서 지적 재산권과 같은 쟁점도 있는데 그것을 강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로열티를 구매한 사람들은 기술이나 상표권을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이러한 잉여의 이전이 문제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회진보연대는 국제 노동기준을 강화해서 가치의 이전을 완화할 방안을 찾자고 주장했습니다. 주변부 국가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해 임금향상이나 노동조건 개선 투쟁을 하면, 자유무역 속의 가치 이전 메커니즘도 완화되거든요. 정리하면 전통적인 영토경쟁을 의미하는 제국주의라면 러시아나 중국이 더 가깝고, 무역을 통한 가치 이전 메커니즘이라는 의미에서 제국주의라면 미국이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사회운동적 대안은 반세계화처럼 EU나 무역협정을 탈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기준을 국제적으로 향상하는 것이고요. 

박준도    그런데 이런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거 같아요. 러시아나 중국이 잘못한 건 맞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국제질서 자체의 변화가 있어야 새로운 국제질서가 나올 가능성을 개방하지 않겠냐는 주장이요.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일단 흔들려야 새로운 국제질서가 태동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희태    어떤 새로운 국제질서인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다극체제가 곧 전쟁을 억제하고 핵확산을 억제하는 것은 아니죠. 팽창주의, 권위주의와 인민주의가 발호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오히려 전쟁과 군비경쟁을 부추기는 효과를 나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반전, 반핵 그리고 평화가 새롭고 대안적 국제질서를 만들기 위한 가장 기본적 합의라고 한다면, 현재 그것을 위협하는 러시아나 중국, 이란의 권위주의, 팽창주의 정권을 어떻게 제어하고 이에 맞서 투쟁하는 각국 민중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에 집중해야겠죠. 
 
 

3.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쟁점

박준도    이번 하마스 이스라엘 전쟁에 관한 사회운동들의 입장을 보면 하마스에 대한 비판 성명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민주노총 성명에도 하마스가 먼저 이스라엘 주민들을 납치·살인했다는 점은 전혀 언급하지 않아요. 이것도 일종의 진영논리가 작용한 결과일 텐데요.

임필수    과거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테러리즘을 강력히 비판했다는 사실을 회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1926년 7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조선공산당 선언」의 한 구절을 보면 “조선의 노력군중은 자력으로써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약탈자의 총검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이며 개인 의협가의 용감적 습격이 조선군중에게 하등의 자유를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의혈단과 같은 테러리즘은 아무리 개인의 용기 있는 행동이라도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테러로 특정한 사람을 제거하더라도 그 자리에는 곧 다른 사람이 배치되니까 그런 식으로는 바꿀 수 없다고 한 거죠. 오직 대중들의 운동을 통해서 변화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스트가 갈라서는 결정적 원인은 테러리즘입니다.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 사람을 납치하고 카페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니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중운동을 해야 한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민간인을 대상으로 거기다 어린아이들까지를 테러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상상하지도 못한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무장저항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대중을 각성시켜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로 활용하는 거예요. 마오의 유격대론이 그런 것처럼요. 지금 좌파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왜 테러리즘에 반대하고 대중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그 원칙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서보람    팔레스타인 쟁점은 어려운 문제이긴 합니다. 당연히 테러에 반대하지만,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을 장시간 다양한 방식으로 탄압해왔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폭력 행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가자지구에 지상군을 투입해서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으니까요.

임필수    발리바르가 2004년에 작성한 글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는 것은 전 세계의 보편적 대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얘기가 있는데요, 당시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자살폭탄테러가 너무 심했어요. 어린이부터 학생들까지 타고 있는 버스에 폭탄을 터뜨리는 일이 발생하니까 발리바르가 정말 이런 건 하지 말라고 만류했지요.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지만, 테러는 반대한 것이죠. 오히려 1국가 체제든 또는 2국가 체제든 또는 제3의 체제든 대안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과 공존을 지지하는 흐름이 힘을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반대로 그들의 입지를 축소하고 강경 우파세력가 득세하도록 만든다고 지적했습니다. 

어쨌든 현재 이스라엘은 세속주의 국가이고, 과거 이스라엘 좌파들이 키부츠 공동체 만들 때 아랍인들과 함께 사는 사회를 구상했습니다. 그런데 테러가 발생하고 충돌하면 극단적 시온주의 세력이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집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상황이 대안을 모색하려는 흐름보다 양극단의 강경세력이 충돌하고 있어서 우려스럽습니다. 사실 하마스가 대중적 지지를 상당히 상실했다는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과거 경향을 보면 이스라엘의 반격이 강해지면 하마스에 대한 지지가 회복되곤 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네타냐후도 사법무력화 시도로 정권이 큰 위기에 직면했었는데, 지금 하마스와 싸우면서 일단은 잠잠해진 상태고요. 이 같은 상황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극단적 세력들이 흔히 말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어간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도    어떤 활동가들은 하마스가 나름 선출된 권력이라 알카에다와는 다르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저항 세력의 일각으로 인정해야 한다면서요. 

서단비    하마스가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승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지금까지 선거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2006년 당시 경쟁세력인 파타가 무능해서 하마스에게 표가 몰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어떠한 선거도 없이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의문입니다.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를 지지하지 않는 비율도 상당합니다. 하마스에 불만이 있더라도 잔혹한 통치와 보복이 두려워 침묵한다는 증언도 많습니다. 

이번 노동자대회에서 받은 유인물을 보니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탄생했기에 하마스와 가자지구 주민들을 분리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 근거가 2006년 총선이라면 현재로선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하마스와 가자지구 주민을 분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이스라엘 극우 세력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가자 주민들은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오히려 좌파들이 하마스와 가자 주민을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극우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물론 그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하마스가 지극히 정당하기에 가자 주민들과 동일시해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마스를 처단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주장은 가자 주민들이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모두 테러리스트가 된다는 의미고, 그래서 이스라엘과 절대 공존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하마스와 가자 주민을 동일시하는 접근은 구체적인 현실과도 어긋납다. 그리고 10월 7일 하마스의 민간인 표적공격을 옹호하는 것은 자유와 정의라는 팔레스타인 대의를 훼손하고 고립을 초래할 뿐입니다. 이는 가자 주민들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4. 북한 핵 문제에 관한 인식

박준도    토론 주제를 좀 옮겨보죠.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입장 역시 쟁점적인데요, 창립 초기와 비교하면 비판의 강조점이 상당히 바뀌었어요. 창립초기에는 한미 군사동맹과 미국의 핵우산을 비판의 초점으로 삼았다면, 최근에는 북한의 핵무력 완성과 실전배치 위협을 비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임필수 정책교육실장님, 이에 대해 부연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임필수    제가 사회진보연대 초기에 한반도위원회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세계가 전반적으로 탈냉전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나토 같은 냉전시기 유산을 청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도 해체했으니까요.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한미일 군사동맹을 해소하거나 대규모 군축을 위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햇볕 정책을 펼치면서 남북 정상회담도 하고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도 시작했습니다. 한반도 역시 탈냉전으로 간다고 판단하면서, 냉전 시기에 군사경쟁에 사용됐던 비용을 평화적이고 긍정적인 것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걸 평화 배당금이라고 불렀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향후 북한에 한국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 틀림없이 노동 이슈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초민족 자본이 다른 나라에 진출하면 노동 문제가 발생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예비하고자 했습니다. 평화와 노동 이슈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개편하자는 것이죠. 그러니까 남북한의 즉각 통일이라기보다 평화공존하는 분단관리체제로 갈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이 비핵화를 할 의사가 있다고 우리는 추정했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 회고하면 아직 불확실한 부분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북한이 정말 비핵화를 할 의사는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핵보유 쪽으로 기운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사실은 비핵화 의사가 없었던 것인지는 당장 파악하기 어려워요. 아무튼 북한이 2000년대 핵실험을 감행했을 때까지 그래도 비핵화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런 전망을 바꾸게 된 것을 2013년 즈음입니다. 당시 오바마 정부가 막 들어섰습니다. 전임 부시 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강경 발언하면서 관계도 좀 험악했죠. 그런데 오바마는 대화 가능성이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오바마 정부는 부시 정부와 확실하게 선을 긋고 정책적 변화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해 6자회담만이 아니라 북한과 양자회담이나 정상회담도 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한 것이죠. 

그런데 북한이 오바마가 취임하자마자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그러자 유엔에서 북한을 제재합니다. 지난 유엔 결의문에서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또 하면 제재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북한은 반발하면서 핵실험을 감행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핵실험을 하기 위한 미사일 실험을 했다고밖에 볼 수가 없는 거예요. 오바마가 대화하자는데 왜 거부하는 것일까, 실제로 핵보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권력 승계가 이뤄지던 시기죠. 김정은의 권력 승계 정당성을 핵보유 강국을 이어가는 백두혈통에서 찾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죠. 그래서 저는 북한이 현재 핵보유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 카드가 아니란 의미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결론은 결국 탈냉전을 거부한 것은 북한이라는 것입니다. 

이진호    2018년에 한창 평창 올림픽도 하고 남북 정상회담도 하면서 평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임필수 실장님과 세미나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남북관계 전망에 관해서 물어봤습니다. 저는 하노이 노딜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임필수 실장님이 협상이 불발될 것이라고 전망하셨고, 정확히 그렇게 되었죠. 그래서 제가 한반도 정세진단에 대해서 임필수 실장님을 깊이 신뢰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실 제가 학생운동을 하던 시기가 임필수 실장님이 설명하신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변화가 감지되던 때입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회운동이 그에 대한 실질적 해법을 내놓지 못했던 거 같아요. 

박준도    올해 초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정세전망에 한반도 비핵화 문제의식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대의원들의 주장이 있었죠. 양경수 위원장이 이를 수용하긴 했어요.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쟁점이 있지만, 민주노총 강령이 비핵화 원칙을 표방하기 때문이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대의원대회에서 모두가 동의했던 건 아니에요. 한반도 비핵지대화, 핵감축이 목표여야 하지 않냐는 대의원도 있었거든요. 민주노총의 논의 지형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던 장면이 아닐까 하는데요.

서보람    북한 핵에 대해 관대한 입장은 NL만의 입장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훨씬 광범위한 동의지반이 있다고 봅니다. 한편으로는 북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여전히 간직해서라는 측면도 있겠으나, 다른 측면에서는 미국이 핵을 저렇게 많이 보유하고 있으니 북한도 핵보유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이러한 상태는 사실 한반도에서 평화를 어떻게 달성할지 사회운동 내부의 합의가 부족하고 그것을 운동으로 만들 경로가 없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민주노총에서 북한문제나 평화운동 관련 계획은 대부분 통일위원회에서 제출됩니다.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 선전전, 615공동선언 이행 집회 등은 열심히 진행됩니다. 그러나 북한 핵문제에 대해선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관련한 논의를 민주노총에서 공식적인 자리서 대중적으로 논의해 본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노동운동의 전략 중에서 평화나 국제주의 같은 이야기를 언급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노총이 한반도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운동과제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은 북한이 핵보유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에 근거한 운동을 설계해야 하지만 못하고 있는 것이죠.  

이희태    좌파, 비NL 세력이 북한 핵문제를 주로 미사일 발사 등 해당 사안이 발생했을 때 다루는 데 비해 NL 세력은 조합원 교육이나 활동가 성장 프로그램에서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 통일 마라톤, 걷기대회, 제주 4.3 역사기행 같은 프로그램, 통일골든벨 등 대중적인 프로그램에서부터 통일선봉대에 이르기까지 NL 활동가로 성장시키는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려면 사안별 비판이나 일회성 기획 수준으로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다양한 층위에서 반전, 반핵, 평화와 관련한 논쟁과 합의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공동 교안, 교육프로그램, 집회, 다종다기한 기획 사업들을 체계적으로 만들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번에 사회진보연대에서 발간한 소책자를 활용해도 좋을 것 같고요.

임필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가 독자적으로 여러 사업을 개최하는 방법도 고민해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포함해 좌파들이 보인 태도는 그들끼리 하고 싶은 거 하도록 내버려 두고, 우리는 우리 관심사에 집중하자는 거였죠. 조합원들도 대체로 무관심하니까. 하지만 이제 우리도 평화와 관련한 행사를 공세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박준도    지금까지 그것을 못하던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자기가 속한 단위의 조합원들에게 NL 시각이 담긴 교육이나 사업을 제안하는 게 아니면, 다른 노조에서 그들이 뭘 하든 묵인하든 게 하나 있을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NL뿐만 아니라 일부 좌파들조차 진영론의 시각에서 북핵을 바라보고 있다는 거예요. 자위권으로서 북핵의 지위를 용인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독자적으로 운동을 기획하려면 함께 추진할 수 있는 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희태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만 앞에서 말씀드렸듯 우리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느냐와는 다른 차원의 고민과 기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NL세력은 자신의 관점과 입장으로 나름의 교육프로그램과 사이클 사업을 만들고 노동조합 내에서 일정 부분 녹여내고 있습니다. 물론 입장발표나 정세적 실천도 하지만요.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과 사업을 탄탄하게 갖춰서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힘이 발휘되죠. 

박준도    이 주제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제 한국 정치로 넘어가죠. 임필수 정책실장님이 먼저 문제의식을 설명해주세요. 
 
 

5. 한국 정치와 인민주의

임필수    사회진보연대 출범 당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비판이 가장 중요한 테마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DJP연합을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한 최상의 정치적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시도로 평가했고요. 제임스 페트라스가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신자유주의 개혁과 정치를 분석했는데,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던 기존세력은 신자유주의 개혁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기존세력은 지금까지 추진하던 정책의 경로 의존성에서 벗어나기 어렵거나, 기업과 공무원 등과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그들의 저항을 견디기 어려워서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에서 자유로운 세력이 개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게다가 DJP연합은 보수와 진보의 연합이라서 저항을 상당히 누그러뜨린 측면이 있었습니다. 물론 노동운동의 저항이 상당했지만, 진보진영에서 DJ에 대한 상당한 지지가 있었거든요. 

그렇게 김대중 정부에서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서 대중적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노무현 정부입니다. 노무현 정부는 기득권에 대항하여 보통사람을 대변한다고 자임하면서 실제로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정치가적 인민주의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민주의 비판은 다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서 다시 인민주의가 활개를 치는데, 정치가적 인민주의라고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정치가적 인민주의는 대중들의 불만을 호도하여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것인데, 문재인 정부는 반경제학으로 일관해서입니다. 그다음으로 검찰개혁도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검찰의 중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독립성을 강화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그것을 역전시키는 모습을 보였어요. 검찰의 중립성을 강화하려면 독립성이 아니라 반대로 정치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해서입니다. 그런데 검찰을 통제하는 정치가 과연 중립적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죠. 문재인 정부의 추미애, 박범계 법무부 장관을 통한 검찰통제가 정말 중립적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간단히 답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민주당 의원 중 하나가 법치주의가 무서운 것이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민주당이 민주주의나 법치를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민주당의 행태가 민주정치의 근간을 흔든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민주정을 인민정으로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과거사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아시겠지만 김대중 오부치 선언을 통해 한일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 본인은 64년도 한일협정도 찬성했죠. 노무현 정부도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를 조사했는데, 보상에서 모두 일본 탓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정부가 일본에서 받은 돈을 피해자 보상에 충분히 쓰지 않은 잘못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정부가 일제 피해자 보상하는 법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재인 정부가 뒤집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기 대통령 비서관이라 뻔히 알던 문제를 뒤집어 버렸어요. 

그 후에 나타난 정치인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극성 지지자들의 문자폭탄을 양념이라는 식으로 두둔하면서 정치양극화의 포문을 열어서 이재명 대표 같은 정치인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겠죠. 정치는 더욱 극단적으로 흘러가고 말이죠. 

박준도    이제 토론을 해보겠습니다. 한국정치 현실에 대해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문재인 정부의 인민주의적 행보를 노동조합에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이진호    과거보다 민주노총의 계급투표 대상이 민주당이 되어버린 것이 확실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실제로 민주노총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본 조합원도 있었어요. 저는 당연히 아니라고 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그런 경향이 훨씬 강해진 것 같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실제로 진보진영이나 노동운동의 일부 요구를 수용해서 정책으로 추진하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조합원들 입장에서는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죠. 그러면 당연히 인민주의 비판이란 문제의식을 받아들이기 어렵죠. 그것에 도달할 경로가 없어요. 심지어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연히 이것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민주노총의 요구를 민주당이 들어주니까 단기적으로 민주노총이 계급투표로 민주당을 찍을 수 있겠다고요. 그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이라는 거죠. 

서보람    문재인 정부랑 노무현 정부 시기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같지는 않았습니다. 2003년만 해도 신자유주의가 일정 통하는 시기였다면, 금융위기 이후로는 그렇지 않았죠.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퇴진-탄핵 촛불의 성과로 당선된 사람이다 보니 시민들 역시 내 손으로 건설한 정부라고 생각했던 측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도 촛불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한계는 분명하지만, 문재인 정부를 투쟁의 결과로 여겼던 것 같고요.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도 민주노총을 무시할 수 없고 민주노총도 문재인 정부를 활용할 수 있다는 기대가 일정 정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예전보다 노동조합의 경제주의 경향이 강화된 측면도 있다 보니 조합원 대다수가 보수 세력보다는 문재인 정부가 그래도 낫다고 여깁니다. 

여기에 정부성격에 따라 민주노총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 차이가 존재하고요. 물론 노무현 정부 때는 화물연대 파업부터 열사투쟁이 다수 존재하면서 민주노총이 대립각을 세우긴 했습니다. 그래서 들어보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반노동적이라는 인식을 가진 분들이 노동조합 내에도 일정 정도 존재하는 것 같은데, 문재인 정부는 물리적 폭력을 통한 탄압을 거의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한계였지만 초기에 비정규직 대책 발표나 성과연봉제 등 2대 지침 폐기 등이 이루어지면서 좀 더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아요. 

현재 상황에서 좀 더 고민해야 할 것은 조합원들이 정권을 판단할 때 나에게 얼마나 유리하냐 혹은 불리하냐가 가장 중요한 판단지점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최근 민주노총 조합원이 크게 늘었는데, 신규 조합원들은 민주노동당과 같은 경험도 전혀 없어서 진보정당 운동과 민주노총의 관계라는 인식도 전혀 없어요. 진보정치라는 인식이 없다 보니 민주당에 기대하게 되고 실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희태    말씀에 동의합니다. 예전에 진보세력, 진보정당이 내세우던 무상시리즈 정책을 민주당이 싹 흡수해버렸죠. 박원순 서울시장 같은 사람이 그런 이슈를 선점했는데, 진보정당 운동이 돌파구를 잘 찾지 못한 거 같아요. 민주노총도 접점을 찾지 못하고요. 요즘에는 노조가 정책적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도 잘 못 찾는 듯해서 우려스러워요. 정책은 정치권이 개발하면 되는 거고, 노조는 핵심요구 걸고 나중에 정책을 수용하거나 반대하면 된다는 인식이죠. 그러다보니 민주당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노조의 자발성이 더 약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준도    여러분들의 말씀대로라면 민주노총의 활동 방식 자체가 인민주의의 토대라고 규정할 수 있을 텐데요. 

서보람    인민주의의 토대라고 말하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세계적으로 권위주의나 인민주의가 발호하는 상황인데, 당연히 노동조합을 비롯한 정당이나 사회단체들에서도 그런 경향이 발호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노동조합이 근본적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다만, 반지성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에는 노동조합에서 소모임하고 학습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현장조직에서는 사회문제를 토론하고 정파들이 서로 건강한 논쟁도 하면서요. 그런데 지금 보면, 정파들이 세력으로 뭉쳐있기는 하지만 이념이나 정세분석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내에서 논쟁과 토론을 건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습니다. 

민주노총,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이야기가 계속 제기되는 것처럼 민주노총이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오히려 후퇴했다고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게 얼마나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기준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판단하는 경제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는 것일 테고요. 그래서 민주노총이 실리적으로 민주당을 활용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요. 

박준도    2000년대 초반에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모두 반신자유주의 전선 아래 사회운동과 함께 하려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사회운동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려 했었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금융위기 이후에는 역전되었어요. 반보수 전선을 주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쇠락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자, 반보수 전선을 주장한 거죠. 이렇게 논의가 전위된 걸 보면, 민주노총에게 반신자유주의란 무엇이었을까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서보람    신자유주의 반대는 사람들이 민영화, 구조조정 반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노동권을 방어하는 투쟁이죠. 그래서 민주노총과 사회운동이 반신자유주의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인민주의 비판은 민주노총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요. 인민주의 비판의 맥락에서 문재인과 이재명을 비판해야 하는데, 조합원들에게는 윤석열보다 더 신뢰가 가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법치라든가 국제정세에 대해서는 조합원들이 큰 관심이 없고 당장 임금과 노동조건이 훨씬 크게 와 닿는 것이죠. 

임필수    노무현의 인민주의와 문재인의 그것이 질적인 차이를 낳는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습니다. 386정치인과 386지지자들이 융합하게 된 세 번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386 세대는 노무현 씨가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던 시기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거리에 나서기 시작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이후에 정치적으로 다시 결집하면서 하나의 세력이 됐죠. 그들만의 왜곡된 세계관 역사관 운동관이 형성되고요. 그리고 노동운동의 지도자들도 사실 상당 부분 그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라 그런 자장에서 자유롭기 어렵죠. 

어떻게 보면 야권연대 최정점이 2012년 대선이었습니다. 심상정 후보를 비롯한 이정희 후보가 박빙의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고 사퇴했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은 선거법 개정을 약속한 거죠. 진보정당이 내세우던 무상시리즈 정책도 민주당이 수용하고요. 민주당은 민주노총과도 정책협약을 통해 다양한 약속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가 낙선해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가, 이후 2017년에 당선되면서 당시 약속을 이행합니다. 

그런데 민주당과 정의당 관계가 삐끗한 것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시행하면서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어서입니다. 정의당으로서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정당들 사이에는 경쟁이 발생하죠. 그런데 민주당과 민주노총은 관계를 해칠만한 일이 없었어요. 약속 이행이 덜 됐다고 불평할 수는 있어도 상당 부분 노조의 요구를 수용했거든요. 정의당처럼 배신당했다고 평가할 일이 없던 거죠. 그래서 민주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의존이 고착화할 가능성이 훨씬 커요. 하지만 민주노총은 알리바이가 많습니다. 야권연대는 정당 간에 합의한 것이고, 우리는 진보정당 지지한다고요. 그리고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도 거부하죠. 이런 것들을 근거로 대외적으로 민주노총이 독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민주당에 대한 의존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서보람    국회 다수당을 보수가 차지하는 것보다 민주당이 낫고 그것보다는 진보정당이 낫다는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노동조합이 정당에 의존하지 않고 정치화하는 실력과 비전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 쉽지 않죠. 그러니까 외국에도 노조가 법안이나 제도를 만드는 것에 적극 나서는 일이 드물죠. 노조에서 모두가 현실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대표적인 사례가 공무직 노동자들입니다. 지자체 장이나 교육감이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처우가 달라질 수 있는데 노조가 민주당을 선택 안 할 수 있나요. 노조법 2, 3조도 민주노총이 열심히 투쟁하지만, 민주당하고 협력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노조로서는 우리가 민주당을 활용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민주당 역시 우리를 이용하는 것이거든요. 이 부분이 언제나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임필수    민주노총 전직 위원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민주당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의 민주노총 포섭시도를 거부하기 어렵겠죠. 게다가 진보당 같은 세력이 이재명 대표나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대가로 지분을 요구하는 흐름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해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문재인 정부부터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까지 민주정의 타락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노조에서 설득하기 쉽지 않음을 객관적 조건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민주당과 민주노총의 그런 관계를 정치적 후견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노조가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를 대가로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후견이 뭐가 나쁘냐는 분위기죠. 

이희태    노조가 민주당 을지로위원회에 과도하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노조가 정당과 사업을 일절 하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 같아요.

임필수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 채널을 가동한다면,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제도적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정권 성격에 따른 일정한 굴곡이야 있겠지만, 지금처럼 노조가 제도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대가로 하는 방식보다 낫죠.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대화 채널은 외부에서 보는 눈이 많아서, 노동조합으로서도 보편적이고 실행 가능성을 고려한 정책이나 요구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고요. 민주당 을지로 위원회나 민주당 분파를 지지하고 그들을 통해 노조의 요구를 실현하는 관계가 오히려 퇴행적입니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를 거부하고 민주당과 거래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이것이 노조의 독립성을 보장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희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사회적 대화를 제안했지만, 진통 끝에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어 지도부가 사퇴했던 일련의 사태가 노동운동 내에 미치는 후과가 굉장히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노총이 전례 없는 재난 시기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위상을 새롭게 확립할 기회였다고 생각했는데요. 우리 내부의 합의도 실력도 일천했음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을 둘러싼 갈등과 혼란만 가중되며 사회적 대화라는 말도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서보람    그런데 노사정대화의 무산은 김명환 집행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노사정대화가 정세적 문제가 아니라 원칙적 문제로 보는 분들도 계시니까요. 그런데 어려운 문제는 그런 분들도 자신과 직접 관련된 사안이 있을 때 민주당을 이용 안 하냐 하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실 매우 양면적인 태도이지요. 

박준도    그런 분들의 경우, 사회적 대화는 정부·자본 대 노동이 2:1이기 때문에 우리가 활용 당할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반면, 민주당과의 거래는 1:1 관계이고 기본적으로 노동이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돌파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활용할 수 있다고 합리화합니다. 광주 지역에서 민주당과 시민단체, 노동조합의 관계는 어떤가요? 

서단비    잘 알려져 있다시피 광주는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초강세인 지역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민사회도 민주당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습니다. 지역의 시민단체장이나 시민단체연합장 출신 인사들이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광주는 사실 민주당이 집권 안정을 위해 노동조합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6. 노동조합 운동의 혁신과 사회진보연대

박준도    사회진보연대는 창립 때부터 혁신이라는 단어를 썼죠. 혁신을 위한 사회진보연대의 여러 활동 중에서 좌담 참가자 여러분께서 인상적이었거나, 심도깊은 평가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있는지요?  

서보람    저는 우리가 노동운동에 관한 환상이 있었다는 게 제일 뼈아픈 평가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들이 노동운동에 들어가려고 했던 곳은 주류 집단이 아닌 곳, 새롭게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하는 곳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활동가들 역시도 더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노동운동이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고, 경제주의 경향 역시 강화되고 있습니다. 조직화나 교섭의 방식에 관해서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정확한 문제의식이나 목적의식이 없으면 노조의 기존 경향성에 휩쓸리기 쉬웠습니다. 노조에 간 활동가들은 혼란을 느끼더라도 일단 노조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틴 경우가 많았다고 봅니다. 우리가 가서 어떻게 하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만, 노동조합이 아래에서부터 제대로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은 잘 못 했던 것 역시 사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대표적인 환상이 비정규직 조직화를 통해서 새로운 리더를 만들면 혁신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정규직 대공장 중심의 운동을 비판하면서 소규모 영세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해서 노동운동 전반을 이끌 새로운 리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경제적 위치가 곧 운동의 진보성, 급진성, 이념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한 것입니다.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오히려 더 경제주의에 매몰될 수 있는데, 그들이 훨씬 더 불안정한 위치에 있어서 단기적 이익추구에 매달릴 수도 있었죠. 

이진호    제 생각엔 사회운동 노조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방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방식이 미조직 노동자를 잘 조직하고 새로운 세력으로 키움으로써 일정한 조건을 형성하고, 그러면 이제 정세나 여러 이슈에 대해 노동조합이 발언을 많이 하면 된다, 이런 수준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노조에 대한 이해나 노하우, 경험이 부족했다면, 이제는 노하우와 경험뿐만 아니라 관계와 신뢰도 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체적 조건과 객관적인 상황 사이에 불일치가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즉 노조에서 무언가를 해볼 만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노조의 상태나 객관적 정세가 너무 안 좋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우리가 올해 민주노총 각급 선거에 이렇게 많이 대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했던 것을 한 번 결산해보자는 생각이 있는 듯합니다. 

이희태    제가 아는 사회진보연대는 노동조합의 혁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제기하는 조직입니다. 혁신의 내용에 대한 고민도 있지만, 혁신의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도 고민해왔다고 생각해요. 지역과 현장으로 회원들이 진출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혁신을 모색해왔다는 점에서 여전히 훌륭하다고 생각하고요. 

혁신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화물연대에서 안전운임제를 통해 근기법을 적용받지 않는 화물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간접적으로 개선하고 운임 결정 과정에 개입하여 정부와 자본을 대상으로 일종의 교섭을 시도하려고 했던 사례가 기억에 남습니다. 금속노조에서도 산업단지의 미조직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고 금속노조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통해 지역 협약 등을 모색하고 있고요. 이런 사례가 사회진보연대만의 활동의 결과물은 결코 아니지만 이를 만들어가는 데에 바지런히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단비    그간의 생각을 돌이켜보면, 운동의 대상이 운동이라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운동을 혁신하는 운동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과, 운동을 혁신하는 것 자체를 우리의 최우선 과제로 명시적으로 목표하는 건 다릅니다. 과거에는 사회진보연대라는 존재 자체가 운동을 혁신하는 운동이라는 접근이었다면, 최근에는 운동의 혁신을 명시적 지향으로 내외에 표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매일매일 일상적으로 만나고 피부로 느끼는 건 구체적인 사람들과 개별 사건들이지 ‘운동’이라는 추상적인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대상으로 무슨 싸움을 해야 하는 건지 갈피가 안 잡힌다는 거죠. 구체적인 일상을 벗어나 시야를 확장하도록 강제하는 건 정세적인 계기나 전선운동과 같은, 구체와 추상을 이어 줄 중간 매개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반신자유주의 전선운동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반신자유주의 전선운동의 빈자리에는 반보수전선 달리 말해 야권연대라는 왜소한 대체재가 있을 뿐입니다. 유의미한 전선운동이 소실 된 이후 과거처럼 전선이라는 전체운동에 기여하는 부문운동이라는 도식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개별 노동조합 운동을 포괄하는 전체 노동운동 혹은 사회운동이라는 범주는 계기나 매개 없이 직관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운 영역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운동을 혁신하는 운동, 운동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게 무엇인지 다가오지 않고, 손에 잡히는 범주 안에서 매진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임필수    사회운동노조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하자면, 사회진보연대 초기 킴 무디의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나 피터 워터만의 사회운동 노조 관련 글을 번역하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두 사람의 강조점에 차이가 있었는데, 워터만은 노동자운동이 새로운 사회운동과 대화를 통해 이념적 혁신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듯합니다. 특히 유럽의 맥락에서 구좌파적인 노동자운동과 신좌파적인 여러 사회운동이 서로에게 배타적 분위기를 깨야 하고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한 단계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킴 무디의 경우엔, 미국 노총의 조직화 모델과의 관련성을 주목했는데요, 사실 조직화 모델이 일종의 ‘이념적 혁신’을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것이죠. 미국 노조가 비즈니스 노조 성격이 강한데, 비즈니스 노조는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격차가 클수록, 즉 조합원이 누리는 혜택이나 서비스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죠. 그런데 조직화 모델의 경우, 우리 노동조합의 돈을 왜 비조합원 조직화에 쓰느냐, 왜 내가 조직화 캠페인에 나가야 하느냐, 이런 문제에 동의를 얻는 과정이 노동조합의 이념적 변화를 동반한다는 말이죠. 게다가 미국의 경우엔 조직화 모델이 저임금 서비스 직종에 집중된 인종 문제나 여성 문제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기도 했지요. 

어쨌든 워터만이 말한 구좌파적 노동자운동과 신좌파적 신사회운동의 대화이든, 무디 식의 조직화이든, 강조점에 차이가 있더라도, 결국 핵심은 노조도 이념이 필요하다, 이념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한 활동 과정에서 기존 노조의 내적 변화를 유도한다는 것이었죠. 어쨌든 한국에서도 전략조직화 사업이 조직화 모델을 가져오긴 했는데 그게 기존 노조운동에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는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한 듯합니다. 조직규모가 얼마나 커졌냐보다, 조직이데올로기, 조직문화에 어떤 변화를 낳는 계기가 되었느냐를 평가해야 한다는 말이죠. 노조가 조직화기금에 얼마큼씩 각출하는 것 정도로는 기존 조직이데올로기, 문화에 거의 영향을 끼치기 어려웠을 듯합니다. 

최근 들어서는 우리가 연대임금 연대고용을 주장하는데, 노동조합 여기저기서 저항감이 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연대임금 연대고용에 관한 토론이 노동운동의 이념에 관한 토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신사회운동과 왜 협력해야 하냐, 조직화를 왜 해야 햐냐는 질문에 부딪혔던 것처럼, 연대임금 연대고용을 왜 해야 하냐는 질문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이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연대임금 연대고용의 정책을 구체적으로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보다, 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한 포인트라는 말이죠. 

서보람    동의합니다. 저는 사회운동노조를 제기했던 문제의식이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복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했냐는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은 어떻게 복원을 이룰 것이냐는 문제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입니다. 

연대임금-연대고용 문제에 관해서 말해보자면, 요즘 우리가 초기업 교섭을 강조하는데요, 현실 노동조합을 보면, 무엇을 위한 초기업 교섭이냐는 문제의식이 확실치 않으면, 초기업 교섭도 결국 자기 직종 및 업종의 임금 많이 올리고, 교섭 틀에 들어오는 조합원들의 노동조건 개선으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즉, 초기업 교섭이 곧 운동적 의미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확장성이 있으려면 이념과 운동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7. 우리의 긴급한 과제

박준도    남아 있는 토론주제가 많은데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마지막으로 한꺼번에 세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민주노총 혁신과제에 관해 본인이 생각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가령 이것부터 먼저 손을 봐야 한다든가, 이것부터 추진 하자든가 말씀해주시고요. 둘째로 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노동자운동이 인민주의와 권위주의, 팽창주의의 위험에 맞서기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접점을 만들 수 있겠는지 의견을 주세요. 셋째로 임필수 실장의 발표문에서 ‘자기비판의 지향점’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자기비판의 과제에 관해 참가자 여러분의 의견은 어떤지 말씀해주십시오. 

이진호    저는 민주노총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보든, 인민주의·권위주의에 맞서는 노동자운동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든, 민족해방파(NL) 비판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대중적인 호소력도 있다고 보는데요, 그런 경향이 노조를 망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족해방파 비판이라는 경로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해방파 비판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제정세 인식 문제나 권위주의 세력의 발호에 대한 비판을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어려울 수 있으나, 역시 이를 통해서 인민주의 비판으로 가는 경로를 확보할 수 있을 듯한데, 제가 보기에 현재 민주노총 내에서 이런 접근법이 가장 현실적인 경로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노조 내 분열과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민족해방파 비판을 시작해서, 그러면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러는 거냐를 따지면서 그들의 국제정세 인식이라든가, 특유한 조직문화 등등을 말하다 보면 인민주의에 비판에 도달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자기비판이라는 문제에 관해 말해보자면, 이행에 관한 현재 우리의 입장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관해서 모호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작년부터 혁명운동사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는데요,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을 비판한다는 것이 어디까지냐라는 질문이죠. 러시아 혁명이 결국 스탈린주의로 귀결되었는데, 이는 어디서 기인했느냐, 10월 혁명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냐 등등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런 질문들을 잘 토론할 필요가 있고, 결론적으로는 대안세계를 향한 이행이라는 문제를 정리해보면 좋겠습니다. 

서보람    저도 민족해방파 비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계정세나 국내 정세에서 평화 문제, 핵 문제라는 좌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민족해방파가 야기하는 인식과 실천의 왜곡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현장 운동의 복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제주의적 노동운동은 조합원을 수동화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끔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이념적이고 능동적이고 계급적인 방식의 현장 운동을 복원해야 하고, 이런 현장 운동을 제도화, 공식화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알아서 잘 할 거라고 생각해서 될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투쟁은 조직적으로 공식화, 제도화돼 있잖아요. 이런 것처럼 현장 운동이 노동운동의 기본적 소양으로 자리 잡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박준도    조금만 덧붙여주시죠. 무엇을 매개로 현장운동을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지요. 

서보람    일단 저는 학습하는 습관, 연대하는 습관이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학습과 연대가 노동운동의 기본일 텐데요, 이제 1970~80년대에 했던 것조차도 안 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1978~80년대라는 무척 힘든 조건에서 민주노조 운동을 복원했던 힘이 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지금은 정보도 많고 지식도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노동운동의 이념이 무엇이냐, 역사 속의 혁명이 무엇이냐, 이런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딱 지금 상황만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 바탕 안에서 노동운동의 과제, 전망, 비전 같은 것들을 토론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도 현장 운동의 복원에 복무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좀 더 분명히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노조 활동을 잘하는 게 아니라, 현장 운동을 복원하기 위해 노조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준도    우리 활동가들이 현실 노조운동의 바쁘게 돌아가는 사이클과 조금 거리를 두고, 조합원이나 다른 활동가들과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익추구집단이 됐냐,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보고,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뭔가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랑 소모임이 됐든 서클이 됐든 작은 정치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조의 공식적인 사업체계 내부에서 개입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말고, 소모임 차원에서 토론도 하고, 대자보도 쓰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단비    제가 생각했을 때 오늘날 노동운동의 핵심 과제는 사회적으로는 국제평화에 기여하는 것과 불평등 해소 즉 노동자 내부 격차 축소에 주도적인 세력으로 역할 하는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이념의 복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께서 민족해방파 비판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지금까지 사회진보연대는 입장발표 수준으로 대응해왔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대중운동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풀어낼 것인지 치열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인민주의와 권위주의에 맞서는 노동자운동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두 가지를 조금 다르게 봅니다. 먼저 인민주의에 대해 말해보면, 대중운동의 과제에 앞서 우선 지식인의 과제여야 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려면 그 문제가 무엇이고 왜 문제인지에 대한 사회적으로 합의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회적 합의의 핵심 요소로서 문제를 정식화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인민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문제의식이 과소합니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인민주의를 우리 사회의 문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대중운동의 영역도 뭔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권위주의에 맞서는 운동의 경우 반권위주의 투쟁을 시대적 과제로 설득할 수 있는 서사가 필요합니다. 홍콩이나 대만, 우크라이나, 시리아나 미얀마와 같이 권위주의 통치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경우 권위주의에 맞서는 투쟁이 사회운동의 직접적이고 중요한 과제로 여겨집니다. 한국은 북한이라는 위협을 대면하고 있음에도 반권위주의 투쟁을 직접적인 과제로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이 문제를 극단주의 우파나 보수가 독점했기 때문에 보편적인 대중운동으로서 접근하기가 까다로운 측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 인권 문제라든지 러시아, 중국 비판이 역사적으로 반공주의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서 사회운동이 비판을 꺼리기도 합니다. 권위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더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일로, 자기의 일로, 한국은 물론 세계의 미래와 연관한 일로 여길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비판에 대해 말씀드리면 사회진보연대 또한 스스로 지적하는 여러 운동의 경향 안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매일 일상적으로 손에 잡히고 느껴지는 범주에 매진하며 그것을 초과하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정세나 전체운동은 자기 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경향도 그 중 하나입니다. 저 또한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시작점을 돌이켜 봤으면 합니다. 사회진보연대가 25살인데 성숙했지만 노쇠하지는 않은 때입니다. 젊었을 때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좀 일찍 늙었다는 인상이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 젊은데 게다가 성숙하기까지 했구나 하는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그간 쌓아온 여러 강점과 그 사이에 삐죽 튀어나온 약점까지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이희태    민주노총 정치방침 및 총선방침을 둘러싸고 올해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요. 일단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NL세력의 패권적 운영을 견제하고 반보수연합의 구도를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올해 연대임금과 관련해서 세미나를 진행하며 내용을 구체화하려 하고, 그 결과를 책자로 발간해 지역별로 워크숍을 진행했는데요. 노동조합의 혁신을 위한 사회진보연대의 여러 시도가 조금씩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걸 각 노조에서 어떻게 또 현실화할 거냐가 앞으로의 과제겠지요. 

마지막으로 인민주의, 권위주의, 팽창주의의 위험에 맞서는 운동을 노동조합 내에서 다양한 사업으로 어떻게 기획하고 체계화해갈지를 모색하고 실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함께할 동지들을 찾고 공동의 사업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토론하고 조정해가며 함께 운동을 만들어가는 게 필요하겠지요.

임필수    제 생각은 발표문에서 대부분 말씀드렸기 때문에 하나만 부언하겠습니다. 아까 이진호 부장께서 이행에 관한 우리의 입장이 모호한 것 아니냐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숙고의 숙고를 거듭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고 싶습니다. 프랑스혁명을 모델로 하여, 소수집단이 중앙권력을 장악하고 강제력을 통해 이행을 밀고 나간다는 식의 혁명관에 대해서 우리가 종합적인 숙고를 하고 있다고요. 이렇게 할 경우, 발생할 수밖에 없는 폭력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 또 민주주의와 법치의 파괴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프랑스혁명은 공포정치로 귀결되고, 또 러시아혁명도 스탈린의 테러(공포)로 귀결되었느냐는 문제를 발본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기보다는 가능한 한 모든 문제를 음미하는 것이 중요할 듯합니다.  

박준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토론 자리에서 우리는 사회진보연대가 변화된 정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노동자운동의 재건을 위해서는 혁신의 아젠더 역시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독자 입장에서 일정하게 해명된 부분도 있을 것이고, 우리에게 스스로 과제를 던진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자리를 자주 갖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긴 시간 토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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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현 정세와 사회운동의 상황에 대한 인식

사회진보연대 출범 25주년 기념좌담 발표문

임필수(정책교육실장)
 
 

1. 객관 정세의 변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서 인민주의·권위주의·팽창주의의 난입으로 

1998년 사회진보연대 출범 당시 우리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비판이었다. 그런데 현 정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민주의, 권위주의, 팽창주의의 난입’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변화는 세계정세의 중대한 변화를 반영한다. 

금융세계화는 미국식 축적체제(법인자본주의, 관리주의,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내적 위기를 계기로 출현했다. 금융혁신과 탈규제로 새로운 고도금융이 출현하고, 초민족기업(TNC)의 축적전략도 변모하여 법인자본의 금융화가 진전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변화된 경제·금융환경에 적합한 정책·전략을 탐색했고, 신자유주의로 변신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대처/레이건의 신보수주의와 구분된다.) 

그런데 금융세계화는 1990년대 탈냉전 또는 ‘포스트냉전’이라는 국제정세와 맞물렸다. 사실 1970년대 후반 이래 제3세계를 강타한 외채위기는 동유럽 경제도 위기에 빠뜨렸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전략은 사회주의 국가들을 포함한 제3세계 경제개혁을 지도하며 정교화되었다. 

199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을 대표하는 관여(engagement) 정책, 중국의 국제무역기구(WTO) 가입,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러시아(푸틴)의 협력 등등이 상징하듯,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탈냉전·포스트냉전이라는 국제질서의 변화와 짝을 이루었고,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규정할 수 있는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탈냉전과 세계화·경제통합이라는 세계 자본주의의 낙관적인 전망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다. 2007-9년 금융위기는 경제의 금융화가 야기하는 불안정성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이때를 계기로 중심부 자본주의는 장기침체에 진입했다. 

20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항의하는 흐름에는 반(反)세계화와 대안세계화 요구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유럽 주요국에서 인민주의 정치세력의 부상 또는 집권이 말해주듯, 인민주의적 반(反)세계화가 강력한 위험으로 떠올랐다. 

한편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세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피한 듯 보였으나,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실제 중국의 경제성장률과 이윤율은 금융위기 직전에 정점을 찍었다가 201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급격한 하락을 보였다. 나아가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시장지향적 개혁이 역전되고 당·국가가 주도하는 ‘국가자본주의’ 경향이 강화된다. 이는 탈냉전 시대 세계화·경제통합의 중대한 위험 요인으로 성장했다. 

다른 한편,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제질서의 심각한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속한 러시아가 세계질서의 규칙을 무시하고 타국 영토의 강탈을 목적으로 침공을 개시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사실 이 기원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 합병, 2008년 남오세티아(러시아-조지아)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확실히 우리는 이러한 흐름에서 1990-2000년대 탈냉전과 세계화·경제통합이라는 시대적 흐름과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미국 정가나 학계는 세계정세의 이러한 중대한 변화를 ‘전략적 경쟁’이나, ‘협력적 경쟁’, ‘상호의존 시대의 경쟁’ 등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를 ‘인민주의, 권위주의, 팽창주의의 난입’이라고 부르겠다. 세계정세의 변화를 이렇게 규정한다면 당연히 사회운동의 우선적 과제도 변화해야 한다. 일단 이러한 인식에 따라오는 몇 가지 문제를 덧붙이겠다. 
 
1)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비판’이라는 우리의 문제의식은 소멸하는가?
 
2007-9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금융세계화가 단번에 중단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우리의 문제의식이 원천적으로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금융위기 이후 금융화의 양상에 대해서는 별도로 깊이 있게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일단 거대한 부실채권의 누적, 초거대부채의 슈퍼사이클, 그에 따른 금융 불안정성이 뚜렷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좀비 자본주의!) 

2000년대 사회운동이 자유무역의 한계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이나 미중 무역분쟁의 현실을 목도한 후, 보호무역의 파괴적 위험을 비판의 핵심대상으로 삼아야 할 만큼 정세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산 자동차, 철강, 세탁기 등등에 대해서 부과했던 보호관세를 애초 계획대로 모두 강행했다면 한국경제에 큰 충격이 있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비판이,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는 모든 게 좋았다’는 과거 지향적 환상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혹자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이전 자본주의는 민족국가가 경제주권을 온전히 보유했고, 국가가 핵심 산업을 보호하고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했다는 식으로 묘사하곤 한다. 물론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우리는 이와 비슷한 그림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갑자기 낚아챈 인위적인 고안물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이전, 중심부 국가에서는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즉 스태그플레이션), 대량실업이 발생했고, 주변부에서는 외채위기가 나타났다. 즉 경제의 금융화, 노동의 신축화로 요약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는 경제주권과 산업발전·고용안정이 아니라, 외채위기(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수입대체 산업화의 위기)와 스태그플레이션·대량실업에 직면해 있었다. 즉 경기침체와 대량실업의 대안으로서 경제의 금융화와 노동의 신축화라는 신자유주의 정책·전략이 출현한 셈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신보수주의와 달리, 완만한 인플레이션을 허용하고 노동의 신축화를 추진함으로써 극단적인 탈인플레 정책과 대량실업을 회피하고자 했다. (덧붙여 라틴 아메리카 외채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은 거시안정화 정책을 기반으로 수출주도 경제로의 변형을 추구했다.) 

이런 언급을 덧붙인 이유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비판이 지향했던 바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기 위해서다. 과거에 대한 환상과 향수는 인민주의적 반세계화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힘이 된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을 탈퇴한다면, 이러저러한 자유무역협정을 파기한다면 다시 좋았던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이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인민주의 운동의 부흥을 낳았다.   

반면 우리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비판은 이중적 함의를 담고 있었다. 첫째, 신자유주의 정책·전략도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붕괴) 경향을 막기에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주의 이전,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말할 것도 없고, 라틴아메리카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의 실패를 보더라도, 세계경제로부터 이탈하여 자급자족적인 경제를 꾸린다는 전략 역시 이미 실패로 돌아갔다.)   

바로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우리는 ‘대안세계화’ 운동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금융적 팽창으로부터 구조적 위기로 이어지는 국면에 대응하는 사회운동, 주체적 역량을 키워나갈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안세계화 운동은 여러 사람들이 종종 혼동하는 것과 달리, ‘반세계화’를 지향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대안세계화운동의 대안자유무역협정(국제적 노동기준 연계)이나 금융거래과세와 같은 요구는 ‘개량주의’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러한 요구를 매개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과학적 인식(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을 확산하고, 노동자운동의 사회적 역량을 강화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대안세계화운동 단계에서는 개량주의/혁명주의의 대립이 별로 유효하지 않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소결]
2007-9년 금융위기 이후로, 중심부 자본주의는 ‘장기침체’에 진입했다. 정부의 재정적자와 부채의 급증, 중앙은행의 자산/부채의 대규모 팽창이라는 대가로 위기의 폭발은 지연되었다. 즉 ‘관리된 위기’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부채 축소, 중앙은행은 테이퍼링을 통해 경제정책의 정상화를 꾀했으나, 코로나 위기로 다시금 반전되었다. 

한편 장기침체 과정에서 한 축으로는 (대외경제정책 측면에서) 반(反)세계화/보호주의 흐름이 등장했다. 트럼프의 무역분쟁,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대표적 계기였다. 다른 한 축으로는 반(反)경제학(부두경제학)/MMT(현대화폐이론) 흐름이 등장했다. 즉 다양한 인민주의 경제정책이 발호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출범 당시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비판에 주력했는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그 한계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뒀다. 대안세계화운동의 요구 중 한 축이었던 대안자유무역협정이나 금융거래과세는 금융세계화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면서 사회운동의 이니셔티브를 구성해보자는 취지의 제안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초점은 반세계화/보호주의 비판, 즉 그 파괴적 위험성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인민주의적 반(反)경제학이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시켜 사회운동의 역량을 탈진시킨다는 비판도 우리의 중대한 과제다. 
 
2)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 비판’이라는 문제의식은 어떠한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비판은 그에 병행하는 군사세계화 비판이라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레닌의 고전적 제국주의론에서 유래하는 통상의 제국주의론은 ‘식민지 분할·재분할을 위한 자본주의 열강 간 경쟁’을 강조했다. 그러나 금융세계화/군사세계화에 대한 분석은 주변부에 대한 중심부의 공동지배(condominium)를 주목했다. 즉 중심부 국가 간 군사적 경쟁이나 전쟁의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고 보았다. 간단히 말하면 미국, 유럽 국가들, 일본 간에 전쟁이 발발한다는 것은 지금 상상하기 어렵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에 전쟁이 발발하는 곳은 오히려 중심부 외부다. 금융세계화 과정에서 주변부에에 대한 선별적 포섭과 배제가 발생했다. 배제된 주변부 지역에서 제한적 자원을 두고 인민의 상호절멸로 귀결되는 ‘새로운 전쟁이 발발’했다. (유럽의 변방, 아프리카 등등.) 중심부 국가는 주변부의 새로운 전쟁에 선택적으로 개입한다. 즉 포섭된 지역에서 안전을 지키고, 배제된 지역에 선택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군사세계화’가 발생한다. 

궁극적으로 주변부에서 발생하는 통치성의 위기가 주변부에서 인민의 상호절멸로 귀결되는 새로운 전쟁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대안적 통치성’을 형성하기 위한 대안세계화 운동이 궁극적 해답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즉 외채탕감, 대안무역부터 대안경제질서의 창출에 이르기까지.   

한편, 이때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변부의 전쟁에 관해서는 매리 캘도어의 ‘새로운 전쟁’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새로운 전쟁은 낡은 전쟁과 구별된다. (그 전형은 보스니아 전쟁이었다.) 첫째, 전쟁의 주체는 비(非)국가적 주체다. 즉 경제가 쇠퇴하고 그에 따라 국가가 쇠퇴하면서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 침식된다. 조직범죄가 증가하고 준군사집단이 등장한다. 전투원/비전투원, 군인·경찰/범죄자 사이의 구별이 무너진다. 둘째, 전쟁목표는 바로 ‘정체성의 정치’다. 즉 민족, 씨족, 종교, 언어에 바탕을 두고 권력을 요구하는 정체성의 정치가 태생적으로 배타적이며 분열적으로 전개된다. 셋째, 전쟁수단으로 ‘공포와 증오’의 씨를 뿌리려고 불안조성 기법을 차용한다.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들 모두 제거하고 공포심을 심어주어  주민을 통제하고자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폭력이 민간인을 상대로 행해진다. 넷째, 재정조달방식을 보면, 전투집단은 약탈과 인질, 납치, 암시장, 외부원조를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 폭력이 계속되어야만 외부원조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전쟁논리와 경제작동 원리가 결합한다.

그런데 캘도어에 따르면, 새로운 전쟁에 대한 (예컨대 보스니아, 코소보 전쟁) 서방의 개입은 종종 실패에 직면한다. 캘도어는 서방이 일반적으로 종족 간 분쟁의 당사자들을 평화협상의 당사자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는데, 이게 바로 패착이라고 분석했다. 오히려 종족 간 분쟁의 당사자들을 평화협상에서 배제하고, 시민사회가 주도권을 행사하여 군벌집단을 포위할 수 있는 구상이 절실했다고 평가했다. 

말이 나온 김에 간단히 덧붙이면, 최근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은 캘도어가 분석한 ‘새로운 전쟁’과 여러모로 유사하다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전쟁의 경우, 공포와 증오의 씨앗을 뿌리려는 불안조성 기법에 따라 민간인이 주요 공격대상이 되고, 폭력이 지속되어야만 외부적 지원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전쟁논리가 곧 그 집단의 경제논리가 된다는 분석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새로운 전쟁에 대한 서방의 개입이 좌절을 겪게 된 원인에 대한 분석도 숙고해야 한다. 굳이 유비를 들자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이스라엘 (강경파) 정부와 하마스 간에 어떤 평화협상을 중재하려고 할 터인데, 이들이 계속 주도권을 행사할 경우, 잠시 평화협상이 실행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곧 무력분쟁이 재발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각각에서 강경파 정부/하마스 외에 평화와 공존, 변화를 추구하는 시민운동 간 어떤 합의를 마련하는 게 더 긴요하다.   
 
[이라크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한편, 9·11 테러 이후 반전운동이 폭발하게 된 2003년 이라크전쟁은 전형적인 ‘새로운 전쟁’이 아니었다. 현재 시각에서 보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오히려 예외적인 사례고, 따라서 다양한 입장에서 광범위한 반전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첫째, 직접적인 영토병합이나 식민지화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제국주의 열강 간 전쟁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친미 세력권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고전적인 제국주의 시대의 팽창주의 전쟁과 닮은 면이 있었다. 따라서 반제국주의론에 입각한 반전운동 흐름이 있었다. 둘째, 프랑스, 독일 등 유럽국가들도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보면, 미국-유럽의 ‘공동지배’에 금이 갔고, 전통적인 자유주의적/다자주의적 접근법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부시 독트린(악의 축, 예방적 선제공격론 등)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다자주의적 시각에서도 강력히 비판했다. 따라서 자유주의적/다자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반전운동도 있었다. 셋째,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은 부시 독트린을 ‘무한전쟁론’으로 해석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반전론/평화주의론적 접근법을 적극 수용하기도 했다. 즉 평화주의적 반전운동 흐름도 있었다. 

종합하면, 이라크전쟁은 반제국주의론적 접근법, 자유주의적/다자주의적 접근법, 나아가 반전론/평화주의론적 접근법이 결합되어 전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을 폭발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의 등장 후, 미국이 여전히 ‘무한전쟁론’을 유지한다고 말할 수 없다. 2014년의 이른바 ‘오바마 독트린’은 미국이 모든 곳에 개입할 수 없다고 다시 선언한 셈이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 행정부에 비해서도 훨씬 더 실리적 접근을 강조하면서 시리아에서 철군했다. 즉 부시 행정부 네오콘의 매파적 개입 노선이 지금도 이어진다고 말하기 어렵다. 외교정책에 관한 미국의 양당합의는 중심부의 공동지배와 선택적 개입이라는 신중한 포지션으로 다시 재이동했다. 게다가 전략적 관심 지역도 아시아로 선회했다. 

이와 대비할 때,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은 영토병합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19세기식 제국주의의 영토적 팽창주의가 부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민족자결권’ 문제가 다시 논의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한 현실을 방증한다. 즉 20세기, 세계대전을 거치며 확립된 민족자결권의 원리가 다시 확인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20세기 질서에 대한 직접적 위협을 가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적극적 행동에서는 자유주의/다자주의적 접근법이 선봉에 선 반면, 반제국주의론이나 반전론/평화주의론적 접근법은 초기에는 주저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시간이 갈수록 ‘반제국주의 진영론’의 관점으로 빠져드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소결]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 비판은 ‘주변부에 대한 선택적 포섭과 배제’, ‘주변부에서 인민의 상호절멸’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발발 후,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가영토적 팽창주의 또는 네오콘의 매파적 개입주의’라는 오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미국은 모든 곳에 개입할 수 없다’는 오바마 독트린과 같은 신중한 노선이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가 지칭하고자 했던 바에 더 가깝다. 즉 우리의 비판은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공동지배)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었다.  

물론 주변부의 전쟁은 멈추지 않고 있다. (에티오피아, 콩고, 예멘,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젠 등) 그런데 현재 영토적 팽창주의는 과거 ‘지역 강대국’(regional power)이라고 불렸던 러시아나 중국에서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전후 질서를 함께 구성했던 당사자라는 점에서 21세기 세계질서에 심각한 위협을 의미한다. 즉 전후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러시아나 중국에 대한 비판이 매우 긴급한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3) 북한 핵 문제,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 
 
사회진보연대는 출범 당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 즉 민족해방파(NL) 통일운동이 주장하듯이 6·15 공동선언은 조국통일의 이정표가 아니라, 평화공존 또는 ‘분단관리체제’에 대한 합의라고 규정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출범 초기엔, 한반도 비핵화가 진전될 것이라는 전망을 전제로, 분단관리체제에서 북한을 향한 남한의 자본진출을 예상했다. 따라서 통일운동을 ‘평화’와 ‘노동’을 쟁점으로 한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
2006년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한국 내에서 북한 핵보유 문제에 대한 논쟁이 폭발했다. 사회진보연대는 북한의 핵무기는 ‘정의로운 전쟁’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북한 핵실험을 강력히 비판했다.  

다만 북한의 핵보유 욕구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남한과 미국이 노력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는 발리바르의 ‘적극적 중립주의와 선제적 (핵)군축’ 논리를 수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발리바르는 냉전 시기, 상호절멸에 기초를 둔 핵경쟁을 막기 위해서는 자국에서부터 선제적으로 핵무기를 감축하고(disarmament), 군사블록에 가담하지 않는 적극적 중립주의를 실행해야 한다는 평화운동의 입장을 수용했다. 

이런 관점에서 클린턴-부시 행정부의 미사일방어망(MD) 개발이나 MD 시스템의 한반도 배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핵전쟁에서 자국의 완전한 방어가 가능한 무기의 개발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한, 핵감축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점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그런 방어무기 체계를 개발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점도 지적했다. (예컨대 최근 러시아는 초음속 미사일 개발로 MD 체계의 무력화를 시도한다.) 

그런데 김정은의 권력승계, 오바마 행정부 등장 시기 북한의 미사일/핵실험을 계기로 북한이 진정으로 비핵화 협상을 할 의사가 있는가에 대해 사회진보연대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북한은 남한을 겨냥한 전술핵무기 체계나 교리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무성의한 협상 태도 때문에 북한이 핵개발을 강행했다는 변호론이 성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결국 탈냉전을 거부한 것은 남한이나 미국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북한 인권 문제]
사회진보연대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 입각했기 때문에,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변호론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북한 인권 문제를 나눠서 보면, 첫째, 북한에 인권 문제가 존재하나, 둘째, 존재한다면 왜 존재하나, 셋째,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로 구분할 수 있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사실 오래전부터 비교적 분명한 답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존재한다. 둘째, 사회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경제적 착취를 동반하므로(국가자본주의), 정치적 억압도 존재한다. 이는 기본적인 시민권(국가로부터의 자유/즉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등), 공민권(참정권)의 억압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소련식 사회주의 형법 체계는 ‘법의 지배’에 미달하는 ‘법에 의한 지배’(권력에 의한 자의적인 입법과 집행)를 실행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형법 체계에도 미달하는 극악한 결과를 낳았다.   

단 세 번째 문제에 있어서, 2010년대 초반까지도 얼마간 주저함이 존재했다. 국제적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흐름이 과거 반공주의적 프로파간다를 실행했던 흐름과 역사적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미국 국무부와 민주주의 재단(NED)의 관계가 그런 역사를 깔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 이르러 설사 반공주의적 프로파간다를 실행하는 집단과 비슷한 주장처럼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독립적인 위치에서, 독립적인 시각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꾸준히 제기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현재 사회운동의 상황을 볼 때, 진영론에 머리와 손발이 묶여 있는 상태를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가는 것은, 결국 운동을 마비시킬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소결] 
선제적 핵감축이나 적극적 중립주의가 민족국가의 자기방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는 없다. 나아가 반(反)폭력도 주체의 자기방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폭력을 제기했던 발리바르 역시 폭력을 무의 상태로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완전한 환상이며, 어떤 경우 비폭력은 ‘최악의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집단적 자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도덕적, 법적 논리도 자기방어를 원칙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 발리바르의 논의는 서방측의 광범위한 평화운동(중거리핵미사일 퍼싱2 배치 반대운동)과 함께 동방에서 연대노조 운동을 필두로 한 노동자운동같은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즉 서방에서 선제적 핵감축(퍼싱2 배치 취소), 나토 해소를 주장, 실천하면, 동방에서도 선제적 핵감축(소련 SS 배치 취소), 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소를 주장, 실천하는 흐름이 등장하고 강해질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현재 한반도의 경우, 남쪽에서 그런 흐름이 있다고 하여, 북쪽에서도 그에 손뼉을 맞추는 흐름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남한의 독자 핵개발이나 전술핵무기 실전 재배치를 막는 수준에서, 즉 과거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따라 남한이 행한 조치를 역전시키지 않는 수준이 일차 방어선이라고 판단한다. 북한 핵 옹호론은 결국 남한의 핵태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힘을 실어주므로, 실제로 이런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해야 한다. 
 
4) 한국 신자유주의 개혁의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민주의의 반(反)경제학 
 
1980년대 개시된 신자유주의 개혁은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발전 노선이 낳은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구상으로 출발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는 1960년대 수출주도 공업화와 달리, 재벌체제 형성을 유도했다. 이는 과대한 자본투자와 과소한 수익성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낳고 1970년대 말 외채위기를 유발했다. 물론 1980년대 신자유주의 개혁의 출발점에서 실시된 안정화 정책(인플레이션 억제)이 폭압적 수단(민주노조 해산, 공무원임금동결, 추곡수매가 동결 등등)을 동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향점은 미국식 자유 기업체제(자유 시장경제)로 변모하는 것이었고, 그 이론적 기반은 미국 주류 경제학이었다. 즉 신자유주의 개혁은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이런 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피라미딩 기업집단, 즉 재벌체제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피라미딩 기업집단은 경제성장 초기 단계에서는 기업의 거래비용을 줄여서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도 있다. 훌륭한 제도가 없을 때, 기업집단 소속 기업들은 다른 소속기업에서 인원을 고용하고, 서로 투자하고, 서로 사업관계를 맺음으로써 거래비용을 절감시킬 수 있어서다. 그러나 피라미딩 기업집단은 경제가 성장할수록 혁신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기업집단은 새로운 경쟁자 등장을 억제하며 사업다각화(문어발)를 추구함으로써, 체질적으로 현상유지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1980년대 신자유주의 개혁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외환위기에 봉착했다. 외환위기를 겪은 후에도 일부 재벌그룹이 해체되긴 했으나 재벌체제가 온존했다. 이는 여전히 ‘중진국 함정’의 원인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대표적 재벌, 삼성을 보자. 삼성은 미국이 일본이나 다른 동아시아 경쟁자들에 밀려 메모리분야 반도체를 포기하는 기회를 틈타 세계적 기업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모리분야는 기본적으로 막대한 자본을 계속 투자할 수 있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다. 즉 기술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에 더해, 자본 동원력이 기업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적 요소다. 삼성의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낮은 수익성이 있다. 지난해, 올해 초 대만 TSMC와의 수익성을 비교해보면 삼성이 직면한 어려움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소결]
사실 경제성장을 결정하는 것은 구조적 요인이다. 단기적인 부양정책과 장기적인 성장정책은 전혀 다른 차원을 지닌다. 현재 한국 자본주의가 자본이나 노동의 양적 투입 양상, 경향을 급격하게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기적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변수는 혁신능력에 있다. 인민주의 반경제학은 경제성장을 결정하는 요인에 대한 인식이 없다. 따라서 피라미딩 기업집단, 재벌이 이러한 혁신능력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경제적 분석능력도 당연히 없다. (재벌=부자=악이라는 도덕적 도식만 존재할 뿐이다.) 구조개혁이 없는 가운데, 미시적인 분배정책(임금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 개입)이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없다.  
 
5) 노무현 정부 시기 인민주의와 문재인 정부 시기 인민주의는 무엇이 다른가 
 
사회진보연대 출범 시기는 DJP 연합에 의한 정권교체와 맞물렸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DJP 연합 지배계급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한 최상의 정치적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시도라고 인식했다. 즉 정권교체가 있어야 기존 정부 내 저항이나 정부-기업의 담합을 깨고 신자유주의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권교체를 달성한 정부가 좌우 폭넓은 연합에 기초할 때 민중세력을 포함해 다양한 세력의 저항도 순치하기에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서는 이를 ‘정치가적 인민주의’라고 규정했다. 김대중 정부 시기부터 누적된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저항이 표출하자, 이러한 대중의 불만이 정부로 향하지 않도록 다른 ‘사회 악을 탓하는 인민주의 정치가가 필요했던 셈이다. 노무현 정부는 인민주의의 특징적 요소를 공유했는데 (정당-의회 정치가 아니라 개인적 인기, 팬클럽에 의존했다), 특히나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말로는 기득권에 대항하여 평범한 보통사람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정치가적’이라고 보았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도는 임기 말로 갈수록 급감했고,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부가 연달아 집권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문재인 정부가 등장할 수 있었는데,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정치가적 인민주의’라는 규정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신자유주의는 뉴케인지언이라는 단연코 주류적인 경제이론을 근거로 했다. 그러나 문 정부나, 최근 각국의 인민주의 정치지도자는 ‘부두 경제학’이라고 말할 만큼, 경제학적 근거가 없는 경제정책을 구사했다. 

둘째, 검찰개혁이라는 측면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와 차이가 존재했다. 이전까지는 검찰의 독립성을 강화해 정치적 중립성을 달성한다는 방향을 지향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검찰을 견제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가 도입되기도 했다. (검찰총장 인사청문화, 검사동일체 원칙 개정부터 검사 적격심사 위원회까지)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검찰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검찰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독립성이 아니라 정치적 통제를 통해 중립성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법치주의나 사법부 독립성 원리를 파괴하는 위험을 지닌다는 점에서, ‘인민정’으로의 타락을 가리키는 핵심적 표지로 인식했다. 

셋째, 김대중 정부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통해 김영삼 정부 말기에 악화된 한일관계를 복원하려고 시도했다(김대중 대통령 개인은 1964년 ‘한일협정’에 찬성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는 한일협정을 재검토하기는 했으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미흡했던 것은 결국 과거 한국 정부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에 있었으므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문 정부는 반일민족주의를 선동하고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고자 시도했다. 즉 외교 사안까지 정치화하는 극도로 위험한 시도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밀고 나갔다. 

요약하면, 반경제학, 법치주의 파괴, 외교사안의 정치화 등등 문재인 정부 시기의 인민주의는 노무현 정부 시기의 인민주의와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러한 질적 차이는 386세대의 정치적 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등장 전후, 386세대나 90년대 세대(현재 40-50대)가 정치에 몰입하게 된 몇 차례 계기가 있었다. 노무현 개인이 대선 유력 후보로 막 등장하던 순간이 첫 번째, 국회 탄핵에 몰리고 반대 시위가 벌어졌던 때가 두 번째, 대통령 퇴임 후 비극적인 사망이 세 번째다. 이런 극적인 순간들을 거치며 386세대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들이 주도하고, 86세대나 90년대 세대가 동원되는 흐름이 창출되었다. 이들은 광우병투쟁, 세월호투쟁 등등을 계기로 사회적으로 결집하고, 2010년대 야권연대를 매개로 정치적으로 결집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결국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을 계기로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현재의 인민주의, 정치양극화를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집단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소결] 
인민주의는 사실 정치-이데올로기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사실 이데올로기는 상당히 정교한 관념 체계다. 인민주의는 매우 앙상한 도식에 기대어 내편/네편이라는 당동벌이를 하기 위한 표식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노동자운동이나 사회운동에서도 지도자급의 주도 집단의 연령대가 40-50대일 수밖에 없고, 바로 그들이 인민주의, 정치양극화를 주도하거나, 최소한 그 영향권 내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정치의 퇴행은 사회운동의 퇴행과 평행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비판적인 사회운동은 어디에서 근거지를 마련할 것인지 고심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제 운동 주체의 변화라는 문제로 넘어가 보자. 
 
 

2. 운동 주체의 변화 

1) 진보정당 측면에서 
 
1998년, 지식인연대와 사회인연합이 통합하며 사회진보연대가 출범할 때 그 내부에는 정당운동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공존했다. 1997년 범민중진영의 공동 ‘선거대응기구’로서 국민승리21의 경험을 공유했더라도 말이다. 그 시각들을 살펴보면 첫째, 국민승리21이 일회적인 선거대응기구가 아니라 상설적인 정당으로 발전해야 하고, 거기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다. 둘째, 노동자 현장조직이나 지역조직에 근거를 둔 노동자 활동가 정치조직을 결성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다. (이러한 두 번째 입장의 경우, 민주노총이 공식적으로 추진하는 정당이 힘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깔고 있기도 했다. 민주노총 내 정당을 적극 추진하는 정파 외에 다른 정파들이 힘을 싣지 않는다면, 대표성을 획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 양자가 가장 뚜렷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본인은 대체로 ‘전선의 일각으로서 정당’이라는 관점을 지지했다. (즉 노동자운동, 농민운동이나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구성된 전선체가 있고, 그 전선체가 선거에 대응할 때, 그 전선체 내에 참여하는 정당들과 유기적으로 연계할 수 있으며, 이때 전선체 내에 정당은 단일할 수도 있고, 복수로 존재할 수도 있다.) 기존 전위당 모델에서는 전위당이 상위에 존재하고 노동조합이나 다양한 부문조직은 전위당의 지도를 받는 ‘외곽단체’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전선의 일각으로서 정당’은 전통적인 전위당 모델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2002년 대선 시기, 사회진보연대의 공동대응기구/대선공투체를 구성하자는 제안은, 필자가 회고하기에, 위에서 말한 여러 입장들이 공존할 수 있는 구상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사회진보연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이러한 구상은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2002년 대선 후 상황을 보면, 민주노총 내 일부 정파들의 예상과 달리 민주노동당은 외형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민족해방파(NL)가 민주노동당에 적극 입당하고, 정당명부제 도입에 따라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대거 당선되면서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 방침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전선의 일각으로서 정당’이라는 본인의 생각은 NL부터 좌파·현장파까지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일원으로서 협력할 수 있다는 희망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IMF를 계기로 노동자 대중의 투쟁이 활성화되고, 각 정파들이 이에 복무하면서 서로 협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특히 NL의 경우에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남북관계가 상대적으로 안정화되면서, 북한 관련 이슈가 운동 진영 내에서 그 중요성이나 민감성이 상대화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여러 계기를 거치며 이러한 희망의 전제조건이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첫째, 전국민중연대 해산, 민주노동당 해체에 이르는 NL의 독단적 행보가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최근 여러 글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부언하지 않겠다.) 

둘째, 민주노동당 해체 후, 탈당세력은 2010년대에 이르러 심상정 의원 주도로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진했다. 탈당세력은 처음에는 민주당을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최소한 거리를 두려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진보정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선거법을 개정한다(연동형 정당명부제)는 약속을 받고 민주당에 적극 협력하는 태세로 점차 전환했다.

달리 말하면, 한편으로 NL 진영은 북한 문제라는 수렁에 빠져 비상식과 독단의 길로 가고 있다. 게다가 이는 근본적인 이념적 차이, 정세인식의 거대한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차이는 실천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탈당하여 그와 선을 긋고 있는 정의당의 경우에도 지난 총선에서 위성정당 파동으로 선거법 개정이 파탄난 후, 전략적 방향성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사실 선거법 개정은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 시절 약속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추진할 때 묵인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정의당은 조국 사태 당시 조국 법무무장관 임명을 인정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공신력이 추락하는 실책을 저질렀다고 반성하며, 최근에는 의식적으로 민주당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투표가 아마도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한일 정상회담이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에 대해 보인 태도에서 드러나듯, 기본적으로 민주당과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공유하는 바가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북한에 편향적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당에 의존적이라는 문제는 단지 정당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현재 사회운동 전반이 공유하는 바다.    
 
2) 노동조합 측면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창립 초기에 ‘계급형성적 노동운동’,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기본 방향으로 제시했다. 그 단초로서, IMF 이후 노동신축화(파견법)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 후로 노동조합 활동의 경륜을 쌓아나가면서 우리의 활동노선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 기관지에서 1987년 이후 노동운동사를 우리의 시각에서 정리하는 글을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1970년대 말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와 함께 노동조합 운동도 여러 측면에서 위기에 처했다.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전통적인 산업노동자 규모의 절대적·상대적 감소, 조직률 하락과 조합원 감소, 노동조합의 경제적·사회적 영향력 감소 등등. (사실 우리가 말한 ‘계급형성적 노동운동’,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도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었다.)

물론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노동조합의 노력도 있었는데, 2000년대 이후 이러한 흐름을 ‘노동조합 재활성화(revitalization)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구의 어떤 연구자들은 이러한 시도를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 

① 조직화: 조합가입 확대와 작업장 대표성 강화
② 조직 재구조화: 통합, 내부적 재조직(조직개편/합병, 내부개편)
③ 고용주와의 파트너십: 단체교섭 제도의 보호와 발전, 노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축소 
④ 사회운동과 연합 형성: 지역 내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하는 개인(대표), 네트워크에 대한 접근
⑤ 정치행동: 권력자원 접근성 제고
⑥ 국제연대: 다국적 기업 정보 교환, 국제노동단체와 국제노동조합에 대한 로비

앞의 세 가지, 즉 ① 조직화, ② 조직재구조화(예: 대산별 통합), ③ 단체교섭 변화(중앙-산별-지역-사업장 교섭 개편)가 노동조합의 내부지향적 개혁이라고 한다면, 뒤의 세 가지, ④ 사회운동과 연합, ⑤ 정치행동(정당관계), ⑥ 국제연대는 외부지향적 개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듯하다.  

한국에서도 지난 25년간 노동조합운동의 개혁을 위한 여러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조직화·조직재구조화·단체교섭 분야의 내부적 개혁은 상당히 지체된  반면, 외부지향적 개혁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분야는 최근 들어 민족해방파의 주도 하에 극히 왜곡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먼저 후자에 대해 말해보자면, 민족해방파 주도로 편향적이고, 노동조합의 기본적 메커니즘을 무시하는 정치화(더 엄밀히 말하면 노동조합의 정치도구화)로 가고 있다. 사회운동 연대라는 측면에서 보면, 전국민중연대 해산, 민주노총의 한국진보연대 미가입 이후, 전국민중행동의 최근 행보를 보면, 민족해방파의 편향적이고 독단적인 성격이 극대화되고 있다. (2022년 사회진보연대는 전국민중행동에서 탈퇴했다.) 정당 측면을 보면, 최근 민주노총의 정치방침, 총선방침 논의가 보여주듯, 민족해방파 세력이 노동조합의 메커니즘을 무시하며 무리한 방침을 강요하려는 태도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다음으로, 전자 분야는 매우 세밀하고, 구체적인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노동운동사 정리 작업도 그의 일환이다. 「계간 사회진보연대」 다음 호에 이 문제를 다루는 별도 좌담을 기획하고 있다.) 간단히만 말해보면, 노동조합의 내부적 개혁을 통해 운동의 통일성과 단결력을 높이고 사회적 지지를 확대하려는 시도보다는, 개별 사안별로 (마치 민원 해결을 요구하듯) 민주당에 의탁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사실 이는 특정 집단이 정치인이나 정당에 정치적 충성을 보이면 그에 따른 특수한 사적 이익을 보장받는다는 정치적 후견주의(clientism)에 가깝다. 이에 비한다면, (비록 정권의 성격에 따라 부침이 있을지라도) 정권의 교체에도 견뎌낼 수 있는 노사중앙교섭이나 사회적 대화 채널을 제도적인 수준에서 확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제도적이고 공개적인 교섭과 대화를 진행하려면 노동조합이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의제와 정책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 민주주의가 활성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일이 실현되려면 노동조합의 내부적 혁신이 동반되어야 한다. 특히 내셔널센터의 역할에 대한 노동조합 내부의 인식이 변화해야 하고, 중앙교섭-사회적대화의 의제나 실행방식에 관한 합의를 마련하는 과정이 진전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는 회피되는 반면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은 민주당에 의탁하는 상황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적 혁신이 왜 지체되는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겠으나, 필자는 기업별 노사관계라는 출발점이 중력처럼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생명을 이어가는 한 기업별 노사관계과 무리 없이 유지될 수 있고, 개별적인 사안이 발생하면 민주당과의 ‘후견주의’적 관계, 채널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굳이 적극적인 현상변경에 나설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3) ‘시민운동’ 측면에서
 
필자는 문재인 정부 시기, 시민운동의 ‘파당적 재편’에 대해 말한 바가 있다. 정부와 시민단체 사이에는 특혜와 지원을 대가로 정치적 지지를 교환하는 관계(후견주의)가 자리 잡았다. 그에 따라 ‘시민사회의 공론장’라는 이상은 소멸했는데, 정당 간 경쟁이나 갈등을 초월하여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21대 총선은 특정 시민운동 출신들이 선거를 위해 급조된 정당의 후보로 선거 경쟁에 나서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시민운동이 곧 정당이고, 정당이 곧 시민운동인 현상이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민운동은 국가에 흡수되고 타락한 것이다.  

시민운동이 파당적으로 재편되었다는 말은 시민단체의 활동이 진영논리를 철저히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은 2015년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합의를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력한 항의 행동을 펼쳤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합의를 파기하지도 않고 재협상을 하지도 않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이고 있음에도 정의연은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미향 전 대표가 민주당 비례의원으로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했다. 이를 보면, 시민운동이 진영논리에 따라 상대방 진영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자기 진영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즉 파당적으로 행동하며, 그 대가로 국회의원직과 같은 권력이나 여타 지원을 향유한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도 추미애 장관의 검찰총장 직무배제에 대해 어떤 논평도 내지 않았다. 이 역시 시민운동이 독립성, 자율성을 잃고 진영논리를 따랐다는 역사적 사례로 남았다. 
 
 

3. 자기비판의 지향점

지금까지 ‘운동주체의 변화’를 다루면서 현재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을 몇 가지 언급했다. 국제정세나 북한에 대한 편향적이거나 맹목적인 인식, 시민운동의 파당적 재편, 노동조합이나 시민운동에서 공히 나타나는 민주당에 대한 의탁 또는 후견주의(사적 특수이익과 정치적 충성의 교환), 그 결과 민주당의 인민주의를 추종하거나 강화하는 경향.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서로 밀접히 얽혀 있다.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에서 왜 이렇게 우려스러운 경향이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필자는 1980-90년대 운동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개인, 집단, 세대가 엄정한 자기비판 없이 정치에 뛰어들거나 운동을 이어나간다고 자임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1980년대 말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 북한의 타락은 우리 운동을 엄정하게 자기 평가해야 할 중대한 계기였으나, 이 계기를 무시하고 정치와 권력에 몰입하면서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최근 우리가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소련과 중국)에 대해서 다시금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것도 현재 사회운동의 편향적이거나 맹목적인 행태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를 숙고하려는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재검토를 통해서, 생산양식의 변형이란 무엇인가(상품-화폐관계, 임노동관계의 변형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혁명은 이견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민주주의), 혁명은 어떻게 폭력을 억제할 것인가(반폭력),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과연 법의 지배를 초월할 수 있는가(법치주의) 등등의 문제를 발본적으로 재론하고자 한다. 

민주주의·법치주의의 거부, (대항)폭력 숭상이라는 자기파괴적 운동 경향은 결코 20세기 공산주의의 실패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21세기에 반복적으로 재발할 인민주의 운동과 함께 더욱 기승을 부릴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회고하건대, 20세기 전반기에는 (또는 흐루쇼프와 알튀세르 등장 이전에는) 공산주의자에게 전향·비전향이라는 틀밖에 없었다. 당과 코민테른의 지도방침에는 오류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를 따르든가, 따르지 않던가 둘 중 하나 선택 외엔 없었다. 그것을 따르면 비전향이요, 따르지 않으면 전향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즉 이 당시에는 ‘자기비판’이라는 제3의 항이 없었다. “비전향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말은 오류에 맹목적인 비전향이 자기비판보다 더 나은 길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민족해방파는 ‘비전향’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바로 북한 그 자체의 내부적 변질(전향)이 있었다고 규정해야만 사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북한이 일종의 ‘세습왕조’ 체제로 변질된 데다가, 선군정치가 말하는 것처럼, 핵무력으로 주변국의 조공을 받아보겠다는 식의 노선을 고착화하고 있다. 민족해방파의 경우, ‘비전향’ 그 자체의 변질, 즉 북한의 본질적인 타락을 인식하지 못한다(또는 인식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오류에 맹목적인 비전향이 자기비판보다 나은 길이 될 수 없고, 운동의 자기비판이 현시대의 사활적 과제라는 말은 이런 경우도 당연히 타당하다.  

25주년의 최후의 질문은 아마도 “그래서 사회진보연대는 지난 25년간 사회운동의 발전에 기여했나? 아니면 사회운동이 겪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 기여했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매 순간 최선의 인식을 하려고 노력했고 최선의 결과를 낳기 위해 실천했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운동집단을 평가하기에 앞서, 철저한 자기비판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을 전제로 오히려 사회운동을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이 현 시기 우리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자기비판과 ‘운동의 운동’이 우리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역시 사회운동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 즉 생각의 변화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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