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정치적 올바름, 분석과 비판

이아림 | 정책교육국장
 

분석대상과 취지

 
사례 하나. 1990년 6월 21일, 일간지 《프레스노 비》는 “메사추세츠주를 아프리칸 아메리칸에게 되돌리는 계획”(a plan for putting Massachusetts back in the African-American)이라는 헤드라인을 지면에 실었다. 단어 ‘black’을 ‘African-American’로 일괄적으로 바꿔서 벌어진 실수였다. “back in the black”은 흑자로 돌아섰다는 의미로, 따라서 원래 제목은 “메사추세츠주를 흑자로 되돌리는 계획”이다. 
 
사례 둘. 2014년 베르겐커뮤니티대의 미대 교수가 소셜미디어에 어린 딸의 사진을 올렸다. 사진 속 딸의 티셔츠에는 용 그림과 함께 “불을 토하고 피를 흘려서라도 내 것을 차지하겠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대학 측은 티셔츠의 문구가 ‘위협적’이라며 문제 삼았다. 교수는 이 문구가 인기 TV 시리즈물인 〈왕좌의 게임〉 내용에서 따온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학교 관리자는 ‘불’이 AK-47 소총을 가리킬 수 있다고 고집하면서 교수를 무급휴직 처리하고 심리 상담을 받게 했다.
 
 
사례 셋. 2017년 2월 1일 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 폭력 사태가 터졌다. 트럼프 지지자인 우익인사 밀로 야노풀로스가 강연하기로 한 건물을 1500명가량의 시위대가 둘러쌌다. 시위대는 맨주먹, 파이프, 막대기, 장대 따위로 강의를 들으러 온 학생과 여타 사람의 얼굴과 머리를 공격했다. 이를 말리던 학생조차 ‘신나치’로 몰려 구타당했다. 그러나 기물파손과 폭력에 가담한 학생들은 한 명도 징계받지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글에서는 상황에 따라 ‘정치적 올바름’ ‘정치적 올바름 운동’ 또는 ‘PC’로 서술)이라는 주제를 분석하기에 앞서 세 가지 사례를 나열한 이유가 있다. 이 사례들은 사건이 일어난 시점, 문제가 된 이슈, 사안의 심각성은 모두 다르지만,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문제의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이 글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을 하나의 정형화된 ‘정치 스타일’로 정의하고자 한다. 첫째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정치적 올바름은 성별이나 인종 등에 따른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단어를 바꿔 부르거나, 소수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입안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소수자를 억압받아 온 ‘피해자’로 위치 지으면서 명확한 ‘가해자’ 개인을 찾게 되고, 이들의 혐오 스피치를 규제하거나 처벌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최근에는 반드시 소수자가 아니더라도 개인적 트라우마를 이유로 정신적 피해감을 호소하는 사람에게까지 피해자의 지위가 확대된다. 둘째 사례에 나온 교수의 소셜미디어를 본 학생들이 학교 당국에 문제 제기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정치적 올바름은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피해감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도덕적 자기 확신에 차 있는 상태를 전제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예전에는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다양한 의제를 공론장에 끌어내 ‘정치화’하지만, 그 사안 자체를 정치적으로 다루기보다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문제로 다시 치환한다. 여기서 ‘정치적으로 다룬다’는 의미는 토론과 상호 설득을 통해 타협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뜻이다. 정치적 올바름처럼 모든 쟁점을 도덕적으로 다루게 되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이 배제되며 서로의 견해가 종합될 수 없고 양단간에 선택이 강요되면서 양극화가 강화된다. 따라서 셋째 사례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우익인사의 강연은 토론할 가치도 없으며 그저 저지하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극단적으로는 이를 위해 폭력도 불사하겠다는 사고까지 이어진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대개 진보진영이 주도하고 보수진영은 이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 운동에 대한 가치판단을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제기하는 이슈를 중심으로 사고하기 쉽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을 하나의 정치 스타일이나 행위 양식으로 정의한 이유는, 문제의 본질이 그들이 제기하는 이슈에 있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이렇게 판단한 이유를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해명하고자 한다. 더불어 이를 통해 소수자에 대한 차별 철폐라는 선의에서 시작한 운동이 왜 위의 사례와 같은 극단적 폭력 사태까지 이어진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2024년 현재 한국 사회운동이 이 문제를 대체 왜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 질문에 세 가지 측면에서 답하고자 한다. 첫째, 2024년 미국 대선에 트럼프가 재등장한 상황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미국정치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 사실 트럼프가 부상하는 데에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PC에 대한 피로나 PC 혐오증이 한몫했다는 분석이 많다. 또한, 트럼프 집권 시기 정치적 양극화와 함께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극단적으로 발전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용어가 대중화된 지 40년이 지난 현재에도, 정치적 올바름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둘째, 정치적 올바름이 미국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취급하기에는, 한국에서도, 특히 2017년 미투 운동 이후 관련한 이슈가 점차 증가하고 있어서다. 한국에서도 ‘PC충’이라는 말이 온라인에서 자주 등장하고, 가장 최근에는 아이유 신곡 제목을 둘러싸고 논란이 된 바 있다. 학계에서도 최근 몇 년간 문화영역을 시작으로 다양한 연구가 전개되고 있다. 이미 사회진보연대는 2019년 한국에서 ‘전투적 여성주의’가 부상하고 있음을 분석한 바 있다. 정치적 올바름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공유하는 지점이 크기 때문에,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부상은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정치적 올바름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방증한다. 한국 사회에서 앞으로 전개될 이슈를 분석하기 위해서라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셋째, 언제부터인가 사회운동에도 정치적 올바름이 주류적인 정치 스타일로 자리 잡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여성이나 환경 의제의 시민운동단체 활동가가 아닌 이상 정치적 올바름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특히 나이대가 높을수록 정치적 올바름을 젊은 세대 사이의 쟁점으로 치부하기 쉽다. 잘 모르는 영역이기 때문에 말을 아끼고 그래서 더욱 논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금기가 논쟁을 대체하는 풍토나 정치를 도덕화하는 경향은 운동사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정치적 올바름의 양상이다. 퇴행적으로 보이는 운동방식이 왜 ‘진보’의 이름으로 유행하게 되었는지 해명하기 위해서, 정치적 올바름 현상을 제대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해일이 덮쳐오는데 조개나 줍는다”는 식으로 무시할 일도 아니고, 단지 속 시끄러워지지 않기 위해 침묵할 문제가 아니다.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는 정치적 올바름의 기원은 무엇인지, 그 운동의 특징은 무엇이고 어떤 사상에 근거한 활동인지 해명하고자 한다. 이에 근거해 2부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고, 사회운동이 정치적 올바름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본다. 거창한 취지에서 시작한 글이지만, 이 글의 한계는 분명하다. 발자취가 깊지 않기에 부족한 측면이 많다. 아직 국내에서 연구가 오래되지 않았고, 특히 사회운동 내에서는 운동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검토하는 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정치적 올바름은 항상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누구인가를 따져 묻기에, 필자가 30대 여성이 아니었다면 용기 내기 어려웠을 만큼 민감한 영역이다. 어렵게 첫발을 내딛은 만큼, 이 글을 시작으로 사회운동 내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주제에 대한 금기를 깨고 많은 토론이 이어졌으면 한다. 
 
 

1부. 정치적 올바름 분석

 

1. 정치적 올바름 용어의 기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의 어원은 좌파 진영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60년대 미국 급진주의자(소위 ‘신좌파’)의 애독서였던 『마오주석어록』에 나오는 ‘올바른 생각’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당시 신좌파는 이 용어를 교조주의에 대해 풍자하는 농담으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동료 학생이 부적절한 행동을 했을 때, 문화혁명의 홍위병 말투를 모방해 “정치적으로 매우 올바르지 않습니다, 동지!”라고 말하는 식이다. 일종의 ‘자학개그’였던 셈이다. ‘political correctness’란 단어가 인쇄물에 명시된 최초의 용례는 1970년의 한 논문으로 알려져 있다. 토니 케이드 밤바라는 1970년 그녀가 편집한 문집 《흑인여성》의 한 에세이에서 “남자는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없다. 쇼비니스트들도 마찬가지다”라고 썼다. 밤바라의 용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정치적 올바름’이란 단어에 점차 웃음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1990년 초 본격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이란 용어가 대중적으로 확산하게 된 데에는 당시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소수자 운동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용어로 불렀던 보수진영의 영향이 크다. 작가 로버트 켈너는 1985년 가을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대학 내 젊은 보수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속어로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2. 정치적 올바름의 양상과 이론적 지반

그렇다면 보수진영이 정의한 ‘정치적 올바름’에 해당하는, 당시 대학가에서 벌어진 소수자 운동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대표적으로 혐오 스피치 코드를 제정하고, 소수자를 위한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를 시행하며, 대학 교과과정을 성·인종 친화적으로 개편하는 것이 주요 실천태였다. 이러한 초기 운동의 양상은 최근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정치 양식의 원형을 갖추고 있다. 이에 대한 검토를 통해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고, 그 운동의 이론적 기반은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1) 혐오 스피치 규제와 처벌
학생 및 교직원이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장애 등에 대한 경멸적인 표현을 사용할 경우 이를 처벌하는 규정인 혐오 스피치 코드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행동 양식이다. 우선 어떠한 표현이 어떠한 맥락에서 혐오인지 판단하기 위해 도덕적 기준이 개입된다. 또한, 언어를 교정하는 행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언어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규제와 처벌이라는 방식을 선호한다. 2011년 현재 미국의 390개 대학교 중에서 67%의 대학교가 혐오 스피치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인종·성·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을 스터디그룹에서 배제하는 행위, 더듬거리며 말하는 학생을 농담조로 비웃는 행위, 히스패닉을 깎아내리는 코미디언을 포함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를 후원하는 행위”를 명시한 미시간 대학교의 사례처럼,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는 경우도 많다. 코네티컷대학교의 경우, ‘적절치 못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까지 금지하면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혐오 스피치 규제라는 운동 방식은 ‘성차별적 언어 바꿔 쓰기’ 캠페인으로 소급할 수 있다. 급진주의 여성주의자들은 1970년대부터 남성 중심의 성차별적인 단어들을 중립적인 단어로 바꾸어 쓰자고 주장했다. 대표적으로 결혼 여부에 따라 여성을 ‘미스’(Miss)와 ‘미시즈’(Mrs)로 구분하지 말고, 남성 통칭어 ‘미스터’(Mr)처럼 여성도 여성 통칭어 ‘미즈’(Ms)로 부르자는 제안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1971년 잡지 《미즈》(Ms.)의 창간으로 추진력을 얻었다. 또한, 남성 소유격 his가 들어간 ‘역사’(history) 대신 여성 소유격을 활용한 ‘herstory’라는 신어도 등장했다. (그러나 history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기록’이라는 의미의 ‘historia’에서 왔기 때문에 his와 관련은 없다.)

문제는 이러한 운동이 의식개선 캠페인 차원을 넘어 규제와 처벌까지 나아갔다는 점이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88년에 있었던 하버드 사회사학자 스테판 테른스트롬의 일화다. 미국 인종 문제의 역사를 다룬 ‘미국의 민중’이라는 제목의 강좌를 담당하던 진보사학자인 테른스트롬은 수업 시간에 Indian(최근에는 Native-American라고 불린다), Oriental(‘해가 뜨는 동쪽’이라는 의미로, 서구를 기준 삼아 아시아를 부르는 용어라 최근에는 사용하지 않는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학생의 익명 고발로 인해 결국 강좌를 폐기당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여겨지는 표현의 범위가 성·인종 분야를 넘어 점차 확대되었다. 당시 미국도서관협회는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기피해야 할 교과서와 도서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1990년대 위험한 도서로 자주 꼽혔던 책 5위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었고, 심지어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가 7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성적인 내용이나 공격적인 언어가 어린이에게 부적합하다는 것이 금서 선정의 이유였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스피치 코드를 제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배경에는 언어가 현실을 바꾼다는 강력한 믿음이 깔려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에 언어를 바꿔야 인식을 바꿀 수 있고, 인식이 바뀌어야 행동도 바뀔 수 있다는 논리다. PC주의자는 차별 철폐를 위한 하나의 강력하고 효율적인 방편으로 언어를 교정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언어도 물리적 폭력에 버금가는 ‘폭력’이 될 수 있기에, 강제력을 통해서라도 언어를 규제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스튜어트 홀은 이러한 접근법에 “우리가 ‘현실’과 맺는 관계가 언어를 통해서만 매개되기에 언어가 권력 작용의 핵심에 있다”는 사고가 깔려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올바름이 극단적인 ‘명목론’, 즉 사물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 그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고 말한다. 언어결정론은 “언어는 사회를 반영한다” “언어 변화는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가설에 반대하며“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모국어가 그어 놓은 선을 따라 자연과 세계를 인식한다”고 보는 이론인데, 사피어의 제자였던 미국의 아마추어 언어학자 벤저민 워프가 주장해 흔히 ‘워프주의’라고 불린다. 워프주의는 현재 학계에서는 신빙성 있게 인용되지 않는다. PC주의자는 강한 워프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어는 생각과 편견을 다듬는 ‘셰이퍼’(Shaper)라고 발언하며 운동을 펼쳤다. 이처럼, 사회 변화를 이루려면 일상적인 언어부터 바꾸는 게 효과적이라는 주장은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누군가의 발언에 문제제기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2) 정체성의 정치를 기반으로 한 적극적 우대조치
미국 사회에서 적극적 우대조치 개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변화했다. 1935년 처음 등장할 당시만 해도 노동자에 대한 관리자의 불공정 관행을 금지하는 ‘적극적 조치’를 뜻했던 적극적 우대조치는, 점차 소수자 차별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그 의미가 변화한다. 처음에는 공공기관에서의 채용 차별을 금지하는 수준에서 이뤄지다가, 「필라델피아 플랜」(1969) 이후로는 다양성의 확보를 위해 소수민족에 일정 비율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1980년에 이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흑인 비율이 백인 비율과 거의 동등해진다. (그러나 흑인의 고등학교 중퇴율이 높았기 때문에 이러한 흑인들의 지위 향상은 주로 중산층에 집중되었다. 1978년 흑인의 27.5%는 빈민계층에 머물렀는데, 같은 기간 백인은 6.9%였다.) 그런데 이렇게 행정부가 주도한 적극적 우대조치는 대학가에서 전개된 정치적 올바름 운동과 만나면서 제도의 취지가 변화한다. 

자유주의 입장에서, 특정 자격요건이 되지 않음에도 여성과 소수자에게 일정 비율을 할당했던 근거는 궁극적으로는 ‘기회의 평등’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즉, 현실에서는 기회의 평등을 달성하려고 해도, 가정형편이나 지역의 교육 인프라 수준 차이와 같은 한계가 있기에 과도기적으로 할당제를 취한 것이다. 사회가 일정수준 이상 성장하면 자연스레 성별과 인종에 따라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적극적 우대조치는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정체성의 정치에 기반을 두어 적극적 우대조치를 영구화하고 원칙화하고자 한다. 이는 기회의 평등보다는 ‘결과의 평등’이 사회적 정의라는 사고를 바탕에 둔다. 따라서 이후 정치적 올바름은 적극적 우대조치를 보존하는 것을 넘어 더욱 확대하고 정교화하는 운동으로 나아간다. 1980년대에 할당제가 정착하면서, 주립대학에서 흑인 여성은 석사학위만을 취득하고 교수로 임용되는 반면, 백인 남성은 박사학위를 받고도 임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미국에서 정체성 정치는 1970~80년대를 거치며 발흥한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종식하기 위해 민권운동이 채택한 전략은 시민권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누구나 평등과 존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보편적 대의에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운동의 급진화와 함께, 성별, 인종, 성적 지향에 기반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운동 양상이 바뀌게 된다. “우리는 가장 근본적이며 잠재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정치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서 직접 나온다고 믿는다”는 유색인 페미니스트 단체 컴바히강 집단의 성명(1977)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정치활동을 ‘내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표현하는 활동으로 이해했고,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신좌파의 구호 아래서 섹슈얼리티, 인종, 종족, 문화 등 다양한 문제를 정치의 영역으로 소환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떤 새로운 의제를 다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혐오 스피치 규제의 방식처럼,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활동 양상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억압받는 소수와 억압하는 다수의 관계를 계급적대와 유비해서 사고한다.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을 마치 자본가를 제거하면 된다는 식의 인격화된 관계로 조야하게 해석했고, 결코 다른 한쪽을 제거할 수 없는 성별, 인종과 같은 문제를 적대적인 관계로 끌고 나갔다. 이들의 운동은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한 상태에서 가해자를 지목해 처벌하는 방식으로 굳어졌다. 

정체성의 정치는 억압받는 소수의 도덕적 정당성과 특권을 옹호하고, 약자의 폭력은 정당하다는 인식까지 나아간다. 1960~70년대 신좌파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허버트 마르쿠제가 1965년에 썼던 글은 이러한 인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마르쿠제는 사회 안의 여러 집단 사이에 권력 격차가 존재하는 한, 관용은 기득권자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줄 뿐이기에 강자를 규제하고 억압하는 차별적 관용이 진정으로 “해방적 관용”이라고 설파한다. 그는 해방적 관용을 “우파에서 전개하는 운동은 용납하지 않고 좌파에서 전개하는 운동만을 용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또한 탄압과 세뇌, 언론과 집회의 자유 박탈, 교육 내용 제한 등 일견 비민주적으로 비치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약자가 권력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최근 스탠포드대학에서 백인 학생이 흑인 학생에게 욕을 하는 것은 안 되지만 그 반대는 가능하다는 스피치 코드를 제정했던 것도, 그것이 피해자의 특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교육기관에서 갖가지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기존에 확립된 담론과 행동의 장 안에 가두기 때문에, 그 교과 내용이나 관행에 엄격한 제한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마르쿠제식 사고는 대학의 교과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간다. 또한 현재 하버드 교수이기도 한 헨리 루이스 게이츠가 「어쨌든 누구의 학습목록인가?」(《뉴욕 타임즈》, 1989)라고 물었던 것처럼, 정체성 정치의 핵심은 결국 “무엇을”이 아니라 “누가” 했느냐이기 때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누가 생산하느냐는 이슈로까지 확장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3) 대학의 교과과정 개편
1988년 스탠퍼드 대학에서는 교과과정이 서구 중심적이라는 학생들의 비판에 직면하여 신입생 필수교양과목으로 진행하는 “서양 문명” 수업을 “문화, 사상 및 가치”라는 다문화 프로그램으로 대체했다. 이에 전국적으로 논쟁이 일었는데, 대표적인 찬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컬럼비아 사범대 교수 다이앤 래비치는 1990년 여름 《미국의 학자》에 실린 「다문화주의: 다수로 이뤄진 많은 사람」이라는 논문에서, 유색인종 및 소수민족 학생의 자존감과 학업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민족 중심적 커리큘럼을 제안하는 사람을 특수주의자라고 비판한다. 특수주의자는 멕시코계 미국인 학생이 마야 수학, 마야 달력, 마야 천문학을 공부하면 과학과 수학에 매력을 느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래비치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학생들이 같은 인종 출신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고 부당 전제하며, 오히려 소수민족 학생과 중산층 백인 학생 사이의 지적 격차를 키울 수도 있었다.

1991년 봄 《미국의 학자》에 코넬대 교수 몰레피 케테 아산테가 래비치를 비판하면서 다문화 교육을 옹호하는 논문을 싣는다(「다문화주의: 교류」). 그의 논리를 살펴보면 정치적 올바름이 왜 대학의 교과과정에 대한 개입을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아산테는 래비치의 입장이 1860년대 남부에 흑인 학교 설립을 반대했던 해방노예국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운을 뗀다. 래비치가 “인종차별을 없애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커리큘럼에서 인종 차별적 사고, 가정, 상징 및 자료를 삭제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산테가 보기에, 래비치는 커리큘럼에 대한 유럽 중심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주류적 입장에 불과했다. 아산테는 공통된 미국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주장하는 다문화주의는 “위계질서가 없는 문화적 다원주의”라 설명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래비치가 “국제 평가에서 수학 성적이 가장 높은 한국의 아이들이 한국의 고대 수학을 공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라고 언급한 것에 대한 아산테의 반박이다. 아산테는 “한국인이 수학 문제를 출제할 때 한국의 전통을 수학에 접목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인들은 유럽 학자들을 먼저 공부하지 않고, 선조 수학자들을 존경하고 존중하도록 배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말에 동의하는 한국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공통의 문화는 존재하지 않고 인종이나 종족 간 다양한 문화가 존재할 뿐이며, 이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없다는 아산테의 주장은 해체주의와 같은 프랑스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 논쟁의 주요 무대였던 주요 대학의 인문학부에서는 1970~80년대부터 프랑스 철학이 주류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해체주의는 객관적인 진리를 달성하기 어렵고 불가능하다는 차원을 뛰어넘어 객관적인 진리 자체를 부정하며, 따라서 객관적인 진리를 달성하려는 현대 학문의 기획 자체가 문제라는 식으로 이어진다. 주체의 보편성이 아니라 특수성을 강조하는 철학은, 텍스트 너머에 독립적인 실재가 있다고 가정할 수 없으며 결국 수용자에 따라 끊임없이 내용이 재구성된다는 문예 이론으로도 나아갔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이 기반한 다문화주의는 기존에 보편적이라고 표상되는 백인, 서구 중심의 문화·학문 대신 흑인, 여성 중심의 문화·학문으로 새로운 보편적 표상을 만들겠다는 기획이 아니다. 주류적 문화를 흑인, 여성들의 잊힌 역사를 통해 보다 보편적인 방식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기획은 더더욱 아니다. PC주의자에게는 한 사회를 구성하는 보편적인 공통의 문화란 존재할 수 없으며, 다양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무수히 많은 복수의 문화들만 위계 없이 존재할 따름이다. 
 

3.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기원: 기독교 복음주의 신우파운동을 모방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용어’가 좌파 진영에서 보수 진영으로 흘러갔던 것과는 반대로, 지금까지 살펴본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양상’은 보수 진영에서 기인했을 공산이 크다. 198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에서 확산한 혐오 표현 규제, 소수자 우대조치, 교과과정 개편 운동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 정치지형의 변화와 함께 사고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관해 분석한 학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1980년대 레이건 시기를 거치면서 진보정치의 운동방식이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좌파 진영이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운동방식을 차용한 것처럼 보인다.

1964년부터 대학가에서 극적으로 분출한 급진주의 운동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점차 대중적 힘을 잃어갔다. 급격한 사회갈등을 경험한 이후, 미국 사회에는 신보수주의 운동이 출현한다. 많은 사람이 정서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개신교의 복음주의적인 신앙에 이끌렸고, 이들을 중심으로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가 형성되어 대중운동으로 발전한다. 그 결과 레이건 체제가 등장할 수 있었다. 레이건은 1984년 재선에서 총 49개 주의 지지를 얻으면서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신보수주의는 전통적으로 정치권에서 논쟁했던 이슈 외에도, 사적 영역, 즉 신좌파가 정치의 영역으로 소환한 의제에 대해 전통적인 가족을 보존할 것을 주장하고 낙태에 반대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내걸었다. 이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국의 ‘문화전쟁’이 벌어졌다.

1980년대부터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지역 교육청을 압박해 신화와 우화, 기타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 작품을 삭제하고 생물학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도록 강요했다. 또한 보수주의자는 대학이 좌파 교수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고 우려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음모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960년대 급진주의 운동이 전략적으로 대학으로 퇴각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롭게 부상한 정체성 집단에 관한 연구가 학문적, 정치적 과제로 등장했고, 관련 연구를 위한 학과, 연구소, 교수직이 이례적으로 급증했다.) 

보수우파는 우선 대학교 외부에 재단과 싱크탱크를 설립하고 이를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은 여름 캠프를 개최해 대학생들을 조직했고, 교수들의 독서회를 후원했다. 대학원생에게도 지원금을 주면서 공화당과 뜻이 맞는 교수들 밑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했다. 보수세력은 이러한 거점을 통해 핵심세력을 교육하고 공화당으로 편입할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대학교 신문들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학내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다. 급기야 공화당의 대학생 선거운동원 수가 처음으로 민주당의 대학생 선거운동원 수를 추월하는 일도 일어났다. 

존 윌슨에 따르면, 학문의 자유에 대한 보수 진영의 직접적인 공격은 1985년 ‘학계의 정확성’(Accuracy in Academia, AlA)이라는 싱크탱크가 결성되었을 때 정점을 찍었다. 진보 미디어의 편향성을 폭로하는 보수적 단체인 ‘미디어의 정확성’(Accuracy in Media, AIM) 운영자였던 리드 어바인은 대학 강의실의 편향성을 조사하기 위해 유사한 감시 단체인 AIA를 설립했다. “학문의 자유는 교수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연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만, 강의실에서 편향된 강의를 할 수 있는 면허를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AlA의 방침이었다. 교수들의 이름 위에 눈 그림과 함께 “우리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는 문구를 겹쳐 놓은 시카고 대학교의 한 광고는 이들의 입장을 상징했다. 우파는 강연 발표자를 감시하기 위한 캠퍼스 위원회를 설립했고, 강연 내용 중에서 미국 헌법을 비판하거나 미국의 도덕적 가치를 약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간주하는 모든 것을 수첩에 적었다. 이러한 학내 분위기 속에서, 1986년 하버드 로스쿨은 17년 만에 처음으로 ‘비판적 법학연구’ 출신의 다니엘 타룰로 교수 임용을 취소했다. 

실제로 대학가에서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시작된 것은 이 무렵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한 정치적 올바름은 이후 대중적인 논쟁으로 커진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미국의 주요 일간지와 잡지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표현이 매년 5000번 이상 등장했으며, 1997년에는 한 해에만 7200번이나 사용되었다. 

일련의 상황을 고려할 때, 1990년대 본격화된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우파가 1980년대 대학가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입장에 따라 벌였던, 도덕적인 이름으로 단죄하는 검열식 정치 행태를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스튜어트 홀은 대학 강의실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공식적으로 규정하려고 시도한 자들은 다름아닌 우파와 기독교 보수주의자였는데, 역설적으로 정치적 올바름과 우파 모두가 “정치 게임은 종종 이러한 도덕, 문화 이슈에서 승패가 갈린다”는 인식을 공유한다고 보았다. 스튜어트 홀은 정치적 올바름이 보여주는 행위 양식인 편협함, 도덕주의, 참호 속에 숨어 있는 전위주의야말로 1980년대 중반에 좌파가 경험한 패배의 순간에 태어났거나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의 전략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올바르다’는 우리 자신의 청교도적 감각을 위해서 다수를 획득한다는 문제를 희생시킬 수 없다. 소수파가 모든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고, 만약 필요하다면 소수파가 강제로라도 다수파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학자 마크 릴라 역시 당시 정치적 올바름의 핵심 기반인 정체성의 정치가 레이건주의와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정체성의 정치는 우파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레이건 시대 때 정체성 정치의 좌파 버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마크 릴라에 따르면, 1960년대를 지나 1970~80년대에 이르자 젊은이들은 ‘개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대학생 선교회 등 종교단체에 가입하거나 급진적인 운동에서 영혼을 구원받고자 했다. 그는 정체성의 정치와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과의 유사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오크’(woke)라는 신조어(awake에서 파생, ‘각성되어 있음’을 뜻함)가 도처에서 들리는데, 정치적이라기보다 복음주의적인 인상을 받는다. 언론 감시, 순진한 귀를 보호하기, 가벼운 잘못을 죽을죄로 뻥튀기기, 불결한 사상을 전파하는 설교자를 추방하기. 이들은 미국 신앙 부흥운동의 후예다.” 

이처럼 ‘삶은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다’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사고방식에 기반을 둔 신보수주의 운동의 스타일은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스타일과 근본적으로 그 형태가 같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악한 사람이 누구인지 결론을 내려고 하며, 그 악한 사람을 신이라는 절대적인 권위에 의존해 십자군식으로 단죄하거나 추방하고자 한다. 정치적 올바름 역시 피해자를 자임하여 가해자를 처벌하고, 정치적 사안을 도덕적 문제로 치환하는 행동양식을 보인다.
 

4. 정치적 올바름의 오늘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은 1990년대와 달리, 성별, 인종, 성적 지향과 같은 의제에 국한하지 않는다. 정치적 올바름의 본질은 스피치 규제나 의제의 도덕화 같은 ‘정치 스타일’이기 때문에 다양한 영역에서 이러한 행위 양식이 발전할 수 있다. 최근에는 장애, 나이, 환경, 식민지 역사, 동물의 권리 문제와 같은 모든 측면에서의 차별적인 표현을 ‘올바른’ 표현으로 바꾸자는 식으로 나아간다. 한국에서도 종(種)평등한 언어생활을 위해 ‘물고기’를 ‘물살이’로, ‘도축’을 ‘살해’로 표현을 바꾸자는 주장도 등장했다. 의제만 확장된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개념이 더욱 확대되었고, 개인이 느끼는 부당함의 정도도 더욱 확대되었다. 그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들이 최근에 정치적 올바름 문제가 사회 이슈로 떠오르게 된 미국 대학에서 벌어졌다. 특히 트럼프 당선 직후인 2017년에는 1960년대 말을 방불케 할 만큼 강력한 정서적 파장을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 숱하게 일어났다. 
 

양상1) 말이 곧 폭력이라는 ‘가해자 지목-피해자 의식 문화’
미국에서는 우익인사 혹은 진보적 인사일지라도 정치적 올바름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인사의 강연을 취소하기 위한 운동이 대학가에서 발생했다. 맨 처음 ‘분석대상과 취지’에서 살펴본 셋째 사례인 2017년 2월 버클리대 사건이 상징적이다. 여기서 “말이 곧 폭력이다”는 논리가 극단화된다. 당시 버클리대의 주요 학보에 실린 「자기방어로서의 폭력」이라는 글은 “(우익 강연자) 야노풀로스 때문에 사람들 몸이 부서지는 건 괜찮아도, 학교 유리창이 부서져선 안 된다며 걱정하는 것”이라고 시위대의 폭력을 옹호했다.

버클리대 사건 이후 강연 취소 운동이 이어졌다. 대표적 사례는 2017년 3월 미들베리대에서 찰스 머리를 초청할 때 벌어진 일이다. 머리는 1994년 한 책에서 인종 집단들 사이에 평균 IQ가 차이 나는 것이 순전히 환경적 요인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강연 취소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연에 참석해 훼방을 놓았다. 그 과정에서 찰스 머리와 함께 질의응답을 주관하기로 한 교수가 학생에게 머리를 낚여 뇌진탕과 목뼈 손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차를 타고 캠퍼스를 빠져나가려는 두 교수의 차량 후드에 올라가거나, 교통 표지판을 차량에 집어 던지기도 했다. 같은 해 4월에는 클레어몬트매케나대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의 역효과를 주장한 헤더 맥도날드 강연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맥도날드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로 인해 경찰이 소수 집단이 사는 지역에 진입하거나 그곳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더욱 주저하게 되었고, 그래서 인근 주민에 대한 방범이 소홀해져 종국에는 범죄에 더욱 속수무책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아예 논쟁할 가치가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경찰국가를 지지하는 그런 백인우월주의자 파시스트와 얽히는 것 자체가 일종의 폭력”이라며 강연을 여는 것 자체에 반대했다. 결국 학생들은 유리창을 두드리며 강의를 방해했고, 맥도날드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서 탈출했다. 

이 사례들에서 학생들은 강연에 참여해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강연 자체를 취소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연사의 말 자체가 폭력인 가해행위라서 그로 인한 피해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사건 자체를 차단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가해자 지목문화와 피해자의식 문화가 미국 대학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대학 당국도 이를 조장했다. 예를 들어, 2016년 뉴욕대는 이른바 “편향적 태도, 차별, 혹은 괴롭힘”을 당했을 경우 뉴욕대 성원들이 서로를 익명으로 신고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게시물을 학교 화장실마다 붙여놓으며 ‘편향태도 신고전화’를 홍보했다. 익명으로 쉽게 가해자 지목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10년대 들어 발달한 소셜미디어 역시 가해자 지목 문화 형성에 일조하기도 했다. 주변에 군중이 쉽게 모여들 수 있어야 가해자 지목 문화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는데, 이 용어는 현재의 가해자 지목 문화와 피해자 의식 문화를 잘 드러낸다. 미세공격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으로 무시 혹은 모멸감을 주어 상대방이 소외감을 느낄 수 있는 은근한 차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시아인에게 (미국 내 출신 지역이 아닌 아시안 국가 중 출생지를 묻는) ‘어디 출신이야?’라는 질문이 그러하다.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함의가 있다는 것이다. 미세공격 개념은 자신의 불쾌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이가 자신을 상대로 ‘공격’ 행위를 저질렀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데 이용되기 쉽다. 게다가 상대방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까지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례한 행위로 규정하게 되면서 다양한 혼란을 낳게 된다.
 
양상2) 도덕적 자기 확신에 근거해 폭력도 불사
앞서 정치적 올바름은 도덕적 자기 확신에 근거해 숱한 쟁점을 도덕적 문제로 치환한다고 규정했다. ‘그랜드스탠딩’(Grandstanding)은 이러한 양상을 잘 드러내는 신조어다. 그랜드스탠드는 야구장에서 가장 좋은 좌석을 의미하는데, 이 좌석에 앉은 VIP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과장된 몸집으로 공을 잡는 투수의 행동을 그랜드스탠딩이라고 한다. 현재 그랜드스탠딩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임을 뽐내는 말이나 행위를 뜻한다. 소셜미디어에서 사회적 약자 보호를 주장하고, 정치적 상대방을 도덕적으로 꾸짖으며, 자신이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음을 증명하고자 애썼던 조국 전 장관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쟁점을 도덕적 문제로 치환하는 행위는 ‘정치적 양극화’의 동력이 되며, 급기야는 상대를 적, 악마로 규정하면서 폭력도 불사한다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특히 버클리대 사태 이후 좌파 진영에는 자신에게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발언에는 폭력으로 응수해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2017년 말 행해진 두 차례의 설문조사에서 각각 20%와 30%라는 상당수의 학생이 연사들의 캠퍼스 내 연설을 막기 위해 ‘다른’ 학생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때로 “용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위의 사례에서도 학생들은 강연을 방해하기 위해 별다른 고민 없이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행사한 폭력은 우익세력의 극단적 폭력까지 초래했다. 버클리대 사건 이후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강연 취소를 위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잦았는데, 2017년 10월에 플로리다대학교에서도 우익 인사의 발언을 규탄하는 시위대가 차량의 뒷유리를 몽둥이로 가격하며 강연자를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백인 민족주의자임을 선언한 남자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는 일이 발생했다.
 
이유1) 극심해진 정치적 양극화와 그 바로미터가 된 대학
미국 사회는 계속해서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었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사이의 정서적 거리감이 급격하게 커졌다. 정치적 올바름은 이러한 영향 아래서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내집단을 향한 호소는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강조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것을 자랑하는 식이 되기 쉽다. 한편 정치적 올바름이 양극화를 더욱 부채질하는 측면도 있다. 트럼프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트럼프는 진보 진영의 도덕적 위선, 특히 민주당 정치인이 수사적으로 진보성을 드러내는 경향을 공격하면서 당선되었다. 이를 두고 힐러리 클린턴이 정체성 정치에 지지기반을 두고 이를 강조하는 전략을 취했기 때문에 패했다는 분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미국 사회에 문화전쟁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피로감이 만연했고, 이것이 트럼프의 당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 이후 대학가의 정치적 올바름은 더욱 극단화된다. 레이건주의에 대한 반경향이 1990년대 정치적 올바름으로 등장했던 것과 유사하게, 2016년 트럼프 당선 이후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폭력적으로 확산한 것이다.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의 극단적 사례가 2017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 트럼프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극단화를 조장했다. 2017년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일어난 백인우월주의자의 폭력 집회로 한 청년이 차에 치여 죽었고, 최소 열아홉 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이 사건에서 여야 가리지 않고 한목소리로 백인우월주의자를 성토할 때 트럼프는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으며, 뒤늦게 내놓은 입장도 “양쪽 편 모두에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며 사실상 행사를 주최한 이들을 두둔하는 것이었다. 이에 트럼프에 대한 진보진영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미국 사회에서 이렇게 심화한 정치적 양극화의 주요 전장은 대학이 되었다. 그 이유는 대학 사회 안과 밖에 존재하는 불균형 때문이다. 교수들 스스로 자신의 정치 성향을 대답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1990년대를 기점으로 좌-우 비율이 5:1에 육박할 정도로 미국 대학가의 정치 성향이 쏠려있다. 특히 인문학 및 사회과학 계열의 경우 그 비율이 10:1을 넘어섰다. 반면에, 라디오 토크쇼, 케이블 뉴스 방송, 음모론 웹사이트 같은 이른바 “분노 산업”은 오히려 우파에서 더 발달했다. 우파 진영의 매체는 툭하면 대학교수를 조롱거리로 삼고, 대학가에서 발견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행에 대해 자극적인 보도를 통해 분노를 부추기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낸 사례는 2017년 에버그린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진보 성향의 와인스타인 교수는 교내에서 일어난 유색인종 관련 행사 방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시위 학생의 표적이 되었다. 이 시위는 급기야 캠퍼스 경찰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총장을 감금한 채 총장실을 점거하는 사태까지 이른다. 이 사태가 우파 매체인 폭스 뉴스를 통해 학외로 알려지자, 학생들을 살해 협박하는 우파들의 행동이 이어졌다.

이처럼 2017년 이후 대학의 양극화 사이클은 다음과 같이 정형화된다. 먼저 대학 내 시위 학생들의 강연 취소 사건이나 좌파 교수의 발언을 대학 밖 우파 언론매체가 분노를 증폭되게끔 전달한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이 해당 학생이나 교수에게 욕설 메일을 보내거나 살해 협박을 하고, 실제로 행동을 불사하기도 한다. 이어 이 이야기를 접한 민주당, 공화당 양측 지지자들은 상대편에 대한 최악의 믿음을 공고히 한다. 결국 정치적 양극화가 계속해서 강화된다.
 
이유2) i세대를 중심으로 확대된 안전주의 문화
2017년에 대학가에 있었던 극단적인 사건이 갑작스레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 조짐은 예전부터 있었고, 유의미한 변화를 보이던 시점은 2013년 전후다. 2013년 즈음부터 미국 대학가에는 ‘안전주의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를 살피기 위해 이 시기 학생들의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쁜교육』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는 스피치 코드를 만드는 동기는 원래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로 여겨지는 발언을 줄이자는 것이었지만, 요새는 스피치 코드를 마련하거나 연사의 강연을 취소하면서 ‘건강상의 이유’를 내거는 일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특정 종류의 발언은 물론 심지어 각종 책이나 교과과정의 내용이 자신의 정신건강에 위협이 된다는 학생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학교 관리자가 스피치 코드를 마련하거나 강연을 취소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2015년 대학 신문에 컬럼비아대 재학생 네 명이 글을 한 편 실었다. 이들은 “강의실 안에서는 학생들이 안전하다고 느껴야만 하는데, 서양 고전의 많은 텍스트에는 소외당하고 억압당한 사람들의 역사와 이야기가 즐비하며” “그 내용이 감정을 격발시키고 공격적으로 느껴져,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정체성을 하찮게 만들어버린다”고 주장했다. 대학의 기존 커리큘럼이 서양백인 중심 문화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내용이 학생의 정신건강을 위협하기 때문에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이른 것이다.

‘말이 곧 폭력’이라는 대명제 아래에서, 대학가에 만연한 피해자 의식 문화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정신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안전주의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이제 학생들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과 ‘안전공간’을 요구한다. 트리거 워닝이란, 조만간 진행될 수업내용이 학생들에게 꽤 고역일 수 있음을 교수가 말이나 글로 미리 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전공간은 감정 격발이 일어난 사람이 강의실에서 탈출해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캠퍼스에 마련된 독립된 공간으로, 소외감을 경험한 개인들이 모여 그 감정과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다.
 

예를 들어, 2015년 브라운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미국을 강간문화 사회로 볼 수 있는가?”를 주제로 하는 두 페미니스트 학자의 찬반 토론회를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학생들은 ‘안전공간’ 만들기 운동을 벌였다. 미국이 강간문화가 아니라고 주장한 교수를 캠퍼스 내에서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어떤 학생은 감정 격발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본래 트라우마성 사건은 전쟁, 강간, 고문 등의 범주를 의미했는데, 안전주의 문화가 확산하면서 점차 당사자가 당한 손상의 ‘주관적 경험’이 트라우마를 판별하는 결정적 기준이 되었다.

사회심리학자 트웬지는 이처럼 ‘안전’ 개념에 자신의 감정적 안전까지 포함하면서 ‘안전’에 심한 강박을 지닌 세대를 ‘인터넷 세대’의 줄임말인 i세대로 칭한다. i세대는 1995년생을 기점으로 삼는데, 1995년생이 10대가 되던 2006년에 페이스북 가입 연령이 낮아졌고 따라서 그들은 소셜미디어와 함께 인격 형성에 중요한 10대 시절을 전부 보내게 된다. 이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좋아요’를 향한 경쟁에 노출된다. 따라서 다른 어떤 세대보다 10대 때 불안증, 우울증, 자살률이 높게 나타난다. i세대는 2013년 9월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했고, 2017년에 이르면 미국 대학생 거의 전부가 i세대가 된다. 

조너선 하이트는 현재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을 고려했을 때 학생들에게서 우울증 환자들과 비슷한 사고방식이 관찰된다고 우려한다. 우울증은 인지에도 왜곡을 일으켜, 자신, 타인, 세상, 미래를 정당한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부정적 필터링, 남 탓하기, 자신을 피해자화하는 패턴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또한 불안증에 걸린 학생은 의도치 않은 은근한 차별을 의미하는 ‘미세공격’이나 강연자의 발언에 민감하고 위험을 인지하는 경향이 높아진다. 하이트는 i세대가 불안증과 우울증의 수준이 높은 세대이다 보니, 미국의 수많은 대학이 안전주의 문화에 동조해 학생을 과잉보호하는 방식에 익숙해진 것이라 분석한다.
 
 

2부. 정치적 올바름 비판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1부 정치적 올바름 분석’에서 이미 짚어 보았다. 앞서 분석했듯이, 정치적 올바름의 핵심은 어떤 의제를 다루느냐보다는, 그 운동을 선악의 구도, 가해자-피해자라는 구도로 다루는 방식에 있다. 결국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동일한 사고방식이라는 사실이 정치적 올바름이 지닌 가장 결정적인 결함이다. 이를 기반으로 2부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 논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기를 드는 우익 보수주의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치를 도덕화하며 양극단으로 몰아간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정치적 올바름과 우익 보수주의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대항 폭력을 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의 비판과 구분되는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 중에는,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의식에는 동조하면서도 방식이 너무 과하기에 절제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지’ 입장이 있다. 도입부의 셋째 사례와 같은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행동만 경계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좌파 진영에서 결과적으로 PC운동에 동조하거나 포섭되는 이유도 대개 이러한 비판적 지지 입장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강준만이 그러하다. 그는 극단적, 변질된 정치적 올바름만 경계하면 된다고 보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은 그 “예의”의 기준에 도전하는 행위다. 정치적 올바름은 사회의 특권 계층이 규정한 예의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에 가깝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는 예의를 잘 지켜서 그들이 제기하는 의미 있는 의제를 공론화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앞선 분석에서 확인했듯이, 말이 곧 ‘폭력’이라는 정치적 올바름의 핵심 전제에는 이에 대항해 폭력도 가능하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또한 악을 척결해야 한다는 식의 도덕적 사고는 극단적 폭력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손쉽게 이어진다. 즉, 정치적 올바름은 정치를 도덕화하는 정치양식 자체의 문제다. 비판적 지지는 정치적 올바름의 이러한 특성을 파악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나 좌파 진영 내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보다 발본적인 비판을 해왔던 논자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자마다 강조점이 달라 무 자르듯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대개 자유주의자는 성·인종의 구분에 따른 차별을 시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도, 백인남성 문화를 비백인비남성 문화로 대체하거나 보편적인 문화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내용을 확장하고자 한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이 합리성과 객관성이라는 학문의 기준을 파괴하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태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비판한다. 

좌파의 경우, 정치적 올바름이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을 고립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체제에 수용될 수 있을만큼 일정한 유해성이 제거된 수준에서 포섭되기도 한다고 비판한다. 영미권의 비판자로는 대표적으로 앞서 소개한 스튜어트 홀이 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대학 생활을 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했던 나오미 클라인 역시 훗날 저서를 통해 PC운동을 반성한다. 유럽권에는 슬라보예 지젝이 일관되게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 왔다. 아래서는 이들의 비판 논거를 중심으로, 사회운동이 유념해야 할 교훈을 추출하고자 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영역, 예를 들어 문화예술, 언어학, 교육, 정치 사회운동의 입장에서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정치적 올바름의 탄생지이자 핵심 전장인 교육을 중심으로 정치적 올바름의 부정적인 영향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정치적 올바름이 정치 사회운동의 전략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제언한다.
 

1. 정치적 올바름이 교육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

1) 보편적인 시민 교육을 어렵게 한다
기존의 교과과정이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문화에 기반해 있다고 보면서, 성별, 인종, 종족과 같은 정체성에 기반한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대체하려는 정치적 올바름의 시도는 보편적인 시민을 육성한다는 현대 교육의 핵심 가치를 근본에서부터 허문다. 

「대학을 뒤덮은 폭풍」에서 존 설리는 정치적 올바름이 시도하는 교과과정 개편이 마치 창조론을 교과과정에 넣으려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행동처럼 보인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개편 시도는 공교육 자체를 위협하고, 전체 교과과정을 정치 캠페인에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크 릴라에 따르면, 미국 아동은 아주 어린 시기부터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그것에 관해 표현하도록 교육받는다. 릴라는 이들이 대학에 올 때쯤이 되면 정치를 다양한 정체성 담론의 표현으로만 이해하고, 계급과 전쟁, 경제, 공공선 같은 과거 정치의 영역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문제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여권 신장 운동이 거둔 성취는 실제로 중요하지만, 권리 보장에 기초한 정치체제를 수립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업적을 먼저 이해해야 그 성취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체성의 정치에 기반한 교육은 소수자 우대조치를 통해 기계적 평등을 달성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다양한 집단 간의 벽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멕시코계 미국인 학생에게 마야 수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식으로) 학생의 인종, 종족에 기반해 학습 내용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학생을 일차적 동일성에 기반한 고정된 범주로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차적인 동일성과 상관없이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공통된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점차 사람들은 서로 섞이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사회는 파편화될 것이다. 과학에서 “누구의 학습목록인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뉴턴 물리학과 아인슈타인 물리학이 아니라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이 존재하는 것이며, 유럽인이 아니더라도 현대인이라면 물리학의 기본 지식을 학습할 필요가 있고 그럴 권리가 있다.
 
2) 교육의 질을 저하한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에서는 교육을 정치적 행위로, ‘사회 변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고한다. 학문에 대한 평가 기준 역시 합리적인가, 진실에 부합하는가가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 어떠한가, 누가 주장했는가가 중요할 따름이다. 비유럽인 ‘타자’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학문에 대한 논쟁과 토론을 대체한다는 사고는 학문적 발전을 저해한다. 

특히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의 양상에서 대학교육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힘들다. 교수는 학생이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고 주장할 만한,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회피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하버드 법학대학원의 석지영 교수는 강간법을 주제로 학생에게 설전을 벌이라고 권하기가 너무 어려워져 그 주제에 대한 논의 자체를 아예 포기하는 강사가 많아졌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학생은 강간법과 관련한 제대로 된 지식교육을 받기 어려워지며,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강간법에 관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법조인이 되어 성폭행 피해 당사자에게 손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 의과대학에서 학생이 자신의 정신건강을 염려해 해부학 수업을 거부한다고 상상해보자. 이렇게 되면, 대학에서 학생을 자격을 갖춘 의사로 훈련할 수 없게 된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인문학과 및 사회학과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데는 이러한 논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 한몫한다.)

미국 대학의 강연 취소 사건과 같은 사례는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이 한창일 때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의 특강에 항의한 경북대 학생들이 있었고, 2019년에는 제주대 학생들이 “강간문화 유포하는 왜곡된 젠더의식을 가진” 탁현민 대통령 행사기획 자문위원 강연을 거부하는 시위를 벌였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강연자의 발언과 논쟁하는 게 아니라 강연 개최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은 학문을 자유롭게 탐구하는 대학과 어울리지 않는다. 15년 전 필자가 대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화다. 진보적인 성향의 생활도서관에서 역사교육이라는 주제로 기획강연을 열었고, 당시 일제 식민지 시기를 미화한다는 논란이 있었던 이영훈 교수를 강연자로 섭외했다. 교수의 주장에 비판적인 학생들이 참가해 열띤 토론을 벌였던 장면이 당시 필자에게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고 지적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대학 문화에서 이러한 경험은 불가능해 보인다.
 
 
 
3) 학생을 더욱 유약하게 만든다
감정적 격발을 불러일으켜 정신건강을 악화한다는 이유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차단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자신을 유약하게 만들 수 있다. 아주 사소하게라도 일말의 위험이 존재한다면 절대 경험하지 않으려는 안전주의 문화는 오히려 안전하지 못한 상황을 조성하게 된다. 일례로, 1990년대에 들어 땅콩 알레르기가 급증한 원인에는 부모와 교사들이 아이들을 어떻게든 땅콩에 노출하지 않으려 보호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인지행동치료 연구자인 『나쁜교육』의 저자는, 대학가에 만연한 트리거 워닝이 인지행동치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반치료적 행위라고 말한다. 그것은 트라우마 환기를 회피하도록 돕는데, 그런 회피는 트라우마를 계속 유지한다. 인지행동치료에서는 반대로 환자를 서서히 그리고 체계적으로 트라우마 기억에 노출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그 학생을 위한답시고 그에게 고통스러운 경험을 떠오르게 할 법한 것들을 숨긴다거나, 혹은 그런 것들을 혹시나 마주칠 수도 있다며 거듭 그 학생에게 경고하는 일은 트라우마로부터의 회복을 오히려 더디게 할 수 있다.  트리거 워닝에 집착할수록, 학생들은 더 유약해지고 원상복구 능력은 떨어져 종국에는 그런 난관을 감당하는 능력이 정말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애초에 치료 차원에서 시작되었던 일이 병을 더 키우는 주된 원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2. 정치 사회운동이 정치적 올바름을 채택해서는 안 되는 이유

정치적 올바름은 분명히 영미권을 중심으로 확산한 하나의 정치 스타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미 전 세계 사회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칠레의 진보적 지식인이 발간한 잡지 《아또모》(ÁTOMO)에서도 2018년 창간호 특집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하는 다수의 글을 실은 바 있다. 여기에 소개된 멕시코의 진보적 역사학자 엔리케 크라우제가 2000년에 쓴 「정치적 올바름의 십계명」은 정치적 올바름이 보이는 행태를 풍자한다. 미국 제국주의는 비판하지만, 소련엔 관대한 정치적 올바름의 ‘내로남불’을 비꼬고, 근거와 숙고를 기반으로 한 토론보다는 상대방을 ‘신자유주의자’나 ‘우파’로 몰아 발언 자격을 박탈하는 행위를 지적한다. 좌파운동 진영이 보기에도 정치적 올바름의 행태는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이 전 세계적인 사회운동의 추세인 상황에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상대방이 주장하는 ‘내용’보다 상대방의 ‘정치적 위치’나 ‘정체성’을 공격해 발언 자체를 봉쇄하거나, 논쟁 자체를 금기시하는 구도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정치적 올바름이 제시하는 정치 행위가 정치 사회운동의 퇴보를 촉진할 수 있다고 심히 우려한다.
 
1) 효과가 없고 기존 체제에 포섭될 뿐이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며, (단어의) 의미는 언제나 미끄러지듯이 변하기 때문에, 그 의미는 궁극적으로 고정될 수 없다”는 스튜어트 홀의 설명처럼, 정치적 올바름이 규제하려고 하는 발언은 결론적으로는 규제될 수 없다. 사회문화적인 의식 수준이 개선되지 않는 한, 혐오적 표현 역시 규제를 피해 진화할 뿐이다. 게다가 정치적 올바름이 취하는 방식은 외려 의식개선을 방해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발언을 도덕적인 이유로 규제하는 방식은 자칫 반감을 부르고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소수에 대한 관용을 내세우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저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발언을 한 화자를 도덕적 비난을 통해 불관용하는 것에 그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회 문제를 그저 정중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은폐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움베르트 에코는 「정치적 올바른 말하기」라는 글에서 만약 우리가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신체 장애인이나 불구자 대신 ‘다른 능력을 갖춘(differently abled) 사람들’이라 부르기로 하고선 이후 공공장소에다 진입 경사로를 설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으로 말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몇몇 상위권 대학에서 흑인 학생을 위한 할당제를 채택하는 동안, 인종 간 실질적인 교육 기회의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할당된 예산은 얼마나 될까? 아직도 흑인 밀집 거주구역에는 주거환경 개선과 함께 학교에 대한 투자나 지역도서관 건립과 같은 교육환경 개선이 시급한 실정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제기하는 쟁점은 결과적으로 기존 체제에 포섭될 뿐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몇몇 대명사를 바꾸고 소수 여성과 소수파들을 이사회와 TV에 진출시키겠다는 의지는 월 가의 이익 산출 원칙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며, ‘빈곤에 대한 차별 대우’는 인식이나 언어, 개인적인 태도 변화로 해결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체성의 정치가 과거 풍요로운 상황이라는 가정하에 작동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경제적 조건 속에서 백인까지 줄어든 파이 조각을 놓고 서로 다투게 만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클라인은 새로운 글로벌 환경에서 정체성 정치의 승리는 마치 “집이 불타는 상황에서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정치적 올바름을 가장 잘 활용한 영화산업은 이전보다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2) 정체성의 정치로는 보편적인 운동 주체를 형성할 수 없다
앞서 정체성의 정치는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을 마치 자본가를 제거하면 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계급을 인격화된 관계로 사고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핵심은 자본은 자본주의 사회를 규정하는 구조적이고 추상적인 힘인 데 반해 노동은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동밖에 없다는 규정이다. 따라서 사회변혁은 임노동에 기반한 생산관계라는 하나의 시스템을 착취자가 없는 더 나은 시스템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이냐의 문제지, 개인 대 개인, 집단 대 집단 간의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정체성의 정치는 계급의 소멸을 지향하는 계급적대이론을 인종, 성 등 결코 한쪽을 파괴할 수 없는 집단 간에 대입하면서 갈등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 적대는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된다. 백인 이성애자 남성에 대한 적대를 통해 결집하고자 했던 정치적 올바름 운동 진영은 점차 동성애자 남성이지만 성차별적인 발언을 한다든가, 흑인 동성애자 여성이지만 채식을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차이를 확인하게 만든다. 

개인의 정체성을 계속 분할하다 보면 결국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특이함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은 없으며 개인의 정체성을 찾는 데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 중요해진다. 정체성 정치의 기본 전제는 정체성은 당사자가 스스로 구성하는 것이기에 백인이 자신을 흑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가능하며, 때에 따라 정체성을 변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인 운동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정체성의 정치는 지금까지 억눌렸던 차이와 특수성을 드러내는 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수성이 보편성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한쪽을 절멸할 수 없는 여성과 남성, 흑인과 백인을 적대적인 관계로 사고할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현대정치에서 보편적 권리를 갖는 시민의 범주와 시민이 지닌 권리의 내용은 확장되어왔다. 같은 시민으로서 기회의 평등을 온전히 누리기 위한 여러 제도적 조치를 마련할 필요는 있겠지만, 특수한 집단에만 적용되는 기준을 영속적으로 요구해서는 역풍이 불기 쉽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은 주체를 보호받고 지켜줘야 하는 것으로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주체를 피해자화하는 방식은 운동 주체의 수동화를 초래한다. 한편 억압받는 소수자가 아닌 활동가는 타자의 언행이나 풍속을 단속하는 단속반의 역할, 조력자의 역할을 자임할 뿐이다. 과도한 피해자화 경향을 상징하는 ‘미세공격’이라는 개념에서, ‘공격’이라는 규정이 과연 합당할까? 의도가 없는 차별적 발언을 공격으로 규정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발화자의 침묵뿐일 것이다. 이는 필요한 예의범절 교육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미세’라는 규정 역시 합당하지 않다. 애초에 의도적인 공격 행위에 ‘미세’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미세공격은 타인의 행동을 최대한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하지만 ‘불편’과 ‘위험’을 같은 선상에 놓고 대우해선 안 된다.
 
3) 사법적 규제에 의존하는 방식은 정치 사회운동의 자활성을 침식한다
피해자 의식 문화의 세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미세공격처럼 자신에게 끼치는 불편에 고도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하며,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을 중시해야 하며, 사태를 해결해 줄 제삼자가 존재해야 한다. 즉, 제삼자가 누군가의 설득에 넘어가 한쪽 편에 서서 개입할 수 있어야 사태가 해결되는 것이다. 대학 내에서는 학교 당국이나 관리자가 그 대상이라면, 대학 바깥에서는 사법적 규제가 최고 권위자가 된다. 이때 사법적 판단을 묻기 위해 조력자인 법률가의 전문성이 중요해진다. 이처럼 사건 해결을 위해 사법적 권위에 의탁하는 방식은 다른 형태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운동의 능력을 위축시킬 수 있다. 

지금껏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폭력 근절을 페미니즘 운동의 핵심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개별 성폭력 사건에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법적으로 성폭력으로 인정되는 범위를 늘리고 증거 기준을 완화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활동을 벌여왔다. 그러나 성폭력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페미니즘 운동의 주체를 활동가에서 법률가로 이동시켰다. 법률 중심적 대응은 여성들이 원치 않은 스킨십을 즉석에서 거절하거나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적절히 대응하고 사후에도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대신, 자신을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로 보이는 데 주력하게 했다. 《뉴레프트리뷰》 편집위원 수잔 왓킨스는 성폭력 문제를 법정으로 가지고 가 이슈화하기 시작하면서 ‘법률만능주의’가 만연해졌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성폭력 관련 법률산업은 번창했지만, 실질적인 개선효과는 없었으며, 주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더 많은 여성과 연대하지 못하고 남성을 동조자로 끌어내지 못한 협소한 운동이 되었다는 지적이다. 

마크 릴라도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법원에 의존하게 된 현실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최근 들어 정체성 정치 운동가들은 그들의 바람이 입법 과정에서 성취되지 않으면 그 과정을 우회하기 위해 연방대법원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모든 의제를 협상의 여지가 없는 불가침의 정의에 관한 문제로 간주하면서 의회를 통해 법안에 관해 협상하려는 노력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운동은 여론의 동향을 살피고 합의를 끌어내고 보폭을 좁히는 습관을 점차 상실했다.
 
4) 도덕의 과잉은 대중의 냉소를 초래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소수자를 관용하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며, 그러한 관용을 지니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자들과 자신을 차별화한다. 그런데 뭔가를 지나치게 도덕적으로 설명하면, 말하는 이의 진정성에 회의와 환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도덕적 순수성의 전시는 ‘분노 표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이렇게 분노 표출이 오용되면, 정말 분개할 만한 일이 무엇인지 감을 잃고, 마땅히 분노해야 할 때도 분노하지 못하게 해 분노 표출의 가치가 절하된다. 한편 분노를 표출하는 데 만족하면서 추가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이처럼 도덕적 민감성을 자극하는 행위는 엘리트주의적인 함의가 있다. 실제 미국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을 주도하는 사람은 전체 미국 인구의 8%이며, 주로 고소득, 고학력 좌파 행동주의 성향을 지닌 백인들이라고 한다. 미네소타대는 성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이유로 여학생의 치어리더 활동을 금지했다. 이에 치어리더 학생들이 반발하자, 대학 측은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희생자가 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은 일반 대중은 모르는 현실 너머의 구조를 인지하고 있는 데 반해, 정치적 올바름에 반발하는 사람은 스스로 구조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모른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그랜드스탠딩’은 위선적이라고 공격받기 쉽고 다수자 운동이 되기도 어렵다. 시민들이 만약 ‘부도덕하다’ ‘편협하다’ 혹은 ‘배려가 없다’ 따위의 딱지가 붙을까 두려워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침묵하는 다수’를 끌어안지 못하면 사회적 변화는 불가능하다. 
 
 
5) 금기가 논쟁을 대체하는 문화는 정치 사회운동을 질식시킨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절차를 지키는 것은 민주정치와 자유주의의 기본 덕목이다. 사회주의는 이를 포괄하는 더 넓은 의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지 표현의 자유와 절차적 공정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이를 보장하는 것 역시 사회운동이 지켜야 할 기본 가치다.

표현의 자유는 단지 하나의 대상을 어떻게 표현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은 상대의 주장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자격을 박탈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즉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하는 것이다. 또한, 대립하는 의견의 종합 가능성을 부정하고 반대의 입장을 악마화한다. 이렇게 되면 주장의 복잡성은 제거되고 찬반양론만 남을 뿐이며, 그러한 입장을 옹호하거나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검열을 강요한다. 논쟁이 필요한 명제들은 참이나 거짓으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결하거나 불결한 것으로 판정된다.

정치적 올바름은 논쟁의 결과를 본인의 ‘주장’이 옳거나 틀렸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존재’ 자체가 옳거나 틀린 것으로 규정당한다고 여긴다. 즉 정치적 올바름이 확산할수록 당사자성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논쟁이 축소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근거는 이러하다”는 화법 대신에, “내가 어떠한 사람으로서 얘기하는데, 그 주장은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식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사회운동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거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다. 사회운동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같은 잣대로 본다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여겨지는 발언이라고 해서 그것을 처벌할 수는 없다. 약자에 대한 혐오 표현은 사회의 자정작용으로 도태시켜야 하지 그것을 규제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정당한 주장이라 하더라도 모든 수단과 절차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비민주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약자가 권력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르쿠제처럼, 정치적 올바름은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사태가 진전되지 않을 시 손쉽게 괴롭힘과 위협적인 행동을 감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폭력 행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나가며: “그들이 저급하게 나와도 우리는 품위 있게”

 
정치적 올바름은 거시적으로 봤을 때 현대정치가 위기에 처한 현실과 떼어놓기 어렵다. 20세기 후반 세계경제가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정치의 위기가 발생하고 인민주의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탈정치화 현상의 한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의 최종적 효과는 정치가 불가능한 지형을 확산하며 대중적 외면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은 현대정치의 위기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의 위기를 더욱 가속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정치 양극화와 정치적 올바름은 상호작용 속에 서로를 강화한다.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가장 번성해 사회이슈가 되었을 시기가 트럼프 시대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양날의 칼이다. 기존에 좌파가 주장해 왔던 다양한 의제를 다룬다고 해서 정치적 올바름을 정치 사회운동이 무기로 사용하다가는 한쪽 날에 베이기 십상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무딘 칼에 불과하다. 아직도 존재하는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의 낙태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시민권의 내용을 확대하는 것은 현시점에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은 이를 달성하는 데 효과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대중의 역풍을 부르기 쉽다.

정치적 올바름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헌신한 흑인 운동가들, 참정권을 위하여 죽어간 여성운동의 성과를 제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운동의 성과를 ‘단어 바꾸기’나 ‘할당제’ 문제로 축소하고 희화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도 독재 타도 운동을 통해 획득한 정치적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권리다. 정치적 반대파라고 해서 그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사고는 명백한 퇴보다. ‘빨갱이’라는 딱지 붙이기에 ‘친일파’라는 딱지 붙이기로 대꾸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들이 저급하게 나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야 한다.

혹자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없었다면 성평등, 인종차별 문제가 이슈화될 수 있었겠느냐고 묻거나, 그러면 도대체 어떤 방식의 운동이 가능한지 물을 수 있겠다. 수잔 왓킨스는 「어느 페미니즘인가?」에서 201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캠퍼스 강간을 끝내자’ 캠페인과 미투운동을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최근에 일어난 페미니즘 대중운동과 비교한다.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에서는 운동의 초점이 항상 여성 자신에 있었으며,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응징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캠페인은 불안정 노동자와 실업자와 연대해 기반이 광범위했고 성폭력 문제에 있어도 형사처벌 접근법 대신 사회적 맥락을 다루었다. 이처럼 어렵더라도 사회에 대한 보편적 요구를 개발하고 대중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서두에 차별 철폐라는 선의에서 시작한 운동이 왜 퇴행적인 운동방식으로 귀결되었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글의 취지라고 언급했다. 결국 정치적 올바름이 선의로 포장된 지옥으로 가는 길이 된 이유는, 보수주의자들이 대학가에서 행한 검열주의식 행태를 그대로 배워 ‘대항폭력’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진보진영의 전략이 실패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대중적 저항운동이 대학가로 축소되면서 보수주의자의 행태를 모방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적 기반을 잃을수록 운동은 더욱 “깨어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자임하며 도덕주의에 빠져들었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역사는, 사회운동이 대중적 기반과 보편적 시야를 잃는 순간 사태가 어떻게 귀결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회운동이 당파적인 기구로 여겨지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공간으로 우뚝 서려면,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나야 한다. ●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