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1-2.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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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의 모호성이라는 쟁점

최원 | 회원, 미국 뉴스쿨 대학 철학 박사과정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침략전쟁이 대규모로 준비되고 있는 동안 지구촌의 곳곳에서는 반전운동의 열기가 드높다. 그리고 이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왜 우리는 반전의 구호를 외쳐야 할까? 평화란 유일무이한 가치인가? 윤리적인 차원에서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전쟁과 평화의 문제가 곧바로 명쾌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어떤 네덜란드 여인숙 주인이 간판에 새겨놓은 풍자적인 문구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 것은 "영구 평화(Perpetual Peace)"라는 말이었는데, 배경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무덤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묘지의 평화라니,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평화 그 자체는 의심되거나 적어도 이러저러한 평화들로 차별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적어도 평화에 대한 어떤 종류의 요구는 단지 나르시시스트적인 요구에 불과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나는 평화를 원한다. 고로 방해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방해를 하는 것이 타인의 존재 그 자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프로이트가 에로스를 '평화의 훼방꾼'이라고 묘사하면서 그것의 본질을 '차이'로 규정하고자 했을 때, 또 역으로 타나토스를 무생물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동일자적인 욕망으로 규정하고자 했을 때, 그가 사고했던 것도 이러한 것이었다. 이제 나는 '나'(혹은 '우리')의 평화를 깨는 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품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 평화를 강제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다. 죽음의 욕동이 피학증에서 가학증으로 전환되고 전쟁과 평화의 경계가 어처구니없이 사라진다.
이러한 전쟁과 평화의 모호성은 사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완강하고 직접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듯 싶다. 냉전 이후 우리가 목도해온 전쟁은 그것의 양적인 증가가 아니라 가시성(visibility)의 증가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걸프전에서 우리는 이미 지구적인 통신망에 의해 전세계로 생중계되는 전쟁이 일개 쇼로 둔갑하는 것을 봤지만,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미디어적 세계화가 또 다른 종류의 전쟁들에 대해 발휘하는 효과다. 지구 각지에서 종교적-종족적 갈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작지만 잔인한 전쟁들(little cruel wars)' 및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극단적인 폭력들이 미디어에 의해 선택적으로 방영(당연히 제국주의국가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폭력들은 제외되거나 축소된다)될 때, 그것은 서구를 비롯한 부유한 국가들 속에서 일정한 보호 하에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정심'과 '경계심'이라는 상반되지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양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미디어는 이질적인 폭력들을 상호 연결하여 단일한 시스템 혹은 사슬로 형상화시키면서 이를 통해 각종의 분쟁들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의 거주자들과 문화를 중심국들의 문명에 대한 야만적 '위협'으로 묶어 세운다. 그리하여 지구가 삶의 구역(life zone) 및 죽음의 구역(death zone)으로 분할, 전시되고 삶의 구역에 소속된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동시에 죽음의 구역으로 자신이 쫓겨날 것에 관한 공포를 느끼고 심지어 자신이 누리는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테러와의 전쟁)에 찬성하기까지 한다.
부시 미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을 했을 때, 이는 정확히 이러한 맥락 속에서 가능했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이 발언은 그와 그의 참모진들이 호전적이기 때문에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만일 미 정부가 미디어를 통한 폭력 그 자체의 세계화 효과로서 문명과 야만의 가상적 분할선을 창출해내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미 정부는 자신의 침략전쟁이 마치 인간적 가치를 보존하고 문명을 방어하기 위한 성전이라도 되는 양 묘사하면서 대중들을 선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미디어 사에 있어 또 다른 신기원을 수립하기도 한)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의 외교적 수사가 "국제주의"의 립서비스(윌슨이래 지속된)를 동반하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미국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당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수사를 대놓고 구사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수사들이 여전히 많은 대중들에게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또 타 국가들도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하게 하는 외교적 억제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모호성이 결합해 들어온다. 평화유지군으로 표상되는 불개입주의와 인도주의 활동들(humanitarian activities)이 그것이다. 미국과 나토의 평화유지군들은 끔찍한 폭력적 사태들을 실질적으로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폭력들의 결과들을 관리하거나 그 지역의 규범들을 확립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인도주의 활동이 여기에 뒤따르고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은 정확히 전쟁에 '인간적 얼굴'을 부여하는 것이다. 인도주의 활동은 이제 전쟁의 필수적인 보충이 되었지만, 막상 그것이 전쟁에 가져오는 효과는 전혀 겉보기와 다르다. 그것은 전쟁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합리성(갈등 요인의 제거)을 교란시킴으로써 전쟁의 효과들을 인지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의 사례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말의 정치적 가능성마저 박탈하는 기능을 한다. 전쟁의 원인, 정당성, 해결책 등에 대한 민주적인 논쟁을 탈정치화된 인도주의 활동단의 파견이 대체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모든 위선과 왜곡에 앞서 공동체간의 작은 전쟁들이 사실은 미국과 국제적인 마피아 조직들(당연하게도 이들의 자본은 국제적인 금융투기꾼들의 자본과 구별되지 않는다)의 무기공급에 의해 외부로부터 선동되고 있다는 사실까지 첨가되면, 전쟁에서 유일하게 '정치적 목표'(Zweck)로 남게 되는 것은 상호적 절멸의 선동을 통한 잉여인구의 제거나 국제적인 분쟁을 이용한 금융투기꾼들의 이윤확보 정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결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모호성들이다. 전쟁과 평화를 대립시키고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있는 이 현실적인 전쟁들의 구체적인 성격들을 분석하고 그로부터 해결해야할 정치적 과제 및 그에 맞는 전략, 전술을 도출해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대(對)이라크전이 예정되어 있는 현재의 정세에서 대부분의 진보세력들은 정당하게 반전과 평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단순한 평화주의의 도덕적 구호와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쯤 던져볼 필요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행동해야할 시기이지만, 우리는 또한 사고를 멈춰서도 안 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레닌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전쟁을 분석하면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관을 활용했는데, 그로부터 레닌이 받아들였던 것은 사실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라는 명제였다기보다는 '파국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전쟁'이라는 명제였다. 혹은 전자의 사고를 정정함으로써 레닌은 후자의 사고를 아주 엄격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그 당시 전쟁의 분석에 적용할 수 있었다. 전자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것이 전쟁을 '도구'(수단)로 바라봄으로써 '정치' 자체를 불변적이거나 자율적인 행위자(도구 사용자)인 국가의 것으로서만 고려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도구주의적 사고에 교정을 가함으로써 레닌은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일 뿐 아니라, 역으로 정치의 진행, 조건들, 행위자들을 변형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과정'이라는 말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과 모순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 동시에 주목하게 만든다. 즉 전쟁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며, 그 속에 내재적인 모순들의 발전, 단절, 전화가 발생하는 물질적 과정이다. 레닌이 이러한 관점 하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전쟁 속에 대중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총력전이나 국민전의 양상으로 전개되는 제국주의 전쟁은 단지 열강들 사이의 대결일 뿐 아니라 그들 각각이 상대편 세력을 이용하여 자국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굴복시키려는 시도이다. 결정적이었던 요소는 전쟁기간이었는데, 전쟁기간이 길면 길수록 전쟁은 그 속에 연루되어 있는 대중들을 지치게 만들 것이며 그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정치 혹은 그것의 조건들을 변형시킨다. 불만에 찬 대중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열망을 갖게 될 것이며, 따라서 전쟁 이후 부르주아적 규범은 전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복구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전쟁은 군산화를 위한 생산의 과잉집중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이는 제국주의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회화를 수행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이러한 정치의 두 변형이 혁명적 정세의 조건이 되며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상호 결합되는 두 측면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 속에서 레닌은 제국주의국가 간의 민족전쟁을 계급전쟁으로 새롭게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혁명적 내전으로 내적으로 '전화'시키는 전략을 가공할 수 있었고, 전쟁의 순수하게 군사적인 논리를 교란시키는 하나의 요소(혁명가)로서 전쟁에 다시 "가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냉전 이후 미국에 의해 도발되고 있는 전쟁들은 이와는 판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라는 명제를 레닌적으로 정정한 형태 속에서조차 다시 적용하기가 매우 어려워지는 것이다. 단적으로 미국이 직접 수행하는 전쟁들의 경우 그것들은 국민전이나 총력전의 양상으로까지 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전쟁 속에 대중이 없는 것이다. 미국 측에 의해 동원되는 병사들은 (용병까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월급을 지급 받는 모병제 직업군인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최첨단 과학기술에 의해 생산된 전쟁기계들이 살인의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제고시켜줌으로써 속전속결이 전쟁의 주된 양상으로 되었다는 점(아프가니스탄 전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미국은 아주 빠른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이 과거 제국주의전쟁과의 차별점을 만들어 낸다. 또 앞서 말했듯 공동체들 간의 작은 전쟁들의 경우 미국은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공동체들 간의 무장투쟁을 선동하고 그 결과만을 관리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다. 어떤 경우이든 현재의 전쟁 속에 대중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절멸되고 있는 대중인 것이다.
아마도 반전평화의 구호가 정당할 뿐 아니라 매우 시급해지는 것은 이러한 조건하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레닌에게 정작 중요했던 것은 어떤 정세에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전쟁의 정의가 아니었다. 반대로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현실주의였다. 그는 전쟁에 단순하게 반대하거나 혹은 민족전쟁과 계급전쟁을 외재적으로 대립시킨 채 그 가운데 후자를 택함으로써 벌어지고 있는 실제 역사로서의 전쟁의 외부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물질적인 조건들을 분석하고 활용함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가능하게 만들 '변혁'의 가능성을 사고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여전히 레닌적인 사고는 우리에게 유효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평화주의의 관념적인 한계 내에서 전쟁을 비난하는 일에 우리가 쉽게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현재의 반전운동이 이라크 전에만 한정되지 않고 세계화된 공간 속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극단적인 폭력의 문제들과 대결할 수 있는 효율적이고 민주적인 간-공동체적 대항제도들의 건설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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