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6.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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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타워크레인기사 노동조합 총파업 투쟁

오희택 | 전국타워크레인 기사 노동조합 사무국장

들어가며

숨가쁜 총파업이 끝나고 뒷정리 작업이 만만치 않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수십 여건의 해고 사건들, 잉크가 마르기도 전 임단협 거부사태와 수백 건의 고소고발 사건, 집행부 사법처리 문제 등 그야말로 일에 치여 숨돌릴 겨를조차 없다. 그나마 이 글을 쓰면서 파업기간을 되짚어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도 내부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다소 거친 부분도 있고 이 글에 쓰인 입장이 조직내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노동 운동판에서 기웃거린지 어느덧 십 수년이 흘렀건만, 이번 파업투쟁을 거치면서 가슴을 짓누르는 부분이 있었다. 이번 파업투쟁의 핵심 요구 사항은 근로계약서 체결이다. 아마도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노동조합이 핵심 요구 사항으로 근로계약서 체결을 요구하며 파업 투쟁을 감행(?)한 사례는 아마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70년대 선배노동자들이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던 시절에나 나왔을법한 요구 사항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노동조합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라 구속, 수배를 각오하며 죽기살기로 파업 투쟁을 벌어야 하는 것이 이 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근로계약서 체결을 위해 지리산 자락 남원 민주노동당 연수원 맨땅 위에서 추위와 싸워가며 침낭하나로 오들오들 떨며 밤을 지새우고, 서울 한복판에서 각 대학을 전전하며, 강의실 복도에서, 심지어 자리가 비좁아 화장실 문 앞 에 까지 자리을 펴고 새우잠을 자야만 하는 현실, 그것도 모자라 80미터 상공에서 목숨걸고 농성까지 해야만 하는 야만적인 현실 앞에서 그저 말문이 닫힐 뿐이다. 이번 파업기간에 부산에 있는 여성조합원이 3 살배기 딸아이와 함께 총파업에 참여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철없이 뛰어노는 아이의 해맑은 모습을 보면서, 복도에서 엄마 품에 안겨 잠자는 이쁜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을 삭히느라 너무 힘이 들었다.

타워크레인노동자들 현실은?
무심코 하늘을 보다가 건설현장 주변에 아찔할 정도로 우뚝 솟은 타워크레인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과연 저 높은 곳에서 어떤 노동자들이 작업을 하고 어떻게 생활을 하는가를 고민하기보다는 과연 저 높은 장비을 어떻게 세웠을까 하는 정도의 의문이 드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타워크레인기사노동자들은 보통 70-80미터 정도의 고공에서 0.3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기본적인 인간의 생리현상마저도 참아가며 하루 10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일요일에도 당연히 근무를 해야만 하였고, 4대 보험, 연·월차, 각종수당, 퇴직금 등은 남에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평균임금은 220만원 정도이다. 모든 것이 포함된 포괄임금제 방식이다. 대부분이 현장 계약직이기 때문에 아파트 공사 등이 끝나면 곧바로 실업 상태에 빠져든다. 요즘같이 건설경기가 바닥일 경우 5-6개월 실업상태에 빠지는 것은 예사일이다.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업급여조차 받을 수가 없는 것이 대부분의 타워크레인기사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지난 4년 동안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해 왔다. 2003년도 임단협 투쟁 과정 속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일요일 휴무 투쟁을 전개해서 건설현장에서도 일요일은 쉬자는 요구가 마침내 관철이 된 것이다. 아마도 남들이 보면 정말 웃음거리밖에 안 될 것이다. 당연히 쉬어야 하는 일요일 휴무투쟁을 벌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일수도 있다. 이 땅에 일제 식민지하에서 건설업이 도입된 지 130년 만이 지난 후에야 건설현장에서도 일요일은 쉬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이 된 것이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사용자들의 조직적인 탄압행위들이 발생한다. 각종 부당노동행위는 물론이거니와 불법용역, 소사장과 고용 계약을 체결토록 고용 관계를 전환하는 등 현장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행위가 발생하게 된다. 노동조합 결성이전에는 그야말로 자본의 천국이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해고다. 해고를 당해도 항의조차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항의하다가 사용자들 불랙리스트에 올라가면 영원히 취업을 못하고 업계을 떠나야하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 주면 주는대로 아무생각조차도 하지말고 귀 막고 입 막고 로봇이 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총파업을 준비하면서---

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이 정규직노동자들과는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는 대개 고립분산적으로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불법 파견노동자들의 경우 파견업체 한곳에서 수 십 개의 현장으로 인력을 보내기 때문에 개별적인 노동자들을 모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전국타워크레인기사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의 경우 전국의 각 건설현장에 철저하게 고립분산되어 있었다. 조합원들이 어느 현장에 누가 있는지 조차 파악하는 일도 쉽지가 않다. 또한 현장이 끝나고 다음 현장에 취업을 할 경우 이동성이 심하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일상활동마저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전국타워크레인기사노동조합은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어 지부로 편재되어 있다. 지부 아래는 각 시군별로 지회 분회로 나뉘어져 있다. 지회, 분회도 몇 개의 시군이 합쳐진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회의 한번하는 것조차도 버거운 일이다. 지회, 분회가 구성이 되었지만 일상활동이 활발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이 미약한 편이다. 저녁에 작업이 끝나고 각 건설현장의 조합원들이 한곳에 모이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속적인 간부 교육을 통해서 중간간부 육성에 중점을 두었지만 조합원들의 교육은 그야말로 전무할 정도였다. 조합원들은 1400여명 정도였지만 교섭대상 업체가 184업체였다. 184개 업체에 공문을 발송하고 단협 요청을 하고 사용자들은 모아내는 일조차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조합원 교육이었다. 2월 25일 대의원대회를 개최해서 임, 단협 투쟁 전술, 전략을 확정하고, 조합원 전국 순회 교육을 실시하였다.

총파업에 돌입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는 결국 그 사회가 않고 있는 모순구조의 농축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업장만의 문제도 아니고 건설현장 울타리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전국타워크레인기사노동조합의 총파업은 담장 안을 넘어 거리로 그리고 사회 속으로 행진하는 총파업이었다. 총파업을 시작하면서 먼저 전국에 있는 조합원들을 현장의 울타리을 벗어나 한곳으로 모으는 일이 시급한 과제였다. 전국 각 건설현장에 대체 근로를 감시할 현장 인력을 남겨놓고 전원 남원 민주노동당중앙당연수원으로 집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집행부도 무척이나 초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원 연수원에 현장감시단 400여명을 제외한 전국 각 지역 조합원들 천 여명이 모여들었다. 마침내 전국에 건설현장이 48%가 마비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1400여명의 조합원 전체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조합원들이 마침내 하나가 된 것이다. 전국에 타워크레인 3천 여대 중에서 절반이 멈춰선 것이다. 현장을 멈추어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가 현실로 다가왔다. 2박3일 동안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집중 교육에 돌입을 하였다. '왜 투쟁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다!' 라는 것을 서서히 몸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교육 중에서 가장 커다란 교육은 스스로가 현장을 박차고 나와 하나로 뭉쳤다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었다. 비 온 뒤 축축한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달랑 침낭하나만 가지고 추위와 싸워가며 새우잠을 잘 수 있었던 것도 동지들이 내 옆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30일 서울 진격투쟁이 시작되었다. 노동부, 삼성, 건설현장, 악덕 사업주, 불법용역업체 여러 곳을 집중 타격 하였지만, 역시 자본에 힘은 막강했다. 하루 50여 만원씩 일당을 지급하며 불법대체근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명백한 불법대체근로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부는 수수방관하고, 오히려 사용자들 편에 서서 노동자 탄압에 열을 올리고, 악덕 사용주들은 조합원을 해고하는 등 각종 부당노동행위들이 판을 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부의 불안감들은 증폭을 더해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위원장은 총파업투쟁을 감당할 수 없어 간부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퇴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이대로 물러서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위기감이 내부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무런 성과없이 현장으로 돌아가 불법용역, 소사장 밑에서 노예로 살수는 없는 것이었다. 조합원 총회을 소집했다. 역시 조합원들의 판단은 현명했다. 타워고공농성 전술을 결정했다. 요구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절대 타워 위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다. 굶어서 허기진 배을 부여잡고 쓰러지더라도 파업투쟁이 승리하기 전에는 두발로 걸어서 내려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결정 사항이었다. 비장함마저 들었다. 이윽고 5월 4일 저녁 6시부터 조합원 500여명이 머리띠 풀고 조끼를 벗고 5인 1조가 되어서 어둠 속으로 삼삼오오 흩어져서 5시간에 걸쳐 서울대를 빠져 나왔다. 12:30분 마침내 전체 조합원들이 현장에 도착을 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타워고공농성 돌입! 수도권에 있는 타워 87대 483명의 조합원들이 타워를 점거하였다.

총파업을 마치며---

표준근로계약서 체결
불법용역, 소사장 계약해지
파주교육원 폐쇄
2003년도 임단협 준수
최저임금 125,000원 인상

이번 파업투쟁의 성과물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과물은 조합원들의 자신감과 의식의 변화이다. 역시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였다. 그 어떠한 교육보다도 가장 큰 교육은 투쟁이었다. 정부, 언론이 어떤 곳인지, 또한 사용자들의 간교함에 혀를 내둘렀지만, 역시 노동자들이 믿을 거라고는 투쟁밖에 없었다.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글로서 말로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몸으로 깨달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현장에서 또다시 부당노동행위가 판을 치고 부당 해고가 판을 친다. 이제는 안다. 제아무리 부당노동행위가 판을 쳐도 이제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집회신고 내고 준법투쟁에 돌입한다는 전화가 여기저기서 걸려온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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