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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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국가의 새로운 외피 (하)

비정부기구와 국가의 국제화

요아힘 히르쉬 |
[역주] Joachim Hirsch, 'The State's New Clothes: NGOs and the Internationalization of States', Rethinking Marxism, Vol. 15, No. 2, 2003. 이 글은 미국의 좌파 이론지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에 실린 것으로 국제정치경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한 요소로 비정부기구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히르쉬는 국내에도 몇 권의 책이 번역되어 있는 독일의 국가이론가로서 최근에는 유럽의 금융과세시민연합(ATTAC)의 학술위원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은 '조절이론'의 국가론적 함의를 둘러싼 몇 가지 이론적 쟁점에도 불구하고 비정부기구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중요한 이론적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특히 NGO가 허구적 성격이 강한 '전문적 지식'에 기초한 '확대된 국가기구'라는 주장은 비정부기구의 성격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며 비정부기구와 사회운동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NGO와 ‘국제 시민사회’

NGO는 ‘그 발전이 미약하긴 하지만 세계적 지향을 갖는 시민사회 내에서 세계적 시민권의 전망을 갖는 조직’으로 널리 간주된다(Messner and Nuscheler, 1996; Habermas, 1998; Sakamuto, 1997). NGO에 관한 연구들이 국가이론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은 ‘국제’ 또는 ‘세계 시민사회’ 같은 용어들이 사용되는 방식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앞서 기술한 국가 및 세계적 국가 체계의 변형 과정이 민족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생산의 국제화, 세계시장 내에서의 경제적 관계의 발전, 점증하는 세계적 문제와 위험들, 이주자와 난민의 흐름, 국제적 수준에서의 의존도의 증가, 그리고 운송·통신의 개선 등으로 인해, 세계를 가로지르는 매우 다양한 연관관계가 강화된다. 그러나 또한 이와 같은 발전은 ‘세계적 사회’가 지극히 이질적· 분절적일 뿐만 아니라 권력 및 의존이라는 관점에서 불평등한 관계로 가득 차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Bonder, Rottger, and Ziebura, 1993; Gorg and Hirsch, 1998: 593; Slater, 1998).
만일 ‘사회’라는 개념을 인민·조직·제도들의 단순한 집합체 이상의 의미로―즉, 기본적 가치 체계, 통합적 경제 발전, 상대적으로 응집력 있는 정치제도들의 체계를 갖는 사회구조로― 파악한다면, 이 용어를 국제적 수준에 적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 엄격한 의미에서 ‘시민사회’에 관한 그람시적 용어법을 따른다면, 이 용어는 오직 그 자신의 고유한 내적 모순을 갖는 일관된 정치적·제도적 체계, 즉 ‘확대된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정당한 물리력의 독점’(베버)을 동반하는 ‘국가’ 같은 제도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국가’가 있다손 치더라도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제도·수준·구조의 지속적인 분절화는 내가 세계화라고 부르는 과정의 중요한 특징이다. 경제적 세계화는 포괄적이고 일관성 있는 정치 제도들의 체계를 동반하지 않으며 개별국가들의 존재에 의해 지속적으로 결정된다. 이는 ‘세계 시민사회’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는 것처럼 마치 민족국가 내에서의 ‘시민사회’와 유비될 수 있는 것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람시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 관한 고전적인 자유주의 이론(Keane, 1988)에 따르더라도, 개별 국가의 경계 내에서 ‘시민사회’의 기능은 ―표현 및 결사의 자유에 기반하여― 제도화된 여론형성과 의사결정과정의 조건을 창출함으로써 합의와 헤게모니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국가적 제도들의 중앙집중화된 체계가 존재해야 하고, 그러한 체계 내에서 형식적 규칙에 따라 의사결정이 확립·집행되며 헤게모니적 기획이 실현·유지될 수 있다. 경제적 세계화의 과정에서 국가의 변형은 합의를 형성하고 헤게모니와 정치적 정당성을 창출하는 이러한 체계 내에서 주요한 변화를 야기했다. 이는 특히 국제적 수준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바, 많은 저자들이 ‘세계 시민사회’보다는 ‘신봉건주의’ 또는 아예 ‘구조화된 무정부상태’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에는 일리가 있다(Gorg and Hirsch, 1998: 600).
‘세계 시민사회’라는 용어는 때때로 특정한 행위자들, 즉 국제적인 관리 계급의 진화와 연관된다. 영리 기업의 경영자, 과학자, 국제조직의 관료, 국가관료기구의 일부와 NGO를 비롯한 다양한 범위의 ‘사적’ 조직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Cox, 1993; Sklair, 1997; Demirovic, 1997: 246; Gorg and Hirsch, 1998: 591). 혹자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일관성 있는 사회 집단의 진화를 목격하고 있으며, 이들은 ‘특수한 자기-관리(self-direction) 형태’를 발전시켜 ‘세계적 합의와 세계 국가 기획의 확립이라는 특수한 목표’를 실행함으로써 민족국가 체계를 크게 변형시킬 것이라고 추정한다(Demirovic, 1997: 247). 확실히 이들 국제적 관리계급은 예컨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과 같은 형태로 자신들의 제도를 건설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들은 이들이 세계적 수준에서의 지배전략 및 사회-경제적 전망의 발전에 착수할 수 있게 해 준다(Demirovic, 1997; Slater, 1997; Van der Pijl, 1997). 어쨌든 이 구조들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적 모델의 우위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Plehwe and Walken, 1999). 그러나 동시에 국제적 관리 엘리트들은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기존의 국가적 조절체계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들의 내적 구조는 앞으로도 세계 자본주의의 경제적·사회적 분절화에 종속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세계 정치와 관련하여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국제적 조절의 맥락에서의 NGO

NGO의 역할과 기능은 개별 조직의 구조와 목표를 통해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변형 과정의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민족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민족국가들의 국제적 체계는 조절과 정당성의 능력을 심각하게 상실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NGO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NGO는 국가 관료들이 소유하지 않은 (과학적) 지식과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활용한다. NGO는 사회 문제와 위협을 식별하고 정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적 협상과 의사결정을 위한 의제설정에 깊숙이 연루된다. 이들은 기성 정치 제도 안에서 들리지 않거나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익들을 대변한다(Brand and Gorg, 1998: 102; Princen and Finger, 1994: 34). 그리고 이들은 국제 협상을 감시하기도 한다(Brand and Gorg, 1998: 101). 이런 식으로 NGO는 민족국가 체계의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변형과 결합된 대표성의 위기에 대한 반작용을 대표한다. 이들은 광범위한 문제 및 이익과 관련된 정치 제도의 지역적·민족적·국제적 수준들 사이의 소통 통로로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이들은 국제조직, 국가, 기층의 풀뿌리 집단, 그리고 여타의 NGO들과 대조를 이루게 된다(Brand and Gorg, 1998: 101; Princen and Finger, 1994: 38; Brunnerngraber and Walk, 1997: 71). 마지막으로, NGO는 국가 행정기관들이 수행할 수 없거나 또는 수행하고 싶지 않은 실천적 프로젝트―특히 개발 및 구호 작업의 영역에서―에 참여하며, 종종 국가 행정기관들은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 NGO들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한다.
NGO가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공식적 기회는 거의 없다. 그들 대부분은 기부나 보조금에 의존하기 때문에 재정적 기반이 취약하고 부족하다. 따라서 NGO가 자신들이 권력을 실행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한 방식은 바로 그들이 보유한 지식과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과학적·기술적 전문성의 결과로, 그리고 국지적·부문적 구조와 문제에 정통한 덕택으로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이에 기초해서 NGO는 문제정의, 의사결정, 정책수행의 전반적 과정에서 정부 및 국제조직과 협력 또는 갈등한다. NGO가 보유한 권력의 결정적 자원은 여론을 동원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다. 사실상 NGO는 오직 여론의 압력의 결과로서만 정치적 전장에 진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이를 위해 힘쓰는 것이 NGO 정책의 핵심적 목표가 된다(Wapner, 1995; Brunnengraber and Walk, 1997; Wahl, 1997; Brand, 2000). 그러나 그들은 자체적인 물질적 자원이 없는 탓에 강력한 미디어 산업의 협력에 의존해야 하고 미디어의 작업 방식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개발 원조의 영역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여기서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하며’ 따라서 볼거리가 없는 사업은 공적으로 주목받기 어려운 반면, 미디어가 극화하는 대재앙의 경우 많은 주목을 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부 면에서도 훨씬 매력적이다. 이는 불가피하게 NGO 활동의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치며, 이런 점은 지난 몇 년간 지속된 국제적 긴급 원조 사업의 팽창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린피스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미디어 지향의 ‘초민족적 NGO’는 정부 및 영리기업에 맞서 상당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 그들은 미디어 지향의 기준들에 따라 자신들의 우선순위를 전술적으로 조정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각양각색의 NGO는 특히 국제적 조절의 수준에서 합의와 타협을 발전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결과 더 넓은 범위의 이익이 고려되고 더 합리적인 결정이 내려진다. NGO는 정치적 전장에서 중요하고 새로운 행위자로 인정될 수 있다(Princen and Finger, 1994: 41; Wapner, 1995; Brand, 2000). 이들은 전통적인 사회조직, 예컨대 국가, 정당, [사적] 협회와 매우 다르며,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변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NGO가 진정으로 국가 제도로부터 독립적인지, 아니면 ‘확대된 국가’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다.
NGO와 국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일정한 지속성을 갖는 전문적 조직으로서 NGO가 일반적으로 기부 이상의 재정적 자원을 필요로 하며 특히 대규모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는 더 많은 자원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의해 대체로 결정된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와 국가연합(유럽연합과 같은), 국제조직, 심지어는 [사적] 협회나 사적 기업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의존관계 때문에 기부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NGO를 활용할 수 있다. 사실상 몇몇 NGO는 아예 기부 국가나 조직이 창설하고 통제한다. 또한 NGO는 민족적 행정부와 국제조직의 내부,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거대중심 국가들이 주변부 국가들의 정부 활동을 우회·포위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민족 정부들이 국제조직에 대항하는 데 동원되거나 또는 그와 반대 상황에 동원되기도 한다(Bruckmeier, 1994; Walk, 1997; Wahl, 1997; Gorg and Hirsch, 1998: 602). NGO는 ‘국가지향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NGO들이 재정적으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사법적·행정적 권력 그리고/또는 사적 기업의 선의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Brand, 2000). 그들의 유효성은 국가가 얼마나 기꺼이 협력하려 드는지 여부에 상당한 정도로 의존하며, 이는 NGO가 그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국가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위험을 항상 수반한다. 이는 NGO가 상당 부분 ‘수요측 유인’에 의해 창설된다는 사실, 즉 NGO가 출현하게 되는 곳은 거의 어김없이 국가가 협력을 통해 정보와 정당성 또는 조절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이해를 갖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Gorg and Hirsch, 1998: 602).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NGO를 국가의 선발 조직이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전의 한쪽 면일 뿐이다. NGO들은 그들이 국가의 기관들이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정한 수준의 재정적·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한에서만 자신들의 기능―조직화, 특수이익의 대변, 집단 및 쟁점과 관련된 지식의 공유와 정당성 획득―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NGO의 역할과 기능이 민족적 수준이나 이와 연동된 ‘시민사회’ 개념의 범위로 국한된 전통적인 국가와 사회 모형에 의거해서 평가되기 어렵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다른 한편 그람시의 ‘확대된 국가’ 개념 또한 제한적으로만 유용할 뿐인데, 왜냐하면 국제적 수준에는 통합된 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NGO는 ‘세계적 통치성(governance)’이라는 복합적 체계의 일부이며 그 유효성은 대체로 국가의 ‘국제화’로부터 나온다. 진화 중인 국제적 조절 체계는 극히 이질적이며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이것이 NGO 정치의 주요한 ‘전략적 관문’이다(Brand, 2000; Wapner, 1995; Brand/ and Gorg, 1998).
국제 NGO의 관료는 어느 정도까지는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관리 계급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다. 최소한 그들은 활동 영역, 행위 형태, 문화적 지향, 그리고 은어를 공유한다. 이는 NGO가 공식적·비공식적 협상 및 의사결정 과정에 접근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된다. 또한 NGO 체계의 구조는 위계적인 국제 경제 및 정치 권력의 구조를 반영한다. 특히 ‘북반구’의 초민족적 NGO는 비단 기술적·재정적 자원 면에서만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또한 ‘문화 자본’을 보유하는데, 그 덕에 그들은 더 큰 유효성을 가질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단일 쟁점에 관한 전문화가 국제 NGO의 활동에서 성공의 주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였지만, [이같은 협소한 전문화는] 더 광범위한 문제들과 관심사들이 무시되게 만들 수 있다. NGO가 이런 식으로 항의와 저항의 힘들을 감소시키고 분할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Demirovic, 1997; 256, Wahl 1997). 국제적 수준에서 NGO가 대표성의 기준과 의사결정의 규칙 같은 형식적인 민주적 구조를 결여하고 있는 대표 및 협상의 정치적 과정에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NGO가 억압되거나 무시당했던 관점 및 관심사를 환기시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전혀 투명하지 않는 권력자들의 협상장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그 곳에서는 ―납득할 만하고 투명한 의사 결정 절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무정부적인 ‘하위정치’ 체계가 성장해 왔다(Gorg and Hirsch, 1998: 605). 따라서 NGO는 국제정치의 ‘재봉건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NGO는 기껏해야 ‘국제적 체계의 민주화를 위한 촉매’의 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Wahl, 1997: 311). NGO는 ‘아무런 형식적인 민주적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지만’, ‘세계사회’의 ‘분절화를 향한 경향’에 대응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민주주의의 대용품’이 되어야 한다(Gorg and Hirsch, 1998: 605).
따라서 민족적 수준과 국제적 무대 모두에서 NGO의 강력한 대두는 국가와 그들의 국제적 체계에 대한 포스트포드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의 귀결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의사결정 및 실행이라는 정치과정의 광범위한 사유화를 낳고, 결국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서 근본적 변화를 초래했다. NGO의 점증하는 숫자와 정치학자 및 사회전반이 이들에게 쏟는 관심의 증가는 이제는 지배적인 위치를 점한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의 일부로 온당하게 간주될 수 있다(Brand and Gorg, 1998; Wahl, 1997). 현존하는 정치·경제 구조, 점증하는 경제적·사회적 분절화, 이에 못지 않게 민족국가가 여전히 보유한 압도적으로 중요한 지위 등을 고려할 때, NGO의 중요성은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특히 민주화에 관한 이들의 영향력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GO는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국제적 조절체계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세계화의 주변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Wahl, 1997: 295).

민족국가를 넘어선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는 그 역사적 뿌리와 기능적 요건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적 민족국가와 -비록 매우 모순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 민족국가의 진화와 함께 사회는 매우 분명한 지리적 경계, 상대적으로 폐쇄된 경제체계, 중앙 통제에 종속되며 정치적으로 규정되는 인구,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통제의 책임을 지면서 동시에 통제를 받는 행정권력을 갖춘 정부 등을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세계화 과정에서 진행되는 국가의 국제화가 국가의 중요한 토대를 침식한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동의되고 있다(Hirsch, 1995, 1998; Gorg and Hirsch, 1998; Zurn, 1998; Narr and Schubert, 1994; Archibugi and Held, 1995; Held, 1991, 1995; Sassen, 1996). 이는 역으로 사회적·계급적 관계의 조직화에, 따라서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 일반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화 및 국제화 과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는 개별 국가의 정부들이 국제 자본의 전략 및 자본축적의 동역학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생산 현장’으로서 국가들 사이의 경쟁은 압도적인 중요성을 갖기 때문에, 민주적 제도들은 유지되기는 하지만 점차 무력해지고 활기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한다. 이 때문에 ―특정 제도들의 구조조정과 함께― 국가와 사회의 새로운 분리형태가 생겨나게 되는 한편 정부 행정기관들은 자율화·권위주의화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사실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재무행정부서와 중앙은행이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으로부터 확고한 독립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국가에 의해 장려되었던 사회협약과 계급간 사회적 협력의 토대를 제거한다. 자본주의적 계급 갈등의 타협과 포괄적 제도화라는 포드주의적 [조직]형태와 대조적으로 계급관계의 신자유주의적 조직화는 대체로 분절화와 분할, 개인간·집단간 경쟁의 촉진에 의존하는 바, 이는 종종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복지 쇼비니즘 따위의 특징을 띤다. 동시에 사실상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국제 조직 및 협상장에서 정치적 논쟁과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점차 증가한다. 개별국가 내부의 민주적 제도와 절차들이 정치적 결정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자유민주주의는 과거의 시민들이 -비록 제한적이었다 할지라도- 향유했던 자유와 자기결정을 상실한 지배의 체계로 환원된다. 이런 식으로 민주적 절차들이 무력해지면서, 정치체계는 사회를 통합하고 갈등하는 이익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한다. 이들은 점차 사회 내부의 세력관계, 관심사들,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에 대응할 수 없게 된다. 즉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조절에서 민주적 구조들의 핵심적 기능이 되어온 학습능력을 상실한다. 세계적 수준에서 볼 때, 민주적 제도와 절차들은 점점 더 통합을 위한 세력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점점 더 사회정치적 분절화의 원천이 되고 있다. 통치기관으로서 국가와 사회적 자기결정이라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괴리는 점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발전은 특히 자본주의 중심부와 종속국의 관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주변부의 경우 ―동서 갈등의 종언과 함께, 그리고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명목상 민주적인 체제가 권력을 잡았지만, 이는 사실상 ‘무능력의 민주화’의 사례일 뿐이다(Hippler, 1994). 과거의 상황에 걸맞게 확립되어온 형식적인 민주적 구조는 실천적으로 권위주의적이며 국제자본과 국제조직, 강대국들에 의존적인 정부들에 대해 대체로 무력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한편 거대 중심부에서 민주주의는 일부 노동자를 포함하는 특권화된 인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배타적인 조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배타적 조직은 세계적·민족적 수준에서 다른 모든 집단들을 배제하면서 스스로를 배타적 소수로 확립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봉사한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지표는 많은 나라들에서 계속되는 이주자와 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해 거주 인구의 일부만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민주적 정치 과정으로부터 사실상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의 불참과 결합되어 세계를 지배하는 서구 민주주의가 부유한 이들의 클럽인 동시에 확고하게 방어되고 바리케이트 쳐진 사회적 요새의 정치적 판본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의 조직된 형태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퇴행적 발전은 민주주의로부터 본래의 보편적·개방적·진보적 성격―과거에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존재했던―을 박탈한다.
이상은 세계적 지배력을 확립하려는 OECD 국가들의 계획과 일치하는데, 그러한 계획은 점차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 주된 토대가 되는 것은 복지 쇼비니즘, 인종주의, 그리고 ‘문화들의 전쟁’(헌팅턴)에서 서구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가정이다. 게다가 그것은 ‘(외국의) 조직된 범죄’, ‘테러리즘’, 그리고 ‘반-서구적’ 체제 등에 맞선 지속적 전투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다. 이러한 전투를 위해 위기 상황에 대한 ‘인도주의적’ 군사·경찰 개입이라는 수단이 동원되며, 세계화의 희생자이거나 또는 제국주의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세계의 일부에 대한 고도의 선택적인 재난 구호 조직이라는 수단이 활용된다.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이 수행되면서 이제 인권은 거대중심적/자본주의적 생활양식과 그 정치적·경제적 토대의 체현으로 변질된다. OECD의 계획은 퇴행적이고 특수한 ‘보편주의’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는 ‘서구적 가치’와 ‘자유와 민주주의’의 미국적 모형―즉 자유시장과 사적 소유라는 자본주의적 원칙의 확고한 방어와 강대국의 지배―을 일반적 규범으로 확립한다. 국제적 ‘인권 체제’가 민주화를 추동하는 효과를 가질 것이라는 희망(Sassen, 1996: 83)은 적지 않은 회의주의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커지는 시장관계의 우위는 스스로의 자연적·사회적 토대를 파괴하는 씨앗을 그 내부에 품고 있다. 과거에 이러한 발전은 대항적 힘들(노동운동이나 노동자정당 같은 사회운동)의 발전과 민족국가 내부에 서 다소 정착된 민주적 구조에 의해 상쇄되었다(Polanyi, 1990). 국가의 국제화 과정에서 이러한 특수한 정치구조들이 약화될 때, 일군의 대항 세력들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들이 사라지게 된다. 혹자는 이로 인해 세계적 세력균형의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사회적 위기가 초래되었고 이러한 위기를 낳은 세력관계는 상호연관된 경제적·정치적 과정의 복합체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가정할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가 새로운 국제적 정치조절 형태를 필요로 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국제화를 겪고 있는) 현존하는 국가체계를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새로운 조절형태가 위기에 대한 임시변통적 대응에 지나지 않으며 탈선하고 있는 세계질서의 토대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적 토대의 구조적 결여는 통제 받지 않는 시장의 힘의 파괴적 결과들에 맞서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자본주의의 위기나 붕괴가 해방 과정의 시작점이 될 거라고 희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파괴적 발전에 맞서 정치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억압·분할·배제의 내재적 메커니즘을 갖는 전통적 민족국가 체계를 단지 복원하는 데 그치는 해결책은 ―국제자본의 우위와 지금껏 일어난 계급 구조상의 근본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설사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전도 유망한 해결책이 아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운동이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민주주의가 정치적 논쟁 쟁점으로 부활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발전이다. 사실 이와 같은 발전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한편으로 이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자신들의 우위를 확립하려는 OECD의 시도의 표현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침식과 세계화에 동반되는 사회적 분절화 및 퇴행에 반작용하려는 항의의 형태다. ‘인권’의 의미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호하다. 나폴레옹은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인권’을 들고 이집트를 정복하려 떠났다. 달리 말해, 현재 진행 중인 토론과 논쟁에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들은 어떻게 현실적 실천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차이가 가장 뚜렷해지는데, 이는 ‘시민사회’를 둘러싼 토론을 떠올려 보면 분명해진다.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시민사회에 관한 토론은 부유층의 바리케이트 처진 요새가 되고 있는 ‘경쟁적 민족국가’의 정치 구조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데 일차적으로 기여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적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슬로건으로 기능하고 있다. 반면 주변부에서 ‘시민사회’는 ―예를 들어 멕시코 싸파티스타 봉기에서 시작된 토론들에서처럼- 권위주의적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자기결정적 민주 사회를 창출하려는 투쟁을 반영한다(Brand and Cecena, 2000).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이에 관련된 정치 조직 및 운동에 관한 이러한 논쟁은 분명히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 민주적 질서―상투적인 민주주의 모델과는 반드시 판이하게 달라야 할 민주적 질서―를 발전시키고 실현하려는 시도가 의제에 올라온 상태다. 민주적 정치의 새로운 형태가 발전되어야 하는데, 이는 특히 현재 진행 중인 국가의 국제화 때문에 그렇다. 민주주의의 이러한 형태들은 민족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행정의 국가적 체계로부터 ―조직과 활동 면에서― 훨씬 더 독립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연계된 정치적 규범―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 대표 및 의사결정과정의 기본 원리―이 근본적으로 재정식화되어야만 한다. 이는 국가와 사적 기업으로부터 독립적인 운동 및 조직들의 국제적 협력이 새로운 방식으로 발전·강화·제도화되고 그 결과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세계 시민사회’가 그 이름에 부응하기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Gorg and Hirsch, 1998). 이와 같은 과업은 국제적 수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지방적·지역적·민족적 수준에서의 기본적인 민주화 과정이 선행되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민주화 과정 역시 유사하게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의 지평과 한계를 넘어 확장된다.
이제 문제는 NGO에 대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과학적 문헌과 정치적 토론 모두에서 NGO는 국제 정치의 민주화와 문명화에 주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예를 들어 Habermas, 1998을 보라).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과 구조를 분석해 보면, 사실 적어도 일부 지역에서는 NGO가 국제 조절체계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최소한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열려진 문제다. 문제는 NGO를 국제 조절체계의 일부로서의 기능으로부터 분리시켜서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행위자로 간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일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최근의 토론에서 더욱 빈번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정치적 절차와 의사결정에서의 기능성(functionality) 및 합리성과 등치한다면(Gorg and Hirsch, 1998: 594), NGO는 ‘민주적’ 조직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그들은 확실히 더 넓은 범위의 이익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고, 문제의 규정 및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더 커진 합리성에 기여한다. 민주주의를 참여의 제한성을 갖는 견제와 균형의 다원주의적 체계로 이해할 경우에도 이러한 판단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민주주의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가능한 최대의 자유와 자율성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체계라고 이해한다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NGO가 민족적·국제적 수준의 관료적 국가 행정기관에 의존하고 근본적으로 국가지향적인 한, 근본적인 사회 변화 전략을 발전시키고 추구하는 능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Wahl, 1997; Brand, 2000). 비록 그들이 내적으로 민주적이고 ‘풀뿌리’에 밀착돼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어느 정도의 대표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적절한 제도적 메커니즘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NGO는 조직 자체의 무시할 수 없는 자기이익 때문에 자신들이 대변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들의 욕구와 밀접하게 연관되기 어렵다. 그리고 물론 NGO가 민주적 정당성이 없거나 분파주의적인 이익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지금까지는 NGO의 활동이 대부분 환경, 사회, 개발, 인권 정책 등과 같은 ‘다루기 쉬운’ 쟁점에 국한되었던 반면, 안보, 방위, 기술, 경제와 같은 ‘다루기 어려운’ 쟁점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는 무엇보다 이런 영역에서는 국가가 그들과 협력하려는 이해관심을 거의 또는 전혀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IMF, 세계은행, WTO의 정책에 관한 최근의 논쟁들은 이와 같은 상황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제 지뢰 캠페인에서 이러한 변화의 징후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Gebauer, 1998). 마지막으로 NGO들은 자원과 행동반경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다양한 정치적 역량을 갖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북’과 ‘남’의 NGO를 비교하고 ‘남’의 NGO의 빈번한 재정적·조직적 의존성을 관찰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Bruckmaier, 1994; Demirovic, 1997: 255). 또한 NGO들 내부의 권력의 위계가 존재하는데, 보통 거대중심부에 근거를 둔 강력한 ‘초민족적’ NGO가 지방적·지역적 수준의 더 작고 약한 조직에 대해 상당한 우위를 점한다(Wahl, 1997; Walk, 1997). NGO 체계는 민족국가들의 권력 불균형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NGO의 민주적 본질이 개별 조직의 작업 조건, 내적 구조, 목적 등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비록 그 내적 구조가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보다 넓은 국제적인 정치적 조절 체계 내에서의 입지와 기능에도 의존한다는 점은 분명하다(Wahl, 1997: 313; Gorg and Hirsch, 1998: 602). 민주주의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NGO는 수많은 행위자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종종 서로 대립하는 극히 다양한 NGO들이 존재한다. 일반원리의 수준에서 보자면, NGO가 국가, 국제조직, 사적 기업에 대한 자신의 물질적·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능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민주적 과정에서 그들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 NGO는 국가의 행정 및 핵심 기능과 관련된 문제에서 국가의 지원금이나 보조금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금 조달을 위해 미디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사회운동과 대중적 주도권이라는 능동적인 정치적 토대의 지지에 의존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별 전자우편이나 TV 자선 음악회만으로는 충당될 수 없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정확하고 비판적인 정보가 관심 있는 이들에게 제공되는 것, 또한 NGO의 활동, 작업 조건, 이들이 직면하는 난점들, 그리고 필요하다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한 이유 등에 관한 공적 토론이 벌어지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국가 행정기관과 사적 기업에 대항하여 충분한 상쇄력-단순한 상징적 권력을 넘어서는-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조절 및 지배 체계의 규범의 제한을 넘어서는 정치적 전망과 사고를 발전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Gorg and Hirsch, 1998). 이는 또한 ‘다루기 힘든’(hard) 정치 영역, 즉 세계적인 사회정치 질서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동시에 NGO가 국가 제도들의 협력과 도움을 확신할 수 없는 영역에서의 유의미한 활동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해방적인 사회 변화를 위한 전략은 ‘정치’ 개념을 근본적으로 확장시켜서 새로운 쟁점들 예컨대 생산과정, 소비, 생활양식과 성별 관계, 그리고 이것들과 함께 의식고양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과 사회적 학습의 증진 등과 같은 쟁점들을 다룰 필요가 있다. 이는 국가가 지배하는 협상장 내에서의 로비활동으로 제한되지 않는 정치적 지향과 행동을 요구한다(Princen and Finger, 1994: 34; Wapner, 1995).
국가 및 국제조직에 대한 NGO의 의존성은 협력과 활동을 위한 국제적 동맹을 창조함으로써만 충분히 감소될 수 있다(Princen and Finger, 1994: 36; Wapner, 1995; Wahl, 1997: 313). 여기서 다시 국제 지뢰 캠페인은 중요한 사례가 된다(Gebauer, 1998). 특히 중요한 것은 국제 체계 안의 복잡하고 모호한 협상 채널을 보다 공적이고 투명하게 만들도록 힘쓰는 것이다(Princen and Finger, 1994: 35). 마지막으로 NGO의 민주성 정도는 NGO가 그 이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느냐와 관련된다. NGO는 그 ‘수혜자’가 독립성을 상실하고 그들이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조직했더라면 획득할 수 있었을 모든 기회를 상실하게 하는 방식으로 ‘수혜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물질적 원조를 제공할 수도 있다. 발전 원조와 구호사업에 관련된 사례들에서 종종 이러한 현상들이 발견될 수 있다. 다른 한편 NGO는 미디어의 이해관심에서 보자면 구경거리가 덜하고 또 국가 당국과 충돌을 낳을 수 있는 자기조직화의 증진을 목적으로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이런 접근조차 여전히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우선, 외부의 개입이 정치적 자기결정을 증진시키는 데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는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정부간 갈등,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착취에 활용될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향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Wapner, 1995: 334). 민주화를 추동하는 NGO의 영향력은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지방적·지역적 정치 구조를 지지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Gorg and Hirsch, 1998; 또한 Walk, 1997을 보라). 이러한 길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NGO는 ‘급진적 행동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Princen and Finger, 1994: 65)고 가정하는 것은 오해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기껏해야 더 광범위한 운동이나 네트워크의 일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1999년 시애틀, 2000년 프라하, 2001년 제노바에서 열린 WTO, IMF, 세계은행, G7/8 총회에서의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항의시위와 관련된 NGO의 모호한 역할이라는 사례에서처럼 NGO와 사회운동의 관계는 다소 복잡한 관계를 내포한다. 이러한 모호성은 NGO들이 거리에서의 항의를 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탓에 정부 및 국제조직과의 협상에서 진지한 파트너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날 때 분명해진다. 만일 세계적 지배·착취·종속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라면, 급진적 행동, 즉 제도적 구조 외부에서의 직접행동에 대한 대체물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직접행동은 지배적인 정치 의제들의 한계를 넘어서고, 합의를 파괴하며, 민족적·국제적 수준의 광범위하고 복잡한 지배체계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대체물을 상층의 외교적 접촉이나 협상 테이블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전혀 가망 없는 일이다. 자체적인 구조와 기능 때문에 NGO는 희귀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행동에 참여하기 어렵다. 우리는 기껏해야 NGO가 급진적 행동의 결과를 수용하면서도 그 당시 그들이 누리던 보다 강력한 지위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내적 구조, 정치적 활동, 방향 등에 조응하여 그러한 행동을 할 의지와 능력을 갖는 한에서― 정부 및 국제조직과 대립하면서 국제 협상에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다. 급진적 사회운동은 항의하고 저항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이 제도 안에 제한되는 것을 거부하는 바, 여전히 민주적 발전의 기본적 토대들 중 하나다. 그 결과 NGO 체계의 민주적 본질은 NGO가 보다 급진적인 정치적 주도세력 및 운동들과 지속적인 갈등관계를 가질 때에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역설이 생겨난다(Brand 2000). 만약 NGO 부문의 성장이 급진적인 정치운동의 쇠퇴에 대한 대응이라는 진단을 면밀하게 검토해본다면, 이러한 진단은 민주화를 추동할 수 있는 NGO의 잠재력에 관한 상당한 회의주의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살펴본 것처럼, NGO라는 용어를 매우 좁고 엄밀하게 정의할 때에도 그 용어는 매우 상이한 다양한 조직들에 적용될 수 있다. 그린피스와 옥스팸, 국경없는의사회와 메디코인터네셔널의 구조와 기능은 유사하지만 그들을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계가 있다. 또한 사실상 기업으로 파악되어야 할 수많은 조직들이 존재한다. NGO의 민주적 본질은 이러한 차이가 NGO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얼마나 정치적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에 어느 정도 좌우된다. 우리는 여전히 유물론적 국가·사회 이론이 ‘시민사회’에 관해 말해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지극히 이질적이며, 사회 모델의 발전과 실현을 둘러싼 투쟁의 전장이다. NGO들은 이와 같은 투쟁에 참여하며 사실상 서로 빈번하게 대립한다. 민주화를 추동하는 NGO의 영향력은 국제적인 국가 협상 체계 내에서의 ‘건설적’ 활동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일부를 이루고 있는 지배적 정치체계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 ‘맨주먹싸움 과정에서의 비판’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한다. 이런 일이 실현되어야만 비로소 NGO가 관련된 곳에서 ‘민주적 시민사회’에 관해 더욱 진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 맞는 NGO의 구호를 인용하자면, 문제는 ‘시민사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꾸는 것이다. NGO의 무차별적이고 규범적인 모든 속성들과 함께 NGO에 관한 신화적 이미지―학술적 담론과 공적 논쟁에서 유행하고 있는―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해방을 향한 중요한 일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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