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5.6.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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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 민중봉기

민중을 배신한 정권의 비참한 최후

배준범 |
에콰도르 민중봉기: 민중을 배신한 정권의 비참한 최후

배준범| 회원, 민주노동당 국제부장

남미의 한 산유국에서 치솟는 유가와 이에 따른 외화수입의 급증, 늘어나는 국가의 부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인해서 인구의 절대 다수가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 이에 대해서 분개한 젊은 군인들 중 일부는 지휘 계통의 명령을 어긴다. 민중들을 더욱 파탄으로 몰아넣을 것이 뻔한 정부 조치들에 맞서 봉기한 인민들을 진압하라는 지침을 거부한 것이다. 이 ‘반란’을 지도했던 젊은 장교는 항명의 대가로 감옥 생활을 감내하다가 결국 군복도 벗게 된다. 그러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중을 위한 통치를 하겠다는 그의 의지에 대해 많은 원주민, 농민, 노동자들은 열성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며, 이에 힘입어 그는 석방 후 제도권 정치의 길에 나선다. 그리고 기존 정당들의 모습에 염증과 절망을 느낀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남미에 또 하나의 파퓰리스트가 등장했다는 서방 언론의 호들갑과 함께.
누구에 관한 이야기일까?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아니다. 남미에는 그 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과거를 지닌 이가 있는데, 바로 얼마 전 이웃 나라 브라질로 망명한 에콰도르의 전 대통령 루시오 구티에레스다. 하지만 차베스와의 유사점은 과거에 국한된다. 올해 초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검찰은 그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그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군부도 그의 국회탈출을 막기 위해서 출국금지령을 내렸다. 이렇듯 완전히 고립된 그는 탈출구를 찾던 중, 다행히도(?) 브라질 측에서 비공식적으로 망명을 허용하여 지난달에 에콰도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불명예스럽게 끝을 맺은 국가원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보다 더 비굴한 최후를 맞은 이가 같은 나라에 또 있다. 바로 전전 대통령인 부카람인데, 그는 ‘정신적 부적격’ 판정을 받고 역시 나라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에콰도르의 정치 현실이다. 에콰도르의 정치 수준을 더욱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구티에레스가 그의 귀국을 정치적으로 주선하려고 노력하던 중 축출 당했다는 사실이다. 별명이 ‘미치광이(El Loco)’인 부카람을 말이다.

반복되는 정권교체, 불안정한 정치

에콰도르는 남미의 많은 나라들처럼 정치 제도가 불안정하고, 정당정치의 발전이 더디고, 민주적 성숙도가 낮다. 그러다보니 정치가 개별 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편, 좌파 인사들도 파퓰리즘적 성격이 강한 경우가 많다. 더불어 에콰도르 역시 남미의 여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90년대 말부터 아래로부터의 민중투쟁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된다.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신자유주의 일색의 정책 속에서 민중들의 삶의 수준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6년에는 개혁의 열망에 힘입어 축구 선수 출신인 부카람이 이색적인 선거 운동 끝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8개월 끝에 의회에서 탄핵되었다. 자신의 정적을 당나귀라고 부른 뒤, “당나귀를 모독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발표했던 점, 선거 운동 기간 동안에 반나체 선거운동원과 가수 및 연예인들을 대거 동원했던 사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가요 음반을 발매하는 모습 등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스타일의 정치를 했는지 엿볼 수 있다. 빈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어 66%라는 지지율로 당선된 그는 초기 두세 달 간 일부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 인상 등 빈민들에게 인기 높은 조치들을 일부 취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돌변하여 긴축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대해 원주민, 학생, 인권단체, 노동자들은 파업 및 시위로 맞섰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은 후 그는 97년 초에 국회로부터 ‘정신적 부적격’이라는 판정을 받고 탄핵 당한다. 이어진 선거에서는 마우아드라는 보수 인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 역시 페소화를 포기하고 달러로 통화를 바꾸는가 하면 민영화와 긴축 재정을 서둘렀다. 그의 이러한 행보에 맞서 민중들은 봉기했고, 그는 물러났다. 그에 저항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민중들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지원에 나섰던 이가 바로 당시 대령이었던 구티에레스다. 하지만 마우아드는 이 사건 직후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에콰도르 최고의 부자 노보아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다음 해의 선거에서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구티에레스에게 진다.

민중의 지지로 당선된 후 친미 - 친자본으로 돌변한 구티에레스

이러한 질곡의 역사 속에서 2002년 11월에 그가 에콰도르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구티에레스에 주요 외신들이 보인 반응은 그가 또 한명의 차베스라는 우려(혹은 기대!)였다.1) 남미에서 차베스와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브라질의 룰라에 이어 좌파 바람이 지속되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말이다. 구티에레스 이후에도 남미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지속되고 있는 좌파 바람 속에서 대부분의 정권들이 집권 후 우경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2) 에콰도르만큼 집권 전과 후의 차이가 큰 나라는 없을 것이다. 무거운 외채 부담과 기득권에 익숙한 관료조직들, 원내에서의 소수파 위치, 친자본 세력들의 공세는 남미, 아니 전 세계의 집권 좌파 세력이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이다. 브라질의 룰라와 우루과이의 바스케즈는 경제적으로 신중한 정책을 펴는 가운데, 다방면의 사회정책 프로그램 강화와 외교 정책 노선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남미 대륙에서 경제, 외교 면에서 가장 급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가 그 중간 어딘가에 있겠지만, 키르치네르 정부의 대응도 국가 부도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들은 적든 많든 기존 정부들과의 차별점을 보여주는 것에는 성공하고 있는데, 에콰도르의 구티에레스 정부는 집권 직후 잠깐 동안의 ‘허니문’ 시기를 제외하면 이러한 면에서 완벽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집권 후 돌연 180도 변한 것이다. 구티에레스는 자신이 반미 인사라는 인식에 대해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미국과의 관계를 무엇보다도 중시한다.”라는 그 자신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애써 부인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대통령 직에 오르기 전까지는 반신자유주의 수사로 인해서 에콰도르의 차베스라고 불렸던 그는 당선하자마자 돌변하여 미국과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콜롬비아 내 좌익 소탕 작전인 플랜 콜롬비아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남미에서는 예외적으로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으며, IMF와의 새로운 협약을 맺어 공공부문에서의 대대적인 인력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추진했다. 남미의 다른 좌파 정권들이 ‘남미의 연대 협력 강화’로 노선 전환을 하고 있을 때, 에콰도르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로 인해서 필수 서비스 가격이 오르고 빈부 격차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정권 교체 이전에도 60%에 이르던 빈곤층은 더욱 늘어났다. 또한 과거 자신을 당선시킨 민중들이 몰아냈던 바로 부카람 전 대통령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귀국 금지령이 내려진 그를 다시 입국시켜, 그가 속한 당의 지지와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러한 몸부림에는 나름의 배경과 이유가 있다. 브라질만큼 당들이 난립하는 에콰도르의 다당제 정치에서, 그가 창당한 애국당은 전체 의석 100석 중에 단지 2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연정을 함께 꾸린 대중민주운동당(MPD), 에콰도르 사회당(PS)과 파차쿠틱(Pachakutik)이라는 원주민 전선체가 확보한 의석을 다 합쳐봐야 전체 의석수의 15-20%밖에 안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2002년 대선 때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노보아의 당(PRE: 원내 3당)과 탄핵되었던 부카람 전대통령의 당(원내 1당), 그리고 기독사회당 등에 손을 벌렸다. 원내에서 안정적 기반을 확보하는 동시에 금융/산업의 중심지인 과야킬과 산악 지대 속에 위치한 키토 사이의 지역주의 문제도 풀어볼 의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폭발한 대중투쟁, 구티에레스의 퇴진

그가 정책적으로 급속히 우경화하고, 적대적이었던 당들에게 무원칙적으로 손을 내미는 동안, 대선 때 구티에레스를 지지했던 에콰도르의 진보적 정치세력들은 하나둘씩 지지를 철회했다. 처음에 대중민주운동당(MPD)이 지지를 철회했고 곧 에콰도르 공산당(의석수는 없지만 민중운동 내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도 뒤를 이었다. 원주민들에게서는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파차쿠틱도 보수적인 PSC와의 공조 논의에 실망하여 연정을 떠났다. 곧 파차쿠틱과 가까운 원주민 대중 조직들의 시위가 키토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뜸했던 대중 파업과 집회들도 작년 말과 올해 초를 정점으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야당들이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보수우익 단체들과 구티에레스의 이전 지지파들이 함께 집회에 나타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러던 중 그가 대법관들을 일제히 교체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사태는 그의 퇴진으로까지 치달은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사법기관들은 가장 보수적인 관료 집단 중 하나고, 진보적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추진한 조치가 민주적 질서를 무시한 것이라 여겼고 사법 기관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더군다나 사법 개혁을 원칙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공조를 구했던 보수 정당들의 추천 인사로 채우려고 했던 의도가 드러나 명분도 상실한 상황이었다. 대법관 교체 시도가 부카람을 국내에 복귀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심도 팽배했다. 이 사건은 구티에레스 정권이 밀실 야합, 보수 정치로 완전히 전락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구티에레스와 관련된 부정부패 사건들마저 폭로되자 그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반정부 시위대에 맞서 막판에 구티에레스를 보호하기 위한 시위대가 나타나고 긴장 국면이 조성되면서(한때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었다) 차베스의 쿠데타 직후처럼 그가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일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언론들은 친위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동원된 경우라고 분석했다. 결과는 알려진 바와 같이 구티에레스가 망명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퇴진이었던 셈이다. 더더욱 참담했던 것은 지지를 철회했던 좌파 진영 중에서 가장 많은 득표력을 지닌(5%) 대중민주운동당이 막판에 구티에레스를 살리는데 결합했다는 점이다. 구티에레스의 위기 국면에서 이에 대한 대응방향을 둘러싸고 좌파 진영이 갈라진 것이다.

에콰도르의 강력한 민중운동이 희망

구티에레스가 집권 하는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압력을 받게 됐고, 집권 후에는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외부에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진보 세력의 역량에 대한 냉정한 판단 속에서 자신의 권한과 민중들의 지지를 통해 변화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보수세력 및 초국적 자본과의 손쉽게 타협하고 지지자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보가 불안정한 민주적 질서 자체에 대해 위협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베네수엘라 및 쿠바 정부도 망명한 그와는 거리를 두는 분위기다. 쿠바는 그가 물러나게 된 것은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며 간접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동조를 지적했고, 베네수엘라 외부부도 “초국적 금융자본 엘리트들과 맺은 협약의 결과”라며 결과의 책임이 일부 그에게 있음을 명확히 했다. 브라질 정부도 망명 허용 결정을 “동조”가 아닌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3)
구티에레스의 망명 후 그의 뒤를 이은 부통령 파라시오는 우선 과도기 정부로서 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사 출신인 그는 석유 값의 일부를 사회복지 예산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IMF와의 갈등을 예고하기도 했다. 미국은 그가 구티에레스보다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하고 일단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미 확인했듯이 에콰도르의 정치에서는 확실한 것이란 없다. 단, 최근 10년간 대통령을 3번이나 민중의 권력으로 갈아 치운 에콰도르의 강력하고 폭발적인 민중운동이 그 나라의 노동자, 빈민, 원주민, 여성들이 지닐 수 있는 희망일 것이다.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좌파 세력들의 약진에 다시 그들이 합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PSSP


1) 일례로 "Lucio Gutierrez: Ecuador's Populist Leader," BBC News, November 25th, 2002.본문으로

2) Immanuel Wallerstein, Death by a Thousand Cuts, Commentary No. 160. May 1., 2005. http://fbc.binghamton.edu/160en.htm본문으로

3) "Ecuador: People Drive Out President," Green Left Weekly, April 25th, 2005.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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