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5.10.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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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투쟁과 '춘투'

- 현대자동차 투쟁을 중심으로 -

배정수 | 회원
노동운동은 때로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받는다.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받는 '억지 의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작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계급 내부에서부터 시작되는 불신이다. 요즈음 즐겨 사용되는 '노동운동의 위기' 담론 역시 이것과 다르지 않다.
현대 씨티(Hyundai City). 아직도 몇몇 외국 지도는 반도의 남동 끝 울산을 이렇게 표기한다. 노동운동에게도 울산은 특별한 곳이다. 역사적으로 그래왔다. 1987년 7월6일, 장호철 노조 회계감사가 1천여 명의 현대엔진 조합원들이 모인 가운데 메가폰을 잡고 노조결성을 알린 뒤 전국 방방곡곡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가며 그 여름을 뜨겁게 달군 대투쟁의 시작도 공업도시 울산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05년 9월4일. 2공장 투싼 21라인에서 일하다가 징계해고 당했던 서른 한 살의 비정규노동자 류기혁 동지의 죽음은 그 오랜 동안 왜곡되고 은폐돼 왔던 우리 운동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동지의 죽음 다음날인 5일, 울산 현대자동차 회의실에는 민주노총과 금속산업연맹, 민주노총 울산본부, 금속산업연맹 울산본부, 현대자동차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노조 등 관련 6개 주체가 모여 대책위 구성 등을 두고 밤샘회의를 가졌다. 이후 일주일동안 회의가 잇따라 열렸다. 다소 과장된 측면도 있고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이 진실처럼 떠돌기도 했지만, 대책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우여곡절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여기에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이곳에서는 그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투쟁주체들 사이의 갈등이 갖고 있는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만 간단히 짚어보자.

현대자동차노조가 작년 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을 하였고 노동부는 1만여 명에 달하는 하청노동자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하였다. 이에 현대자동차비정규노조는 2005년 1월부터 불법파견 철폐와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농성에 돌입했고, 현대자동차노조는 1월 24일 대의원대회를 통해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 3개 노조(울산, 아산, 전주공장)가 참여하는 '불법파견 원하청 연대회의'를 결성하여 정규직-비정규직 연대투쟁의 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최소한 현대자동차 안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한 배를 탄 동지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현대자동차 비정규투쟁을 총괄하는 '원하청 연대회의'에서는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회의 때 녹음기가 필요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예컨대 '공동논의, 공동결정, 공동투쟁, 공동책임'에 대해서도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의 해석이 달랐고 이에 따라 비정규직노조의 독자적 투쟁에 대해 정규직노조에서 투쟁일정 재고나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정규직노조의 연대를 통한 조직화에 힘입어 2,000여 명이 넘는 조합원이 비정규직노조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정규직노조는 비정규노조의 '실력'을 믿지 못하며, 비정규노조는 정규직노조의 '투쟁성'에 의심을 품었다. 임단협투쟁에 대해서 정규직노조는 임단협과 불법파견 투쟁을 분리하여 대응하고자 임단협과는 별도로 불법파견 특별교섭을 사측에 요구했고, 비정규직노조는 임단협과 불법파견 투쟁을 결합시켜 불법파견 해결 없는 임단협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임단협은 임단협대로 타결되고 불법파견 관련해서는 한 달 이내에 실무교섭을 거쳐 특별교섭을 하기로 하면서 문제는 더욱 커졌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만을 반영한 임단협이다", "불법파견 특별교섭에 대해 회사측이 응하겠느냐", "임단협투쟁 끝내면 어떻게 투쟁 동력을 모으냐", "곧 현대자동차노조 선거가 있는데 불법파견 특별교섭과 이에 대한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정규직노조에 쏟아졌다. 현대자동차노조 이상욱 위원장이 '원하청 연대투쟁의 모범 모델'로 삼고자 했던 연대회의는 이제 원하청 노조 모두가 "한계에 봉착했다"고 말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현대자동차노조 집행부는 이른바 '핵심 좌파'로 분류되는 정치조직의 성원들이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좌파'라는 이름표가 모든 정당성을 상징하는 마패가 될 순 없지만, 그간 현대자동차 투쟁에서 가장 전투적인 현장조직으로 인정받고 있던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노총 소속인 하이닉스 원청노조가 하청노조의 투쟁을 탄압하면서도 운동사회의 관심 밖에 놓여있는 것처럼, 현대자동차노조는 그 지도부가 갖는 상징과 이에 따른 기대심리 때문에 보다 더 큰 비판을 받는 측면도 있다. "다른 데는 몰라도 적어도 현대차노조만은 그래선 안 된다"라는 논리다. 현대자동차노조 집행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좋든 싫든, 밉든 곱든 간에 현대차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운동진영은 물론, 자본과 정권도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울산을 주시하는 이유다.
연대회의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현대자동차의 원하청 연대투쟁이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물론 외관상의 문제는 신뢰관계에 금이 간 것이다. 결정사항은 다르게 이해되고, 현장에서는 연대회의에서 발언되지 않은 내용이 마치 공식 결정사항인 것처럼 떠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금간 신뢰'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연대회의의 한계와 비정규투쟁의 질곡에 직접적인 작용을 한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연대의 근거가 상실됐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하나'라는 명제는 집회 구호와 유인물의 제목으로만 남았을 뿐, 실제 노동자들 스스로가 하나라고 여기지 않는다. 노동계급은 어느덧 자본이 쳐놓은 촘촘한 그물을 스스로 재생산하고 있다. 비정규직 중에서도 1차 하청과 2/3차 하청이 구분된다.

노동계급 내부를 가로지르는 이러한 구분은 지금의 노동운동 현실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정규직노조는 이른바 '춘투'로 상징되는 임단협투쟁을 중심으로 1년을 난다. 다른 모든 정치적 쟁점과 사회적 이슈 역시 임단협 시기에 맞춰 함께 제기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하지만 임단협투쟁은 '자기 대중', 조합원을 동력으로 그들의 권익보장을 위해 하는 싸움이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는 물론 사절한다. 하지만 모두가 이야기하듯이 비정규직 문제가 현실 노동운동의 목줄을 죄고 있는 상황에선 과거 임단협투쟁의 주제를 뛰어넘는 투쟁이 필요하다. 불행하게도 임단협투쟁은 아직까지 조합원 실리주의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기업별 노조에서는 일면 불가피한 결론이기도 하다.
故류기혁 동지 투쟁 과정에서 임단협투쟁은 현대자동차노조의 운신의 폭을 더욱 좁혔다. 전체 투쟁과 대응이 늦어지고 힘 빠지는 형태로 흘러가게 했다. 접점을 찾지 못하던 대책위 구성이 합의에 다다른 것은 현대자동차 임단협투쟁 잠정합의가 이뤄진 뒤였다. 임단협을 길어지게 할 수 있는 대책위 구성을 조금 미룬 뒤, 타결 이후에는 오히려 대책위 구성을 통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의혹이 이곳저곳에서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상대방이 진전된 안을 계속해서 내놓고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라는 현실론적 반론도 있다. 고인의 죽음으로 비정규직 관련한 쟁점이 형성되고 투쟁이 촉발될 여지가 있을 때, 회사 쪽에서 협상을 빨리 끝맺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 현대자동차에서도 고인의 죽음 이후 임단협에서 미합의 쟁점에 대한 회사의 양보안이 대거 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건강한 활동가들로 구성된 노조 집행부라면 임단협 중단을 선언하고 해당 투쟁의 전면에 나섰어야 했다.
정규직노조의 한계와 이에 따른 투쟁의 질곡, 다시 말해 임단협투쟁 중심의 정규직 투쟁방식은 비정규노동자들을 두 갈래 길로 내몰았다. 대리주의와 분리주의다. 정규직노조의 투쟁만 바라보며 그들 스스로의 요구를 전적으로 대변해 싸워주기를 바라거나, 정규직노조와 완전히 담을 쌓은 실천을 통해 오히려 정규직노조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식이다. 물론 비정규노조의 이 같은 현상을 가속한 데에는 자본의 가공할 탄압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핵심적인 것은 주체조직화를 통해 스스로의 역량을 배가하고, 이를 통해 정규직노조와의 연대를 거쳐 불법파견 투쟁으로 나아가는 로드맵의 부족에 있다.

현실 투쟁의 질곡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보다 '비정규 투쟁 주체의 발굴과 조직화'다. 조직된 대중없이 벌어지는 싸움은 필패할 수밖에 없다. 비정규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강화하고, 정규직/비정규직을 뛰어넘는 연대를 실천해야 한다. 투쟁의 전술과 목표도 앞으로 보다 더 나아가기 위해 어떻게 주체를 형성해야 하는가를 중심에 두고 사고해야 한다. 정규직이 진행해 왔던 투쟁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비정규직의 현실에 맞는 투쟁을 고민해야 한다. 과거 한국통신계약직노조가 '비정규직 사회 의제화'를 목표로 그에 걸맞은 투쟁을 통해 모진 탄압 속에 스러져 갔다면, 지금은 지금의 상황에 맞는 투쟁전술과 목표가 배치돼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정규직노조 역시 임단협투쟁 중심의 활동 틀을 과감히 깨고, 불안정노동의 시대에 맞는 투쟁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공장 밖에 있는 사회적 의제에 적극적으로 어깨 걸고, 갈수록 폐쇄적으로 변해 가는 활동양태를 혁신해야 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러한 지향을 잡고 사업을 펼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산별노조운동도 마찬가지다. 산별교섭'만'을 절대선으로 하는 지금의 산별노조 건설로는 비정규직 조직화와 노동의 불안정에 맞선 투쟁은 요원하다. 노동조합 활동의 중심을 '교섭'에서 '불안정 노동에 맞선 공동행동'으로 이동해야 한다.
무엇보다 서로의 동질성을 확보하고, 연대의 근거를 만드는 척도는 실질적인 연대투쟁의 경험이다. 전국적/지역적 차원의 공동투쟁을 활성화하고, 조합원들을 공장 안팎의 연대로 안내해야 한다.
조직률 10% 대의 한국 노동운동이 계급대표성을 갖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전체 계급운동에 복무하는 의제를 설정하고 그게 맞는 투쟁을 펼치는 길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오늘날 노동운동에 가장 핵심적인 의제는 불안정 노동에 맞선 투쟁이다. 자본도 잘 알고 있다. 각종 매체는 물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대립의 전선을 노동자계급 내부로 옮겨내는 방식으로 계급적 단결을 막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가로막는 것은 단순히 누구는 많이 받고, 누구는 적게 받는다는 '현상' 때문만은 아니다. 임금격차 그 자체보다는 이를 야기한 사회구조적 작용에 정규직 노동자들이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노조는 계급 내부에서 연대의 근거를 더욱 확장하기 위한 요구와 투쟁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요구와 투쟁의 중심에는 노동자 계급 공동의 이익이 자리 잡아야 함은 물론이다.
현대자동차를 바라보는 시각은 동일하다. 노동계급으로서는 이곳을 돌파하지 않고 우회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다. 정부와 자본 역시 현대에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판단이 있을 게다. 실제로 다른 많은 비정규사업장 투쟁에서 노조와 사측 모두의 입을 통해서 "현대차도 저런데 뭘"하는 말들이 심심찮게 튀어나온다.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긴 사족을 남기는 이유는 울산의 싸움이 불안정 노동에 맞선 계급투쟁의 길목에서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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