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3.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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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노동 - 보살핌의 비용

드루실라 바커·수잔 페이너 |
[편집자 주] 신자유주의 개혁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지탱하는 데 여성을 활용한다. 노무현 정부에서 마련·추진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지원 정책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가사와 직장의 양립’이라는 기치 하에 여성이 가정 안과 밖에서 노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작금의 여성 정책의 목표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성별분업이나 여성의 이중부담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절히 관리하면서 여성을 활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여성에게 해악적이다. 여성의 영역을 가족으로 할당하고 가내의 노동을 여성의 일차적인 의무로 규정하는 성별분업의 구조와 이데올로기는 가족 밖에서 일하는 여성의 임금과 노동조건도 규정한다. 따라서 가족 안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중요성과 이것이 여성에게만 전가되고 있는 상황 및 이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번 <책속의 책>은 가족 안에서 행해지는 노동이 사회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밝히고, 이것이 여성만의 의무로 전가되었을 때 여성의 가족 밖에서의 노동과 여성 일반에 생기는 문제점을 다룬다. 특히 모성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양육이 여성의 노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필자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가사의 의무와 고용 노동의 의무를 분담할 수 있는 사회적 지원과 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가족과 고용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현재의 여러 정책이 여전히 가족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여성의 의무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상황을 재생산하는 핵심적인 구조인 가족의 변혁과 해체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저임금을 남성과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올려 여성이 가사노동을 전담했을 때 생기는 이점을 없애는 것이 여성의 고용을 촉진하고 가사의 평등한 분담을 이끌 수 있는 유효한 경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여성에게 저임금을 할당하게 만드는 가족 내 성별분업의 구조와 이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에 있다. 따라서 가족비판을 우회하고서는 여성의 현실을 변혁할 수 없다. 기간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가 여성의 고용을 촉진하고 가사 의무를 줄여준다는 정부의 ‘직장과 가사의 양립’ 정책을 비판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 위기에 빠진 가족을 수선하고 보전하려는 관점에서 출발한 이런 정책은 가족의 위기의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므로 여성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위기를 지연하는 차원에서 여성을 활용한다. 이 부분에 대한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의 입장은 이후 ‘저출산·고령화 정책 비판’ 등의 맥락에서 더욱 풍부히 밝힐 것이다. 번역 대본은 다음과 같으며, 참고자료는 지면 관계상 『사회운동』 홈페이지, www.movements.or.kr에 올리는 것으로 한다. Drucilla K. Barker and Susan F. Feiner, "Love's Labors―Care's Costs," Liberating Economics: Feminist Perspectives on Families, Work, and Globalization,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04.


가족과 친구를 위해 하는 일을 묘사할 때 “사랑의 노동”이라는 표현을 얼마나 자주 듣는가? 잠시만 생각해보면 사랑의 노동이 대개 가정에서 여성이 하는 일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일을 “보살핌 노동”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보살핌과 관련된 일은 가족이나 사회적 지원을 받는 서비스 기관에 의해 제공되거나 시장에서 구매된다. 예를 들어, 노인은 사립 또는 공립 요양원에서 보살핌을 받고 아이들은 사립 또는 공립 양육 센터와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는다. 그리고 중환자는 가정에서 가족 성원의 보살핌을 받거나 유급 간호사의 보조를 받고 공립 또는 사립 기관에서 보살핌을 받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 그 일은 유급이고 보살핌 제공자는 소득을 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보살핌 노동은 무급이고 화폐 거래는 발생하지 않는다. 보살핌 노동은 그것이 유급이든 무급이든 경제적 후생에 절대적으로 핵심적이다.

보살핌 노동이란 무엇인가?

현재 경제학에서 보살핌 노동을 다루는 방식은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의 엄청난 영향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보살핌 노동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성별 이데올로기로 인해 경제학자들은 유급이 아닌 모든 노동을 평가절하하고 무시했다. 더욱이 그들은 보살핌 노동의 취지나 그것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중요성을 밝혀야 할 근거도 찾지 못했다. 페미니스트들은 보살핌 노동이라는 충분히 발전된 개념을 통해 경제학을 재구조화하고자 한다.
경제사상사에서 가구노동에 대한 관심은 별개의 두 학문 영역인 마르크스주의와 제도주의에서 부상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류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무급 가구노동의 중요성에 맹목이었음을 지적했다. 가사노동 논쟁으로 알려진 논의에서 마가렛 벤스톤, 낸시 폴브르, 하이디 하트만, 수 힘멜화이트, 제인 험프리즈, 막신 몰리뉴 그리고 시몬 모흔 같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가구 내 무급 노동이 사회적 재생산에 필수적임을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무급 가구노동이 구매된 상품을 성인 노동자들을 위한 요리된 식사, 세탁된 옷, 깨끗한 집으로 변형하며, 또 미래의 노동자 세대를 재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양육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가사노동 논쟁은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가족의 경제적 후생―부르주아 가족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가족도 포함하여―에서 성별분업의 중요성을 밝혔고 현재의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가구는 여전히 생산의 중요한 영역임을 보여주었다. 가정이 단지 소비의 장소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핵심적인 점을 놓치는 것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재생산 노동의 개념적 중요성을 주장했다.
19세기 제도주의 경제학자 샬롯 퍼킨스 길먼과 토스타인 베블렌은 가정의 일의 중요성을 인식한 최초의 사람들 중 일부였다. 그들에 이어 20세기 제도주의 경제학자 하젤 키르크와 마가렛 라이드는 노동의 전문화가 가정의 핵심적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공급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졌다. 키르크와 라이드는 유급 고용의 확대가 무급 노동의 공급에 미치는 효과를 규명했다. 이 경제학자들은 무급 가사노동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2차 세계전쟁 이후 수년 동안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학 이론과 강의에서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가구노동에 대한 고려는 가정 경제학의 영역으로 강등되었다. 특정한 페미니즘 경제학이 출현하면서 그들의 작업은 재발견되었고, 경제학자들은 다시 한 번 가정 내에서 수행되는 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경제학은 사랑, 공감, 동정, 연계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보살핌 노동의 관점에서 재생산 노동에 대한 논의를 재구조화했다.
경제학자 낸시 폴브르의 작업은 이런 논의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보살핌 노동은 보살피는 사람과 보살핌을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로 구성된다. 따라서 보살핌 노동은 대개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보살핌을 받는 사람은 대개 보살피는 사람에게 매우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영유아, 취학아동, 환자, 장애인, 노인이 받는 보살핌은 이들이 보살피는 사람과 맺는 관계의 질에 좌우된다. 가족이 시장 소득을 늘려야 하는 압박이 증대하는 세계에서 유급고용의 수요가 보살핌 노동의 공급을 압박할 수밖에 없다. 여성과 남성이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유급고용에 할애하면서 “보살핌 결핍”이 나타난다.
오랜 성별분업 하에서 여성은 사회적 재생산에 필요한 보살핌 노동을 하기 위해 가정에 있어야 한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의 노동력 참여율은 남성의 참여율에 근접하고 있으며, 편부모 가족이 증가하고 있고, 지리적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확대가족은 규범이 아니라 예외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보살피는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이에 주목한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보살핌 노동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정책을 발전시키려 한다. 여기서 페미니즘의 시각은 완전 고용이라는 특별히 숭배되는 거시경제정책의 목표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전일제 일자리를 원하는 모든 이들이 그런 일자리를 갖는 동시에 보살핌 노동의 저임금, 미조직 상황이 지속된다면 사회의 의존자들은 고도의 불안전성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에서 보살핌 노동을 구매하는 비용에 비해 가정 밖의 여성의 급여가 너무 낮기 때문에 여성이 무급의 보살핌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 가정에 머물면서 발생하는 위장된 실업을 지속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살핌 노동자들이 당면한 급여와 노동조건을 변화시키자는 주장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이런 문제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이런 상황과 이와 관련한 쟁점들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후원해왔다. 국제노동기구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에 따르면, 보살핌 노동은 한 사람 또는 더 많은 이들의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발달상의 욕구를 돌보는 일로 정의된다. 그에 따르면, 보살핌 노동의 충분한 공급을 보장하는 한 가지 방법은 충분한 급여를 지급하고 보살핌의 능력과 숙련을 보장하는 적절한 규제 지침을 마련하고 규제 규범의 강화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보살핌 노동과 관련하여 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국가는 원하는 이들이 양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만 이를 위해 지불할 충분한 소득이 없는 이들을 위해 보조금과 소득이전을 보장해 주어야만 한다. 가족 역시 보살핌의 제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탠딩이 주장하는 것처럼 공식적인 유급 보살핌이 중요한 사회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피할 수 있다면 공식적인 보살핌의 공급에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의존하려 하지 않고, 의존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살핌 노동은 이타성, 상호존중과 존엄, 호혜성과 같은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적 관계다.
이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점이 도출된다. 첫째, 보살핌 노동에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이런 일의 감정적 내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간호사, 교사, 사회 서비스 노동자가 수행하는 모든 일을 생각해보자. 때로는 이런 직업이 좋은 급여를 받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스트레스가 많고 감정적인 고갈을 동반하는 성질 때문에 이런 일의 중요성은 대체로 인정되고, 누구도 이런 유급 노동을 자발적인 무급 노동으로 바꿔야 후생이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간호사, 교사, 사회 서비스 노동자가 자신의 일에 대한 급여를 받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사실 그들의 일을 자발적인 무급 노동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노동자(보살핌 제공자)와 그 노동의 수혜자(보살핌 수혜자)가 가족이고 그 일이 가정 내에서 수행될 때, 여성과 가족 내 이타주의에 대한 문화적 가설로 인해 우리는 이런 일이 무급이기 때문에 그 질이 향상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높은 급여가 몸져누운 노인과 장애인에게 양질의 보살핌을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왜 양육의 질은 무급일 때 더 나아진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역설은 모성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이 어머니의 친근하고 배타적인 관심을 요구한다는 통념은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의 우연적인 가공물이다. 상호 배타적인 공/사 영역을 만들어 여성에게 사적인 가내 세계를 할당하는 과정은 동시에 어머니를 아이의 후생을 위한 배타적인 보호자로 정의했다. 어머니와 자녀 관계에 관한 모든 시각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여성에게 전일 가정생활을 강요하지 않고서도 양질의 양육을 적절히 공급할 수 있는 사회 정책의 길이 열린다.
둘째, 보살핌 노동, 특히 양육과 관련된 보살핌 노동은 경제학자들이 “긍정적인 외부효과”라고 부르는 중요한 사회적 혜택을 갖는다. 아이들이 배려있고 생산적인 시민으로 길러짐으로써 생기는 이득은 사회에 돌아가지만, 이런 특성의 인간을 생산하는 비용은 대체로 여성에게 전가된다. 18세기 버나드 만데빌의 “벌들의 우화”는 사적인 미덕과 공적인 악덕에 대해 논했다. 그는 이타심, 관용, 정직과 같은 사적인 미덕이 경제와 정치의 공적 영역에서 행동 지침으로 활용되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런 미덕들이 보살핌 노동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만데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모성의 경제적 비용

보살핌 노동의 사례 중에서 양육과 관련된 노동보다 더 좋은 예는 없다. 정치가, 사회 비평가, 교육자, 종교 지도자는 가족과 아동의 부양에 대해 점점 더 창조적이 되어간다. 어떤 이들은 가족의 양육비 부담을 보조하기 위해 세금 공제를 활용하자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양질의 조기 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직접적인 보조금을 요구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직장-가족 균형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을 제안한다. 이런 정책들의 효용성을 둘러싼 논쟁이 몇 권의 책에 달하고 신문기사의 제목을 장식하며 저녁 뉴스에 풍부한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 논쟁의 참가자들은 어머니의 일이 아이의 후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들을 참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용이 아이의 후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에 왜 놀라지 않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정책 논쟁은 주로 어머니가 아이에게 책임이 있다는 가정(그리고 이 가정은 종종 현실이다)을 반영한다. 산업혁명 이전, 즉 가정생활과 경제생활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 아이는 부모와 더불어 노동하고 놀았다. 그러나 직장이 가정 밖의 공장, 가게, 사무실로 이동하면서 가사와 양육이 전적으로 ‘여성의 일’이 되어버린 새로운 성별분업이 발생했다. 바바라 버그만은 생물학으로 인해 여성이 가사담당자라는 하나의 직업에 고정되어 버리는 신분 체계가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부상하는 성별 이데올로기에 따라 여성은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기 위해 가정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직업적 성취와 경제적 독립의 권리를 주장함에 따라 이런 신분 체계는 붕괴하는 중이다. 이처럼 여성의 유급 고용이 크게 증대했지만 남성의 무급 가구노동 기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 아이들은 맞벌이 가족에서 산다. 1998년에 한살 미만의 아이를 둔 여성의 59%가 고용됐고, 한살 이상의 아이를 둔 어머니의 73%가 가정 밖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여성들은 왜 일하는가? 남성이 일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다. 즉 직장, 경력, 소득이 아버지에게 의미가 있듯이 어머니에게도 의미가 있다. 성별분업의 유산 중 하나는 작업장에서의 평등을 위한 여성의 요구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 즉 누가 양육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가구의 남성 가장이 가족임금을 벌어 전업 주부를 부양하는 오래된 합의, 즉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델이 모든 이에게 실제로 작동한 적도 없었다. 가난한 가족에서는 능력 있는 모든 이들이 일했다. 농촌 공동체에서 농사는 몹시 고되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 조부모, 형제, 자매가 모두 참여했다. 화폐임금에 의존하는 가족에서 여성과 아이는 산업 노동을 수행하거나 가내 하인으로 보내졌다.

어머니가 일할 때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페미니스트와 반(反)페미니스트는 모두 모성이 여성의 노동시장 소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한다. 양육이 소득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 중요해서 저널리스트 앤 크리텐든은 그것을 “엄마세”(mommy tax)라고 불렀다. 엄마세는 여성이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벌 수 없는 소득이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기회비용”이라고 부른다.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미셀 버디그와 파울라 잉글랜드는 모성으로 인한 임금 불이익이 5~7%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아이가 태어난 후, 여성은 대개 직업 경험을 잃고 이 때문에 다시 평생소득이 낮아진다. 더욱이 어머니는 모성친화적인 직업을 위해 고임금을 포기하거나 파트타임으로 일할 것이다.
양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지는 일하는 어머니는 적정한 비용의 양질의 양육을 활용할 수 없을 때 파트타임 일자리를 매력적인 선택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전일제 대신 파트타임 일자리를 선택함으로써 어머니의 평생소득은 더 낮아진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파트타임 고용이 언제나 시간당 급여가 낮고 전일제 고용에 따르는 수당이 거의 없으며 총 노동시간(주당, 월당, 혹은 연당)도 더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디그와 잉글랜드는 전일제와 파트타임 노동 사이의 차이와 고임금에 관련된 다른 객관적 수치(경험, 근속 등)를 통제한 후에도 여전히 어머니가 더 적게 번다는 점을 지적한다.

양육의 사회적 책임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양육에 대한 두 가지 접근이 있다. 많은 국가들이 양육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고 따라서 높은 수준의 직업 교육, 충분한 급여의 직업, 그리고 육아 휴직을 지원하는 실질적인 공공기금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특히 미국과 같이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국가들에서는 이런 사회적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다. 잘 양육된 아이의 혜택이 더 큰 사회에 돌아갈 때조차도 양육의 경제적 부담은 여전히 가족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양육에 관한 국가 정책은 육아휴직 정책에서 시작된다. 표 3-1은 7개 산업국의 육아휴직 정책을 보여준다.

표 3-1 OECD 7개국의 모성/육아 휴직 수당
(* 첨부자료 참조)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정책, 가족의료휴가법(Family Medical Leave Act)은 전혀 관대하지 않다. 이 법은 회사가 12주에 달하는 무급 육아휴직을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50인 이상의 사업장에만 적용되고 또 대부분의 여성들은 50인 미만의 사업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법과 현실의 격차가 크다. 또한 이 법은 육아휴직 중에 부모의 소득을 보전해주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적정한 비용의 양질의 양육 서비스의 공급은 매우 부족하다. 따라서 대다수의 가족은 믿을 만한 양육기관에 아이의 전일 보살핌과 교육을 맡길만한 여유가 없다. 많은 지역에서 확실히 검증된 양육기관의 연간 수업료는 종종 지방 주립대학의 연간 비용을 초과하지만 입학 대기자들이 줄을 이루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세 가지 선택지를 가질 뿐인데, 이것들은 모두 신임할 수 없는 환경에서의 양육을 의미한다. 유아가 있는 가족은 아이를 최소한의 안전과 보육교사의 요건만을 갖춘 양육기관에 아이를 맡긴다. 이런 기관조차도 매우 비싸다. 또 다른 선택지는 가내 양육시설을 이용하거나 보모를 고용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 비용이 많이 든다.
이런 양육기관들에는 허가를 위한 필수규정이 거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의 주나 지방만이 매년 안전점검을 요구하고 소방 안전에 대한 기준을 설정해놓고 있다. 양육기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타의 위험을 점검하는 주(州) 보건 감독관에 대한 요건은 없다. 가내 양육기관의 경우 연령에 따른 커리큘럼을 개설하고, 아이 당 보육교사의 비율을 높이며, 넓고 장비가 갖춰진 놀이공간을 마련하는 등의 쾌적한 설비의 제공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선택지인 보모의 고용은 교육과 훈련의 기준이 부재하기 때문에 아이의 건강과 후생을 위한 안전장치가 거의 없는 셈이다.
재정적 능력이 있는 여성은 노동시장으로의 재진입을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 미룰 수 있다. 다른 여성들에게, 특히 아이가 어리지만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의 경우에도 초등학교는 양육비용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육기관으로서 초등학교는 또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다. 당신이 작업장 정책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가장 자유로운 회사조차 노동시간을 학교 일정과 맞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확실히 부모들은 학교와 직장의 일정을 잘 조정하지 못함으로써 고용상의 책임을 다하는 데에 곤란을 겪을 수 있다. 아이를 어머니의 책임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견해로 인해 여성은 비용이 많이 들고 아이들에게 잠재적으로 위험한 방식들을 선택할 수가 없다. 평등이 여성과 남성이 직면하는 선택과 제약이 대체로 유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양육과 관련된 확실한 사회정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부모가 직장과 가족에서의 의무를 모두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사회 정책과 관련하여 서유럽 국가들의 상황은 미국과 기타 영어권 국가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영어권 국가에서 부모가 직장과 가족에서의 책임을 균형있게 수행하려고 할 때 그들은 정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국가들은 상황이 매우 다른데, 이들은 모든 시민이 잠재적으로 노동자이자 양육자라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들은 여성과 남성의 유급 노동자이자 무급 양육자로서의 역할을 지원하는 정책을 선도해왔다. 다시 말해 국가 정책이 작업장과 가정에서의 평등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이런 정책들에 대한 사회적 헌신은 우리가 점차 맞벌이 가구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만 더 이상 한 사람에게만 가사노동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정책들의 비용은 충분히 수용가능하다. 고용된 여성 1인의 가족 휴가를 위한 년간 지출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가족 휴가 관련 지출은 고용된 여성 1인 당 약 900달러였고,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는 600~700달러였다. 이 같은 지출은 이들 국가의 GDP의 0.7~1% 정도다. 이런 관대한 프로그램이 다른 산업 국가에서는 GDP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할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불행하게도 세계의 많은 곳에서 반대 방향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동유럽의 이행기 경제는 그런 사례를 보여준다. “자유 시장”을 촉진하기 위해 이 국가들은 사회 서비스를 심각하게 축소하고 있다. 보건, 양육, 교육이 모두 손상되고 있다. 결과는 좋지 않다. 일부 나라에서는 기대 수명이 줄었고, 초등교육 진학률이 감소했으며, 여성의 노동부담은 증대했다.
부유한 나라들이 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지 않으려 할 때 다른 문제들이 발생한다. 양육 제공자로 일하는 여성이 자기 가족의 경제적·감정적 안전을 해치는 고용 조건에 직면한다는 것은 그 예다. 양육 노동은 급여가 매우 적고 건강과 안전 조건이 감독되지 않으며 사회보장 급여를 거의 받지 못한다.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유색인종 여성(특히 남부의 아프리카계 여성)이 백인 가정에서 가내 노동자로 일했다. 2차 세계전쟁 이전에 아프리카계 여성의 절반 이상이 가내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사실 시민권 운동과 여성운동의 중요한 성과들 중 하나는 그 수를 급격히 줄인 것이다. 현재에는 개발도상국과 동유럽의 구(舊)공산주의 경제 출신의 이주자들이 주로 양육 노동을 수행하는데, 이들은 특권층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더 부유한 국가로 이주한다. 하지만 여성이 더 좋은 기회를 찾아 이주할 때 대다수가 자신의 아이를 두고 떠나야만 한다.
알리 혹쉴드는 이것을 “보모 사슬”, 즉 양육 노동에 기초한 일련의 지구적 연계망이라고 부른다. 부유한 나라의 전문직 여성은 외국인 보모를 고용함으로써 자신은 전일제로 일할 수 있다. 가난한 나라 또는 지역 출신의 보모는 한 명 이상의 아이를 가정에 두고 떠나오며, 그 곳에서는 나이가 많은 딸이나 여성 친척이 그들을 돌본다. 이런 지구적 보살핌 사슬에는 다양한 변종이 있다. 그 변종들의 공통된 특징은 양육 노동의 흐름이 항상 빈자에게서 부자로 향한다는 점이다. 이주 여성이 자신의 아이를 떠나는 상황은 1959년 아동의 권리에 대한 유엔선언의 허울뿐인 전망을 폭로한다. 선언에 따르면 모든 아이는 “행복, 사랑, 이해가 넘치는 가족 환경에서 자라야 하고” “자신의 의지에 반해 부모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이주 여성에 대한 착취는 구식민주의의 현재적 변종이며 이를 통해 부유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의 인적·자연적 자원을 착취한다.
로버트 에스피노자는 다양한 출처의 자료를 연구하면서 가사노동에 종사하기 위해 가난한 지역에서 부유한 지역으로 이주하는 여성들의 초민족적인 흐름을 네 가지로 규명했다.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중동 국가들은 백만 명 이상의 여성들을 인도, 스리랑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에서 수입했으며 이들은 현재 가정에서 가내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유사하게 많은 유럽 국가들이 스리랑카와 필리핀 출신의 가내 노동자에게 의존한다. 일례로 1987년에 이탈리아의 가내 노동자의 52.5%가 필리핀 출신이었다. 모로코,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나이지리아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 출신의 가난한 여성이 서유럽으로 향하는 흐름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증가하고 있다. 수십만의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필리핀 출신의 여성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돈을 보낼 수 있는 가내 일자리를 찾아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한다.
미국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본 학생이라면 이것을 인종 착취만큼이나 오래된 한 이야기의 변종으로 여길 것이다. 노예상이 서아프리카 사람들을 포획할 때 그들은 가족과 마을을 일부러 파괴하고 부모와 아이를 강제적으로 떼어놓았다.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이 몇 백 마일 떨어진 플랜테이션으로 빈번히 팔려갈 때 이런 상황은 미주(美洲)에서도 지속되었다. 노예해방 이후 남부의 엄격한 인종 분리정책은 아프리카계 여성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백인 여성의 아이를 돌보는 것과 관련된 일뿐인 경제적 조건을 창출했고 그녀들은 다시금 자신의 아이들을 희생시켰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미국에 왔던 아일랜드, 폴란드, 그리스, 중부 유럽 출신의 다른 이주 여성들 역시 부유층의 아이를 돌볼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였다.
부유층의 아이를 보살피는 가난한 여성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그것이 해결하는 만큼이나 많은 문제들을 낳고 있는 구식 해법이다. 첫째, 가장 명백한 문제는 가내 서비스에 종사하는 여성의 아이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런 일자리는 급여가 많지 않고, 따라서 빈곤을 영속화한다. 셋째, 이런 직종은 수당이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매우 적고, 가내 노동자는 작업장의 학대로부터 거의 보호받지 못한다. 넷째, 이런 가내노동을 조직하는 것은 시공간적으로 성별분업을 심화할 뿐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해결책이 보살핌 노동의 가치를 평가하고 보상하는 방식을 심원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아동, 노인 또는 환자를 비롯한 가족의 의존자들에 대한 보살핌이 여성의 고유한 일로서 사적인 가족의 문제라는 가설에 도전해야 한다. 오늘날 부유한 국가들은 보살핌 노동의 수출을 장려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저개발국을 계속 착취하고 있다. 이 사슬의 끝에 있는 여성들은 종종 자신의 아이를 희생하면서 다른 이들의 아이에게 감정적 지원, 애정, 보살핌을 제공해야 하는 부러워할 것도 없고 지속가능하지도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
가난한 여성이 다른 이의 아이에게 보살핌, 사랑, 애정을 제공할 때 모성애는 돈으로 교환된다. 1960년대 비틀즈는 돈이 당신에게 사랑을 사줄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반대다. 사랑의 노동, 즉 보살핌 노동은 많은 면에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상품이다. 본질적으로 문제는 그것의 상품화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상품화가 착취에 기초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보살핌 노동이 사적 시장에 놓일 때 그것의 가치와 보상은 낮다. 그 이유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전통적인 이원론이 모성애를 본성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 특질이 본성이라면 훈련이나 숙련이 필요 없고 따라서 높은 급여를 받을 가치도 없다. 우리는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보살핌 노동이 전문직으로 인정된다면 급여는 증대할 것이고 노동조건도 개선될 것이며 보살핌의 질도 향상될 것이다.
보살핌 노동이 비숙련의 여성의 일이라는 전통적인 가정은 성별분업에 관한 본질주의적인 견해를 재생산한다.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고, 은행을 경영하고, 우편을 배달하고, 심장수술을 하고, 법을 집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과 기술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닌 것처럼, 보살핌에 필요한 능력과 기술도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 삼십년간 유급노동에서 여성의 기회가 급변했지만 남성이 보살핌 노동과 맺는 관계는 겨우 변화의 초기단계에 있다. 충분한 평등을 위해서는 남성과 남성성에 대한 문화적 구성이 변해야 한다. 또한 유급 고용의 구조도 변화하여 보살핌에 대한 인간의 요구가 고용의 책임과 동등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직장-가족 분리를 연결하기

양육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지원이 부재한 상황과 더불어 여성이 일차적으로 아이를 책임진다는 가정은 여성의 경력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법학 교수 조안 윌리엄스의 연구에 따르면, 생산직 또는 전문/관리직 노동자를 위한 최고의 일자리는 “전일 또는 초과근무를 하고 출산과 양육에는 거의 또는 전혀 시간을 뺏기지 않는 노동자의 이상”을 중심으로 조직되기 때문에 “이상적 노동자”만이 풍부한 승진의 기회를 갖는다. 결국 승진은 저녁에 일하고, 갑작스레 출장을 가고, 주말에 출근하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문제는 아이들, 특히 12세 미만의 아이들에게는 어른의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그들이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고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시간 방치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합당하지도 않다. 만약 중요한 회의가 저녁 7시에 있고 양육기관이 저녁 6시에 끝난다면 일하는 부모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엄마의 진로”로 알려진, 덜 유망하고 경력을 덜 요구하는 길을 선택한다.
유전자 조작된 태아가 산업화된 인큐베이터에서 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 알도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끔찍한 전망에서조차 보육교사를 둔 탁아소가 등장한다. 양육의 엄청난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사회는 현재의 재생산 양태에 결부된 비용과 혜택을 따져봐야 한다. 문화, 교육, 시민 생활, 좋은 직업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도록 육성된 성인이라는 혜택은 우리 모두가 향유한다. 그러나 그 비용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법률, 과학, 기술, 회계, 의료, 정부 분야에서 고소득을 올리는 명망 높은 최상위층을 조사해보면 불온한 양태가 드러난다. 승진과 양육을 결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랜디 알벨다와 크리스 틸리 교수가 훌륭하게 지적했듯이, 아내를 위한 직업과 아내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직업이 있다. 그들의 요점은 승진에 대한 “정상적인” 기대는 회사 일정에 갑작스런 변화가 있을 때 24~27시간 활용할 수 있는 양육전담자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양육전담자가 없다면 의무적인 초과근무, 출장 또는 주말근무에 대한 고용주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부모의 책임과 직접적으로 마찰을 빚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MBA학위를 받았거나 CEO 지위의 최상층에 오른 여성의 49%만이 아이가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같은 지위의 남성의 84%가 아이가 있다. 이런 수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종이 여전히 “아내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직종”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베티 굿 와이프> 광고가 보여주듯이, 가정에만 있는 전통적인 배우자의 역할을 수용하는 전업남편이 있다면 확실히 많은 여성의 경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상자 3.1).

상자 3.1 <베티 굿 와이프> 광고(북 캘롤라이나 상점에 붙어있던 전단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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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이것이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40여 년 전에 베티 프리단은 “이름 없는 문제”는 여성을 가정에 유폐하고 유의미한 직장과 자기실현에 대한 여성의 요구를 무시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상황을 뒤집어 또 다른 아내의 신분제도를 만드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장과 가족 의무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일자리 공유, 가족·의료 휴가, 신축적인 노동일정과 같은 “가족 친화적인” 정책이 생산되었다. 이런 정책이 표방하는 목표는 소득을 버는 데 필수적인 고용주에 대한 책임과 가족의 성원들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일하는 가족들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스웨덴은 이런 움직임의 선두에 있었고 그 정책들은 종종 하나의 모델로 간주된다. 스웨덴은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양육, 유급 노동, 가사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을 실행했다. 아이의 출산 또는 입양 시에 부모는 둘 다 소득을 보전해주는 긴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아이가 어릴 때 부모는 자신의 1일 노동 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그들의 급여 또한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유급 의료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더욱이 모든 노동자들이 매우 적은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전문화된 조기 아동 교육과 보육의 체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이 모성과 승진을 결합하도록 하는 명백한 국가적인 노력을 스웨덴에서 발견한다.
그렇지만 스웨덴식 해법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엘렌 무타리와 데보라 피가트에 따르면, 육아휴직과 관련된 법의 젠더 중립적인 언어와 남성이 휴가를 이용하도록 장려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휴가를 사용한 사람 중 단지 6%만이 남성이었다. 이들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결국 직장과 가족의 의무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책임은 어머니에게 남겨진다. 따라서 대다수 스웨덴 여성은 첫째 아이를 출산한 후 파트타임 노동자가 된다. 이런 정책이 가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그것은 전통적인 성별분업을 강화한다. 이런 발견은 가족 친화적인 정책으로 인해 여성은 계속해서 양육과 가사의 일차적인 책임을 떠맡는 불이익을 당한다는 바바라 버그만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여성의 소득이 남성의 소득보다 매우 적은 상황에서 아이가 생긴다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는 게 이치에 맞다. 임금 형평성을 창출하는 강력한 정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성은 계속해서 무급의, 대체로 비가시적인 노동을 하는 암사자의 역할을 맡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임금이 남성의 임금과 거의 동등할 때 이런 이점은 사라지고 양육을 좀 더 평등하게 분담된 사업으로 만드는 방법에 관해 논의할 수 있는 상당한 공간이 생길 것이다. 이런 점을 인식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은 보편적인 양육자 등가1)를 촉진하는 정책과 임금 형평성을 촉진하는 정책의 신중한 결합을 지지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오래 전부터 임금 형평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옹호해왔다. 여성과 남성의 소득 불균형의 감축은 여성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근본적인 원인을 감축하기 때문에 이런 프로그램은 보살핌 노동과 관련하여 적절한 것이다. 또한 양육자 등가 정책은 고용주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가족을 돌보는 데 똑같은 책임감을 갖는 동등한 파트너로 취급하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거대한 태도의 변화, 즉 시민권과 보편적 참정권과 관련된 변화만큼이나 거대한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최대한의 평등은 가능하다.

결론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사람―아버지와 어머니, 빈자와 부자―들이 양육, 노인부양, 환자 보살핌 그리고 자기 보살핌에 필요한 시간과 경제적 자원을 가질 때, 사회의 최고의 이익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런 쟁점을 다루는 효과적인 정책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보살핌 노동의 중요성과 지속적으로 보살핌 노동을 여성의 일로 가정하는 명백한 불공정성 그리고 보살핌 노동의 급여와 존중을 향상시킬 필요성에 대한 공개 토론이 필요하다. 보살핌이 시간소비적이고 노동집약적이라는 사실을 우회할 방법은 없다. 어떤 기술적 변화도 이것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시민들이 건강한 가족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 정책이 필요하다. 현재의 상황에서 세계 대부분의 여성은 남성 또는 더 큰 사회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사실상 이 모든 노동을 하고 있다. 여성의 낮은 소득, 양육자로서 가난한 여성의 착취, 가족에 대한 정신적 부담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그 비용은 여전히 사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 혜택은 사회적이다.

1)[역주] 지난 호 <책속의 책>에서 언급된 보편적 양육자 모델을 말한다. 이는 가정 안과 밖에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분업하는 모델로, 이 하에서는 가사 노동, 아동과 피부양자의 양육, 유급노동이 성인 가구성원 사이에서 평등하게 분담된다. 자세한 것은 드루실라·바커, 「가족문제: 성별분업의 재생산」, 『사회운동』, 2006, 1/2월호를 참조하라.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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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여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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