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4.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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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바리안 혁명과 대안세계화운동

류주형 | 조직교육부장
서론

지난 1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개최된 다중심 세계사회포럼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세계화에 대항하여 분출 중인 사회운동과 최근 잇따라 등장하고 있는 ‘좌파’ 정권의 관계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특히 이 논란의 중심에는 본 포럼을 직접 지원하며 미 제국주의에 맞서 역내 좌파정부와 사회운동이 단결할 것을 호소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위치했다.
지난 해 11월 아르헨티나 마르 델 플라타에서 열린 미주정상회의에 즈음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운동들은 ‘미주지역자유무역협정(FTAA)’ 체결 논의를 효과적으로 중단시켰는데, 당시 차베스 대통령은 정상회의장 안팎에서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ALBA)’을 주장한 바 있다. 포럼의 마지막 날 행사로 열린 세계사회운동총회에서 사회운동들은 최근 들어 각 국에서 좌파 정권이 줄을 이어 등장하고 있는 현상이 남미 대륙에서 폭발하고 있는 자유무역, 군사주의, 사유화 정책에 반대하고, 자연자원과 식량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사회운동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세계사회운동총회가 ‘좌파 정권에 대한 정치적 자율성’과 ‘각국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도록 압박’하는 것을 (재)천명하며 논쟁은 일단락되었지만, 당초 세계사회포럼 원리헌장의 ‘정당 및 무장조직 배제 원칙’ 논란이 전진적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다.1)
오히려 이러한 쟁점 이동은, 세계사회포럼의 원리헌장이 과거 라틴 아메리카의 좌익적 정당과 대중운동이 인민주의로 변질된 역사적 조건을 고려한 결과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하지만 역으로 ‘운동의 운동’ 또는 ‘공간’으로서 규정된 세계사회포럼이 이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실현해 나갈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 결과 세계사회포럼에 관한 복합적인 논란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는 세계사회포럼 자체의 전망을 둘러싼 논쟁을 넘어 이행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쇄신하기 위한 이론적·정치적 차원 전반의 기획을 요청하기 때문이다.2)

이에 오늘날 차베스-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이행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쇄신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향후 대안세계화 운동의 전망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이 글은 우선 라틴 아메리카와 베네수엘라의 정치적·경제적 조건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도한다. 다음으로, 일종의 지역적·민족적 특수성으로서 제국주의의 지배와 인민주의적 전통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사회운동의 출현과 대응, 변모를 살펴본다. 이 속에서 차베스 정권의 성격 및 ‘볼리바리안 혁명’의 특징을 분석하면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진전을 위한 몇 가지 쟁점을 추출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의 정치학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유주의 정치이념이 안정적인 토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지배세력은 의회정치 대신 과두제적·권위주의적 지배체제에 의존했다. 동시에 사회주의나 급진주의를 표방했던 좌익적 사회운동은 폭압적으로 억압됐다. 그 결과 사회개혁과 하층계급의 사회적·정치적 통합은 권위주의적·위계적 분할과 포섭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빈번하게 출현하는 인민주의는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불안정을 표현한다. 사회경제적 불균등성과 극단적인 불평등은 인민주의의 조건이 되며 정치제도의 취약성은 ‘반정치의 정치’에 기여한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 사회운동의 출현과 변모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자본주의의 변동에 대한 지역의 대응양상, 계급구조의 변화와 지배체제의 변동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적 전통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도시화와 제한적인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대의 뿌리 깊은 유산을 극복하지 못했다. 정치적 독립 이후에도 전통적인 토지귀족의 지배력은 지속되었고 독자적 군대를 보유하고 대사제이자 행정관의 역할을 하는 토지귀족이 지방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국적 차원에서는 대중적 참여를 제한하는 토지귀족의 ‘과두제적’ 의회제가 확립되었고, 국가는 지역 영주들의 연맹체로서 권위적·전제적 성격을 유지했다. 그런데 토지귀족의 자유주의는 민족적 통합이나 민주주의와는 대비되며, 이들은 영지를 중심으로 강력한 연고주의적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며 라틴 아메리카의 종속 유형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쟁-세계시장의 붕괴-1차 상품 수출의 위기에 따라 브라질·멕시코·아르헨티나 등에서 경공업 중심의 초보적 수입대체 산업화가 시작됐다. 이와 함께 토지귀족의 지배력과 과두제적 픽망ㅔ〉?약화되었다. 또 국내시장, 국가, 도시의 팽창으로 연고주의라는 전통적인 정치적 통제방식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토지귀족은 새로운 부유층을 상류사회의 하층으로 포섭하는 한편, 기존의 정치제도와 정당은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도시의 중산층, 노동자, 빈민을 배제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적 인민주의는 대공황에서 2차 세계대전 동안 급속히 성장하여,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1940-50년대에 확립된 인민주의 정권은 미국의 ‘발전주의’가 본격적으로 이식되기까지 지속되었다. 1950년대 미국의 전략은 ‘자유 세계주의’라는 냉전의 틀 내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공산주의 세력을 봉쇄하는데 집중했다. 반면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지역 차원의 냉전 질서가 가시화되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는 상대화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관료들은 미국에게 발전원조를 호소했지만 마셜플랜은 구상되지 않았고, 발전의 쇼케이스로 수출지향적 산업화가 지원된 아시아와 달리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주로 미국계 법인자본의 직접투자를 위한 우호적 조건 형성이 강조되었다.
이 시기에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는 국내외적인 정치·경제적 권력의 공백과 교착 상황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띤다. 인민주의는 기존의 발전전략과 통치구조에 대한 반대를 중산층, 노동자, 도시빈민들의 요구와 결합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이들은 새롭게 형성된 국내 산업자본가들과 노동자계급의 제휴를 형성하고 토지귀족과 타협함으로써 국내산업을 중심으로 한 민족적 발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립하는 세력들 사이의 특수한 제휴형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대중적 동원이 추가되어야 했다. 즉 인민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세력 및 그와 결탁한 토지귀족 세력, 자유무역과 과두제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성장했다. 이들은 제국주의로 변질된 19세기 자유주의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영향을 받아 열정적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 감정을 동원하면서 민족적 갱생을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인민은 노동자·농민·빈민과 같은 계급적 범주를 초월한 유기체적 통일성으로 이상화된 주체였다. 그 결과 인민은 기존의 연고주의에서 배제된 도시 노동자, 프티 부르주아, 농촌 출신 이주자, 학생, 지식인, 사병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인민주의적 동원 과정에서 사회적 관계는 인격화되고 정치는 인민의 지도자와 적 사이의 투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인민주의는 결코 근본적인 변혁을 지향하지 않았다. 혁명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소유권과 생산관계의 변혁을 추구하지 않으며 토지귀족과 타협했다. 동시에 그들은 대중적 선거 과정에서 다양하고 이질적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독창적인 정치적·문화적 동원방식을 발전시켰다. 한편 인민주의는 자율적인 노동자운동을 억압하고 노동조합을 확대된 국가기구로 통합했다. 노조는 국가의 권위 하에서 자본가조직과의 기능적 조정을 통해 계급적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 위계적 질서 내에서 노동자 개인에게 고정된 지위를 제공하는 코포러티즘 기구로 전락했다. 노동자는 인민주의 정권에 대한 충성을 대가로 국가에 의해 승인된 틀 내에서 임금교섭과 복지혜택, 인정적인 사회적 지위와 선거권을 획득했다.

미국 헤게모니의 형성과 군부독재의 폭정
1950년대부터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해외직접투자가 거대하게 이뤄졌고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법인자본과 초민족화된 국내 부르주아지는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이에 기초한 자본축적은 더 이상 인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울러 1960년대 초 라틴 아메리카 내외의 정치상황도 인민주의의 토대를 해체하는 요소였다. 1955년 반둥회의로 상징되는 비동맹운동의 확산과 1959년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적·민중적 발전의 요구가 증가되고 있었다. 인민주의의 틀을 벗어나려는 노동자와 농민의 저항도 증가하고 일부에서는 게릴라 무장 투쟁도 출현했다.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중반에 이르는 “동시적인 혁명의 고조”는 1940-50년대 인민주의와 비교할 때 새로운 중요한 특징을 반영한다. 첫째, 혁명적 고조는 이전 시기의 민족적 인민주의를 넘어 강력한 급진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포함했다. 둘째, 이들은 게릴라, 대중봉기, 총파업 등 의회 외부적 투쟁과 연계했다. 셋째, 이들은 이전의 프티 부르주아 선거주의자들과의 연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넷째, 새로운 혁명적 운동이 중앙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연안 국가의 강탈적·권위적·자유주의적인 수출지향적 체제와 남아메리카의 인민주의적인 수입대체적 체제에 대해 동시에 도전했다. 다섯째, 혁명주의적 물결의 기원은 각국의 특수성에 기반했지만, 미국의 반봉기 전술에 대한 투쟁과 함께 특히 쿠바혁명에 의해 창안된 수렴점을 공통적인 혁명적 ‘참고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3)
이에 미국은 1961년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고, 사회주의 및 비동맹운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전술적으로 워싱턴은 다중적 정책을 적용했다. 가령 ‘진보를 위한 동맹’을 통한 개량의 쟁취,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반봉기, 군사쿠데타 등 고도의 군사 전략, 해외 군대 파견과 군사적 원조, 프로그램의 이식 등이 그것이다. 혁명을 제국주의적으로 봉쇄하려는 이러한 노력에서 국내 프티 부르주아 선거 지도자들이 주된 역할을 수행되었다. 그러나 다중적 전술의 시기는 결국 군사적 선택이 우위를 점하며 막을 내리게 된다. 미국의 전술 변경은 혁명적 물결을 봉쇄하는 데 있어 민간 선거 체제와 개량에 대한 워싱턴의 의심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워싱턴은 일련의 군사 쿠데타를 후원하는 쪽으로 방향 선회하며 혁명세력의 부상을 제거하고 민족주의적-인민주의적 개량을 역전시켰다. 아울러 ‘혁명적·국제주의적’ 쿠바를 고립시키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 군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강화되었고 역내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동반하는 반공과 냉전의 논리가 확산되었다. 결국 좌파를 고무할 수 있는 인민주의 정부를 제거하기 위해 군부가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군부-반혁명-권위주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물론 아메리카에서 군부의 정치개입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다만 이 시기의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후 토지귀족과 보수주의 정당에 권력을 이양한 1930년대와 달리, 수출주도 산업화라는 사회·경제적 전망 속에서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해 장기 집권한다는 차별점이 있다. 또 미국은 군사정부를 관료적 능력과 기술적 역량을 갖춘 현대화의 주도세력으로 간주했다. 이 시기 군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인민주의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군부는 민족경제를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개방하고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진출을 장려했다. 또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추진하고 노동자에 대한 수혜를 철회했다. 임금하락, 장시간노동, 노조탄압, 비공식부문 노동자·빈민에 대한 탄압은 자연스러운 산물이었다.
미국은 군사 독재 시기 동안 신자유주의적 경제를 위한 법적·이데올로기적·제도적 기초를 창조했다. 미국의 지배를 위한 정치·경제적 파라미터는 군사 정권이 새로운 대중적 사회-정치적 운동이 부상하는 1980년대 초 쇠퇴할 때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미국 및 유럽의 제국주의는 단순히 군사적 지배만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인민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사회주의 정당, 즉 ‘시장 해법’을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정치적으로 추방했다. 제국주의 세력은 대중들이 군사 정권을 위기로 몰아붙일 때 이들이 정치에 복귀할 경우를 대비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치하는 한편 이들을 대체할 미래의 선거 정당을 후원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선거주의적인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의 복귀가 제국주의적-군사 국가가 기초한 신자유주의적 파라미터 내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前인민주의, 前사회주의, 前민족주의 선거 엘리트들은 반독재 운동을 해체하고 오히려 선거 정치의 물꼬를 텄다. 군부가 신자유주의의 기초를 닦았다면 민간 선거주의자들은 모든 전략 부문에 대한 집단적인 사유화, 총체적인 탈규제, 영속적인 부채 지불, 부의 유출과 역진 등을 구조화했다.

외채위기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
한편 1980년대에 이르러 수출주도 산업화의 한계들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와 달리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제한적이었으며 오히려 역내에서 활동하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또 역내 국가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외채에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 높은 경제적 비용을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유가상승과 고금리·고달러로 인해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외채위기가 발생하고 생산마비, 자본도피, 대중적 소요가 발생했다. 1982-83년 외채위기 이후 라틴 아메리카는 만성적 경제위기에 진입했다. 미국은 1985년 ‘베이커 플랜’을 통해 재정긴축을 전제로 외채의 상환시기를 재조정할 것을 제안하고 수출을 통한 외환확보와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무역자유화를 권고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이 대중적 불만과 사회적 소요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우려 속에 경제개혁의 정치적 조건을 둘러싼 논쟁이 개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기구의 변화와 민주화 운동세력의 분할, ‘책임있는’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지원 등이 모색되었다. 즉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위해 군부의 퇴진과 자유주의 또는 중도좌파의 집권이 권고된 것이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에 대한 관리적 관념의 출현을 의미한다. 군사정부에서 이뤄진 경제적 자유화는 정치적 자유화를 필요로 하고 정치적 자유화는 민주화와 동일시되거나 경제적 위기를 관리할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민주주의는 선거와 같은 절차와 규칙으로 환원되거나 탈정치화되고 순수한 기술적 문제로 파악된다. 동시에 민주적 민간정부의 책임성이 강조되고 문민화의 구체적 경로로서 군부와 책임있는 야당의 협상이 권장되기에 이른다. 아르헨티나(1983년), 칠레(1990년) 등 군사정부의 퇴진 또는 문민정부로의 ‘협상된 이행’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4)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대다수 국가들은 외채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협상된 이행’에도 성공하지 못한다. 무능력하고 부패한 보수정당, 분명한 정치적 전망이 결여된 중도좌파 등 군부의 퇴진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대의제로 동원할 수 있는 정당의 역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셈이다. 문민화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통치구조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거의 의미는 자연스레 축소되었다. 기술관료들은 국제금융기구의 정책지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경제엘리트와 정치엘리트의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편 경제위기는 사회적 불평등과 노동자들의 이질성을 심화하면서 노동자운동의 자율성을 침식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가치절하가 이뤄지고, 정치는 부패한 직업정치가와 귀족집단의 이기적인 게임으로 간주되었다. 정치엘리트와 노조 등 기존제도의 수혜자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 누적되고 ‘원한의 정치’가 득세하게 된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외채위기를 거쳐 금융세계화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군부와 전통적 인민주의 세력은 무능을 노정한다. 기존의 정당들은 신자유주의를 추진함으로써 내적 위기를 경험하고 대중적 토대를 상실했다. 또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들도 독자적인 이념을 상실하고 내적 분할을 경험했다. 결국 기존의 어떤 정치세력도 분명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를 등에 업고 새로운 인민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하기에 이른다(아르헨티나의 메넴, 브라질의 콜로, 페루의 후지모리, 멕시코의 살리나스, 베네수엘라의 페레즈). 새로운 인민주의자들은 ‘반정치의 정치’를 통해 경제적 위기와 계급적 갈등을 기존의 정치와 정치 엘리트, 정당과 의회제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했다. 그러나 이들은 극단적 위기를 진정시키고 민족을 재건하기 위한 필요악으로 여전히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수용한다. ‘충격요법’의 과감성은 전통적 인민주의에 대한 국제금융기구와 자본가의 불신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긴축정책, 부채-주식 전환, 국유기업 사유화, 남미공동시장, 북미자유무역협정 등). 이는 곧 광범위한 실업·빈곤을 야기하고 실질임금 하락, 소득불평등을 확대하며 경제적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경제적 조건

석유경제의 형성과 농업의 위기, 도시화
19세기 초 식민 치하 베네수엘라는 광물 자원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코코아, 커피, 설탕, 면화, 담배 등) 여전히 농업이 주된 경제 활동이었고 최소한 70%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했다. 하지만 19세기 내내 토지는 독립전쟁(1821-39년)에 참가했던 강자의 수중에서 분할, 점유되었다. 이러한 불공평한 토지 분배에 맞서 독립 후 내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에세키엘 사모라), 불공평한 토지 분배 구조를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그 후 구스만 블랑코와 같은 군부 지도자들은 충직한 부하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는데, 이 점에서 가장 악명 높은 후안 빈센트 고메스와 같은 독재자는 막대한 토지를 개인 소유로 전유했다.
고메스 독재 치하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농업경제에서 천연 자원 개발(특히 석유) 기반 경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국적으로 농업을 황폐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고메스 독재가 1935년 막을 내리자, 농업은 전체 노동력의 60%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GDP의 단 22%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최대 석유수출국이 되었다. 석유 생산이 점점 다른 산업 부문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경제학자들이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 북해 천연가스/원유 발견이 네덜란드 경제에 끼친 효과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야기되었다. ▲석유 수출로 인한 해외 통화 유입 ▲구매력 증가로 인한 인플레이션 발생 ▲국산품에 비해 수입 공산품·농산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결과 수입량이 증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품으로 인해 농업 생산 파괴 산업 발전 저해라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5)
1960년에 이르자 농촌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은 단 35%로 급감했다(1990년에는 12%). 이로써 베네수엘라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도시화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네덜란드 병”의 또 다른 결과는 베네수엘라가 역내에서 유일한 농산물 수입 국가이자 GDP에서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최소인 국가로 전락한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급격한 농업의 쇠락은 도시화가 굉장히 급속히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도시는 수용 가능한 인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 결과 도시 변두리에 거대한 슬럼/바리오가 형성되었고, 농촌 쇠락에 조응하는 슬럼/바리오 규모의 확대는 1960-70년대 석유 수익이 어마어마하게 증대한 결과였다. 1980-90년대 20여 년 동안 석유 수익이 꾸준히 하락하자 국가는 재분배 조치를 통해 빈곤의 충격을 완화할 수 없었고 대신 사회적 소비를 삭감하는 극약처방을 내세웠다.
한편 전반적인 농업의 쇠락 이외에도, 베네수엘라 농민들은 극심한 토지 소유 불평등에 처했다.6) 국가가 보증하는 토지개혁은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독재가 막을 내리고 1958년 자유 민주주의가 도입된 직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토지개혁법(1960년)에 따라 전국농업연구소가 설립되고 20만 이상의 가구에 국유지가 분배되었는데, 차기 정부는 연구소와 토지개혁 강령을 다시 무시했다. 1970년대 석유 호황기에 “네덜란드 병”이 심화되면서 농산물은 이윤이 남지 않았고, 도시화는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토지개혁 수혜자의 1/3이 탈락했고, 수혜자의 90% 가량이 온전한 토지 소유권을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따라서 토지개혁은 필연적으로 토지 소유권의 개혁을 필요로 했다. 즉 토지소유자의 수중이 아닌 국가에서 소농으로 소유권의 이전이 요구된 것이다.
1997년 농업 인구조사에 따르면, 토지분배는 1960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평등한 상황에 머물렀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소유자를 위한 시장이 확대되고(종종 투기 목적으로 토지 매매) ▲대토지소유자들이 농업노동자/소작농을 내쫓는 경향이 증가하고(신기술의 도입 또는 농산물이 더 이상 경쟁력이 없자 생산을 포기한 결과로, 이는 결국 도시화에 기여), ▲토지소유자들이 점점 개인보다는 기업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계속 진행되었다. 단적으로 현재 베네수엘라의 인구 중 9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는 1970년 ‘오일 붐’의 결과로서, 그 이후에도 정부는 석유산업에 전적으로 집중했으며 이촌향도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석유로 인한 소득은 대부분 도시의 기반시설을 구축하는데 투자되었고, 중산층, 백인에게 돌아갔다. 이는 농업 기반을 축소시키고 경제에 대 혼란을 가져왔다(OPEC의 공동 창설자 후안 파블로 알폰소는 “석유는 악마의 배설물이다”라고 표현했다).

푼토피지협약 체계와 경제 위기
푼토피지협약(1958년)으로 건설된 양당 협조 체제에 대한 반대가 볼리바리안 프로젝트의 시초를 구성한다. 대부분 군사 독재 하에 있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건전하고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는 제국주의적 시각과 달리 차베스는 이 체제를 사회적으로 배타적이고 부패한 체제로 규정했다. 가령 사회민주적 경향 하에서 기조직된 도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행동당(AD)과 베네수엘라 노총(CTV)의 사례가 그것이었다.8)
푼토피지협약 이후 베네수엘라 지배계급은 중동과 유사한 실책을 저질렀고, 전국민을 석유로 혜택을 받는 자와 고통 받는 자로 양분했다. 국제 유가의 하락과 국제이자율의 상승은 석유 수출 의존적이고 해외 금융 도입 의존적인 국가 경제에 침체를 가져왔다. 특히 1980년대 초 라틴 아메리카 전반의 외채위기로 인한 긴축이 장기화된 결과 많은 국가들에서 자산의 평가절하가 일어났다. 긴축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안겨 주는 반면, 유동 자본의 소유자들에게는 그 지역의 자산을 최저 가격에 구매하여 축적과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다. 긴축기간 동안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부터 미국으로의 대규모 자본도피는 그 지역에서 생성된 자본 분파를 고위험의 국내 투자로부터 보호하는데 복무했다. 또한 도피한 자본가들이 자신의 자본을 본국으로 재송환하기를 원하는 경우에 외채문제는 자산 비용의 하락을 통해 자본가들의 미래의 기회를 확장하기도 했다.9)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페레즈(1988년 당선)는 IMF를 신봉했다(사유화, 공공지출 삭감, 자유화, 탈규제). 경제는 8.6% 수축했고, 빈곤도 급증했다. 신자유주의적 조치는 인플레이션처럼 지배계급 스스로 해결을 공언했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인구 다수를 황폐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자유주의적 조치들이 빈곤을 심화하고 거대한 빈농들의 도시 이주를 촉진하고 실질임금을 하락시키고 비공식부문 노동자를 팽창시킨 원인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바로 빈민 봉기인 ‘카라카소’였다.
페레즈 집권 3년간 60만의 노동자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업 노동자, 빈농, 중농의 상당수가 감소했다. 비공식부문 노동자 비율은 1980년 34.5%에서 1999년 53%로 급증한 반면 산업 노동자 비율은 감소했다. 1989년 이후 통신, 항만, 석유, 철강, 항공 등이 사유화되면서 외국자본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고용이 감소했다. 경제적 불평등과 실업이 창궐하고 실질임금이 급락하고 사회적 분할선이 심화되었다. 경제적 위기는 정치적 위기를 동반했고, 부패와 무능은 정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또 연이은 은행 위기로 대량의 자본도피에 직면해야 했다. 통화 가치 저평가는 70.8%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야기했고, 물가 및 환율 통제가 또 다시 부과됐다. 1995년 협상을 통해 또 다시 14억 달러의 IMF 차관이 도입됐지만 이는 더 많은 구조조정, 사유화, 외국인 투자와 함께 유가 하락과 빈곤을 강요하는 것이었다.10)
이것이 바로 1999년 차베스가 승계한 정치적·경제적 상황이었다. 차베스는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전통적인 정치체제에 회의적인 대중들의(56%) 지지를 얻어 1998년 12월 당선되었다. 차베스는 1992년 봉기 실패 및 수감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들에게 제도적 변화를 확신시켰고, 베네수엘라의 난국을 종식시키기 위해 사회·경제적 변화를 강조했다(차베스는 봉기 실패 이후 군사 쿠데타 대신 제도적 변화 노선을 채택했다). 차베스는 칠레 아옌데 이후 평화적 방식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심도 깊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수행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되기도 한다. 차베스는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고(군대에 대한 영향력 유지), 제도 영역에서 게임의 법칙을 변화시킨다는 기본 전제 하에 변화를 모색한 것이 차이점일 것이다.11)

차베스의 집권과 반혁명, 그리고 개혁

개혁을 위한 제도적 조건의 창출
반대세력은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기존 과두제가 여전히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국영석유회사의 경영, 입법·사법 권력 및 지방 정부에서 높은 수준의 동맹을 유지했고, 미디어에 대한 독점적 통제와 경제인 연합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베네수엘라노총(CTV)의 지지, 고위 장교, 카톨릭과의 연계도 굳건했으며 무엇보다도 미국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 중간계급과 군부는 차베스 정권에 미온적이거나 비판적이었다. 또 베네수엘라에는 강력한 좌파 정당이 부재했다. ‘제5공화국운동(MVR)’은 현재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당이지만, 그 속에는 기회주의적 요소가 상당한 정도로 포함되었다.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은 대체로 취약했으며 전통적인 지배 정당들에 의해 조종되는 등 자율성이 심각히 훼손된 상태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차베스는 그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 구조로서 군부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기회를 거의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정부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제도적 게임의 법칙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제헌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국민투표에 이어 ‘볼리바리안 헌법’이 제정되었다(1999년). 신헌법은 반신자유주의, 참여 민주주의, 협동조합 및 노동자 자주 관리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과 인간주의와 연대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12) 다음 단계는 정부 내 세력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주지사, 시장, 국회의원 등을 선출하는 거대 총선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고, 이로써 차베스가 국가기구를 장악한 반면 반대세력은 분할되어 국회에서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 결과 2001년 12월 토지법, 어업법, 탄화수소법, 소액대출신용법, 협동조합법 등 49개 개혁법안이 제정되었다. 또 반대세력의 역공에 대처하기 위해 차베스는 ‘볼리바리안 써클’을 제창, 차베스 지지자들 스스로 10명 내외로 그룹을 지어 헌법에 대해 주변을 교육하고 구체적인 발안을 취하게 했다.13) 아울러 차베스는 핵심산업인 석유부문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강화했다. 차베스는 석유 국영회사인 PdVSA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해외자산 매각, 생산량 축소를 통해 국제 유가 상승을 유도하고, 각종 세제 개편을 통해 국고에 대한 PdVSA의 재정 기여도를 제고시키고자 했다.14) 석유산업에 대한 통제 강화는 재정 증대로 귀결됐고, 이는 다시 빈곤 해결을 위한 재분배 정책으로 이어졌다. ‘볼리바르 2000 프로젝트’라는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볼리바리안 스쿨’이라는 교육 정책은 차베스 집권 초기 개혁의 대표적 사례다(<표1>참고).

반대세력의 역공과 지지 세력의 확대
그러나 49개 개혁법안이 제정되는 날에 맞춰 반대세력은 거대한 시위를 조직하고 총파업을 시도했다. 이때 루이스 미킬레나 등 ‘기회주의’ 세력은 차베스의 개혁법안에 반대하며 이탈했는데, 그 결과 여권은 의회 과반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불리한 정치 역관계 속에서 2002년 4월 군사 쿠데타의 발발은 베네수엘라 정치사에 일대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이는 점증하던 반대세력의 정치 투쟁의 효과로서 정부와 반대세력 사이에 총격전으로까지 비화하게 된다. 군부 지도자들이 차베스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차베스를 일시적으로 축출한 뒤 베네수엘라 상공회의소 의장인 카르모나를 임시 대통령으로 옹립한다(2002.4.11). 이들은 워싱턴의 암묵적 동의 하에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들의 쿠데타는 빈민층을 중심으로 한 차베스 지지자들의 대규모 시위에 의해 이틀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2002.4.13).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의 이웃 국가들도 이번 쿠데타를 헌정파괴행위라며 신임 정부를 불신임했다.
2002년 4월 반차베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군부 내 차베스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지고 반대세력을 숙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울러 쿠데타를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과 차베스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이자 반대세력을 분할하고 개혁에 미온적/비판적이었던 중간계급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볼리바리안 써클’은 전국적으로 배가되었고, 다양한 형태로 포진할 수 있었다. 또 농·어민 운동 조직이 결성되고, 반대세력의 미디어 보이콧에 맞선 시청자운동, 도시토지위원회, 의사, 교사, 변호사 등 특수 중간계급 단체 등 새로운 조직이 출현했다. 무엇보다도 CTV에 비판적이었던 노조 지도자들이 혁명 과정을 지지하기 위해 독립 노조 세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차베스를 지지하지만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다양한 좌파 정당들은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공동 전선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해외 좌파 세력 및 진보세력에게 잘 이해되지 않거나 높게 평가되지 않았던 베네수엘라 이행 과정이 세계적으로 동조 세력을 얻어갔다.
한편 반혁명 쿠데타의 실패와 헌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언제 발발할지 모를 쿠데타에 대비해서 차베스는 지지세력, 특히 군부를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나아가 경제인 단체에 더 친화적인 사람을 경제 부문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반대세력에게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아울러 자격부여법(Qualifying Law) 일부를 수정하고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반대세력들은 이러한 차베스의 행동을 정부가 취약하다는 신호로 간주하고 2002년 말 - 2003년 초 관리자 총파업/사보타지 등 역공세를 다시 취했다. 그러나 차베스의 강력한 지도력과 석유 부문 노동자 등 노동자들의 반대로 반대세력은 두 번째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차베스 정부는 1만8천에 이르는 관리자와 상층 노동자를 파면할 법적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석유수출이 마비되는 등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는 근 8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국회경제자문처에 따르면, GDP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석유 부문이 총 37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비석유부문이 12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 경제는 2003년 10% 가량 수축했다. 재정부 장관 토비아스 노브레가는 2003년 경제가 회복하기 시작하면서 4/4분기 GDP 성장률이 대략 0% 즈음이고 2003년 인플레이션율은 25% 정도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완연한 회복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차베스 정권에 대한 맹렬한 반대 상황에서 경제가 안정화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16)

국민소환투표 승리와 집권 기반의 안정화
쿠데타와 총파업/사보타지 결과 베네수엘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후 국민소환투표가 시행된 2004년 8월까지, 1년 반 사이에 사회경제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환경은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경제는 10% 이상 성장하고 있었고 국제 유가는 기록적으로 상승했고 이로 얻어진 소득은 사회복지 지출로 환류되었다. 그 사회적 효과는 대단히 두드러졌고 친차베스 조직은 전국적으로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한편 미주국가기구(OAS) 및 ‘미국의 우방국’은 국내 반대세력과 합세하여 차베스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가했고, 그 결과 차베스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소환투표를 수용하게 된다.
이에 친차베스 세력은 쿠데타와 총파업/사보타지 당시 자생적으로 분출된 차베스 지지 시위 과정에서 도시빈민 등 풀뿌리 민중 운동을 조직했다. 특히 2003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시오네스(Misiones, 미션) 프로그램은 빈민에 대한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을 시도하며 지지율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100만에 달하는 콜럼비아 출신 이주자들을 귀화시킴으로써 차베스의 지지층 더욱 확대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끝에 차베스는 국민소환투표(2004.8.15)에서 60%에 달하는 찬성률로 자격을 재확보한다.

<표1> 차베스의 사회 복지 프로그램15)



차베스의 국민소환투표 승리는 반대세력에게 3번째 패배이자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 대한 지지를 의미했다. 차베스 정부는 국내적·국제적으로 더욱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고, 이제 그 누구도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의 정당성과 차베스를 지지하는 거대한 대중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대세력에 대한 신뢰는 더욱 추락했고 이들의 분할은 가속화됐다. 이어 2005년 말 총선에서도 차베스 정부 여당이 승리하면서 지지기반은 더욱 공고화되었다(MVR이 의석의 68% 차지). 빈민의 절대다수(90% 이상)가 차베스를 지지했으며, 이는 라티푼디오와 파산 공장의 몰수, 대규모사회간접투자 등을 가속화하는 조처로 나아갈 동력을 의미했다. 또 차베스의 세 번째 집권을 가능케 할 개헌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차베스의 개혁을 제약하는 구조적·객관적인 요인

미국의 대 베네수엘라 저강도 분쟁
현재까지 차베스 정권과의 대결 과정에서 미국은 점진주의적·내재적 정치 전략을 거부하고 최단기간에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베네수엘라 내외부의 전략적 연대 대상을 상실하고 말았다.17) 무엇보다 국내 반정부 야당이나 NGO의 세력이 약화된 것이 미국의 고민이다. 현재 미국과 반대세력이 차베스 정권에 대한 즉각적인 전복 시도에 나서기는 힘들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우선 차베스 정권을 지지하는 활동가가 많으며 대중적 기초도 튼튼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익들이 대중을 동원하고 대중운동을 기획할 이슈가 거의 부재하다. 이는 차베스 정권의 복지 프로그램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경제가 성장 중이며 삶의 질도 높아지고 있고 부패가 억제되고 언론, 출판, 집회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수적인 기업 협회도 정부와의 계약으로 점점 번영하고 있으며 여당과의 접촉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NGO나 정당들과 달리 위험한 도박에 매달리지 않는다. 현재 반정부 친미 선전을 수행하는 민간 언론사 정도가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18)
따라서 현재 미 정책결정자들은 베네수엘라 국내 사안에 개입하거나 양분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어느 한편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차베스 정부가 민주적 원칙을 고수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하는 가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베네수엘라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오히려 차베스 정부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부 정책결정자들은 더욱 과감한/호전적인 접근법은 양자간 관계를 멀게 하고 긴장을 증폭시킬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또 일부 논자들은 미국이 차베스 정부와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하고 가령 마약 수출 등 상호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대해 공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또 다른 장기 정책 접근법의 경우, 미국은 차베스가 부상하게 된 정황에 착목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 정책접근법은 비단 베네수엘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업, 범죄, 정치적 부패에 시달리는 여타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19)
결론적으로, 미 국부무는 ‘민주주의’나 ‘인권’ 마약문제를 빌미로 간섭을 지속할 것을 정책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20) 그 구체적 방안은 ①베네수엘라 시민사회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침해를 고발하기 위해 OAS, EU, 등 국제기구와 협력하고 ②인권 및 기타 NGO들이 베네수엘라 시민사회를 지지하고 방어하기 위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결성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③베네수엘라 정부 기관에 대항하여 기조직된 노동자, 독립 미디어, NGO, 종교단체를 조직할 것 등이다. 이미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원조기금’(NED, 라틴 아메리카에 반공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미국 해외홍보처(USIA)에서 지원하는 자금)이 후원하는 SUMATE와 같은 NGO가 암약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21) ‘플랜 콜럼비아’로 대표되는 일련의 군사작전과 함께 내부 반대세력을 후원, 규합하여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의 종합으로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저강도 분쟁은 항상-이미 전개 중이었고, 이는 베네수엘라의 급진화를 제약하는 잠재 요소다.22)

자본의 초민족화와 미국 주도의 경제통합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의 대외적 축을 이루는 ALBA가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를 넘어 대안적인 지역통합을 추구할 수 있을지도 중요한 관심사다. 미국이 구상한 FTAA 협상이 장벽에 부딪치며 정의와 평등, 연대를 원칙으로 대륙의 경제적 인프라를 구축하자는 차베스의 ALBA 제안이 대안으로 부상 중이다
그런데 ALBA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우선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경제통합 시도가 다변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FTAA 협상 타결 실패 이후 미국은 하위-지역 협정을 병행 추진하며 경제통합을 시도 중이다. 도미니카공화국-중앙아메리카-미국 자유무역협정(DR-CAFTA)을 법제화하고 파나마와 여타 안데스 3개 국가들과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 중이다. 한편 역내에서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인 브라질은 메르코수르 8개 회원국을 확대 규합한데 이어 2004년 10월에는 안데스공동체(CAN, Andean Community of Nation)들과 정치·경제 협정을 수립했다. 또 2004년 12월에는 총 12개국이 남미공동체(SACN, South American Community of Nation)를 결성하는데 합의했다. 이에 거의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자주적인 경제정책을 실용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미국·브라질과 협상중이거나 모종의 협정에 가입하고 있다. 따라서 ALBA가 실질적으로 역내 국가들에 끼치게 될 영향력이 얼마나 클지는 미지수다.23)
게다가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 구상의 핵심은 공동시장을 직접 활용하는 것보다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매개하지 않은 역내 국가들 간의 호혜평등한 교역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넘어 미국의 경제통합으로부터 이탈하기 위해서는 자본도피라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외채위기를 기화로 초민족적 법인자본에 철저히 잠식당한 라틴 아메리카 경제는 일상적인 자본유출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초민족적 은행으로 저축을 이전시킨 자본가들은 국내의 위험에서 자유로워진 반면 국제금융체제의 재생산에 종속되며 사회가 수탈당하는 구조가 고착화 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자본도피와 경제 성장 사이에는 음의 상관관계가 강하게 나타났음을 상기할 때, 자본도피는 역내 국가들의 자주적 경제정책 수립 및 내생적 경제성장에도 큰 장애가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석유산업에 대한 통제 강화를 통해 차베스 정부가 ‘오일 달러’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초민족적 법인자본에 대한 통제를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최근 차베스가 석유산업의 대미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며 민족자본 육성과 투자 및 판로 다변화에 나서고 있지만, 미국이 수입하는 원유 중 15% 가량이 베네수엘라 산이고 베네수엘라가 수출하는 원유 중 절반가량이 미국으로 수출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과의 정치-외교적 마찰이 급격한 경제적 단절로 이어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볼리바리안 혁명’의 주체적 조건과 한계

차베스 개혁 노선의 한계
이처럼 라틴 아메리카에서 ‘무적의 제국’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비가역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간섭과 자본의 초민족화는 차베스의 개혁을 제약하는 구조적·객관적 요인이다. 이런 맥락에서 차베스 개혁의 성격을 몇 가지 측면에서 평가해보도록 하자.
집권 초기, 차베스 정부는 기존의 외채상환을 지속하고 외채지불정지 같은 조치는 없을 것으로 약속했다(단, 재정지출의 30%에 달하는 외채상환부담을 줄이기 위해 외채재협상(만기연장)을 추진하고, 채무주식화 제도를 도입한다는 요지의 계획을 발표한 바 있음). 또 차베스는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재산, 특권, 부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도 없을 것이라고 반복했다. 게다가 이들 엘리트들이 정부에 대해 세 번의 비합법적인 정부 전복 시도를 하고도 여전히 그들의 계급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베스 대통령이 여전히 민관 협력과 사회복지 지출에 기초한 발전 구상에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극심한 계급 갈등을 거치면서도 최소한 정부 수준에서는 소유 관계 또는 계급 관계의 파열이 없었으며, 외국인 채권자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원유 고객들과의 어떠한 관계 단절도 없었다. 정부는 의료제도, 교육, 중소기업, 그리고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국가의 자금지출을 증가시키긴 했는데, 이는 외채 상환, 민간 수출업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 산업자본가에 대한 저리의 융자라는 재정 계획의 틀이라는 제약조건 안에서만 제시된 것이었다.24)
더욱이 국내적·국제적으로 차베스의 업적 중 상당부분이 석유 수입에 의존한 결과라는 점도 분명하다. 석유로부터 얻는 초과수익이 없었다면 거대기업과 빈곤층 사이의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석유부문을 제외하면 사적 투자는 고갈 상태이며 예년 수준으로 유가가 견조하게 하락한다면 베네수엘라의 경제 문제는 매우 심각히 위기에 처할 것이다. 지난 2년간 베네수엘라가 GDP 3%에 달하는 재정적자를 보인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 상태는 당분간 현재의 유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차베스의 집권 기반도 큰 수준에서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26)
또 차베스의 개혁정책 중 가장 급진적이라고 평가받는 토지개혁도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2001년 11월 “농촌으로 돌아가자”라는 프로그램이 토지및농업개발에관한법률에 따라 시행되었는데 이 법의 목표는 ▲토지소유 규모 제한 ▲농업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유휴 토지에 대한 과세 ▲국가 소유의 미사용 토지를 소농 가구 또는 협동조합에 분배 ▲사유의 미경작지, 휴경지를 징발, 재분배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001년 토지개혁법은 전 세계 토지개혁의 역사와 비교할 때 그다지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다. 본 법은 대토지소유자가 자기 토지에 대해 소유권을 가진다고 명시했고, 오직 휴경지나 특정 규모 이상 토지의 경우 그 질에 따라 그 일부가 징수될 수 있을 뿐이라고 규정했다. 가장 모순적인 목표는 토지소유자들에게 시장 가격으로 배상한다는 것이었다. 차베스 정부는 국유지 200만 헥타르를 13만 소농 및 협동조합에 분배했지만 사유지는 전혀 징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국유지에서 라티푼디오로 확장하려고 하자 대토지소유주와 농민 사이에는 긴장이 팽팽하게 형성됐다.27)
2005년 변경된 토지개혁법은 토지소유자가 소유할 수 있는 유휴지 규모를 개정했다.28) 대규모 유휴 부동산을 국가가 징발할 수 있는 권한 이외에도, 토지개혁법은 유휴 부동산에 비례해 과세되어야 함을 규정했다. 이 조치는 대토지소유주의 큰 반발을 샀고, 현재까지 이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지불유예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이유는 ▲법적 회피와 토지 등기부의 부실(취약한 법적 틀거리) ▲총체적인 법의 불비와 불처벌 관행 ▲취약한 농민 조직 ▲빈약한 농촌 지원 구조 등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석유경제를 다변화하고 농업을 근본적으로 회상하는 현실적 경로의 문제다. 현재 베네수엘라 경제 구조상 농민이 토지를 불하받고 농업기술을 습득하더라도 농산품을 판매할 경로를 확보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를 위해 정부가 베네수엘라농업협동조합(CVA)을 설립했지만, CVA가 판매를 대행할 것이라는 보증도 없다. 정부가 베네수엘라 농산품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입품에 대해 국산품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농산품들이 국내외 시장에서 좋은 가격에 판매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경제적 “네덜란드 병”은 베네수엘라 농업이 현재 GDP 5% 수준에 머무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이 문제에 관한한 차베스를 포함한 역대 어느 정권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베네수엘라의 역대 정권들은 고유가 시절, 예산 외의 잉여수입을 사회 간접자본 확충 또는 비석유산업의 성장기반 마련에 투자하지 않고 단순한 빈민구제정책 등에 집행함으로써 유가 하락시 전 산업이 함께 몰락하는 경험을 되풀이한 바 있다. 경제를 다각화하고자 하는 차베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석유산업으로부터 얻어지는 거대한 수익이 베네수엘라 통화가치를 고평가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오고 있으며 최근 유가 상승(차베스 임기 동안 4배 상승)은 이 문제를 더욱 격화시켰을 따름이다.29)

차베스 지지 세력의 이념적 불균등성
차베스는 자신의 지도력이 위협받을 때에는 저항적이고 급진적인데 그에 대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했을 때에는 유화적이고 중도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헌정 질서에 대해 군사 쿠데타와 폭력적인 공격을 선동한 반대세력에 대해 어떠한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단적인 사례다.
현재 차베스 정권 내에는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민족주의,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그룹 등이 자유롭게 경합하고 있다.30) 차베스 자신은 ‘개량주의’, 실용주의 및 혁명주의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차베스를 지지하는 세력들 가운데 온건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 분파는 정권의 정당성/합법성을 염려하고 실용주의자들은 재정 건전성/규율, 사회 지출 제한, 합동 공사 및 공공-민간 협력 증진 등을 주장한다. 중앙파는 점진적 개혁, 사회 지출 및 분배 증가, 진보적 부르주아지와의 기간 시설 계약 등을 통해 국가 기관 및 선거구 내에서 정치권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좌파의 경우 주로 새로운 계급적 지향의 노조, 지역 및 공동체에 기초한 협동조합, 농민 사회운동 및 특히 노동자 자주 관리 기업 및 운동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좌파는 사회화 과정을 심화하고 지방의 생산적 기업에 더 많이 투자함으로써 실업/불완전 고용 상태에 있는 노동력의 절반을 감소시킬 것을 주장한다. 동시에 이들은 하향식 후보 선정에 반대한다. 차베스는 좌파와 대중운동에 찬성하지만 거시경제정책을 결정하는 실용주의자들을 무시하지도 않고 정치권력을 제도화하려는 중앙파도 존중한다. 차베스는 이 과정에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며 상이한 입장들을 종합하는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32)
그런데 정당들의 확산은 명확한 정치적 노선에 기초하기보다는 국가 기구 내에서 입지를 점유하고 요구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 구조를 갖추려는 일부 지도자들의 속성에서 기인한 측면이 많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요소는 베네수엘라 구체제의 오랜 관행이자 악습으로,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1998년 차베스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해지자, 다수의 정치 그룹들은 다수파가 되기 위해 차베스와 경합했다. 장관직 획득이나 권력 분점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자, 정당들은 야당 진영을 규합했다. 전국적 수준에서 서로 대치하던 정당들이 지역적 수준에서는 제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이 앞서 루이스 미킬레나가 이탈하거나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MAS)’이 분리된 이유 중의 하나다. 두 번째 요인은 차베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전반적으로 급진화되면서 정당이 더 이상 이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1998년 차베스가 당선될 때만 하더라도 그가 토지개혁, 어업 및 은행 개혁 법안을 제도화했던 2001년만큼 진보적이지 않았다.
한편 차베스를 지지하는 정당이나 사회세력의 통합력도 현재로선 미미하다. 단적으로, 2003년 10월 창설된 ‘코만도 아야쿠소’라는 차베스주의 정당들의 선거 연합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이에 차베스는 전국 선거 순회단을 제안했고, 10여명의 정치·사회 활동가로 구성된 단위 성원들은 현장과 가가호호를 누비며 차베스 지지 운동을 전개했다.
<표2> 베네수엘라 주요 정당 현황31)
당명 주요특징 비고
제5공화국운동(MVR)제1여당1998년 군부 중심 창당
우리는 할 수 있다(Podemos)여권 내 우파 2001년 MAS에서 분리
모두를 위한 조국(PPT) 여권 내 마르크스주의 계열 1997년 급진주의에서 분리
민주행동당(AD)구 지배정당, 우익 민주주의 1936년 창당
기독사회당(COPEI)구 지배정당, 우익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MAS)중도 우파 1971년 베네수엘라 공산당(PCV)에서 분리
적기(Bandera Roja)




혁명적 좌파, 무장노선 1970년 혁명적 좌파운동(MIR)에서 분리
급진주의(La Causa Radical) 급진주의1971년 MAS 및 PCV 출신 활동가들이 결성
단결(Union)구 차베스 지지세력 1999년 창당
연대(Solidaridad)루이스 미킬레나 주도 2001년 창당
혁명사회주의당(PRS)전국노조(UNT) 내 트로츠기 그룹 2005년 창당

<표3> 차베스 지지-반대 주요 정당
구분
차베스지지
차베스반대

선거연합
공동전선

애국의 기둥(Polo Patriotico, 1998)
코만도 아야쿠소(2003)

민주공조
(CD, Coordinadora Democratica)

정치적 스펙트럼
좌파
군부
우파
좌파
중도
우파
정당
PPT
MVR
Podemos
적기
급진주의
단결
연대
MAS
AD
COPEI

차베스 개인 카리스마에 대한 과도한 의존
따라서 개혁 과정이 차베스 개인의 지도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편향이 발생했다. 우선 비상 국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 발휘가 요구되는 상황적 논리를 들 수 있다.33)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좌익적 정당의 부재와 자율적 사회운동의 경험이 부재한 결과다. 주요 선거 및 국민소환투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대통령 개인이 전국 순회 캠페인을 통해 직접 지지자를 조직하고 이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를 통해 차베스는 복지정책을 장려하고 구호자금을 수집·전달함으로써 대통령 자신의 지지층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또 이 과정에서 군부가 대통령 개인 및 대통령의 정치 프로그램에 직접적으로 봉사하는 경향이 대두했다. 차베스는 종종 민중과 군대의 관계를 수정해야 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군이 가진 유용한 자원을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플랜 볼리바르 2000의 사례). 차베스의 개혁정책이 기층 민중들을 대열에 동참하도록 자극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민중들은 스스로 전국 순회 선거운동을 조직, 투표를 조직하기보다는 거리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선거구보다는 현장에 근거해서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서 전국 순회는 가장 중요한 조직적 형태였다. 이들은 조직적인 정당의 지도 없이도 수십만의 지지자를 규합하고 구체적인 정치적 과제를 독립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또 차베스는 정기적으로 방송에 출연하면서 개혁에 대해 국민과 직접 대화를 시도했다. 분명 대중 동원의 성공이야말로 차베스가 국내적으로 사회적 변화를 심화하고 대외적으로 반미적 태도를 강화하게 된 요소였다.
그런데 대중적 사회운동이 성장하고 또 자율성을 획득하는 역동적인 과정이 동반되지 않는 한, 개혁이 차베스 개인에게 의존하는 경향은 점차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인민주의의 위험을 환기한다. 구조적·객관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개혁이 위기에 처하고 단기간의 가시적 성과가 사라지면, ‘개혁’은 지도자 자신의 정치적 승리와 경제정책의 근본적 쟁점의 호도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결과적으로 정부도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적 사회운동의 자율성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빈민 정책이 주효하면서 사회 변화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높아지고 있다. 도시 이외에 농촌에서도 토지개혁의 확장 및 지주들의 민병대에 반대하는 빈농들의 투쟁이 형성되고 있다(인디안 공동체 운동 포함). 이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UNT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운동의 변화 흐름이다. 반대세력의 쿠데타와 총파업/사보타지에 즈음하여 일부 노조지도자들이 CTV와 거리를 두고 새로운 전국노조의 결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석유, 공공, 자동차, 고무 등 전략분야의 많은 지도자들은 UNT에 가입해서 현재 전국적으로 약 100만의 조합원을 확보한 상태다. 많은 현장에서 구체제에 반대하는 새로운 노동조합 활동가 네트워크가 조직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정부에 대한 노조의 자율성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서도 UNT 일부에서 전개 중인 노동자 통제와 평의회 건설 흐름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34)
<상자1>에서 보듯이 사유화 반대 투쟁, 관리자들의 사보타지에 맞선 공장 점거 등을 경험하며 UNT 소속의 많은 노조와 활동가들이 노동자 통제(공동관리/자주관리)나 평의회 운동에 대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이들은 국유 기업에서 사기업으로 노동자 통제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주관리, 공동 관리 및 협동조합을 통해 사회·경제적으로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확장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차베스도 생산을 포기하거나 유기된 산업 및 공장을 몰수할 것을 발표하며 산업 발전, 생산 증진을 위해 노동자들이 관리의 일주체가 될 것을 호소했다.35)
자본가들의 자본유출 또는 사보타지로 유기, 폐쇄된 직장을 점거하고 노동자 스스로 생산과 작업을 통제하는 노동자 통제 또는 평의회의 경험은 역사적으로 위기와 이행의 시기에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단순한 소유관계의 변형(사유에서 국유 또는 집단적 소유)을 넘어 노동자들의 대중권력,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 극복, 민주주의 등의 쟁점을 제기했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노동자 통제 또는 평의회 운동이 기존 노조운동의 혁신, 노동자운동과 지역운동의 결합, 비공식부문 노동자 조직화를 추구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다.

<상자1> 베네수엘라의 노동자통제

노동자 공동관리는 1990년대 사유화 반대 투쟁을 진행한 국영전기회사( CADAFE/CADELA)와 국영알루미늄회사(ALCASA) 노동자들로부터 출현. 노동자 소유를 증진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참여와 양질의 공공 서비스 제공이 노동자들의 요구. 공동 관리는 새로운 유형의 관리자, 노동자, 노조 지도자를 요구하지만 과거의 이념적 틀, 노조 기풍, 미디어의 공격으로 지체되거나 역행하기도. 관리자들의 사보타지에 대항해 석유산업을 유지하기 위한 석유노동자들의 경험도 소중. 당시 현장을 사수한 석유노동자의 사례에 의해 UNT 전체가 크게 고무되었음. 현재 UNT 노조원들은 국유기업에 대해 노동자 통제를 주장. 이들은 노동자 통제 하의 기업이 지역 공동체 및 지역 사회 전체에 봉사해야 한다고 언급.
ALCASA에서 공동 관리의 진행 과정은 차베스 정부가 모든 국영기업에 도입하고자 하는 모델. 영구적인 노동자 평의회와 노동자 관리가 모든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핵심. VENEPAL 제지 공장을 노동자들이 점거, 전체 1600명의 노동자 중 600여명이 원료가 바닥나기 전까지 수개월간 공장을 접수하고 가동함. 정부는 2005년 1월에 이 회사를 국유화했고, 현재 회사는 국가와 노동자들이 구성한 협동조합을 통해 INVEPAL로 거듭남. CNV 밸브 공장 노동자들도 관리자들이 직장을 폐쇄하자 공장을 점거하고 정부는 2005년 4월 국유화하여, INVEVAL로 거듭남.

한편 차베스 정부의 다양한 빈곤 퇴치 프로그램이 거둔 가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빈민 대중운동이 고양되고 있는가의 여부에 주목해야 한다. 온정주의적 방식으로 분배된 복지가 정치적 능동성을 자동적으로 고양하지 않으며 복지정책의 수혜자들은 아래로부터 투쟁하는 것보다 위로부터 시혜를 얻는데 더 익숙해졌기 때문에 수동적일 가능성이 상존한다. 미션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기회가 확대되고 도시토지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빈민들의 자기 조직화, 자기 통치의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베네수엘라 농민 조직이 취약한 이유는 농업 경제의 붕괴에 기인한다. 따라서 차베스 정부의 토지개혁을 급진화할 대중적 세력이 미미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2001년 토지개혁법 시행 후 현재까지 약 130명의 농민이 대토지소유주의 사병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토지분배의 결과로 협동조합이 맹아적으로 형성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는 농민 조직의 성장 여부는 향후 농업경제의 회생과 토지개혁의 급진화를 좌우할 변수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은 차베스 집권 이후 몇 가지 주요 양성 평등 법안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서 ▲여성적 이슈가 여전히 부차적으로 다뤄지는 문제 ▲여성운동이 제도화되면서 사회운동과의 결합이 약화되는 문제 ▲1990년대 쟁취한 법률적 성과를 사회운동적으로 확산하는 문제 등이 과제로 남아 있다.36)
사회운동들이 자율성을 확산하고 대중적·지역적 토대를 확장하는 과정은 여전히 험난하지만 도시와 농촌, 공장과 지역에서 자주관리 운동, 평의회, 협동조합 등이 출현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지표다. 향후 차베스 정부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권력의 보전과 사회경제적 ‘현상유지’를 위한 실용적 방편을 찾는 방향으로 경도될 것인가는 결국 대중적 사회운동의 역량을 어떻게 신장시켜나갈 것인지에 달린 문제라 할 수 있다.

결론

차베스-베네수엘라는 ▲개헌 등을 통해 정치권력을 강화하고 재분배 정책을 중심으로 제도적·대중적 기반을 다진 집권 초기를 거쳐 ▲쿠데타·총파업/사보타지 등 구 지배세력의 반격에 처한 수세기를 지나 ▲국민소환투표와 총선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대내외적으로 볼리바리안 프로세스가 가속화되는 국면을 맞고 있다. 이 과정에서 차베스는 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규합한 것이 사실이지만 ‘볼리바리안 혁명’은 여전히 모호한 측면이 많다.37) 그런데 라틴 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의 확산과 이에 맞선 사회운동의 출현이 항상적인 정치과정이라면, 과거 라틴 아메리카 사회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는 가운데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한 몇 가지 쟁점을 추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1940-5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하지 않은 채 제한적 코포러티즘을 시도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방식으로 대중을 동원했다. 오늘날 ‘볼리바리안 혁명’이 인민주의적 전통으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는 소유권과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혁 및 토지개혁의 급진화를 추구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은 대중적 사회운동의 자율성이 적극적으로 신장될 때만 가능하며, 따라서 최근 고조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자통제, 평의회 운동 및 빈민, 농민, 여성들의 자기 조직화에 주목할 수 있다.
둘째, 1960-70년대 사회주의적 지향 속에서 급진화된 군사조직, 정당, 노동조합 및 이를 포괄하는 전선체 등은 대개 군부 독재와 미국의 ‘저강도전쟁’으로 압살 당한다. 지금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무적의 제국’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비가역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간섭은 상수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차베스가 시도 중인 군사노선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1960-70년대 좌익적 사회운동이 좌초한 원인을 ‘무장’ 여부에서 찾기보다는 반혁명에 맞설 수 있는 대중적 토대의 문제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쿠바나 칠레의 사례처럼 노동자운동 등 사회운동이 독자적인 사회변혁의 전망을 갖추고 그 계획을 물질화시켰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1980년대 평화협상을 거쳐 선거정당으로 전환한 기존 사회운동 세력은 1990년대를 거쳐 선거정치와 신자유주의에 순응하게 되었고, 일부는 NGO로 흡수되었다. 이들은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금융기구와 초민족적 법인자본에게 권력을 대폭 이양할 것을 주장하며 ‘사회운동의 자율적 요구와 상호조정’을 참조하기보다는 선거승리를 위한 캠페인 기술에 전도되었다. 이에 반해 1990년대 후반부터 촉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운동은 기존 정당과 노동조합이 선거정치에 매몰되거나 코퍼러티즘을 수용하면서 대중운동을 분할하는 상황을 극복하고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 세계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다양하게 분출하고 있는 사회운동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했다.38) 이런 점에서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혁명’과 ALBA 제안에 대한 환호는 그 자체로 정당한 반응이지만 일견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는 향후 세계사회운동이 연대와 자율성을 바탕으로 ‘대안’에 대한 전망과 역량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장해 나갈 때만이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차베스-베네수엘라가 구조적·객관적 제약을 극복하고 진정한 ‘21세기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질문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할 것이다.


1) 류미경,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연대를 확장하자! - 다중심 세계사회포럼으로 본 대안세계화 운동의 과제」, 『월간 사회운동』 통권 62호(2005.3) 참조. 본문으로
2) 대안세계화 운동과 세계사회포럼에 대해서는 임필수, 「세계화와 세계사회운동 - 대안세계화 운동과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월간 사회진보연대』 통권 37호(2003.7-8) 참조. 본문으로
3) James Petras (2004), "The politics of imperialism: Neoliberalism and Class Politics in Latin America", http://www.rebelion.org 본문으로
4) 칠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민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대표적 사례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기민당과 사회당은 피노체트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의 성과를 인정하고 정치적 타협을 수용, 1990년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간 제휴’ 연정이 성립된다.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기민당과 사회당이 참여한 에일윈 정부는 여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안정적인 형태로 의회와 정당정치 체제를 유지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지속하게 된다. 본문으로
5) Gregory Wilpert (2005), "Land for People not for Profit in Venezuela", http://www.venezuelanalysis.com 본문으로
6) 1937년 당시 토지 소유는 1000ha 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대농장에 집중됐다(4.5%가 88.8% 소유). 10ha 이하의 토지를 소유한 소농은 전체 토지 소유자의 57.7%를 차지한 반면 0.7%의 농지만 소유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7) 5% 대지주가 75% 토지를 소유하고, 75%의 소토지소유자가 고작 6%의 토지를 소유했다. 농지의 경우 더욱 심각한데 2%의 인구가 60%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중 대부분이 휴경지다. 본문으로
8) Richard Lapper (2005), "Venezuela and the Rise of Chavez: A Background Discussion Paper", http://www.cfr.org 본문으로
9) 제임스 페트라스 외, 「라틴 아메리카의 초민족적 자본가와 외채 문제: 계급 분석적 시각」, 다이앤 엘슨 외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페미니즘의 시각』, 공감, 1998 참조. 본문으로
10) C.P. Pandya and Justin Podur (2004), “The Chavez Government's Economic Policies”, ZNet, http://www.zmag.org 본문으로
11) Marta Harnecker (2004), "After the Referendum: Venezuela Faces New Challenges", Mothly Review, Vol. 56, No. 6. 본문으로
12) 그 주요내용은 ▲국호 변경 ▲양성 평등 참여 ▲법치와 정의 ▲인권과 국제조약 준수 ▲여성의 권리 신장 ▲정보의 자유 ▲정당 관련 국고 보조 금지 ▲국민투표 ▲사회·교육·문화·경제적 권리 ▲원주민의 권리 ▲환경권 ▲삼권분립이 아니라 오권분립(입법행정사법에 선거관리위원회, 시민 또는 공공의 권력을 추가) ▲입법부/대통령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 ▲시민불복종 등이다. 신헌법에 관해서는 Gregory Wilpert (2003), "Venezuela's New Constitution",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13) ‘볼리바리안 써클’에 관해서는 Alvaro Sanchez (2003), "Bolivarian Circles: A Grassroots Movement",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14) 2000년 2월 PdVSA의 중장기 사업계획(2000-2009 Business Plan)을 발표했는데, 이 계획은 ▲국내 민간자본 형성 강조(석유산업에 대한 민간부문 참여 확대) ▲생산구조 개편(가스 및 경중질유 비중을 제고) ▲생산성 및 정유산업 활성화를 위한 수출 경쟁력 제고 ▲화학 및 유화산업 개발 및 생산성 향상 ▲석유정책의 국제적 협력 등을 가이드라인으로 삼고 있다. 본문으로
15) C. P. Pandya and Justin Podur, 앞의 글 본문으로
16) 차베스 정부의 빈곤정책과 관련해서는 Gregory Wilpert (2003), "Mission Impossible? - Venezuela's Mission to Fight Poverty",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17) 이에 미국이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관된 정책을 추진한 이유가 무엇인지가 쟁점인데, 이에 대해서 대략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네오콘의 맹동성. 2001-02년, 반테러리즘이 발호하는 가운데 미국은 차베스 정권을 지체없이 처리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네오콘은 베네수엘라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언론 및 기업 엘리트들의 권력을 과신한 것이다. 둘째, 이라크전과 차베스와 OPEC 주도국인 이라크·이란 간 결속으로 불어 닥친 석유위기가 미국의 간섭을 촉진했다. 셋째, 차베스가 FTAA에 반대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ALBA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차베스의 복지정책과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 그리고 석유 외교가 역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잠식하는 주요 원인이자 ‘좌파의 중심’이라고 간주했을 수 있다. 본문으로
18) James Petras (2005), "The Venezuelan Election: Chavez Wins, Bush Loses (Again)! Now What?", http://www.counterpunch.org 본문으로
19) Mark P. Sullivan (2005), "Venezuela: Political Conditions and U.S. Policy",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Report for Congress, http://www.state.gov/ 본문으로
20) U.S Department of State Bureau of Public Affairs, "The State of Democracy in Venezuela" (2005.12.1) 참조. 본문으로
21) 미국이 베네수엘라와 미국의 반(反)차베스 단체들에 수십만 달러를 제공했으며 이 중에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베네수엘라노동자연맹(CVW)도 포함돼 있다고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바 있다(2002.4.25). 이 신문은 이 자금이 NED에서 제공된 것이라며 지난해 반차베스 단체에 대한 지원액은 전년보다 4배 가까이 늘어난 87만7천달러(약 11억 4천만원)였다고 밝혔다. NED는 AFL-CIO 산하 대외관계기구인 ‘국제노동연대를 위한 아메리카 센터’에 15만4천3백7십7달러를 지원했는데, 전액이 베네수엘라의 노동권 향상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CTV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또 미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외관계 외곽조직들에 상당 액수의 자금지원을 했으며 양당은 이들 자금을 차베스 비판세력들의 워싱턴 방문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본문으로
22) 지금도 미국은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의 접경지대에서 - 이 곳은 서반구 최대의 수자원 보유지역이기도 한데 -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군의 파라과이 주둔을 정당화한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파라과이 군기지는 볼리비아의 천연가스 매장지로부터 약 200km 떨어진 곳이다. 이 가스전은 미주대륙 전체에서 2번째로 큰 규모다. 미국의 대다수 주류 언론들은 서반구에서의 차베스의 영향력이 지닌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 “반테러”라는 수사를 즐긴다. 한편 미 플로리다에 본부를 둔 선교단체가 베네수엘라 남부와 브라질 아마존 접경의 고립된 인디오부족 선교를 위해 대규모 시설물을 설치한 데 대해 차베스는 ‘CIA에 의한 침투’라고 규정하고 이들 단체들을 향해 90일 내에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국경지역에서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기도 했다. 이상 벤자민 당글, 「미군의 파라과이 진주」, 프레시안(2005.10.17) http://www.pressian.com 참조. 본문으로
23) J. F. Hornbeck (2005), "A Free Trade Area or the Americas: Major Policy Issues and Status of Negotiations",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Report for Congress, http://www.state.gov 본문으로
24) James Petras (2004), "President Chavez and the Referendum: Myths and Realities", http://www.rebelion.org (국역: 『월간 사회진보연대』, 통권49호(2004.10)에 수록) 본문으로
25) 국제 원유가격이 폭락할 경우 베네수엘라 경제가 항상 침체와 위기에 봉착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거시경제안정화기금(FIEM) 마저 정부가 소진하는 것은 베네수엘라의 유일한 위기관리체제를 마비시킬 수 있어 우려스럽다는 문제 제기도 있다. 본문으로
26) Richard Lapper, 앞의 글. 본문으로
27) Seth R. Delong (2005), “Chavez’s Agrarian Land Reform: More like Lincoln than Lenin”, The Council on Hemispheric Affairs, http://www.coha.org 본문으로
28) 2001년 법에 의하면,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는 생산성이 낮은 휴경지의 최대 면적은 5000ha였다. 2005년 토지개혁법은 생산성이 높은 휴경지 토지의 경우 100ha에서 50ha로, 생산성이 낮은 휴경지의 경우 5000ha에서 3000ha로 제한했다. 본문으로
29) Gregory Wilpert (2005), "Land for People not for Profit in Venezuela", http://www.venezuelanalysis.com 본문으로
30) 현재 여권을 구성하는 주요 정당은 ‘제5공화국운동(MVR)’ 및 ‘우리는 할 수 있다(Podemos, ‘우리는 할 수 있다 - 사회 민주주의를 향하여’), ‘조국을 모두에게(PPT)’ 등이다. MVR은 차베스 본인이 1998년 대선을 위해 군부를 중심으로 창건한 정당으로서, 정치적 스펙트럼을 불문하고 우선 차베스 지지자를 규합한 성격을 띤다. 당원 중에는 더러 구체제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내 민주적 장치나 안정적인 평당원 구조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Podemos’는 MAS(사회주의를 향한 운동)에서 기원하며 차베스 지지자 중 합리적인 부위를 자처하는 세력이다. 유럽적 스타일의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Podemos’는 차베스 정부의 우파를 대표한다. PPT는 선거인단 수로는 가장 취약하지만 노동, 교육, 문화 등 다수의 내각을 책임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PPT는 ‘급진주의’로부터 분리되었다. PPT는 스스로를 ‘운동중의 운동’으로, 또 노조운동(자율 노조)과 청년운동(‘구국 청년’), 여성운동(마누엘리타 사엔스 운동) 및 지역 공동체에 대한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상 Edouard Diago (2003), "Venezuela’s political forces", IV 353,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 참조. 본문으로
31) James Petras (2005), "The Venezuelan Election: Chavez Wins, Bush Loses (Again)! Now What?", http://www.counterpunch.org 본문으로
32) 베네수엘라의 전반적인 정당 분포와 관련해서는 "Leftist Parties of the World", http://www.broadleft.org 참조. 본문으로
33) 일례로 베네수엘라 의회는 1999년 3월 경제난 극복을 목적으로 차베스 정부가 출범 직후 상정한 일련의 비상경제조치법안(일명 Enabling Law)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향후 6개월간 의회의 추가 승인 없이 ▲금융거래세 도입 및 소득세법 개정 등 세제 개편 ▲국가 행정 조직 개편 ▲비상금융법안 개정과 같은 경제 조치들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 1999년 제정된 신헌법은 불신임투표를 포함한 국회해산권, 국가긴급조치 선포권, 내각임명권, 대통령 임기의 연장(5년에서 6년으로) 및 이에 따른 즉각적인 재선 허용 등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본문으로
34) 베네수엘라 노동자운동에 대해서는 Daina Green and Barry Lipton (2004), "Report on Venezuela's Trade Union Situation", http://www.venezuelananaysis.com 참조. 본문으로
35)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와 평의회 흐름에 대해서는 Marta Harnecker (2005), "Joint Responsibility and Confidence in Venezuela’s Worker Co-Managed Industries", The challenges of congestion: Cadafe and Cadela's experiences, Popular Library, Colection Testimonials Nº2, La Burbuja Editorial, Caracas, April 2005, http://www.venezuelananaysis.com; Bill Burgess (2005), "On the road to a new society: Venezuelan workers debate workers control of industry and government enterprises", http://www.socialistvoice.com; Rafael Rodriguez (2005), “Co-management” in the Alcasa aluminium factory, IV 371,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 참조. 본문으로
36)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Sarah Wagner (2005), "Women and Venezuela’s Bolivarian Revolution",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37) ‘볼리바리안 혁명’이 페미니즘적 정치, 반인종주의적 정치, 심지어 반자본주의적 정치에 대해서도 성격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Michael Albert (2005), "Venezuela's Path", ZNet, http://www.zmag.org 참조. 본문으로
38) 라틴 아메리카 사회운동의 역사에 대한 개괄로는 James Petras, "Latin America: The Resurgence of the Left," NLR, no. 223, 1997; James Petras and Timothy F. Harding, "Introduction", Latin America Perspective, Issue 114, Vol. 27 No. 5, September 2000, pp.3-10. (국역: 『월간 사회운동』 통권 57호(2005.9)에 수록) 참조. 아울러 라틴 아메리카의 좌익적 사회운동이 선거주의로 전환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는 James Petras, (2004), "Class-based Direct Action versus Populist Electoral Politics", http://www.rebelion.org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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