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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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5.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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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 서다.

보르헤스 전집2『픽션들』

정혜진 | 인천지부 운영위원


‘고급 독자’

아는 사람 중에 자신의 꿈은 ‘고급 독자’ 라고 줄곧 말하는 이가 있다. 그래서 늘 나에게 ‘고급’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 ‘고급’책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저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추천해주었을 뿐인데, 내가 제안한 책을 꽤 마음에 들어 했고 졸지에 나도 ‘고급 독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분이 나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본인은 도저히 읽을 수 없었지만 당신은 읽을 수 있을 거라는 부담스러운 말과 함께…. 그것은 마치 시험과 같았다. ‘이 책을 통과하고 나면 너는 고급 독자가 될 것이다.’
‘고급 독자’라, 상당히 간지러운 단어이다. 고급, 즉 높은 등급이라 함은 나에게 주어진 책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닐까. 내식으로 책에 대한 감동을 만들고 재 정의할 수 있다면 적어도 나만큼은 한 단계 상승해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핵심은, 단계의 상승이 아니라 내 식대로 정의했다는 것에 있다.
꽤 무거운 책을 소개함에 앞서, 해석이 정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변명을 늘어놓았다.


허구 속의 사실, 사실 속의 허구

난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사방으로 끌려 다녀야 했다. 각주가 많은 책은 질색이다. 그런데 작가가 달아 놓은 원주부터 번역자의 각주, 심지어 원주에 달린 각주까지, 친절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설이다. 그 각주만 모아놓아도 충분히 환상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보르헤스는 모든 작품에 실존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백과사전, 책 등을 등장시킨다. 각주는 바로 그것들에 대한 설명이었다.
『영미백과사전』(뉴욕, 1917) 46권 마지막장에 보면 우크바르의 한 이교도 창시자가 말한 “거울과 성교는 사람의 수를 증식시키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 자, 여기서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각주는 바로 그 허구와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고, 각주를 읽은 후에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면, “속았다!”라는 탄식이 나올 때도 있다. 그런데 소설 자체가 허구이지 않은가. 책 제목조차 ‘픽션들’인데 왜 난 이 글이 픽션이라는 사실에 당황했을까.
우리에게는 익숙해진 ‘사실’들이 있다. 백과사전은 사실만을 적어 놓은 것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증거를 가지고 있고 틀림없는 사실의 기록이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바로 이 익숙한 사실을 허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한 실존 인물을 등장시켜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다 허구라고 고백한다. 보르헤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허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관념적인 세계를 조직하기 위해 보르헤스가 만든 방식은 가짜를 가장 사실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허구와 사실을 조합하고 그 혼재를 인정하면서 내 사고는 이미 먼 곳으로 떨어져 있었다. 일단, 낯선 곳에 뚝 떨어짐은 신선한 충격이었으니 그의 속임수에 한 수 접고 들어 가야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 서다.

『픽션들』은 1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편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고민할 수 있는 수준의 질문이 담겨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언제나 그 정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고력을 굳이 구분해본다면 확산적 사고와, 수렴적 사고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맞춰 나를 돌이켜본다면 난 틀림없이 확산적 사고력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실례를 무릅쓰고 대화 중간에 이런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다. “미안한데, 지금 왜 그 이야기를 해? 아까 이야기랑 지금 이야기가 무슨 관계야?” 그러면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준다. 물론 그 설명은 이해하겠지만 왜 가지를 쳐서 이야기가 확산되는지는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내 친구에게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현대의 관념은 공간적으로 계속 확산되고 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 서있는 당신들은, 확산 능력에 의해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창작해낼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는 거대한 우주이다. 그러다 혼돈이나 무한대에 빠지면? 그것은 당신이 발 딛고 있는 곳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 서 있다니.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반복되고 있는 인간의 창작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세헤라자드의 천일야화 속에서도 무언가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반복에서 다른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새로운 실험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사고의 능력을 항상 실험하고 있는 꼴이다. 태초에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창작의 불을 밝혔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내 사고가 어디까지 확산되고 나의 정원이 어디까지 갈라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창작이라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나는 우주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 믿으며….

‘시간’ 을 숨겨라!

“만약 어떤 책에서 <시간>이라는 단어뿐만 아니라 <시간>을 뜻하는 유사한 단어조차 쓰지 않았다면, 이 의도적인 삭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바로 수수께끼의 정답이라고 한다. 어떤 단어를 강조하기 위한 가장 뛰어난 방법은 그것을 영원히 삭제해 버리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두서 없는 글에 하나의 수수께끼를 담아 보았다.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원히 삭제한 채, 사실은 그 수수께끼를 누군가가 눈치 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속에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에게 인간의 고민은 상상과 환상 속에서 갈등할 뿐이라는 아주 간단한 명제만 내려준 이 책은, 나를 더 고립시키지 않았나 하는 걱정도 잠시 해 본다. 고급 독자가 되는 시험에는 통과하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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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소말리아 해적 아덴만 삼호주얼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