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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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 파동, 예상되는 피해

박주영 | 편집실
도대체, 지문날인 거부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는 6월 1일 종이코팅이 되어있는 종전의 주민등록증의 법적 시효가 만료되고 이제부터 플라스틱 새 주민증만이 주민등록증으로 인정된다. 주민등록을 갱신한 사람이야, 그게 뭐 문제인가 하겠지만, 지난해부터 시작된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면면을 들여다보자면 6월부터 세상과 고립(!)되어야 하는 사람은 너무도 많다.

1999년 5월말부터 시작된 플라스틱 새 주민증 갱신은 전자지문을 채취한다고 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반발을 샀다. 약 2000명의 사회단체 인사와 활동가들이 지문날인 거부 선언을 하였고 수천명의 국민들이 홈페이지와 PC통신을 통해서 지문날인 거부선언에 동참하였다. 이 운동이 이처럼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과거 재일한국인 지문날인 거부파동에서 경험한 지문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전자지문 채취라는 전자감시의 우려가 함께 작용한 것으로 인식된다.

여기에 더해 지문날인제도는 그 자체로 법률적인 근거가 상당히 희박했다. 오로지 주민등록법 시행령에 주민등록증에 지문을 날인한다는 규정이 있고, 이에 따라 주민등록증 발급신청서 용지에 열 손가락 지문날인란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1999년 4월 주민등록법이 개정되어 '지문'이라는 단어 한마디가 주민등록법에 추가되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지문날인제도는 국민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서약으로, 그리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여 범죄예방차원에서 지문을 강요하는 것이 문제였다. 지문날인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68년 1월 12일 무장공비침투사건으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의 단독국회는 어수선한 국내분위기 속에서 주민등록증 개정안을 의결하여, 국민들의 복종을 법적으로 강제시킨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30년이 넘도록 이에 순응하며 범죄자 취급을 당해왔다.

따라서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범죄자임을 거부하고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문날인 거부를 이유로 새 주민증 갱신에 응하지 않는 것 역시 정당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합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문제는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것이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많은 차별과 불편함을 겪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민등록증이라는 국가신분증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이 사람들 중에는, 운전면허증이나 여권 등 주민등록증을 대체할 만한 아무런 신분증이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당한 권리와 양심을 지켜나가는 것이 여전히 어리석고 손해만 끼친다는 교훈을 21세기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지문날인 거부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지문날인 거부자의 하루

-학교에서
당신은 대학 3학년 복학생, 아직 학생증을 재발급 받지 못했다. 얼마전 통신에서 새 주민증 경신이며, 지문날인의 문제점을 알게된 후, 지문날인 거부운동에 동참하였다.
오늘은 학교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토익시험을 신청하려고 했다. 그런데, 시험을 볼 수가 없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변리사, 회계사 및 기타 공무원 채용시험에 응시할 수 없으며, 취직시험, 토익, 토플시험 등에도 신분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문날인 거부자 중 상당수가 학생신분을 가져, 국가고시나 각종 시험에 응시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다. 학생인 김영진씨의 실제경험이다. "막상 닥쳐서 생각해 보니 주민증 없는 생활은 불편한 일이 많을 뿐더러, 당장에 토익 시험을 보는데. 신분증 없이는 안 된다고 하던데요."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며 교문을 나서려니 불법검문 중이다. 경찰이 신분을 확인하자며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란다. 신분증이 없다니까, 파출소까지 무조건 임의동행을 해야 한단다.
김광현씨의 사례를 보자. 작년 10월 중순경 지방에 내려가던 김광현씨는 목포로 향하던 중 검문소를 만났다. 주민증이 없어서 주민등록번호를 외우고, 결국은 검문초소로 이동하여 손가락까지 펴 보여야 했다.

-은행에서
자, 다시 학교를 벗어나서 은행으로 향한다. 어제 통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원래 갖고있던 계좌고 통장만 새로 발급하는 건데, 별다른 신분증이 필요하겠나 싶다. 도장만 달랑 들고간 당신은 또다시 거부당한다.
통장을 재발급 받기는커녕, 신규개설도 할 수 없다. 수표를 현금으로 교환하지도 못하고 10만원 이상의 고액을 송금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은행 대출은 물론이거니와, 적금을 탈 때 본인 확인이 안되어 적금을 탈 수도 없다. 6월 1일부터는 계좌 개설과 송금 등 금융거래를 할 때 새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실명을 확인해야 한단다. 친절하게 은행직원이 가르쳐준 바로는, 재정경제부에서 주민등록법에 따라 6월부터 구형 주민등록증은 사용을 못하게 하고 따라서 금융거래를 하려는 고객은 실명확인을 위해 새 주민등록증을 금융기관에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이기 망정이지, 개인사업이라도 벌이고 있는 당신이라면 당장 6월 1일부터 금융거래를 할 수 없어서 당장 업무자체가 위기에 빠지게 된다.

-행정기관에서
이제 은행거래까지 막막해진 당신은, 얼마전 계획을 짜둔 대로 일본 비자발급을 신청하러 대사관에 갔다. 토익시험도 안되고 은행거래도 안되니 비자라고 될 리 없건만, 설마설마 하다가 역시나의 상황을 맞는다.

배수한씨는 일본 비자발급을 위해 운전면허증을 이용했다가 거부당한 경험이 있다. "일본 비자발급받는 데 운전면허증 냈다가, 한자가 적혀 있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거부당했습니다. 호적등본사본을 보냈더니 원본을 가져오라며 다시 거부당했고, 마지막으로 구 주민등록증을 보내 겨우 발급을 받았습니다. 이제 구 주민증의 효력이 정지된 이후에는 아마도 일본 비자발급을 위해서는 호적등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사관을 돌아나오는 당신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아침에 인감증명서를 급하게 떼어오라던 어머니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래도 혹시나 외국 정부기관처럼 냉랭하랴 싶어 동사무소에 들렀다. 면사무소에서 인감증명서를 발급받고자 했으나 거부당한 조○○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4월 24일, 주소지인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면사무소에서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으려고 했었는데, 주민등록증을 새로 만들지 않아서 인감증명서를 발급해 주지 않으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 제가 그것을 따지려고 하자 그 공무원은 상급자에게 주민증을 새로 발급하지 않았는데 인감증명서를 발급해 달라는데 해줘도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상급자는 저의 눈치를 보더니 해주라고 했다. 아마도 면사무소 내부적인 지시사항이 있었던 같다. 결국 발급은 했지만 급하게 사용할 인감증명을 발급하는데 쓸데없이 시간이 지연되었고 기분도 매우 안 좋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의료보험, 운전면허증, 여권, 비자, 인감증명 등 증명서 또는 행정서류의 모든 발급이 어려워진다.
얼마 전에 일어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도 떠오른다. 지문날인 거부자는 아니었지만, 새 주민증 경신을 차일피일 미루어오시던 아버지가 먼 친척의 급한 보증을 부탁받으셨던 것이다. 고민고민하시던 아버지가 정작 보증인으로 나서자니, 주민등록증이 없어 보증인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법률적으로 보자면 주민등록증이 없을 경우, 본인명의로 진행되고 있는 법원소송 관련처리가 불가능하고 행정처리와 관련하여 대리인으로의 역할이 불가능해진다.

심지어는 예비군, 민방위 훈련에도 참가할 수 없고 혼인신고도 불가능하며, 임대주택에 입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일은 일대로 처리되지 않고, 더욱이 기분나쁜 것은 가는 곳마다 범죄자 보듯 하는 것이다.
'내가 주민등록증을 경신하지 않은 것이,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이런 인격적 모욕감을 당해야 하는가.' 또박또박 따져묻지도 못한 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투표소에서
결정적으로 당신은 얼마전 있었던 4.13 총선 때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그 때 신분증이 아무 것도 없던 당신의 친구는, 투표하기 싫었는데 잘됐다며 다행스러워 했다. 그나마 구 주민증이 있던 당신은 고심고심하다가 투표를 했었다. 그럼… 이제 구 주민증 시효가 만료되면, 신분증이 없는 당신은 투표권도 박탈당하게 되는가? 자치단체는 물론, 국회의원, 대통령 등 모든 선거에 투표를 할 수 없다.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경우에는 피선거권 역시 박탈된다.

이와 관련하여, 지문날인거부 운동본부(준)는 지난 4월 1일 선관위에 공개질의서를 보낸 바 있으며 공개질의서에 대한 선관위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현행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및 공직선거관리규칙에서는 투표권자의 본인여부 확인을 위하여 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 공무원증과 관공서 또는 공공기관이 발행한 경로우대증, 장애인수첩, 자격증 기타 사진이 첩부된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증명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거 본인확인을 위한 자료로서 주민등록증만이 허용되다가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온 결과입니다. 앞으로는 귀 단체의 주장처럼 아무런 신분증도 보유하고 있지 아니한 자의 선거권도 보장되어야 할 것이므로, 우리위원회에서는 그러한 자의 본인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도입될 수 있도록 법 개정의견제출시 귀 단체의 의견을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민등록증 소지가 우리 국민들의 의무적인 사항이 아님에도, 주민등록증 미발급 또는 관공서가 발행하는 기타 신분증을 소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이 위헌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생활공간의 곳곳에서
하루종일 이곳저곳에서 거부당한 당신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동네어귀에 있는 비디오가게, 도서대여점이 눈에 띈다. 새로 오픈한 곳이라 깨끗하고 친절하리라 기대하지만, 주민증이 없으면 손님이 될 수 없다.
신분증이 없는 당신은 비디오, 책 등 각종 대여점에서 대여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놀이공간에서 자녀를 위해 유모차 한 대도 빌리기가 힘들며, 여객선 기타 선박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물건을 분실한 후 분실물센터에서 물건을 다시 찾을 수도 없고, 국회, 법원, 정부기관, 방위산업체 또는 기타 신분증명을 요구하는 건물에도 출입이 불가능해진다.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곤 그저 한몸 누일 당신의 집 뿐, 그러나 그 집에도 맘 편히 들어가기는 힘들다. 대문 앞에 붙은 경고장 '주민등록 미갱신자 명단 ○○○, ○월○일까지 동사무소에서….' 철저히 사회적 소외자로 당신의 하루는 마감된다.


순응할 것인가, 불복할 것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대로 주민증을 갱신하고 말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개개인의 힘을 모아낼 것인가?
1999년 4월에는 주민등록법이 개정되면서 주민등록증 재발급과 소지에 대한 의무가 없어졌다. 행정자치부는 지문날인거부자들의 행위가 정당하고 합법적이라는 민원회신을 보내온 바도 있다.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새로 발급되는 플라스틱 주민증의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주민증을 발급 받지 않는 것은,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리행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이들에 대해 국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겪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차원에서 고민되고 해결돼서는 안되며, 또한 그럴 수도 없다. 이들이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한다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사실상 박탈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상에서 여러 가지 차별과 불편함을 무릅쓰는 이들에 대해,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를 제기하고 힘을 모아나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 모아졌을 때 가능하다. 지문날인 거부자들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해 우리의 요구를 촉구하고, 대사회적으로 거부자들이 겪는 문제와 이러한 상황들의 부당함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주민등록증에 대해 당연시하는 분위기, 주민등록증으로 모든 행정과 업무를 처리하려는 관행을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당연히도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거부자들의 어려움을 스스로 폭로하고, 이 상황이 결국 국민들을 무의식적으로 길들이고 통제하는 기제임을 알게 하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당한 상황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혀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더욱 고립되고 거부당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저항 또한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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